본문의 핵심은 지난 번에 다 설명했다.
-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가진 아들이 바로 나 예수다.
- 증거로 요한, 내가 하는 일들, 아버지, 성경을 제시한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증명하셔서,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신다.
5장 전체의 메시지는 다중적이다.
① 먼저,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② 병자는 변질된 이스라엘 전통의 피해자이다. 따라서 병자를 회복시키신 예수님은 변질된 이스라엘을 회복, 대체하신 분이시다.
③ 안식일에 치유하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구해받지 않는, 안식일의 주이시다.
④ 안식일의 주는 오직 하나님 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다.
⑤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성경 조차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 이 중에 이번 본문은 ⑤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런데 본문에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한다고만 주장하지, 어떻게 증언하는지 주장의 근거가 없다.
- 본문은 그 아들이 예수님이라는 증거를 설명 없이 나열하고 있다.
- 그 증거가 어떻게 사실을 증명하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숨겨져 있다.
-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 없던지, 뒤에서 말하던지.
그래서 나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증거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 기록될 당시에는 다 알고 있어서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다루겠다.
따라서 초점은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나?"에 둘 것이다.
내용 정리
30절: 주제 전환 - 아들 → 나
19-29절에서 말한 아들의 역할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주체가 '나'이다.
- 즉, 지금까지 설명했던 아들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 이 논증은 예수님과 유대인 둘 중 하나가 반드시 틀렸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논증이다.
- '나'가 그 아들임이 증명되면, 유대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31-32절: 증거의 조건 - 두 사람 이상의 증언
유대인들에게 증거의 조건이 있다.
[신 19:15] 어떤 잘못이나 어떤 범죄라도,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판정할 수 없습니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만 그 일을 확정할 수 있습니다.
[요 8:17] 너희의 율법에도 기록하기를 '두 사람이 증언하면 참되다' 하였다.
- 사실을 증명할 때 물증보다 증언을 중시했고, 두 사람 이상의 증언만 인정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증언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을 제시한다.
33-35절: 예수님의 변론 ①: 침례 요한의 증언
1:19에서 유대 사람들은 침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서 정체를 묻는다.
- 유대 사람들에게도 요한은 큰 이슈였다.
그런데, 예수님과는 다르게 요한은 유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마 3:7]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침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왔다.
- 왜냐하면 침례 요한의 사역은 회개를 선포하고 메시야의 오심을 예고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언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도 영향력 있다.
- 어쩌면 유대인에게는 예수님이 제시한 증거 중에 요한의 증거가 가장 강력한 것이다.
- 성경의 증언은 추상적이고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요한의 증언은 구체적,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경고한다. 요한의 증언은 한계를 갖는다고.
① 요한의 증언은 다른 증거와 다르게 사람의 증언이다.
- 하나님의 증언에 비해 사람의 증언은 효력이 떨어진다.
-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는다.
② 그럼에도 요한의 증언을 제시한 것은,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증거이기 때문이다.
- 요한의 증언이 예수님께는 필요 없지만,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 듣고 이해해서 믿고 구원 받게 하려는 것이다.
③ 하지만 요한의 증언은 일시적이다.
- 요한은 등불이다. 더 정확한 번역은 촛불이다. 빛을 내면서 사라지는 것이다.
- 빛을 내서 세상을 밝히지만, 타고나면 사라진다.
이렇게 요한의 증언은 유대인들에게 효력이 있지만, 제한적이고 일시적임을 강조한다.
- 예수님은 사람들의 초점이 요한에게 쏠리는 것조차 경계하셨다. 오직 하나님께만.
36절: 예수님의 변론 ②: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
이는 예수님께서 바로 전에 하신 38년 된 병자 치유의 기적을 비롯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전체 표적과 가르침, 최종적으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 이 증거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증거이기 때문에,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거이다.
예수님의 표적과 가르침은 유대인들도 특별하게 여겼다.
[마 13:54] 예수께서 자기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그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 그들조차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 역시 유대인들에게 유효한 증거이다.
- 물론 유대인들이 대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37-38절: 예수님의 변론 ③: 아버지의 증언
이전의 증언이 간접 증거라면, 아버지의 증언은 직접 증거이다.
- 아버지가 "얘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물증이 없다.
- 이 말이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모르겠다. 근거 없는 주장으로 보일 수 있겠다.
녹취록이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녹취록이 없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 나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 그래서 유대인이 하나님의 음성, 모습, 말씀, 즉 하나님의 증언 녹취록을 갖지 못했다고 하신다.
이는 순환 논리 오류처럼 보인다.
- [믿음 없음] → [하나님의 증언 못들음] → [예수님이 아들인지 모름] → [그래서 믿음 없음]
이 증언을 제시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39-40절: 예수님의 변론 ④: 성경
성경은 유대인들에게 명목상 최고 권위를 가진다.
- 그러나 실질적 권위는 전통이, 그리고 그 전통을 좌우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다.
- 따라서 유대인은 성경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정한 것이다.
그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한다면, 유대인도 거부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에 예고된 메시아 예언을 충실하게 성취하신다.
[요 12:14]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요 13:18] 나는 너희 모두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택한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요 15:25] 그래서 그들의 율법에 '그들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기록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요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9:24] ・・・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요 19:28] ・・・ 예수께서는 ・・・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 19:36] ・・・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 19:37] 또 성경에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쳐다볼 것이다' 한 말씀도 있다.
[요 20:9] ・・・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 이렇게 요한복음은 성경이 얼마나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인정해야 했다.
-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부정함으로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 유대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시늉만 했을 뿐, 성경을 통해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중간정리: 증거의 관계 - 구체적 → 추상적, 제한적 → 포괄적
예수님이 제시한 증거는 구체적이지만 제한적인 증거에서 시작하여 점차 추상적이지만 포괄적인 증거로 확장된다.
- 침례 요한의 증언은 이해하기 쉽지만(구체적), 사람의 말이라는 단점이 있다(제한적).
- 반면 성경의 증언은 너무 방대해서 쉽게 이해될 수 없지만(추상적),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는 장점이 있다(포괄적).
이렇게 예수님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증거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아들임을 증명한다.
그런데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모두 성경의 증언에 포괄된다.
- 침례 요한도, 예수님의 표적도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든 증거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고된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증명한다.
게다가 한 가지를 덧붙이면, 성경에 나오는 사건, 기록되는 과정, 우리에게까지 보존되고 전해진 과정 전부를 포괄하는 창조부터 종말까지 인류 역사 전체 역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도구이다.
- 단순히 역사를 주관하는 막연한 신이 있다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그런 믿음은 거의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다.
- 기독교 믿음의 차별점은, 역사의 주관자인 신이 역사 전체를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 속에 살아가는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 내 인생을 도구로 생각하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밥 먹고 일하는 것이 신앙이다.
- 내 인생을 도구가 아닌 본질 삼는 것은 불신앙이다.
- 말씀, 기도, 전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고, 일은 단지 내가 예수님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수단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41-44절: 예수님의 반론 ① -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만을 구하는 유대인들
여기서 '영광'은 인정, 칭찬, 영접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논리를 명료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대전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은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사람은 사람의 영광을 거부하고, 사람의 영광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거부한다.
- 소전제: 그런데, 너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영광도 받는다.
- 결론: 따라서 사람의 영광을 받는 너희는 하나님의 영광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 나 예수도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전제이다.
- 종교를 가진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여긴다고 말한다.
-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받기 위한 방법이라는 미명 아래 사람의 영광을 구한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 그것이 유대인 공동체, 특히 바리새인 공동체이다.
상호 인정 방법은 시스템이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율법 시스템을 상호 합의 하에 만든다.
- 그래서 그 시스템 안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인정과 칭찬을 준다.
- 그리고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가 인정을 받는다.
- 또한 그 시스템 밖의 사람을 비하해서 자신을 더욱 높인다.
현대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 상호 합의 하에 교회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영광을 주고 받는다.
- 똑같이 법, 도덕, 윤리 시스템을 만들어 그 안에서 서로 인정을 주고 받는다.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원리이다.
- 시스템은 다른 말로 하면 가치관, 가치 체계, 세계관이다.
-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
-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관이 더 높은 지위를 얻도록 하여,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인다.
그렇다고 시스템 자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사람의 뇌 구조 상 시스템은 필연적이다. 생길 수 밖에 없다.
시스템을 사람이 만든 것으로서 필요에 따라 수정, 폐기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
- 문제는 시스템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여 절대 불변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 그것이 우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치유를 하셔서 유대인 시스템을 파괴하시는 것이다.
- 세상 시스템을 파괴해야, 서로 영광을 주고 받는 일을 멈출 수 있고,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45-47절: 예수님의 반론 ② - 모세의 글조차 믿지 않는 유대인들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사람이다.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권위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이 그 모세의 글조차도 믿지 않는다고 지적하신다.
-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책에서조차 예수님은 예고된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신 18:15]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모세를 믿지 않는 것이다.
- 즉, 유대인의 논리로도 유대인은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한 것이다.
주제
1)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심을 믿도록 하기 위한 책이다.
침례 요한의 사역도, 예수님의 표적과 가르침도,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도,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글도 모두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 알다시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의 위치를 의미한다.
- 옆에서 같이 먹고 자고 얘기하는 어떤 아저씨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가 아들에 대해 오랫동안 내려온 전설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말과 삶 그리고 죽음과 부활로 증명하시고, 똑같이 제자들도 말과 삶 그리고 죽음으로 전설 속의 아들이 얼마 전에 살았던 그 예수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2) 성경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가 그렇다.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임을 믿는다면, 인류 역사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도구라는 것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 왜냐하면 성경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태초부터 종말까지 인류 역사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거시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 뿐만 아니라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모든 나라의 역사,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도 모두 예수님을 증언하는 도구이다.
반대로 미시적으로 해석하면,
- 오늘 내 인생 전체, 밥 먹고 일하고 잠 자는 사소한 삶이 다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고, 곧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3) 하지만 유대인은 성경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속한 시스템과 시스템에 속해있는 공동체를 믿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유대인이 가진 정보만 가지고도 예수님이 그 아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적어도 예수님께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우연에 대해 고민 정도는 해봐야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근거는 율법 시스템이다.
- 유대인들의 삶은 너무나 완벽했다.
- 유대인 사회 안에서 자신들이 고안한 율법 시스템이 최정점에 있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완벽했고(영적), 사람들의 칭송도 받았고(명예),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웠다(부).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부가 걸린 율법 시스템에 흠집을 내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할 수 없었다.
- 그 사람이 하나님이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몰라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알고도 거부한 것이다.
- 자신들의 영적 자부심, 사람들의 칭송, 물질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 나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함께 거부하자나. 설마 우리 공동체가 틀렸겠어?
-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예수를 거부하는 자신들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 이렇게 유대인들은 대세를 따르다 지옥에 간 것이다.
4)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그렇다.
돈이라는 근거 없는 시스템을 만들고, 모두가 그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처럼 만든다.
- 시스템 안에서 서로가 영광을 주고 받으며 자신을 높인다.
- 그리고 시스템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비하하며 또 자신을 높인다.
이것이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 시스템을 의심할 상황이 생겨도,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스스로 합리화한다.
- 의심을 버리고 대중 속에서 대세를 따른다. 이 시스템에 자신의 평생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시스템이 얼마나 안전한지, 얼마나 타당한지,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 평가하지 않는다.
- 자신이 투입한 자신의 인생이 아까워서라도,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계속 자신을 투입한다.
- 이는 마치 사람이 도박에 중독되는 과정과 똑같다.(매몰비용의 오류)
- 도박에 더 많은 돈을 잃은 사람일 수록 자리에서 일어나기 더 어렵다. 본전 생각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 사람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시스템에 자신을 투신한다. 그 시스템이 자신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도 모른체.
5) 예수님은 유대인을 비롯해 세상 전체의 시스템을 파괴하여 자신만을 믿도록 하셨다.
사람들에게 율법 시스템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시스템을 파괴하여, 시스템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은 정말 필요한 일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신 것이고, 사람들을 율법에서 건져 자신에게 인도하신 것이다.
- 지금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스템을 파괴하여, 사람들을 예수님의 시스템으로 옮기신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시스템과 예수님의 시스템의 차이점이다.
- 흔히 예수님의 시스템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시스템으로 착각한다.
- 민중 신학, 여성 신학, 해방 신학이 그러한 예이다.
- 이는 기존 세상 시스템에서 또 다른 세상 시스템으로 옮긴 것일 뿐이다.
예수님의 시스템의 핵심은 시스템이 없는 시스템이다.
- 어떤 사람도 규정하고 정의하고 이해하고 장악하고 소유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 민중과 여성과 해방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 외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시스템이다. 희미하게만 알 수 있다.
이렇게 시스템 자체에서 벗어나, 시스템 없는 예수님의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결론
결국 또 다시 예수님이다.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 성경은, 인류 역사 전체와 우리 매일의 일상을 통해 예수님이 왜 하나님인지 증언하고 있다.
- 단지 우리가 듣고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 이유는 우리가 세상 시스템에 눈이 멀어 예수님의 증언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실은,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믿도록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증거를 여전히 끊임없이 주고 계신다.
우리가 할 것은, 나를 사랑해 줄 것처럼 보이는 내가 속한 공동체 시스템이 실상은 나를 죽이고 있다는 것과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만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 그것을 믿을 때, 지금은 보지 못하는 예수님의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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