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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13) 5:19-30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본문이 복잡하다. 내용보다 특히 전개가 복잡하다.

- 전개 방식을 알아야, 글의 의도를 알고, 표면적인 내용 이면에 있는 중심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는데, 어렵다.

- 전개 방식을 모른다는 것은, 글자만 읽었을 뿐 행간의 의미, 글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본문을 언뜻 보면,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듯 보인다. 

-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한다.", "생명과 심판을 주다."는 구절이 반복된다.

- 이러한 반복이 요한일서에도 나온다. 

- 반복 속의 변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요한의 특징이다. 소위 나선형 구조라고 말한다.

- 따라서 반복과 변화를 잘 포착해야 내용 전개를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런 강화가 이어지는데, 표면적 내용 이면에 있는 뉘앙스, 구성과 배치를 통한 강조점, 논리 전개 흐름을 집중해서 보자.


지난 본문 정리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치유로 인해 논쟁이 생겼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치유자이신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범법자인가?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 범법자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범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근거는, 하나님과 자신이 동등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문제 될 것 없다고 주장하셨다.
이에 대해 유대 사람들은 신성모독이라 정죄하였고, 그에 대한 반박이 이번 본문이다. 
- 주장의 핵심은 나와 하나님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내용 정리

예수님의 반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9-23절 

 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종속적 그리고 독립적이다.

 24절

 주제 전환

 초점이 '아들'에서 '사람들'로 바뀐다.

 25-29절

 ② 아들과 사람의 관계

 그 아들로 인해 사람들은 생명과 심판을 받는다.

 30절

 주제 전환

 다시 초점이 '사람들'에서 '나'로 바뀐다.

 31-47절

 ③ 아들과 나의 관계

 내가 그 아들인 이유는 ①요한 ②내가 하는 일들 ③아버지 ④성경 때문이다.

아들의 정체성을 ①아버지와의 관계와 ②사람의 관계로 나눠서 설명한 후, ③그 아들이 나 예수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 이는 1장에서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사람과의 관계)과 '하나님의 아들'(하나님과의 관계)로 증언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 중에 ①, ②와 ③을 나눠서 읽겠다.

19 ~ 23절: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 아버지에 대해 종속성(제한성)과 독립성(특수성)을 갖는 아들

제한성과 특수성은 이전에 침례 요한의 정체성을 말할 때 나왔던 것이다.(1:7-8, 19-28)

- 요한은 빛을 증언하는 특수한 역할을 갖지만(7), 빛을 증언만 할 뿐 빛이 아닌 제한성을 갖는다(8).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정체성 역시 이와같은 특징이 있다.

- 아버지께 종속되어 아버지가 하시는 일 그대로 순종하는 제한성을 갖지만(19-20), 생명과 심판을 주시는 일은 아버지에게 없는 아들 고유의 독립적이고 특수한 역할이다(21-23).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부자 관계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종속적이며, 훨씬 더 독립적이다.

19-20절: 종속성 - 아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한다.(19)

그런데, 이런 관계를 맺는 이유가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20)

- 사랑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다 보여주었고, 그래서 아들은 순종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낯설다. 상식적이지 않다. 내 상식은,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본문은 반대로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아들이 순종했다고 말한다.

-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하는 이유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라는 것이다.

- 본문에는 이러한 관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어서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후의 본문을 기대하자.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상식이 틀리고 본문이 맞는 것 같다.

-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닐까?

- 따라서 신앙 생활의 초점은 "어떻게 해야 내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날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에 있어야 할 것 같다.

- 사랑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20절후: '더 큰 일'에 대한 언급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예고한다.

요한복음에서 '더 큰 일'은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나왔다.(1:50) 거기서는 성전을 예수님께서 대체, 초월하신다는 뜻이었다.

- 따라서, 더 큰 일, 즉 아버지가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뜻이다.

- 이는 결국 아들의 지위가 아버지에 종속되는 것을 초월하여 아버지를 대체, 독립한다는 것을 예고한다.

21-23절: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명과 심판을 주신다.

종속성과 완전히 상반되는 아들의 특징이다.

-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셨고, 아들은 자기 뜻대로 행한다.(21, 22)

- 아들의 특징 안에 이런 양면성, 모순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아들의 양면성을 잊고 한 쪽에 치우치면 신앙이 변질되어 이단이 된다.

- 종속성에 치우치면, 예수님을 배제하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려 한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심을 부정한다.

- 독립성에 치우치면, 예수님만 강조되고 하나님이 배제된다. 현세의 죄 사함만 남고 영원 속의  창조와 종말을 잊는다.

- 종속성은 하나님만 공경하게 하고, 독립성은 예수님만 공경하게 한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양면성을 부여하신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공경 받도록 한 것이다.(23)

- 둘 중에 한 분만 공경하는 것은 아무도 공경하지 않는 것이라고 못박아 말하고 있다.(23)

- 아버지는 모든 것을 독점하지도, 다 아들에게 위임하지도 않으셨다. 그렇다고 반반씩 나눈 것도 아니다.

-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똑같이 유일무이한 절대 권위가 있는 것이다.(유일무이한 권력이 둘에게 있다?)

-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유일신으로서 공경, 찬양을 하도록 한 것이다.(유일신이 두 분이다?)

이러한 공동 지위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말 자체가 비논리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이다.

- 이러한 비논리 때문에, 기독교 초기에 아들의 지위에 대한 논쟁이 많았고, 오해로 인해 수 많은 이단이 나왔다.

- 지금도 여전히 이것을 설명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이 신학적, 현학적으로 들릴 수 있다.

-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하길, 우리 갖는 신앙 문제 대부분이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만큼 실제적인 문제이다.

- 간략하게 예를 들어, 신앙을 현세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여, 현세에서 죄 사람 받고, 자유 얻어, 평안을 구하는 사람은 예수님만 주님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간과한 것이다. 예) 민중신학

- 반면에, 신앙을 내세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여, 죽음 이후의 영생만 생각하고 현세를 방관하는 사람은 하나님만 주님으로 삼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간과하는 것이다. 예) 신비주의

-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것은 실제적인 신앙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24절: 주제 전환 - 아들 ➔ 사람들

초점이 아들에서 사람들로 바뀐다.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생명 혹은 심판을 받는다.

25 ~ 29절: 아들과 사람들의 관계 - 아들에 의해 생명과 심판을 받는 사람들

아들과 사람들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이전 내용을 반복하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심판권을 사람들에게 행사한다.

- 그런데 이전 구절과 차이점은 초점이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25절: 아들의 음성이 들리는 때는 종말의 때인데,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한다. 즉 지금이 종말의 때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종말은 막연히 먼 미래였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 후 종말은 근접한 미래다. 

- 더 정확하게는, 종말은 현재다. 본문은 지금이 바로 그 때, 즉 종말이라고 말한다.

- 이유는, 구약에 종말 이전에 있을 일에 대해 여러가지 예언이 있었는데, 모든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은 이렇게 지금이 종말의 때임을 강조한다.(4:28)

그리고 아들의 음성에 의해 사람은 생명과 심판 중 하나를 받는다.

- 즉, 사람의 운명은 아버지가 아닌 아들에 의해 결정된다.

26-27절: 아들의 심판권의 근거는 아버지임을 재확인한다.

이 구절은 21, 22절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이는, 앞에서는 심판권을 가진 아들의 독립성을 강조했다면, 여기서는 심판권을 주신 아버지의 주도성을 강조했다.

- 따라서, 아들이 심판권을 가진 것은 아버지의 주도 하에 이뤄진 것임을 강조한다.

28-29절: 아들의 심판권에 의해 사람들은 생명과 심판을 받음을 재확인한다.

이 구절의 강조점은 심판권을 가진 아들도, 모든 것을 주도하신 하나님도 아닌, 심판을 받는 사람에 있다.

- 따라서, 아들의 심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주는지 강조한다.

30절: 주제 전환 - 사람들 ➔ 나(예수)
마지막으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성을 재확인하며 끝난다. 19절의 반복이다.
그런데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종속성을 가진 대상이 아들이 아니라 '나'이다.
- 이것이 말하는 것은, 이제까지 설명한 권세를 가진 아들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 다음 본문에서 아들과 나의 관계를 증명하신다.
이렇게, 나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권세를 위임 받은 주체인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나는 하나님과 동등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범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신다.

주제
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양면적(종속적, 독립적)
권위의 시작은 분명히 아버지다. 아들은 아버지에 종속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권위를 아들과 공유한다. 아들은 독립적인 권위를 갖는다.
- 권위의 독점도, 권위의 위임도, 권위의 분배도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태이기 때문에,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없다.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성경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신 존재의 본질인데,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밑바닥 토대를 이룬다.
- 그런데, 기독교의 신 존재의 본질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도 표현도 불가능하다.
-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기독교 신에 대한 설명이 더 타당할 가능성이 있다.
- 이해, 설명, 표현할 수 있는 신은 신의 자격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의 본질은 기독교의 모든 원리에 영향을 주는데, 특히 동등한 관계를 맺는 공동체의 강조이다.
- 신과 사람의 관계도, 사람 사이의 관계도 모두 신의 내적인 관계를 기반한다.
- 기도, 예배, 말씀, 찬양의 본질도 신과 사람이 종속적이면서 동시에, 독립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맺는 방식이고, 교회, 교제, 전도, 봉사, 선교, 구제의 본질도 사람 사이에 서로에게 종속됨과 동시에, 독립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 신의 내적 관계가 확장되어, 신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만물까지 계속해서 확장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목적이다.
- 우리 신앙 생활의 목적도 이것에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의 양면적인 관계를 아는 것이 신앙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 이해하기 어려운게 사실이지만,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기독교의 신을 모른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신앙 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똑같다.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는 것이 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지가 될 수 있다. 그러니 꼭 기억하자.
②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이유: 아들의 사랑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은 독립적이고 동등한 관계지만, 분명한건, 그 관계의 시작은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 관계의 시작은 아버지이며, 아들은 아버지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아버지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아들과 공유한 것이다.
- 아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작할 수는 없다. 시작은 언제나 아버지다.
-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 짓는 유일한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이유 역시 그 근원은 아버지여야 한다. 본문은 그것을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또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이후에야 비로소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를 따라할 수 있었다.
- 물론 예수님도 아버지를 사랑했겠지만, 그 시작과 근원은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 먼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양면적이다. 종속적이며 동시에 독립적, 대등적이다.
- 예수님은 우리를 종, 자녀라고도 부르시지만, 친구라고도 부르신다.
-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가기도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가기도 한다.
- 그러나 관계의 시작은 반드시 예수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과 헌신이 아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예수님 품에 종속시키셨기 때문에, 우리가 종속되어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 생활의 초점을 '예수님 사랑하기'에 두면 안된다.
- 우리는 사랑을 만들 수 없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은 자기 사랑 뿐이다.
- 자기 사랑은 죄이다. 따라서 '예수님 사랑하기'는 죄를 만드는 것 뿐이다.
초점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알기'에 두어야 한다.
-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셨고, 그래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그에 대한 결과로서, 날 사랑하는 존재에게 종속되어 그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남을 위한 것 같고, 죽음과 부활이 나와 상관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이후에 나오는 것이고, 헌신과 믿음은 단순한 결과일 뿐이다.
-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은 간과한 체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려고만 하지 않았나?
내가 전한 메시지는 어땠나 되돌아 본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초점을 돌려야겠다.
- 신앙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할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 우리의 노력을 '날 향한 예수님의 사랑 알기'로 향해야 한다는 뜻이다.
③ 아들과 사람의 관계: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아들
흔히 심판자는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아들이라고 말한다.
- 아들은 십자가 죽음 부활하신 분, 중보기도 해주시는 분 등으로 역할에 대한 인식이 축소되어 있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권위를 가지고 계신 실세라고 말한다. 
-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 같으신 분이다. 하나님도 안하시는 심판을 예수님이 하신다.
우리에게 창조주로서 무한한 능력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만, 아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④ 지금은 종말의 때
구약의 시간관: 창조 → 종말 이전에 있을 징조 예고 → 징조 실현(특히 메시야 등장) → 바로 종말
- 구약에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언급이 없다.
- 따라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곧 종말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오셔서 종말 이전에 있을 모든 징조가 실현되었지만,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것 같은 상황이다.
- 따라서 구약의 시간관과 우리의 현실 인식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이고, 우리는 구약의 시간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지금 세상이 이렇게 잘 돌아가고 있고, 세상이 끝날 것이란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종말은 먼 일이라고 생각한다.
- 구약 사람들이 너무 옛날 사람들이라 메시야가 두 번 오신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성경의 인식은 반대다. 구약의 시간관대로 지금은 종말이라고 말한다.
- 그 말의 뜻은,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현실은 종말 안에 있다는 것이다.
- 지금이 종말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라는 것이다.
- 우리만 모르고 있을 뿐, 예수님께서는 심판권을 가지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생명과 죽음으로 나누고 있다는 뜻이다.
구약의 시간관이 맞을까, 아니면 내가 맞을까? 지금은 종말일까, 종말이 아닐까?
-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의미 없다. 아무도 사실을 밝혀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단서조차도 우리는 찾을 수 없다.
- 문제는 우리는 매일을 내일을 위해, 5년 후 10년 후를 위해 살고 있는데, 성경은 내일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또 문제는 성경은 내일이 없다고 2000년 동안이나 계속 말했지만, 내일이 73만번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 누구도 이 찝찝함을 해결해줄 수 없다.
-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의 찝찝함을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 뿐이다.

결론
혹시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보다 예수님께 헌신하기를 강요했다면, 사과를 드린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나온 사랑이 아닌, 사람 안에서 만들어진 사랑으로는 절대로 구원 못받는다.
- 영화 "바울"에서처럼 긴박하고, 혼란스럽고, 철박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사랑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 그 젊은 청년처럼 예수님을 배제시킨다.
- 믿음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께 반역한다. 본문의 유대 사람들처럼 말이다.
오직 나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정확하게 알고, 그 예수님께 종속되어 순종하는 사람만이 구원 받는다.
- 그런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적의 칼날이 내 목을 겨누어 절망적일 때조차, 모든 상황과 현실을 뛰어 넘는 예수님의 사랑 속에 압도되어, 평안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 맹수와 대면하러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조차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