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이 복잡하다. 내용보다 특히 전개가 복잡하다.
- 전개 방식을 알아야, 글의 의도를 알고, 표면적인 내용 이면에 있는 중심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는데, 어렵다.
- 전개 방식을 모른다는 것은, 글자만 읽었을 뿐 행간의 의미, 글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본문을 언뜻 보면,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듯 보인다.
-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한다.", "생명과 심판을 주다."는 구절이 반복된다.
- 이러한 반복이 요한일서에도 나온다.
- 반복 속의 변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요한의 특징이다. 소위 나선형 구조라고 말한다.
- 따라서 반복과 변화를 잘 포착해야 내용 전개를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런 강화가 이어지는데, 표면적 내용 이면에 있는 뉘앙스, 구성과 배치를 통한 강조점, 논리 전개 흐름을 집중해서 보자.
예수님의 반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9-23절 |
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종속적 그리고 독립적이다. |
24절 |
주제 전환 |
초점이 '아들'에서 '사람들'로 바뀐다. |
25-29절 |
② 아들과 사람의 관계 |
그 아들로 인해 사람들은 생명과 심판을 받는다. |
30절 |
주제 전환 |
다시 초점이 '사람들'에서 '나'로 바뀐다. |
31-47절 |
③ 아들과 나의 관계 |
내가 그 아들인 이유는 ①요한 ②내가 하는 일들 ③아버지 ④성경 때문이다. |
아들의 정체성을 ①아버지와의 관계와 ②사람의 관계로 나눠서 설명한 후, ③그 아들이 나 예수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 이는 1장에서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사람과의 관계)과 '하나님의 아들'(하나님과의 관계)로 증언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 중에 ①, ②와 ③을 나눠서 읽겠다.
19 ~ 23절: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 아버지에 대해 종속성(제한성)과 독립성(특수성)을 갖는 아들
제한성과 특수성은 이전에 침례 요한의 정체성을 말할 때 나왔던 것이다.(1:7-8, 19-28)
- 요한은 빛을 증언하는 특수한 역할을 갖지만(7), 빛을 증언만 할 뿐 빛이 아닌 제한성을 갖는다(8).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정체성 역시 이와같은 특징이 있다.
- 아버지께 종속되어 아버지가 하시는 일 그대로 순종하는 제한성을 갖지만(19-20), 생명과 심판을 주시는 일은 아버지에게 없는 아들 고유의 독립적이고 특수한 역할이다(21-23).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부자 관계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종속적이며, 훨씬 더 독립적이다.
19-20절: 종속성 - 아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한다.(19)
그런데, 이런 관계를 맺는 이유가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20)
- 사랑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다 보여주었고, 그래서 아들은 순종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낯설다. 상식적이지 않다. 내 상식은,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본문은 반대로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아들이 순종했다고 말한다.
-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하는 이유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라는 것이다.
- 본문에는 이러한 관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어서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후의 본문을 기대하자.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상식이 틀리고 본문이 맞는 것 같다.
-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닐까?
- 따라서 신앙 생활의 초점은 "어떻게 해야 내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날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에 있어야 할 것 같다.
- 사랑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20절후: '더 큰 일'에 대한 언급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예고한다.
요한복음에서 '더 큰 일'은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나왔다.(1:50) 거기서는 성전을 예수님께서 대체, 초월하신다는 뜻이었다.
- 따라서, 더 큰 일, 즉 아버지가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뜻이다.
- 이는 결국 아들의 지위가 아버지에 종속되는 것을 초월하여 아버지를 대체, 독립한다는 것을 예고한다.
21-23절: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명과 심판을 주신다.
종속성과 완전히 상반되는 아들의 특징이다.
-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셨고, 아들은 자기 뜻대로 행한다.(21, 22)
- 아들의 특징 안에 이런 양면성, 모순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아들의 양면성을 잊고 한 쪽에 치우치면 신앙이 변질되어 이단이 된다.
- 종속성에 치우치면, 예수님을 배제하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려 한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심을 부정한다.
- 독립성에 치우치면, 예수님만 강조되고 하나님이 배제된다. 현세의 죄 사함만 남고 영원 속의 창조와 종말을 잊는다.
- 종속성은 하나님만 공경하게 하고, 독립성은 예수님만 공경하게 한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양면성을 부여하신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공경 받도록 한 것이다.(23)
- 둘 중에 한 분만 공경하는 것은 아무도 공경하지 않는 것이라고 못박아 말하고 있다.(23)
- 아버지는 모든 것을 독점하지도, 다 아들에게 위임하지도 않으셨다. 그렇다고 반반씩 나눈 것도 아니다.
-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똑같이 유일무이한 절대 권위가 있는 것이다.(유일무이한 권력이 둘에게 있다?)
-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유일신으로서 공경, 찬양을 하도록 한 것이다.(유일신이 두 분이다?)
이러한 공동 지위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말 자체가 비논리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이다.
- 이러한 비논리 때문에, 기독교 초기에 아들의 지위에 대한 논쟁이 많았고, 오해로 인해 수 많은 이단이 나왔다.
- 지금도 여전히 이것을 설명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이 신학적, 현학적으로 들릴 수 있다.
-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하길, 우리 갖는 신앙 문제 대부분이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만큼 실제적인 문제이다.
- 간략하게 예를 들어, 신앙을 현세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여, 현세에서 죄 사람 받고, 자유 얻어, 평안을 구하는 사람은 예수님만 주님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간과한 것이다. 예) 민중신학
- 반면에, 신앙을 내세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여, 죽음 이후의 영생만 생각하고 현세를 방관하는 사람은 하나님만 주님으로 삼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간과하는 것이다. 예) 신비주의
-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것은 실제적인 신앙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24절: 주제 전환 - 아들 ➔ 사람들
초점이 아들에서 사람들로 바뀐다.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생명 혹은 심판을 받는다.
25 ~ 29절: 아들과 사람들의 관계 - 아들에 의해 생명과 심판을 받는 사람들
아들과 사람들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이전 내용을 반복하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심판권을 사람들에게 행사한다.
- 그런데 이전 구절과 차이점은 초점이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25절: 아들의 음성이 들리는 때는 종말의 때인데,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한다. 즉 지금이 종말의 때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종말은 막연히 먼 미래였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 후 종말은 근접한 미래다.
- 더 정확하게는, 종말은 현재다. 본문은 지금이 바로 그 때, 즉 종말이라고 말한다.
- 이유는, 구약에 종말 이전에 있을 일에 대해 여러가지 예언이 있었는데, 모든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은 이렇게 지금이 종말의 때임을 강조한다.(4:28)
그리고 아들의 음성에 의해 사람은 생명과 심판 중 하나를 받는다.
- 즉, 사람의 운명은 아버지가 아닌 아들에 의해 결정된다.
26-27절: 아들의 심판권의 근거는 아버지임을 재확인한다.
이 구절은 21, 22절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이는, 앞에서는 심판권을 가진 아들의 독립성을 강조했다면, 여기서는 심판권을 주신 아버지의 주도성을 강조했다.
- 따라서, 아들이 심판권을 가진 것은 아버지의 주도 하에 이뤄진 것임을 강조한다.
28-29절: 아들의 심판권에 의해 사람들은 생명과 심판을 받음을 재확인한다.
이 구절의 강조점은 심판권을 가진 아들도, 모든 것을 주도하신 하나님도 아닌, 심판을 받는 사람에 있다.
- 따라서, 아들의 심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주는지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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