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은 완결된 하나의 단락이다.
- 전반부의 두 가지 기적과 후반부의 그 기적의 해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기적(miracle)은 초자연적인 현상 전체를 말한다.
- 반면 표적(sign)은 기적 중에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기적을 말한다.
- 특히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주는 기적이다.
- 따라서 표적은 기적과 메시지를 모두 담고 있는데, 특히 메시지가 중요하다.
- 그래서 6장도 기적과 메시지로 되어 있고, 둘은 반드시 함께 이해해야 한다.
6장의 표적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 예수님은 이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해 오병이어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셨다.
- 반대로 말해서, 오병이어 기적은 배고픈 사람 배불리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현실에서 경험하는 기적, 병이 낫고, 밥과 돈이 생기고, 원하는 일이 이뤄지는 기적은 우리가 세상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 예수님의 기적은 오로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르쳐둔다.
- 예수님과 상관 없는 소원 성취 기적은 세상에 안주하도록 하는 사탄의 기적이다.
생명의 빵이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이, 생명의 자양분, 생명의 근원,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한다.
- 여기서 생명은 단지 숨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근원, 인간 그 자체, 인간성이다.
- 따라서 예수님이 인류 전체의 본질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길게 말하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① 생명, 즉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고,
② 유대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은 생명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 오해를 파괴해야만 올바른 생명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명도 두 가지로 나뉜다.
① 오해와 편견, 다른 말로, 유대인의 시스템, 또는 인간의 시스템, 가치관을 파괴하는 것과,
② 인간의 본질임과 동시에 예수님 그 자체인 생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 인간의 참 본질은 결국 예수님이다. 태초에 아담이 하나님의 숨결, 즉 예수님의 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본질(=인간성), 즉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한 인간성 회복이 필요하다.(생명=인간의 본질=인간성=예수님=관계)
이렇게 장엄한 메시지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배불리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 오병이어 사건은 빵 먹고 배부른 기적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을 가르쳐주는 표적이다.
- 따라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나에게도 배불려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착각이다.
- 기적 바라며 세상에 안주하지 말자. 오히려 세상에서 안주하지 못하도록 망하길 구하자.
게다가 바로 이러한 착각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정죄하신 핵심이다.
- 본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왕 삼고자 한다.
- 이런 태도는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 삼아 세상에서 자유를 얻으려 했다.
-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육체적 자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정치적 자유이다.
-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었다.
-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내밀한 이유까지도 들춰내셔서 정죄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려는 것도, 엄밀하게 말해서, 주종 관계를 맺으려는 것도 아니다.
- 예수님은 왕 되시는 것을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신다. 예수님을 왕 만드려는 자는 사탄이다.(눅4)
- 철저한 상호 신뢰 속에서 서로의 내면을 끝 없이 파해쳐 이해하고 뒤섞이는 교제를 원하신다.
- 완전히 순수하며, 사이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하나 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 그러한 관계가 인간의 본질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관계이다.
-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해 그러한 관계를 맺는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큰 시야를 가지고 이번 본문의 작은 사건을 보아야 한다.
- 그래야 본문에서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과 같은 착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내용 정리
내용은 다 아니까, 설명은 최소화하고 포인트만 짚겠다.
기적 사건의 핵심은 모세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오마주하는 것이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이 모세를 계승한 구원자이며 동시에, 모세를 초월한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 이렇게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계승/초월하신다는 이전의 메시지는 발전시킨다.(2장)
1-4절: 배경 설명
5장에서 예루살렘에 계셨던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오셔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바다 동편으로 가신다. 그리고 나서 가시는 곳은 '산'이다. 게다가 그 날이 때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이다.
- 예수님이 '유월절'에 사람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산'으로 가는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최초의 유월절'을 경험하고 '홍해 바다를 건너' '광야'로 가는 것을 암시한다.
-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모세임을 상징한다.
- 단, 모세는 민족의 구원자였다면, 예수님은, 모세를 초월하여,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이유는 표징 때문이라고 말한다.
- 이는 15, 26절에 대한 복선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잘못 믿었다. 믿지 않았다.
이러한 방법으로 6장은 계속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대조한다.
5-9절: 문제 제기 -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먼 길을 왔는데,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하여 광야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만나를 주시는 상황을 상기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 문제를 내신다. "빵이 없는데 어떻게 할까?"
- 시험의 목적은 정죄가 아닌 가르침이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 양식이 자신임을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정답은 "주님이 빵이시니 주님을 구합니다." 일 것이다.
- 이런 문제와 시험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치신다.
- 문제와 시험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랑의 손길이다.
- 지금도 예수님은 문제 상황을 통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우리를 부르신다.
- 하지만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정답을 맞추지 못하고, 현실적인 방법을 구하다가 좌절한다.
-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까?
10-11절: 기적 실행 - 더함 없이 풍요로운 식사
예수님은 사람들을 풀 위에 앉게 하신다.
- 건조한 이스라엘에서 풀은 풍요를 의미한다.
- 시편 23편 중,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 따라서 이는 예수님께서 주실 생명의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나누어 주시는 것은 마지막 만찬을 암시한다.
- 오병이어는 마지막 만찬을, 마지막 만찬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몸을 암시한다.
- 따라서 오병이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풍요롭게 주시는 생명의 빵임을 상징한다.
기적을 본 사람의 수가 남자만 오천, 대략 2만명이기에, 당시 인구수에 비하면 상당한 세력이다.
- 자료가 워낙 적어 추정하기 어렵지만,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5만이었다고 한다.
- 15절에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한 것은 거대한 규모의 반란이다.
- 만약 예수님이 반란에 찬성했다면 반역으로 로마에 죽고, 반대했다면 이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도망가셔야만 했다.
12-13절: 후속 조치 -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
오병이어 기적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유일한 기적이며, 부스러기 모으는 장면도 모두 나온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는 딱 한 절이지만, 요한복음만 두 절로 자세히 설명한다. 의도가 있어보인다.
[마 14:20]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막 6:43]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눅 9:17]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특히 이 표현이 강조되어 있다. 남은 부스러기를 다 모으고, 조금도 버리지 말아라.
- 이음동의어로 강조했다. 다른 복음서에 없는 '버리지 말아라'라는 표현을 추가했다.
그런데 같은 단어가 27, 39절에도 나온다.
- 39절은 어떤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살리겠다는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의지를 나타낸다.
정리하면, 예수님이 남은 부스러기를 버리지 않고 모으시는 것은, 구원 받아야 할 어떤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살리실 것이라는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되는 것은, 그렇게 모인 사람들로 인해 열두 지파, 즉 새 이스라엘이 나타날 것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 이는 현재 우리의 상태가 먹고 남아 버려진 부스러기처럼 쓸모 없지만, 그런 우리조차 버리지 않으시고 모으셔서 참 백성을 만드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상징한다.
14-15절: 비극적 결말 - 사람들의 오해와 예수님의 도망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예언자'라고 말한다.
- 신명기 18:18에서 모세는 자기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 나타날 것을 예고했다.
- 따라서 사람들이 빵 기적을 보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모세라고 생각한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모세처럼, 예수님이 정치적, 육체적 자유를 주실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하길 원치 않으셨다. 정확하게 원하시는 추종이 있었다.
- 단순한 추종은 맹신, 미신이며, 불신이다.
- 세상의 자유 얻어서 세상에 안주하기 위한 추종은 예수님을 도망가게 한다.
- 예수님이 원하시는 추종은 상호 관계, 원초적인 교제, 목적 없는 쌍방향의 사랑이다.
이러한 맹신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있다.
- 표적 속에서 기적만 보고 메시지를 보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 죄인은 기적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유익을 얻는 '나'만 본다.
- 그래서 나에게 밥 달라, 돈 달라, 건강 달라, 자유 달라고 애원한다.
- 그게 신앙이라고 착각한다. 영생을 주실 예수님은 외면한 채.
- 신앙은 다른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예수님과의 내밀한 관계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중간 정리
이렇게 예수님은 모세와 같이 '광야'에서 '빵'을 주시며, 자신이 모세를 계승했음을 보여주신다.
그러자 당연히 사람들은 그 '모세'를 따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모세임을 부인하시며 도망가신다.
16-18절: 새로운 문제 상황 설명 - 예수님의 부재
상황이 바뀌어, 예수님 없이 남겨진 제자들은 혼자 다시 바다를 건너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간다.
게다가 제자들은 바다 가운데 바람과 파도로 고립된다.
- 예수님이 없는 어두운 상태이다. 예수님이 없어 바다가 상징하는 혼돈스런 상태이다.
20-21절: 기적 실행 - 물 위를 걸으심 & 바다를 잔잔케 하심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서' 건너신다. 그러자 바다가 잔잔해진다.
- 이 역시 바다를 가르고 걸어서 건너 출애굽 한 모세를 암시한다.
예수님의 부재로 제자들은 어둠과 혼돈에 빠졌지만, 예수님과 함께 가려던 땅(가나안)에 도착한다.
주제
① 예수님은 다시 오신 '모세'시다.
구약 |
신약 |
모세 |
예수님 |
홍해 바다 |
갈릴리 바다 |
광야 |
산 |
유월절의 시작 |
유월절 |
만나 |
오병이어 |
유월절 어린양 |
예수님의 몸 |
예수님께서 모세를 계승하신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새로운 증거이다.
- 모세와 같이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 유월절의 어린양처럼 자신의 살과 피로 죽음을 막는 분이다.
- 홍해 바다를 가르듯 바다를 통치하여 죽음에서 건지시는 분이다.
이렇게 구약 예언을 성취하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신다.
② 하지만 그냥 모세가 아니라 '새' 모세시다.(다음 본문 예고)
구약 |
신약 |
노예 해방 |
영생 |
어린양의 피 뿌림 |
예수님의 피 흘리심 |
무교병 |
예수님의 살 찟김 |
일시적 |
영속적 |
썩어 없어질 양식 |
영생에 이르는 양식 |
먹어도 죽는 양식 |
먹으면 영원히 사는 양식 |
예수님은 모세를 초월하여 더 뛰어나신 분이다.
- 단순히 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넘어서, 죽음에서 해방시켜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
- 먹어도 죽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주신다.
- 모세의 능력은 일시적이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은 영원하다.
③ 그러나 사람들은 '모세'를 오해하고 있었다.
모세가 만나를 준 것도, 배부르라는 것이 아니라 만나를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 하지만 사람들은 만나 먹고 배부르자, 고기 달라 물 달라 계속해서 불평만 늘어갔다.
- 하나님을 관계 맺는 인격으로 보지 않고, 밥통, 물통, 이용할 도구로 취급했다.
- 부부 관계에서도 서로를 애인이 아닌 도구로 취급하면, 불평이 생긴고 싸움이 일어난다.
- 모세 시절 이스라엘이 범한 실수를 예수님 시절에도 했고, 오늘의 나도 하고 있다.
오병이어도 예수님을 알고 관계 맺도록 하는 표적이었다. 배불리려는 것이 아니다.
-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 삼아 밥통으로 이용하려 했다.
-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이 붙잡혀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예수님을 버린다. 제자들조차.
- 우리가 예수님께 기적을 바라는 이유 역시 예수님의 이용 가치를 평가하려는 것일 뿐이다.
-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은 모세 시절 이스라엘 민족처럼, 예수님 시절 유대인처럼, 반드시 예수님을 버린다.
모세 시절의 이스라엘 민족도 기적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에서 남김 없이 죽는다.
- 그 내용이 구약 성경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도 똑같이 실수한다.
- 또 그 결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어떤 정죄를 받았는지 다 아는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한다.
모세 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모두 심판 받아 죽었다.
④ 예수님은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망가신다.
이용 가치를 보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만나 주시지 않는다.
- 예수님이 사람들을 거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다.
- 표적을 통해 사랑의 손길을 내민 예수님께 사람들은 칼을 내밀어 빵을 요구한 강도가 되었다.
- 결국 그 칼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이다.
결론
예수님은 정말 우리와 관계 맺고 싶어 하신다.
- 관계의 본질은 아무런 본질도 없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고, 아무런 유익도 없이 나와 상대의 인격에 대한 관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흰색 방에, 성별도, 나이도, 배경도, 취미도 모르는 나와 네가 만나 과거에 대한 것도 미래에 대한 것도 아닌 정확하게 현재의 '우리'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를 원하신다.
- 우리의 시간, 돈, 몸, 생각, 마음, 인생, 영혼까지
- 써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함께 있고 싶어서.
신앙은 예수님과 이러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 과하게 말해,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 생명을 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조차 수단이다.
- 본질은 이런 관계를 맺는 것이다.
- 기도, 말씀, 찬양, 예배하는 이유는 이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과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것만이 신앙이다.
- 교회에서 하는 신앙 행위는 물론이고, 밥 먹고 놀고 자는 것까지 오직 이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일상에서는 없는 개념이니까.
- 사람은 사람에게 유익 없는 관심을 절대로 갖지 않는다.
- 유익이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 그 유익이 물질적이건, 단순히 재미건, 뭔가를 베풀고 도와줘서 생기는 성취감이건.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고 사랑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실까를 생각한다.(기복주의 신앙)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예수님께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율법주의 신앙)
- 이렇게 관계는 배제하고 유익만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께 유익을 얻으려 하고 있다. 혹은 유익이 되려 한다.
-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도망가신다.
예수님께 유익 얻을 생각 버리자. 그것은 관심, 관계,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께 아무 유익 없는 관심 갖자.
예수님과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관계 맺자.
예수님께 어떤 유익을 드리려 하지도 말자.
또한, 우리 동동체 안에서도 서로에게 유익 얻을 생각 하지 말자. 유익 줄 생각도 하지 말자.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순수한 관계를 맺자.
관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관계를 맺자. 그것이 교회다.
존재와 존재의 만남과 뒤섞임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되자.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의 빵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과 관계 맺고,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참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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