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핵심이다.
- 여기서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과 <영생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본문은 이렇게 끝났다.(35-40)
- 빵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질 생명의 강력함이 선포되었다.
- 그런데 한 가지 남은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 믿음만 있으면, 썩지도, 죽지도, 잃어버리지도 않는 확고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주어진다.
- 믿음만이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따라서 지난 본문 끝에 제기한 질문은 이것이다. - 그래서 믿음이 뭔데?
- 믿음만이 문을 열고 들어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그래서 이번 본문은 그 믿음을 한 단계 더 자세히 설명한다.
- 지금까지 요한복음은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3:15)라고 선포만 했을 뿐 믿음과 영생이 무엇인지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 그런데 이제부터 차근차근 믿음과 영생을 설명한다.
물론 이번 본문을 통해 이것들을 단박에 이해하고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 여전히 모호하고 아리송하게 느껴질 수 있다.
- 전혀 딴 소리 같이 느껴지고, 공감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 믿음은 정말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 전체의 핵심이며,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고, 영생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이며, 인간 존재의 근원이기도 하고, 우주 만물 존재의 본질이기도 하다.
- 오히려 단번에 이해하겠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예를 들면, 이는 마치 거시 세계 움직임의 본질을 말하는 상대성 이론 같은 것이다.
- 믿음은 이보다 수천 배는 어렵다.
-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려면, 속도와 가속도부터 알아야 한다. 빛의 속도에 관련된 것이니까.
- 함수도 배워야 한다. 1차 함수, 2차 함수, 다차 함수까지.
- 미분과 적분도 배워야 한다.
- 또 다차 함수의 미적분을 위해서는 행렬도 배워야 한다.
- 그 다음에 이름도 생소한 이론을 배워야 한다. 맥스웰 방정식, 로렌츠 변환 등.(나무위키 참고)
이렇게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초, 중, 고등학교의 수학, 과학 지식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이해한 후, 대학에서 일반 물리, 역학, 전자기학, 선형대수, 양자 역학, 현대 물리학 등을 배운 다음에 이해할 수 있다.
- 앞에 과목을 이해 못하면, 뒤 과목은 절대로 이해 못한다.
- 어림잡아 5년은 배워야 한다. 차분하게, 길게 보고, 한 걸음씩 가야한다.
- 성급하게 건너 뛰고 이해하면, 결국 중도 포기하게 된다. 끝까지 상대성 이론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상대성 이론의 대가 아인슈타인이 바로 옆에서 설명해준다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 선생 문제가 아니다.
- 어려운 이유는, 아인슈타인 문제도, 상대성 이론의 문제도 아니고, 내 문제다.
상대성 이론 따위도 이런데, 우주 만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 복음의 문제도, 설명해주는 예수님의 문제도 아니다. 내 문제이다.
신앙은 더 길에 봐야 한다. 40년은 배워야 한다.
- 성급하게 빨리 이해하려고 대충 건너 뛰면서 이해하면, 결국 신앙도 중도 포기하게 된다.
- 하나하나 차분하게 멀리 보고 이해하자.
이번 본문도 믿음에 대해서 단박에 이해할 수 있도록 완전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다.
- 다시 말하지만, 설명 못하는 예수님의 문제도, 복음 자체의 문제도 아니다.
- 그렇다고 나 지신의 문제냐? 엄밀하게 말해, 그것도 아니다.
- 그냥 인생이 그런 것이다. 단계가 있고, 과정이 필요하고, 인내를 해야한다. 그래야 결과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본문이 믿음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을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 단언하건데, 이번 본문 이해 못하면, 평생 믿음 이해 못한다.
- 이번 본문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이해하는 여러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너무 부담 갖진 말자. 오늘 이해 못하면, 내일 이해하면 되니까.
- 우리에겐 40년이나 남아있으니까.
- 단지, 오늘이란 주어진 시간에, 할 때 하자는 것이다.
고등학교 함수를 배우면서, 누구도 이 지식이 상대성 이론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 좋은 선생님은 큰 그림을 보여줘서 동기 부여를 하기도 한다.
- 하지만, 학생은 그런가보다 하지, 다 이해하지 못한다.
- 상대성 이론을 배울 때야 비로소 "함수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라고 느끼며, "아, 그때 잘해놓을걸."이라는 후회와 함께 옛날 책을 뒤적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번 본문이 우리의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할 수 있다.
- 그렇다고 너무 낙심하고 걱정해서 조급해하지 말자.
- 진짜 믿음으로 가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분명히 믿음에 이르는 길로 가고 있다.
- 왜냐하면 성경을 읽고, 고민하고, 교제하고 있으니까.
- 시간이 지나 믿게 된 이후에 되돌아 보면, 그때 그 본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느끼게 될 것이다.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나누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믿음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나도 동기 부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여러분도 막막하고 어렵겠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영생에 이르는 분명한 길임을 믿고 차분하고 조급하지 않게, 착실하고 성실하게, 한 걸음씩 내디뎌주길 바란다.
그 때는 온다! 말씀 가지고 씨름하다보면.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온다!
본문의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이다.
-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 =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 믿는 것
- 영생을 얻는 것 =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믿을 때 예수님과 순수한 교제 속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다.
중고등학교 수학의 꽃이 미적분이듯, 대학교 수학과 과학의 꽃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듯, 신앙 생활의 꽃은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 이 꽃을 피우기 위해 우리가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내용 정리
41-42절: 질문 ⑤ -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지난 본문 마지막에, 예수님은 자신은 너무나 강력하여 자신에 오는 사람은 누구도 물리치지도, 잃어버리지도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반드시 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그에 대한 근거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셨다.
- 즉, 내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살면서, 이런저런 사역과 가르침을 주는 가장 본질적인 존재 이유가 사람 살리는 것에 있다는 뜻이다.
- 정말 감사하다. 믿음직스럽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싹 배제하고, 말꼬리만 잡는다.
-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 말이 무지 거슬렸나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모가 사람이라는 것을 근거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씀을 부정했고, 이를 빌미로 예수님 말씀 전체를 부정한 것이다.
43-51절: 대답 ⑤ -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라는 근거(43-46) & 생명의 빵의 의미(47-51)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꼬리 공격에 반격하시기 위해 37절과 40절을 살짝 변형해서 반복한다.
- 44절은 37절과 비슷한 의미를 부정문으로 바꿨다.
- 그리고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다."를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다."로 변형했다.
- 나머지는 완전히 일치한다.
- 이는 예수님의 이전 말씀의 요약임과 동시에 이후에 제시할 주장의 근거이다.
반격 논리는,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은 다 자신에게 오는 것이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증거라는 것이다.
또한 구약 예언(이사야 54:13)을 인용하여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정리하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는 사람은 아버지께 듣고 배울 것이고,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께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신다.
- 논리 방식 자체는 순환 논리 오류이다.
- 하지만 이것이 강조하는 바는, 예수님의 독보적인 지위이다.
-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45절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란 표현은 사람이 직접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울 수 있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 이는 예수님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오해를 준다.
하지만 46절에서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하신다.
-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즉 예수님만 아버지를 볼 수, 들을 수,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 그 외에는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들을 수, 배울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요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이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오해다.
[출 33:11]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
- 이는 친밀감의 표현다.
모세가 본 것은 영광(빛)일 뿐이다. 빛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출 33:19] ・・・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 [20]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독보적인 위치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또한, 절대로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우리의 한계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은 하나님은 전부 가짜다.
이제부터 믿음에 대해 말한다.(47-51)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47)
- 영생으로 들어가는 열쇠로서 믿음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키워드가 44, 45절에서 '예수님께로 오는 것'에서 갑자기 '믿음'으로 바뀐다.
- 이는 35절에서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는 것을 새로운 단어로 표현한다.(49-51)
- 광야에서 만나를 먹듯이 빵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이다.
- 만나는 먹어도 죽지만, 예수님은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그러면서, 빵이신 예수님도 새로운 단어로 표현한다.(51)
- '살'이다.
그럼 '살을 먹는 것'의 의미는?
- 일차적으로는 '주의 만찬'이다. 예수님을 기념, 기억하며 예수님의 살인 빵과 피인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다.
- 하지만 '주의 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살을 먹는 것'의 본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효력을 믿는 것이다.
- 그것을 믿는 사람만이 영생을 가진 것이다.(47)
정리하면 이렇다.
- 하나님의 이끄심 = 예수님께로 옴
- 예수님께로 옴 = 예수님을 믿음
- 예수님을 믿음 = 예수님의 빵을 먹음
- 예수님의 빵 = 예수님의 살
- 예수님의 살을 먹음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음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믿음 = 영원한 생명 갖음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지 않은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님께 오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이끄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요한복음에서 이미 나왔었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요 3: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니고데모와의 대화 말미에 모세 광야의 뱀처럼 인자가 장대, 즉 십자가에 들려 죽는 것의 의미를 믿는 사람만 영생을 얻는다고 언급되었다.
결국 이렇게 십자가 이야기를 하려고 먼 길을 돌아온 것이다.
52절: 질문 ⑥ - 예수님을 식인종 취급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어떻게'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일단, 이러한 질문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 행간의 의미는 외면한 채, 말꼬리 잡기를 하며 예수님을 식인종 취급한다.
동시에 질문은 예수님께서 살을 먹이시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도록 유도한다.
- 이후 53절에서 '살 먹는 것'에 '피 마시는 것'을 추가한다.
-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방법이 <살이 찟겨 피를 흘리는 것>임을 더 구체적으로 암시하신다.
53-59절: 대답 ⑥ -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과 사람의 상호 거함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며, 그것으로만 생명이 주어진다.(53, 54)
- 이는 48-51절을 살짝 변형해서 반복한 것이다. 변형 반복은 요한의 글쓰기 스타일이다.
- 살에 피를 추가하여 십자가 죽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이는 예수님의 이전 말씀의 요약임과 동시에 이후에 제시할 주장의 근거이다.(44절 참고)
여기까지 믿음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믿음의 결과인 영생에 대해 설명한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 54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갖는다'고 말했었다.
- 그런데 이번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표현한다.
- 이렇게 영생을 상호 거함으로 한 단계 구체화시킨다.
그리고나서 57절에서 상호 거함의 의미를 설명한다.
- 한 마디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와 똑같이 성부 예수님과 성도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는?
[요 5: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요 5: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셔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① 성부 성자 모두 '자발적'으로 서로를 향해 철저히 헌신한다.
-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셔서,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신다.
- 성자는 아무 것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성부의 뜻을 그대로 수행하신다.
② 하지만 관계(=생명)의 시작은 절대로 성자가 아닌 성부이며, 성자는 철저히 '의존적'이다.
- 성부에 대한 성자의 사랑과 헌신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성부에게 받은 것이다.
따라서 성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 역시 '자발적'이며 동시에 '의존적'이다.
①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똑같은 사랑으로 성도도 예수님을 사랑한다.
② 하지만 사랑의 시작은 절대로 성도가 될 수 없다. 철저히 예수님께 의존한다.
이러한 관계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상호 거함이다.
- 무조건 대등하기만한 관계도, 종속적이기만 한 관계도 아니다.
- 100% 자발적이고 대등하며, 100%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관계이다. 반반이 아니라 이중적이다.
- 종속을 강조하면 칼빈주의가 되어, 어떻게든 되겠지라 핑게대며 방종하게 된다.
- 대등을 강조하면 알미니안주의가 되어,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며 율법주의가 된다.
이러한 상호 거함이 영원한 생명이다.
- 영생은 나름대로 재밌고 신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의 사랑 받아, 예수님께만 헌신하며, 예수님만을 위해,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과 함께 오래오래 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58절에 전체 말씀을 요약 정리하고 대화가 끝난다.
이 대화는 갈릴리 서편 갈릴리 지역 가버나움의 회당 안에서 있었던 것이다.(59)
주제
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십자가 죽음을 믿는 것이다.
6장의 시작은 표적이었다. 표적을 통해 기적만 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실상을 고발했다.
- 기적이 아니라 메시지이신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런데 이번 본문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 오병이어 표적이 전하는 메시지는 막연히 예수님이라는 분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 중에 특히 살과 피, 즉 십자가에서 살이 찟기고 피를 흘리시며 죽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 이러한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른다고 하더라도 영생 얻지 못한다.
- 이는 결국 모세의 만나를 먹고 죽은 이스라엘 민족, 오병이어를 먹고 예수님을 왕 삼으려했던 유대 사람들과 똑같다.
따라서,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고, 죽음으로 무슨 효과가 있었으며, 그 죽음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아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 예상컨데, 요한복음의 결론은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기대하자.
② 영생을 갖는 것은 예수님과 상호 거함 관계, 즉 자발적이며 의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람들은 구원, 영생, 천국에 대해 너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 본문의 사람들은 구원을 배고픔과 식민지에서의 구원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 삼으려 했다.
- '나'를 중시하는 현대는 '나'가 어떤 것에도 거슬리지 않고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을 구원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나'를 왕 삼으려 한다.
하지만 구원은 강력하고 유능한 왕에 종속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종속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되는 것도 아니다.
- 이렇게 구원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면 오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구원과 영생은 철저하게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 구원, 영생 뿐만 아니라, 믿음, 의/불의, 죄, 악 등 모든 것이 다 관계에 대한 것이다.
-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 관계를 빼고는 인간에 대해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올바른 관계란 무엇이냐? 부부의 예를 들어보자.
① 종속되지 않고 자발적이고 독립된 인격이어야 한다.
- 왜냐하면 서로 각자가 배우자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 부모에게 독립되지 않으면, 그래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면, 제한된 만큼 배우자를 책임질 수 없다.
- 부모 뿐만 아니라, 친구, 직장, 세상, 돈, 나 그리고 배우자에게 독립되어야 한다.
- 독립된 사람만이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배우자에게 사랑과 헌신을 선택할 수 있다.
- 이것 외에 의무적이고 비자발적인 헌신은 올바른 관계가 아니다. 이용일 뿐이다. 예) 탕자 형
② 동시에 상대에게 철저히 의존적 종속적이어야 한다.
- 독립적이며 자발적인 선택 능력으로 상대에 의존, 종속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관계이다.
-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나의 삶을 포기하고 배우자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 그래서 배우자가 나의 삶의 목적과 본질이 되는 것이다.
- 이렇게 남자는 여자의 뜻을 위해 살고, 여자는 남자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다.
- 그러면 아무도 자기의 뜻을 위해 살지 않지만, 남자와 여자의 뜻이 모두 이뤄진다.
- 이러한 원리는 성경 뿐만 아니라 심리학개론이나 부부 클리닉만 봐도 다 나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자발적이며 종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 하나님은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그런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런 관계만이 관계 맺는 양 편의 뜻이 모두 이뤄지기 때문이다.
- 이런 관계에서만 양 편 모두의 생명이 생명다워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거함의 관계만이 유일한 생명이다.
- '영원하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또한 성도 간의 관계를 맺을 때, 세상 속에서 참 생명을 느끼며 천국을 경험하는 것이다.
- 이것만이 생명이며 천국이지, 생명과 천국을 누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결론
누구나 영생을 가지고 싶어 하고, 누구나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관계만이 유일하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아무도 영생하고 싶어하지 않고, 아무도 참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영생과 관계의 부질없음을 경험과 역사와 철학이 너무 잘 말해주기 때문이다.
- 영생하면 결국 보지 않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추악한 현실만 더 보고 알게 된다.
-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게임 이론을 통해 이미 증명했다.
- 세상에 행복한 영생과 행복한 관계는 없다.
- 추악한 영생과 추악한 관계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영생을 포기하고, 차선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 돈, 명예, 권력 등이다.
- 이런 것이 주는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자극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을 외면하려는 것이다.
- 쉬운 예를 들어, 게임, 도박, 성 등에 빠지면, 그 시간 동안 만큼은 현실의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 그래서 중독에 빠지면 나오기가 어렵다. 생명을 느끼게 해주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 중독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다시 현실과 죽음의 두려움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것은 죽는 것만큼 고통스럽다.
그리고 관계도 포기한다. 모든 사람을 이용 대상으로만 본다.
- 왜냐하면 한 번도 실망하지 않은 관계를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 이론에서, 만약 지구 인구 70억이 모두 양보하고 배려하며 신뢰하여 윈-윈 태도를 취한다면, 모두가 서로를 신뢰하며 만족하며 살 수 있다.
- 하지만, 딱 한 사람만 욕심을 내어 남들보다 하나 더 가지려 시도하는 순간, 그 한 사람으로 인해 70억 모두의 신뢰가 깨진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신뢰 관계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
- 세상에서 경험하는 관계는 언제나 비극적이다.
- 모든 사람을 이용 대상으로만 봐야 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이다.
-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은 100% 이용 당하여 다 털린 후 버려진다.
- 반복적으로 그런 경험을 당하면, 모두를 불신하여 눈에 불을 켜고 이용하려고 들게 된다.
-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알면서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만이 영생과 관계를 주신다고 하신다.
- 사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처럼 수양을 해서 이뤄내라 하시지 않는다.
- 먼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영생하는 올바른 관계를 맺으신 후, 그 관계 속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다.
-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안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사람 사이의 있는 이상적인 관계의 모델이 완벽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차차 설명할 것이다.)
이러니 우리가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하나님, 예수님, 사람, 우주만물이 다 들어있는데.
믿자. 믿으면 생명다운 생명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 참 사람, 참 나, 참 세상까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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