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를 먹고 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만다.
게다가 남아 있는 열두 제자들도 그다지 신통치 않다.
- 결국 그들도 예수님을 버린다.
현 시점에서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 주변에 아무도 없다.
-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왔는데, 그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참 비극적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문제의 원인이 뭘까?
그 문제의 핵심을 <영과 육에 대한 오해>에서 보려고 한다.
- 영이신 예수님을 육으로 이해하려하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버린 것이다.
- 사람들이 영과 육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을 통해 영과 육의 구분 기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겠다.
내용 정리
60절: 질문 ⑦ -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다.
- 이는 십자가 죽음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식인종이요, 피를 먹는 범법자라고 생각했다.
[신 12:23]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피는 먹어서는 안 됩니다. ・・・・
- 피를 마시는 것은 율법을 범한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식인이라는 인륜과 상식까지 벗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듣고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이해되었다.
- 그때까지 누구도 이 불경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이 언급된 때는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시고 교회 공동체가 생긴 이후이다.
- 그 때는 본문 말씀이 선포된 후 약 1년이 지나서일 것이다.
- 제자들은 1년 전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했을 것이다.
-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바르게 이해하고 깨달았다 하더라도 1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인데, 이해하지도 못했던 말을 1년이 지나 생각했다면, 굉장히 불명확했을 것이다.
- 그렇게 재구성된 기억에 의존해 제자들은 말씀을 선포했을 것이고, 그 선포들이 쌓이고 쌓여서 예수님 생애 전체가 재구성되었을 것이며, 각 복음서 저자가 당면한 상황에 맞게 또 다시 재구성되어 복음서가 기록되었을 것이고, 그 복음서가 2000년이란 시간, 공간, 문화의 간격을 넘어서 지금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정말 많은 변형이 생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어쨋든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헛소리라고 무시한 것이다.
-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번역했는데, 늬앙스를 그대로 살리지 못했다.
- 영어로는, hard, violent, harsh, stern으로, '거슬리고 반감을 품게 만드는 듣기 싫은 소리'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너무 이상해서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61-66절: 대답 ⑦ - 이 말씀은 아무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듣기 싫다며 짜증내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반응은 '포기'이다.
-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설득하기를 포기하시고 떠나도록 놔두신다.
- 이렇게 복음은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이성적으로 설명해야 하지만, 복음은 논리를 초월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이 상식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61)
그런 사람들이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62)
- 더욱 더 거부할 것이다.
- 하나님이며 구원자이신 분이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 형을 당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도 너무 많이 벗어났다.
- 아마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지 몸뚱이도 간수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구원하겠는가!"(마 27:42)
예수님도 자신의 말은 물론이고, 자신의 죽음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아셨다.
-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경험, 가치관, 수천년 동안 쌓여온 세상의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불가능하리만큼 어려운 것이다.
- 그리고 세상 상식과의 맞대결은 처음 믿음이 생길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이후에도 반복되며,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맞대결의 강도는 더욱 격렬해진다.
- 따라서 믿음 이후에 평안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격렬한 맞대결이 있기 때문에, 신앙을 긍정적인 것으로만 말하는 사람은 신앙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거부하는 이유를 뭐라고 하시냐?(63)
- 영과 육은 철저히 구분된 것인데, 영이신 예수님을 육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 육(경험, 상식)으로는 영(예수님의 말씀과 죽음)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은 영과 육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데, 같은 논의를 이미 니고데모 이야기와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에서 언급했다. 세 가지 이야기를 종합해서 영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
니고데모 |
사마리아 여인 |
오병이어 |
|
공통점 |
육과 영은 철저하게 구분된다. 육은 영을 절대로 알 수 없고, 영으로만 영을 알 수 있다. |
|||
차이점 |
육 |
니고데모는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다. |
사마리아 여인은 율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했다. |
사람들은 상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했다. |
영 |
하나님 나라는 영이기 때문에 육인 사람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고 영이신 예수님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
참 예배는 영이기 때문에 육인 율법을 초월하여 영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기 때문에 육인 상식이 아닌 영이신 예수님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
|
초점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법 |
참 예배를 드리는 법 |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법 |
- 이렇게 각 이야기는 육과 영을 구분하여, 참 생명은 육인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영이신 예수님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 따라서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참 예배를 드릴 수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다.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육인 사람이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64)
- 그래서 예수님은 여전히 육 속에서 예수님을 왕 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결국 믿지 않게 될 것이며, 제자 중에 유다가 자신을 넘겨줄 것을 예고하신다.
이러한 예고를 예수님의 선지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을 왕 삼으려는 마음은 여전히 육을 구하는 것이다.
- 그렇게 육에 매몰된 사람은 영이신 예수님을 절대로 알 수 없다.
-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된다고 예상하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는 판단이다.
- 유다의 경우도,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을 듣고, 보고, 오병이어를 먹고, 예수님과 수 년을 함께 살아도 예수님을 믿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영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65)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예수님을 쫓던 제자들은 거의 다 떠나고, 간신히 열두 제자만 남은 것이다.(66)
- 이는 현대 교회의 설교에 경고한다.
- 현대 교회는 세상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상식적인 메시지만 전한다.
- 예수님을 왕 삼으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방관하는 것을 넘어서 조장한다. 그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람들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영 없이 육으로도 노력하면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 세상 안에서 돈 벌고, 행복하고 평안해져, 자유를 느끼는 것에 초점을 둔다.
- 기복주의, 신비주의, 율법주의 모두 지극정성이면 물질적, 정신적 풍요를 얻는다는 상식적인 원리이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기뻐하며 평안을 얻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다.
- 이는 거짓 기쁨, 거짓 평안으로 지옥으로 가는 기쁨과 평안일 뿐이다.
67-71절: 마지막 대화 - 제자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오리무중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 베드로는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베드로가 떠난다는 것을.
- 이런 관점에서 대화를 자세히 보자.
- 베드로의 고백만 보면, 틀린 점을 찾기 어렵다.
-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 먼저 보고, 베드로의 고백을 보겠다.
예수님의 반응이 묘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70)
- 헬라어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 첫 단어가 '내가'로서, 예수님 자신을 강조한 점이다.
- 헬라어는 대부분 주어를 생략한다. 동사에 주어가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주어가 삽입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주어를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나'의 선택에 있음을 강조하신다.
- 이는 65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예수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은 그렇지 않다.(69)
- 헬라어를 보면, 베드로의 고백 문장 역시 '우리는'으로 시작한다.
- 필요 없는 주어를 삽입하여, 신앙의 주체가 '나'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신앙의 주체를 놓고 서로 '나'라고 싸우는 꼴이다.
- 즉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이는 육으로 영에 이를 수 있다고 착각한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는 이후 있을 배신을 예상할 수 있다.
끝으로,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넘겨줄 악마로서 유다를 지적하신다.(70)
- 실제로 예수님은 유다를 염두하셨을 것이고, 예고대로 유다는 예수님을 판다.
하지만, 예수님의 진짜 목적은 유다가 아닌 나머지 11명의 제자들에게 있었을 수 있다.
- 혹자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유다를 돌이키시려 했다고 한다.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
- 그러나 유다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야 예수님의 사역은 완성된다. 유다는 돌이키면 안된다.
- 따라서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유다를 돌이키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이 말씀이 유다를 향한 것이라면, 불필요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의 대상을 유다가 아닌 나머지 제자로 봐야할 필요가 있다.
진짜 목적은 나머지 제자들 모두가 악마임을 경고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모든 제자들이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의심했을 것이다.
- 그리고 이후 잡히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이 그 악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 그리고나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다시 예수님께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상태는 유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전체가 다 악마이다.
- 신앙의 주체가 '나'라고 착각하는 것은 악마가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 악마는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믿고 알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알게 된 것이라고 착각하게 한다.
- 실제로 제자들은 악마에 매여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간다.
-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가 스스로 악마임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영생을 얻을 자격이 전혀 없음을 기억하여, 예수님만 의지하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도 악마이다.
- 우리도 여전히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있다.
- 예수님 못믿는 '나'를 보며 억울해하지 말자. 악마에게 믿음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믿는 게 이상한 것이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악마들'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믿도록, 알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미 믿었다 하더라도, 이 믿음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 한 번 믿었다가 믿음에서 벗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 믿음을 유지하는 것 역시 '나'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선택 뿐이다. '나'는 여전히 악마이다.
- 내가 악마임을 잊어버려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순간, 신앙은 끝이다.
- 반대로,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나'의 악마임을 깨닫고 부끄러움 속에서, 신앙의 주체가 '예수님'이심을 기억한다면, 이미 영생 얻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제
사람들도, 베드로도, 유다도 모두 예수님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버렸다.
이렇게 된 근원적인 원인은 무엇이냐? 육과 영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과 육의 관계를 니고데모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오병이어 이야기를 통해 세밀하게 생각해보겠다.
①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과 육에 대한 오해
|
육 |
영 |
기준 |
근거 |
니고데모 |
일상적인 일 |
기적같은 일 |
기적 |
니고데모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영이라고 판단했다. |
사마리아 여인 |
율법을 어김 |
율법을 지킴 |
율법 |
여인은 율법에 근거해서 올바른 예배를 드리려 했다. |
오병이어 |
상식에서 벗어남 |
상식이 지켜짐 |
상식 |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을 육이라고 판단했다. |
이 사람들은 기적, 율법, 상식을 기준으로 영과 육을 구분했다.
- 일상적인 일은 육적이고 사람이 한 일이고,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면 영적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했다.
- 율법을 어기면 사람이 죄를 지은 육적인 일이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하신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 상식에서 벗어나 말도 안되고 이해되지 않는 말을 들으면 사탄의 말이라고 하고, 상식적이고 잘 이해되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말이라고 했다.
이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너무 똑같다. 우리는 '영적인 것'하면 무엇이 떠오르냐?
- 우리도 밥 먹고 용변 보고 일하고 자는 일상은 육적이라고 말하고, 우연히 바라던 일이 생기고 원했던 돈과 기회를 기적적으로 얻으면 영적이라고 말한다.
- 교회에서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으면 육적이고, 교회에서 하라고 한 일을 잘 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 설교가 이해가 안되고 듣지 못했던 내용이면 나쁜 설교, 이해가 잘되고 들어봤던 내용인데 우리에게 감동까지 주면 좋고 영적인 설교라고 생각한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처럼 우리도 육과 영을 나누어, 뭔가 좋고 재밌고 신기한 일에 영적이란 말을 붙이고, 싫고 재미 없고 지루한 일에 육적이란 말을 붙인다.
- 우연히 지하철 환승할 때 타이밍이 잘 맞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느낀다.
- 반대로 회사에 지각하고 업무가 잘 안될 때, 하나님이 날 벌하신다고 느낀다.
- 예배에서 찬양이 좋고 눈물 나올 것 같은 감동이 되면 신령한 찬양, 거룩한 예배라고 한다.
- 설교에서 평상시에 내가 생각했던 것을 언급하며 공감이 갈 때 은혜 받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너무 일상적이어서 문제 의식을 느끼기 어렵지만, 오병이어를 먹고도 예수님을 떠났던 사람들이 했던 오해들과 똑같다.
- 다 영과 육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해의 핵심이 뭐냐? 바로 판단 기준이다.
- 영과 육을 나누는 판단 기준이 '나'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사람들은 '내'가 듣기에 어렵고 이상하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또한 베드로 역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적이라고 판단했다.
- 니고데모도 사마리아 여인도, 오병이어의 사람들도 '내'가 판단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내'가 판단의 기준 되는 것을 전부 '육'이라고 한다.
- 같은 이유로, 니고데모도, 믿음 이전의 사마리아 여인도, 오병이어를 먹은 사람들도 다 육에 머물러 있었다.
- 같은 이유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다.
따라서 영과 육을 바르게 구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② 영과 육의 진실
영은 언제나 예수님이셨다.
- 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영이신 예수님이었고, 영적인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영이신 예수님을 통해서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법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이다.
- 즉 예수님을 통한 것은 율법을 어겨도, 상식을 벗어나도, 일상적인 일이라도 전부 다 영적인 것이다.
게다가 영의 또 다른 특징은 '바람과 같다'는 것이다.
- 흔적은 알 수 있지만, 절대로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영인지 육인지 흔적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알 수는 있지만, 절대로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유일한 영적인 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 뿐이다.
- 예수님을 통해 살면, 밥 먹고, 용변 보고, 잠 자는 것도 영적인 일이고,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예배도 찬양도 전도 선교도 짜릿하게 감동 받은 은혜도 전부 육적인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과의 상호 거함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셔서 나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셨고, 자신의 인생은 전혀 돌보지 않고 오직 나의 인생만 돌보시며 나의 생명이 생명답게 살 수 있도록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 그리고 나는 그런 예수님을 사랑해서 나의 인생을 전혀 돌보지 않고 나의 인생 전부를 예수님께 드려 오직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그런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상 안에 교회로 생겨서, 교회 식구들의 인생을 위해 나의 인생 전부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그 삶 속에서 무엇을 하든 전부 영적인 것이고, 이렇게 살지 않는 것은 아무리 말씀, 기도, 예배, 봉사, 전도, 선교에 쩔어 살아도 다 육적인 것일 뿐이다.
결론
이런 말을 듣고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적으로 살려면 뭘 해야 하지?"
뭐든 해도 된다. 단 아무거나 하면 안된다.
- 당연히 말씀, 기도, 교제, 전도를 해야 한다.
- 뿐만 아니라, 일상 전체를 예수님과 교제하는 기회라고 믿고 충실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 하지만 예수님과의 교제를 잊어버릴만큼 일상에 빠지면 안된다. 너무 열심히 살면 안된다.
- 일해서 돈을 벌되 적당히 일해서 벌고, 아기를 키우되 적당히 키우고, 설교 준비를 하되 적당히 해야 한다.
'나'를 위해 일하고 아기 키우고 설교 준비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과 교제할 기회로서만 해야 한다.
- 그럴 수 있으면 수천 억을 벌어도, 아기를 여럿 낳아도, 설교 위해 학위를 여럿 따도 좋다.
- 그러나 그럴 수 없으면 돈도 적게 벌고, 아기도 적게 낳고, 설교도 적게 해야 한다.
- 그래서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영이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만이 영원하다. 모든 일상을 영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육이다. 육은 결국 썩어 없어셔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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