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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20) 7:14-30 예수님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출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출처를 의심한다.(15, 27)

- 의도는 단순히 스승이 누구며, 출신지가 어딘지를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한 질문을 계기로 예수님의 본질을 선포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논증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듯 하다가도 정작 아무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순환 논증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16-19절에서 예수님의 논증을 간단하게 보면,

-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알 수 있다.

-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따를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

-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알면 된다.

-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순환 논증은 결론을 근거로 결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성경은 왜 진리인가? 왜냐하면 성경 속에 성경이 진리라고 말하니까.

- 보통 전도할 때 표현만 다른 비슷한 말을 많이 한다.

이는 명백히 오류이다. 아무 것도 논증하지 않는다. 결론을 반복해서 말할 뿐이다. 불필요하다.

하지만 순환 논증은 인류에게 없으면 큰일나는 필수적인 것이다.

- 얼마나 필수적이냐면, 순환 논증이 없으면, 모든 사람은 불안에 빠져 정신병에 걸린다.

예를 들어, 이 건물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왜냐하면 이 건물은 무너지지 않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어졌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순환 논리를 만들어서 불안함을 해소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 사람이 존재 근원에 있는 불안함을 직시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거짓 논리를 만들어서 자기의 눈을 가려버린다. 

- 마치 얼굴만 땅 속에 뭍고 자기 전체가 숨겨진 줄 아는 동물들처럼 말이다.

- 이 역시 사람의 생존 본능인데, 이러한 본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정리하면, 사람이 어떤 상황에 순환 논리를 사용하냐면, 문제 상황에서 반드시 답을 내야하는데, 스스로는 알 수 없을 때이다.

-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답을 알아야 한다.

- 물론 전문가라면 '나름' 객관적인 방법으로 건물의 무너짐 가능성을 체크할 수 있겠지만, 평범한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그럴 때 순환 논리로라도 "무너지지 않게 지어졌겠지!"라고 답을 내리지 않으면, 건물에 들어갈 수 없거나, 들어가도 불안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그래서 일부 강박증 환자들이 건물에 들어갈 때 특별한 행동을 반복한다. 이는 자기 위안이다.

이렇게 답을 내야하지만 스스로 낼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 유치하게 예를 들어, 나는 왜 사는가? 먹으려고 살지. 그러면 나는 왜 먹는가? 살려고 먹지.

- 순환 논리 외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순환 논리로라도 결론을 내지 못하면, 사람은 정신병에 걸린다.

따라서 '하나님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도 순환 논리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 하나님은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존재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한복음에서 이전의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나 순환 논리였다.

[요 3:6]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 이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을 육으로 이해하려하는 니고데모를 비판한 것이다.

- 그런데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는 순환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본질을 변론하기 위해 순환 논리를 사용하신 것이다.

- 다른 방법이 전무하다. 최선이고, 최고이며, 유일한 방법이다.

- 예수님이 순환 논리의 오류를 범하셨다는 이유로 단순히 무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가? 아니다.

-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존재 본질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 자기 스스로조차 존재 본질을 증명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 존재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순환 논리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존재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논증에서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메시지는 알 수 있다.

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② 하나님은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 이것이 진실인지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두 가지 메시지를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마찬가지로, 순환 논리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다 알 수 없지만, 살아야 한다는 것과 먹어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의 목적은 자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

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②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예수님을 알 수 있다.

③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순환 논리가 예수님의 존재 본질을 완전히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논리를 파악하되 논리에 매몰되지 말고, 논리 이면에 있는 메시지를 보자.

- 그렇지 않고 표면 논리만 보면, 니고데모와 같이 횡설수설하며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다.


내용 정리

14-15절: 유대 사람들의 의문 - 어디서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

예수님은 명절 초반의 뜨거운 분위기를 피해 명절 중간 즈음에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다.

- 참고로, 명절 기간은 안식일부터 안식일 전날까지 일주일이다. 따라서 이때는 수요일쯤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추측해보면, 메시야가 누군지 구약을 근거로 설명했을 것이다.

- 이를 통해 그 메시야가 나 예수임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상당히 설득력 있어서 유대 사람들도 어느정도 설득을 당했다.

- 유대 사람들은 대부분이 회당에 모여 성경을 배우고 연구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상당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들어본 적도 없지만, 반박할 수도 없어서 놀라움을 주었다.(마7:28)

그렇지만 예수님의 출신 때문에 사람들은 의문을 가졌다.

- 이 당시 정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스승을 가지고 있고, 학문의 계보가 있었다.

- 그런데 예수님은 스승도 없고 일반적인 계보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의심스러웠다.

따라서 의문의 핵심은 예수님 가르침의 출처였다. "어디서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

16-19절: 예수님의 변론 - 나의 가르침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기본적으로 순환 논리기 때문에 무엇을 논증하지는 않는다.

-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순환 논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나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

 나의 가르침 사람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

 =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

 = 진실하고 의로운 것

 = 불의한 것

 =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믿는 것

 =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

 = 율법을 지키는 것

 =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

이를 통해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①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 이는 하나님의 뜻, 즉 율법을 따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다.

- 이를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② 따라서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

-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이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들리지만, 이 말을 듣는 유대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21-24절에서 다시 상세하게 설명하신다.

-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지 논리적으로 말씀해주신다.

물론 그들은 그 설명을 듣고 이해하긴 커녕, 더 화가 났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 했다.(30)

20절: 무리들의 의문 -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오?

무리들은 세계 각지에서 모였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잘 몰랐던 것 같다.

- 그래서 무리들은 이미 예수님이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지 몰랐다.

- 예수님이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말을 과대망상쯤으로 생각한 듯하다.

-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고 판단했다.

21-24절: 예수님의 변론 - 나만이 유일하게 율법을 올바로 지킨다.

살해 위협에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을 통해, 살해 위협의 계기가 되는 사건에 대해 말씀하신다.

- 살해 위협의 시작은 5:18인데, 이 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셨다.

-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기와 하나님을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올바로 지킨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 이것이 핵심이다.

예수님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 몸의 일부분을 성하게 해주는 의식인 할례법은 안식일법보다 우선한다.(22)

-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할례를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지키는 것이다.(23)

- 즉, 안식일법은 상황에 따라 지킬 수도 있고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 그런데, 치유는 몸 전체를 성하게 하는 것으로 몸 일부분만 성하게 하는 할례보다 더 중요하다.(23)

- 따라서 안식일을 어기며 치유를 행하는 것은 오히려 율법을 올바로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 사람들이 율법을 범했다며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 유대 사람들은 율법의 겉모양만 보고, 안식일을 어긴다고 정죄했다.(24)

- 유대 사람들조차 더 상위의 율법(할례법)을 지키기 위해 하위 율법(안식일)을 범한다.

-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정죄는 유대 사람들의 기준에서 봐도 공정하지 못한 심판이다.(24)

지금도 이런 일은 너무 많다. 

- 성경 말씀의 올바른 뜻은 알지 못한 채 겉모습만 지키려는 사람이 많다.

- 그런 사람들은 본문처럼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행하려는 사람을 오히려 정죄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항상 겉모습보다는 성경의 올바른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 예배의 겉모습보다는 본질이신 예수님을.

- 설교라는 형식보다는 본질인 성경을.

- 교회 건물보다는 교회의 본질인 사람을 추구하려고 한다.

우리 교회의 모토를 잘못되었다고 드러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옳다고 인정한다.

- 하지만 실제로 이를 행하는 우리를 보면, 불편해할 것이다. 본문의 유대 사람들처럼 말이다.

만약 성경 말씀일 옳다면, 그리고 우리 교회 모토가 성경 말씀과 일치한다면, 우리 교회도 분명히 정죄 당할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 그럴 때,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근거로 설명하고, 그 설명이 아무리 설득력 있어도, 사람들은 끝까지 우리를 죽도록 비난할 것이다.

25-27절: 예루살렘 사람들의 의문 - 이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리들과 달리 예루살렘의 상황을 잘 알았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살해 위협이 계획되고 있고, 실행 중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 그들은 그 계획에 동조하는 것을 넘어, 실행이 미진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26)

- 그래서 지도자들조차 예수라는 사람에게 속아 넘어간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린다.(26)

그러면서 이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확신있게 주장한다.

- 근거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출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데, 예수의 출신지가 갈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의 혈통과 출신지를 언급한 구절이 있지만(사9:7, 미5:2), 또한 메시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갑자기 나타난다는 구절도 있다.

[단 7:13]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 이러한 구절 때문에 메시야는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출신, 성장 과정, 가족 관계 등을 다 아는 예수가 메시야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름 논리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했던 사실들은 잘못된 것이었다.

- 특히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 아니라 구약의 예고대로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8-29절: 예수님의 변론 - 나는 하나님에게서 왔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성전에서 가르침을 이어신다.

특이 이번에는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데, 메시지를 강조하시려는 의도이다.(1:15, 7:37, 12:44)

-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말을 어느정도 인정하시는듯 보이지만, 사실상 부정하신다.

- 예수님은 "너희는 나와 내 출신지를 알고 있다."라시며 인정하시는듯 보인다.

-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지금은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진짜 출생지가 구약에 예고된대로 베들레헴이라는 것과 예수님의 진짜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지적하신다.

그런데 이 변론 역시 순환 논증이다.

-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다.(28)

- 왜냐하면 너희가 알지 못하고 나만 아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

이렇게 자신의 말을 증명하시기 위한 근거로 자신의 말을 인용하신다.

- 따라서 아무 것도 증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있다.

메시지는 두 가지다.

① 나는 하나님에게서 왔다.

-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메시야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도 아니며,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메시야라고 주장하신 것이다.

② 내가 아는 하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나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 이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착각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한 정죄이다.

- 예수님만이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자신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안다는 뜻이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아신다는 메시지는 요한복음에서 반복되는 메시지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요 6:46]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외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요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전부 가짜이다. 본문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말이다. 

- 우리 스스로는 예수님 없이 하나님을 조금도 알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 만약 예수님 없이도 하나님에 대해 지식을 알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지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신약 성경 전체가 아무 가치도 없게 된다.

- 예수님을 통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미신, 맹신, 잡신, 귀신, 사탄일 뿐이다.

30절: 결론 - 예수님에 대한 살의는 점점 더 커지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최고의 자랑으로 삼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으니, 예수님이 욕을 들으시는 것은 당연하다.

- 이는 마치 부모님에 대한 욕을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32절에 공식적으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기 전인 지금은 아직 예수님을 잡으면 안된다. 불법이다.

-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열받아서 예수님을 잡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 피해가신다.

- 그 이유가 예수님의 달리기가 빨라서일 수도 있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셨을 수도 있다.

어쨋든 예수님은 여느 때와 같이 잘 도망가셨고, 그 이유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죽기 전까지 행하셔야 할 일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제

①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올바로 지키셨다.

오히려 율법을 잘 알지 못한 사람은 유대 사람들이었다.

유대 사람들조차 율법이 계층이 있음을 인정하고, 때에 따라 선별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

- 그런 과정 중에 율법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어기기도 했다.

- 율법을 어긴다고 무조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킨다고 무조건 다 좋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율법을 올바로 지킨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적절히 이해하고, 그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뜻이 뭔지 고민하는 것이다.

-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신앙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누구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 이러한 율법의 기능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

- 예수님만 율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지켰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전체적,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 마음에 드는 자구에만 매몰되어 벗어나지 못한다. 기계적인 율법 행위만 반복한다.

그러면서 정작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다. 

- 하나님의 뜻은 관계이고,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는 것인데 말이다.

- 율법과 교회 형식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있다.

이러한 지금의 상황이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너무 똑같다.

아마도 예수님이 지금 다시 오신다해도, 요한복음 말씀도 똑같은 말씀을 전하실 것이다.

- 그러면 사람들의 반응 역시, 요한복음 말씀과 똑같이, 예수님에 대해 적개심을 느끼고 예수님을 죽이려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려고 노력하자.

-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는 의미도 아니고, 노력하면 다 알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씀 읽어서, 계속해서 하나님과 관계 맺자는 뜻이다.

- 그것만이 올바른 신앙 생활이기 때문이다.

②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이 정말 창조주 하나님이냐에 대한 논쟁은 일단 접고 이야기 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은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너무도 잘 일치한다.

-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 하나님의 뜻은 안식일일지라도 사람의 몸을 성하게 하는 것이다.

-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살해 위협에 빠질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다.

이는 예수님이 정말 창조주 하나님인지에 대해서는 답해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이 구약의 하나님이시며,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야라는 것은 말해줄 수 있다.

- 그리고 분명한 것은, 당시 유대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③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미워한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이유는 단순히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다.

- 유대 사람들이 화가 난 이유가 율법을 정말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 정말로 율법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는 못할지언정, 고민하고 회의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함부로 미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짜 이유는 예수님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유익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 이들은 자신의 유익, 자신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이다.(18)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이 지키는 율법의 권위가 위협을 받았고, 그래서 자신의 명예가 위협을 받았고, 그래서 자신이 얻을 돈이 위협을 받았고, 그래서 자신이 받을 영광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 유대 사람들 입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살해 위협을 한 것이다.

- 그래서 반작용으로 예수님께 살해 위협을 한 것이다.

이러한 위협은 지금도 일어난다.

- 복음을 올바로 전하는 것은 살해 위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기억하자.

- 그리고 복음을 바르게 들은 사람은 복음을 전한 사람에게 살해 위협을 가한다는 것도 기억하자.

- 이렇게 복음은 기쁜 소식이지만, 반대로 살해 위협을 유발하는 무서운 것이다.

④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아신다.

하나님의 뜻인 율법의 올바른 의미는 예수님만이 아신다. 나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도 모른다.

쉽게 예를 들면, 이전에 말했듯이, 율법을 올바로 지키는 것은 올바른 상황 이해 속에서만 가능하다.

- 유대 사람들이 안식일에 치유하신 예수님을 정죄한 이유도, 그 상황이 안식일법보다 더 중요한 율법을 지켜야 할 때라는 상황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아무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 그래서 이 상황이 안식일법을 지켜야 할 때인지, 어겨야 할 때인지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도 율법을 올바로 지킬 수 없다.

-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시늉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상황을 아신다. 그래서 상황에 맞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만이 신앙 생활이다.


결론

하나님의 뜻이 율법을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어기는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 인생 전체가 이러한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정해진 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고민하면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것이다.

- 반복되는 시행착오의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회계하며, 예수님과 관계 안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 즉 신앙 생활이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지식, 경험, 문화 속에서 배운 답을 의심과 고민 없이 선택한다.

- 지식, 경험, 문화가 정해준 답은 결국 자신에게 최고의 유익을 주는,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는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보다 더 많은 부, 명예, 권력, 안전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들을 점점 더 잃어간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진다.

- 하나님을 점점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더 알아간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멀어진다.

- 하나님께 무관심하며, 부정하고, 모독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모든 선택을 예수님 안에서 고민하며 살고 있는가?

- 아니면 배운대로, 하던대로, 들은대로 하고 있는가?

겉보기에 두 사람의 인생은 그다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 하지만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을 기억하자.

배운대로, 하던대로, 들은대로 하지말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고민하여 선택하자.

- 그럴 때에만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