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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21) 7:31-53 예수님의 말씀 선포로 일어나는 사람들의 분열

본문의 키워드를 '분열'로 뽑았다.

- 예수님의 말씀 선포에, 예수님의 동생들을 시작으로, 무리, 유대 사람들,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 성전 경비병, 니고데모의 반응이 계속 엇갈려 제시된다.

- 그들은 나름의 이유로 예수님을 옹호하거나 거부했고, 그 결과 자기들끼리 싸우며 분열한다.

그 사이 사이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지만, 분량도, 비중도 적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도 적다.

- 단순히 분열을 부채질하는 역할로 보인다.

- 33-34절에서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을, 37-39절에서는 성령 강림을 암시하고 있다.

- 이러한 말씀이 모두 의미심장한 구절들이지만, 추상적이고 불분명하다.

- 아마도 이후에 설명될 내용들의 예고편일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사람들

 옹호

 거부

 분열

 예수님의 동생들

 

 3-5

 

 무리

 31

 20

 12, 40-43

 유대 사람들

 

 15, 35-36

 

 예루살렘 사람들

 

 25-27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32, 45, 47-49, 52-53

 

 성전 경비병

 46

 

 

 니고데모

 50-51

 

 

- 특히 40-43절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 또 45-49절에서는 성전 경비병들이, 50-53절에서는 니고데모가 바리새파 사람들과 언쟁한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의 가르침은 상당한 거부감을 일으킬만큼 오해의 여지가 컸다.

② 반면에 설득력도 충분히 있었다. 옹호하는 사람도 많았다.

③ 사람들의 다양한 옹호와 거부 이유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 내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 뿐만 아니라 옹호한 사람들도 결국 모두 예수님을 부정하고 떠났다.

- 즉, 거부 이유 뿐만 아니라 옹호 이유 역시 바른 믿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 따라서 그런 잘못된 반응을 이끌어낸 사람의 내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 이를 통해 우리의 내면도 살펴보자.

따라서 7장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들의 분열에 초점을 두고 본문을 읽어보자.


내용 정리

31-36절: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기 시작

예수님은 지난 본문에서 안식일 할례 문제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바르게 지켰는지 역설했다.

- 이를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주장했다.

-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열받아서 예수님을 잡으려 했다.

반면에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징을 보고 믿은 사람들도 많았다.(31)

- 물론 믿음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 게다가 믿음의 근거 역시 '표징'이다. 부정적이다.

- 2:23-25에서도 기적을 보고 믿은 사람들의 믿음을 예수님은 부정하신다.

- 표징은 절대로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간판일 뿐이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믿음의 고백조차 듣기 싫었다.(32)

- 성전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들리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성전 경비병을 보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다.

- 아마도 이제는 예수님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더 이상 가만 둘 수 없었던 것 같다.

- 가만 뒀다가는 자신들의 권위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졌던 것이다.

- 비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권력은 기반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파견에 이어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떠나갈 것임을 예고하신다.

그런데, 이 예고가 참 아리송하다.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① 앞의 맥락과 연결하여, 성전 경비병의 파견 직후 이 말씀을 배치하여 경비병에 의해 체포될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 실제로 예수님은 경비병에게 체포되셨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 뜻이 아니다.

② 반면에 뒤의 맥락과 연결하여, 그리스 지역(에베소,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에 전도하러 가시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 예수님이 직접 가시지 않으셨지만, 실제로 복음은 이방 지역인 그리스에 전해졌다.

- 후대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이를 통해 이방 지역 전도를 정당화 한다. 아마도 이방 지역 전도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 같다.

③ 맥락과 상관 없이 보면, 알다싶이 이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을 의미한다.

- 앞뒤 맥락과 연결이 없어도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 놨다.

- 반면에 실제 의미와 상관 없는 구절을 앞뒤로 연결하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더 부각하고 있다.

- 이게 참 요한복음의 아리송한 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의도가 체포나 전도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 부활, 승천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사람들의 오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체포나 전도라고 생각한 오해에도 뼈가 있다. 이를 통해 이후에 있을 체포와 전도를 암시한다.

- 저자는 예수님 말씀의 실제 의미는 숨기고 오해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실제 의미를 부각시킨다.

- 또 그 오해가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오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 이렇게 3단 꺽기를 통해 짧은 구절 안에 풍성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글쓰기의 고수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35)

- 우리에게는 죽음, 부활, 승천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지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하도록 만든다.

- 이것도 글쓰기 기법같다.

37-44절: 예수님의 물 선포로 인한 사람들의 분열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설교에서도 엄청 많이 듣고, 감동도 참 많이 받은 구절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중요한 구절은 아니다. 그러니 간단하게 넘어가겠다.

- 예수님이 생명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생명이 넘쳐난다는 메시지는 니고데모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충분히 전달되었다. 더 나올 필요가 없을 만큼.

- 지금은 광야에서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터져나온 사건을 기념하는 초막절이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이야기들이 더 감동적이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성령 강림을 예고한다는 점이다.(39)

- 시점은 예수님의 영광, 즉 죽음, 부활, 승천 이후라고 명시한다.

- 그리고 예수님이 주실 풍성한 생명을 성령 강림과 연결한다.

- 앞으로 성령에 관해 많이 이야기할텐데, 그 때 이를 더 자세히 다루겠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옹호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이 분열한다.(40-43)

옹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 근거는 가르침과 기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기적 역시 이용하려고만 했을 뿐, 바르게 믿은 사람은 없었다.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혈통과 출신을 문제 삼았다.

- 하지만 이들은 정작 예수님의 혈통과 출신을 알지 못했다.

- 이들에게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다윗 혈통에 베들레헴 출신이었다.

이들이 분열하며 싸운 것은 참 어리석은 행동이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냐는 문제는 논쟁할 문제가 아니라 사실 확인이 필요한 문제이다.

- 사실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다.

세상에는 논쟁 해야할 것과 논쟁하지 말하야 할 것이 있다.

- 논쟁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사람과 논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논쟁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그렇다면 논쟁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① '사실 문제'는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 논쟁 해서 이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 사실 확인해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논쟁할 시간에 네이버를 키는게 낫다.

② '가치 문제'는 논쟁해야 한다.

- 같은 상황에 다른 가치 기준을 가지고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 그러나 논쟁한다고 해서 누구 판단이 더 옳으냐를 가를 수는 없다.

- 하지만 논쟁하면, 나와 상대방의 가치 기준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올바른 논쟁이라면, 논쟁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사실 문제는 논쟁하고, 가치 문제는 논쟁하지 않는다.

- 예를 들어, 5.18 광주 사태의 원인이 누구냐는 논쟁할 문제가 아니라 조사할 문제인데, 많은 사람들이 논쟁한다. 어리석다.

- 마찬가지로 예수가 하나님이냐는 문제 역시 논쟁해서 해결이 안되는 사실 문제다.

- 반대로, 돈은 좋은 것이냐는 논쟁해야 할 문제이지만, 아무도 논쟁하지 않는다. 고민해보지도 않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러지 않도록 노력하자.

- 사실 문제와 가치 문제를 구분해서 쓸데 없는 논쟁하지 말고, 필요한 논쟁은 박터지게 하자.

결국 싸움은 예수님께 불똥이 튀었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45-53절: 대제사장, 성전 경비병, 니고데모 간의 논쟁

그러한 분열은 무리와 같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뿐만 안이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있었다.

먼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성전 경비병이 저항한다.(46)

- 성전 경비병은 예수님을 체포하러 갔다가 그냥 돌아온다.

-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성전 경비병은 단순히 '경비' 이상의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 이들은 레위인 중에서 선발된 사람들로서, 종교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기계적으로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 따라서 이들 나름의 성경 지식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권위에 호소하며, 또한 율법을 근거로 경비병을 비난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

- 지도자들 중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없다며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을 했지만, 바로 50절에 바리새파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옹호하고 나선다.

- 또한 율법에 있어서도, 바리새인보다 예수님이 더 설득력있게 논증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경비병을 '미혹된 자',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했지만, 실제 미혹되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저주받은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다.

니고대모의 반박 역시 마찬가지다. 니고데모는 정확한 율법에 기반하여 논증하지만, 바리새인은 잘못된 정보에 기반하여 주장한다.

- 니고데모는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는 절차상의 문제를 올바르게 지적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성경에 근거해 지적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① 일단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 아니다.

② 게다가 갈릴리 출신 예언자가 있다는 점이다. 요나와 나훔이 갈릴리 출신이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는 절차상의 문제도 있었고, 체포하는 근거 또한 부실했던 것이다.


주제

일반적인 무리 사이에서도, 특별한 종교지도자 사이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옹호와 거부가 나뉘어서 분열되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누구도 예수님을 바르게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옹호와 거부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사람들의 내면을 유추해보겠다.

① 예수님을 옹호한 사람들 - 무리(31, 40, 41), 성전 경비병(46)

이들이 예수님을 옹호한 이유는 두 가지다. 가르침과 표징이다.

- 가르침과 표징 모두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바르게 고백했지만, 누구에게도 믿음은 없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옹호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

-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일종의 예능이었다.

- 예수님의 표징은 자신들의 배를 불려 줄 밥통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예수님을 통해, 종교적, 정서적, 물질적 유익을 얻으려고 이용하기만 할 뿐, 정작 예수님께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 지금 이와 같은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②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 - 무리(42),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47-49, 52-53)

이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율법과 예수님에 대한 정보이다.

- 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은 율법을 범했으며, 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율법을 범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이었다.

- 율법은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라고 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은 병자들을 치유하지 않았다.(23)

- 율법에는 사람을 심판하는 절차가 있는데, 종교지도자들은 절차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다.(51)

게다가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예수님의 혈통과 출생지를 제대로 조사해보지도 않았다.

왜 이들은 바르게 판단하지 못했을까?

- 율법에 도사들인데, 정말 올바른 율법이 뭔지 몰랐을까?

- 예수님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성급하게 판단했을까?

다음 몇 가지가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이들은 율법을 알았지만, 율법을 믿지 않았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율법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그래서 지키지 않았다.

- 이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도 믿지 않았다.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그리스도가 아닌 이유 찾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 이들은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예수님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처리했다. 그래서 절차도 펙트도 보지 못했다. 

결국 이들 내면에는 유익을 추구하는 것만 있었다. 율법, 성경도 유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그래서 감정적으로 격해졌고, 그래서 눈 앞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보이는 광경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옹호한 사람도 거부한 사람도 모두 자기 유익만을 구했다. 나머지는 모두 유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 율법도, 성경도, 그리고 예수님도.

그러니 자신의 유익을 빼앗아가는 타인과 분열하여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론

이러한 분열을 남 일처럼 말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 교회 다니는 사람의 대다수가 종교적, 정서적, 물질적 유익을 위해 다닌다.

- 교회 다니는 사람의 대다수가 율법과 성경을 유익을 얻기 위한 수단 삼는다.

- 교회 안다니는 사람의 대다수가 펙트 체크도 안해보고 유익을 주지 않는다고 거부한다.

- 본문에 나온 사람들과 똑같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사실상 우리는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 갖지 않는다. 

- 인류 평화를 위해 생명을 걸고 지키려는 사상과 이념도 결국 유익 때문이다.

- 목숨만큼 소중한 나의 가치관과 자존심도 결국 유익을 얻기 위한 합리화 수단일 뿐이다.

- 우리가 성경 읽고 기도하고 교회 와서 교제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부 유익 지키기, 나 지키기일 뿐이다.

-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이유야 전부 다르지만, 반드시 분열이 생긴다.

- 분열하지 않는 모임이 있다면, 같은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일 뿐이다.

- 나는 다르다,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은 가장 위험한 착각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교회 안에서 한정하면,

- 언제나 그렇듯, 먼저 우리가 이지경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 예수님만이 답임을 기억하고,

- 정말 예수님은 나보다 더 완벽하게 나의 유익을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믿자. 기대하고 다르지만.

- 그러다가 서로 유익이 충돌하여 분열이 생기면, 너 때문이라며 죽일듯 싸우지 말고, 함께 예수님 의지하자.

그러면, 예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고, 교회 안의 관계도 회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계는 무엇일까?

- 이용하여 유익을 얻는 것은 무조건 아니다. 함께 유익을 얻는 동료도 아니다. 관계의 본질에는 유익이 배제되어야 한다.

- 감정도 아니다.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 모두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나쁜 감정 뿐만 아니라 좋은 감정도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왜곡하여 이해하게 된다. 일명 콩깍지.

- 감정은 관계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관계 그 자체는 아니다.

내 맘대로 관계를 정리하면, 나의 판단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최대한 객관적, 이성적,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 본문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옹호하며 신앙 고백을 하기까지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 이유는 자신의 판단을 믿어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또한 예수님을 거부한 바리새인 역시, 자신의 판단을 믿고 중요한 펙트 체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

성령의 일이 이것이다. 자신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

- 그럴 때,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고, 예수님의 한량 없는 사랑을 알 수 있고, 그 사랑 때문에 믿을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연약함을 공감하며,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