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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23) 8:12-30 하나님만 기준 삼으시는 예수님

7장의 초점은 사람들의 갈등과 분열에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추임새 정도였다.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이 메인으로 나온다.

키워드는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 '예수님의 증언'이 참된 이유도, 내가 온 곳이며 내가 갈 곳이신 '아버지'를 알기 때문이다.(14)

- '예수님의 심판'이 참된 이유도,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16)

- 너희가 '죄' 가운데 죽는 이유도, 내가 가는 곳이신 '아버지'께 갈 수 없기 때문이다.(21, 22, 24)

- 예수님은 위이신 '아버지'로부터 왔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너희는 '아버지'가 아닌 아래에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여 있다.(23)

- 너희에 대해 '심판'할 것이 많은 이유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6, 27)

이렇게 예수님은 중요한 개념인 증언, 심판, 죄, 죽음, 세상을 아버지를 근거로 설명한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한다.(27)

-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다.(41)

- 하지만 실상은 악마의 자녀였다.(44)

-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했다.

-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버지와 관계로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도 유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열심히 신앙 생활 한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비중은 얼마나 되는가?

그런 우리에게 본문은 뭐라고 말하는지 생각하면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자.


내용 정리

12절: 예수님의 선포 - 나는 세상의 빛이다.

지금은 초막절 마지막 날이다.

이 때에 예수님은 물 선포에 이어 빛 선포를 하신다.

- 큰 관점에서 물과 빛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 특히 빛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이끄셨던 불 기둥을 상징한다.(출 13:21)

-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신 하나님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물과 빛의 차이도 있다.

- 물은 쏟아져 내린다는 특징을 통해 하늘에서 내리는 성령을 상징했다.

- 반면에 빛은 어둠을 밝혀서 보고 알아서 깨닫게 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빛은 하나님을 보고 알고 깨닫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맺도록 하는 것을 상징한다.


[요 3:20-21]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빛은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를 드러낸다.

-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는 것이 빛의 역할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예수님 자신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어둠(=하나님과 관계 없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하나님과 관계 맺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은 왜 이 맥락에서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선포를 하시냐는 것이다.

-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8장 나머지에서 빛과 관련된 설명이 일체 없기 때문이다.

- 본문을 자세히 읽지 않으면, 8장에서 빛 선포는 맥락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빛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 나머지 모든 말씀이 빛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빛이 비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증언과 심판이 참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4, 16)

- 하지만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27), 예수님의 증언과 심판이 참되다는 것을 알 수 없고, 여전히 죄와 세상 속에 속하여 영원히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23, 24)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다. 즉 세상이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시는 분이다.

-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야 빛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다.(19)

- 그래야 세상에 속하지 않고, 어둠 속에 다니지 않을 수 있다.(23)

- 그렇게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23, 24)

이후부터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의 빛이신지 그 근거를 설명하실 것이다.

13절: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공격

예수님의 빛 선포를 하셨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초막절의 빛이 하나님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선포가 불쾌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포에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절차 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 마치 최순실 사건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태블릿 습득 절차 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같다.

- 절차 상의 문제가 있는 증언은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절차 상의 문제는 증언의 조건에 있다.

- 증언이 참으로 인정되려면, 둘 이상의 증언이 일치해야 한다.(신 17:6)

- 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증언은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

14-18절: 예수님의 반박 - 생명의 빛이라는 나의 증언은 참되다.

예수님은 자신의 증언이 참되다고 반박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신다.

언제나 그랬듯, 예수님은 자신이 공격 당하는 상황을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장으로 활용하신다.

- 표면적으로, 대화는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의 논쟁으로 보인다.

- 하지만 내면적으로, 예수님이 왜 세상의 빛이신지 논증하고 계신 것이다.

- 이중적으로 흐르는 대화 전개를 잘 따라가야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증언, 즉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신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뉜다. 

① 14-15절: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즉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은 어디인가?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증언이 참된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란 증언은 옳다.

하지만 너희(=바리새파 사람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 그렇기 때문에 심판할 때조차,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기준을 따른다.

- 사람의 기준을 따른 심판은 틀리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의 기준을 따라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 오직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서만 심판하신다.

② 16-18절: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심판은 참되신 이유는?

- 심판의 기준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증언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 두 증인에 의해 증언되기 때문에 참되다.(17, 18)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증언이 참된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하신다.

-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증언의 '내용'이 참되다는 것이다.

-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증언의 '절차'가 참되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공격에 대해, 자신의 증언의 절차 뿐만 아니라 내용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논박하셨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빛임을 논증하셨다.

19절: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말꼬리잡기 질문을 한다.

-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에, 아버지를 찾는다.

- 이는 마치, "니 아버지가 누군데? 당장 불러봐!"와 같은 동네 싸움 같다.

- 하지만 사람들의 질문은 의도치않게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의 이유를 지적하신다.

-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조차 모르는 이유를 예수님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의 빛, 즉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2-19절을 정리하면,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신 세 가지 근거이다.

①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14-15)

②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16-18)

③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19)

20절: 상황 설명 -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잡지 않았다.

예수님은 일관성있게 자신이 세상의 빛되심을 논증하시지만, 사람들도 일관성 있게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향한 적개심만 점점 고조될 뿐이다.

- 그래서 결국 59절에서 사람들은 돌로 치려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말씀을 선포하고 계신 위치다. 헌금궤가 있는 곳이다.

-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헌금궤는 성전 초입에 있다.

- 이 장소는 여자들고 쉽게 드나드는 곳이라고 해서 '여인의 뜰'이라고도 불린다.

- 누가복음 21장에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장소가 이곳이다.

상상컨데, 예수님은 일부러 이 곳에서 말씀을 전하신 것 같다.

- 언제든 도망 나갈 수 있도록 성전 출입구 바로 앞인 헌금궤 앞에 자리를 잡으신 것 같다.

이렇게 예수님의 빛 선포는 마무리된다.

21-26절: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의 본질 - 나는 가고,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원과 목적, 즉 본질이 하나님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2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목적'에 대해 그리고 23절에서는 사람들의 '기원'에 대해 말씀하신다.

- 이를 통해 사람들의 본질이 하나님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는 하지만 찾지 못한다.(21)

- 이유는 사람들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지 못한 체, 죄, 즉 하나님과 관계 없음 가운데서 죽는다. 영원한 사망이다.

-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는 이스라엘, 특히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저주 중의 최악의 저주이다.

이 말을 유대 사람들은 '자살'로 오해한다.(22)

- 7장에서는 '전도'로 오해했었다.(7:35)

- 이는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꾸하시지 않고, 말씀을 이어가신다.

이번에는 사람들의 기원을 말씀하신다.(23)

- 예수님의 기원은 '위'이며, '세상에 속하지 않는 곳', 즉 하나님이다.

- 반면에 사람들의 기원은 '아래'이며, '세상'이기에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들의 기원과 목적, 즉 '존재의 본질'이 하나님과 관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죽음이라는 저주를 퍼부으신 것이다.(24)

- 더군나 예수님만이 세상과 하나님을 관계 맺게하는 유일한 분이신데, 예수님조차 믿지 않으니, 사람들이 죄 가운데 죽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듣다 듣다 참다 못한 사람들이 말한다. "당신은 누구요?"(25)

- 이 구절만 보면, 사람들이 굉장히 점잖게 물어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전 구절과 연결시켜서 보면, 절대로 좋은 소리 나올 상황이 아니다.

- 누군가가 눈 앞에서 "지옥에나 떨어져 죽어라!"고 말하는데, "당신은 누구요?"라고 점잖게 말하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누구냐고 묻는 말이 아니다.

- 반드시 욕이 나와야 할 시점이다.

- 따라서, "당신은 누구요?"가 아니라, "너 누구야? 니까짓게 뭔데 이딴 헛소리야?"가 적당하다.

예수님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으신다.

- "내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말했었자나. 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 예수님은 2장에서부터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셨다.(2:16)

그러면서 더 열받게 말씀하신다.(26)

-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에 해당하는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으시지만, 그것 뿐만 아니라 '너희가 받을 심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하신다.

- 즉, "너희가 죄 가운데 죽을 것이다."란 저주는 너희에 대한 심판의 시작일 뿐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예수님 자신은 참되신 분, 즉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았고, 단지 하나님에게서 들은 것을 말하는 것 뿐이라고 말씀하신다.(26)

- 즉, 너희에게 심판할 것이 많지만, 내 말에는 하나도 틀린 것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21-26절을 정리하면,

-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은 하나님인 반면, 사람들의 기원과 목적은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이렇게 12-19절은 '예수님의 본질'에 초점을 두었다면, 21-26절은 '사람들의 본질'에 초점을 둔다.

27절: 상황 설명 -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본질에 대해서도 '아버지'를 근거로 설명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는지조차 몰랐다.

- 사실 처음 읽을 때 나도 잘 몰랐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28-29절: 예수님의 대답 - 나는 곧 나다.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는 심판의 말씀을 듣고 누군가는 분노를, 누군가는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 왜냐하면 우리 사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가 무식해서 깨닫지 못한게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때가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8)

-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라는 위로의 말씀이다. 물론 믿는 자에게만.

때가 되어 예수님이 죽음, 부활, 승천하시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냐? 내가 곧 나다.

- 알다싶이, 출애굽기 3:14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 즉, 하나님을 상징하는 문구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실 일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 유대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참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 가장 심한 신성모독이다.

-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분명하며 유일한 사건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선포를 정리하신다. ① 예수님은 하나님 뜻대로 말한다. ②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

- 두 구절은 26절과 16절에서 이미 언급하셨던 말씀이다.

- 반복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강조하신다.

- 특히, ①은 예수님의 가르침 '내용'이 참됨을 강조하고 ②는 예수님의 '존재'가 참됨을 강조한다.

30절: 상황 설명 -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믿은 많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쨋든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계속 읽어왔다면 이 믿음에 진정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2:23-25에서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없다고 고발했고, 6:66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믿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떠났다.

8장 다음 본문부터 예수님은 믿는 유대 사람들에게 집중하여 심각한 저주를 퍼부으신다.

- 예수님 말씀의 융단 폭격을 받은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께 완전히 털려 멘붕이 된다.

- 그래서 돌을 들어 치려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한다. 그것도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 말이다.

- 예수님이 얼마나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지 다음 본문에서 기대해보자.


주제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뉜다. ① 12-20절, ② 21-27절, ③ 28-30절

각 단락마다 주제는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다.

-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 맺게 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②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 사람들은 자신의 기원과 목적, 즉 본질이 세상에 있다.

- 따라서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다.

③ 그러나 그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죽음, 부활, 승천하시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다.

- 특히, 예수님이 '내가 곧 나', 즉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 십자가 사건만이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는 중보자임과 동시에 하나님 그 자체시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핵심이다.

이 주제들도 충분히 우리에게 중요하다.

- 우리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고, 예수님의 역할을 가르쳐주며, 결국 예수님의 본질은 십자가를 통해 알 수 있음을 말해준다.

-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다.

- 예수님의 역할은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이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시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란 증언이 참되다고 주장하시는 기준도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 또 죄 가운데 죽게 될 사람의 기준도 하나님이셨다. 사람의 본질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이다.

- 게다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알게 될 것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모든 판단 기준은 하나님이셨다.

- 하나님에 기원을 두고, 하나님을 목적 삼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이 전부다.

- 이는 하나님이 참 창조주시고, 전지전능자라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갖게 되는 태도이다.

하지만 이를 안다고 자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도 머리로 알고 말로 고백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며 세상에 속해 있고, 결국 죄 가운데 죽을 운명이다.


결론

우리는 어떻게 세상과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할 수 있는가?

- 본문은 결국 십자가 사건이라고 말한다.

- 십자가를 통해서만, 예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으며(28),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19)

- 또한 하나님을 알아야 예수님처럼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14, 15)

그러면, 어떻게 십자가 사건을 알 수 있는가?

- 십자가 사건은 성경에만 씌여있다. 성경을 알아야 한다.

- 물론 성경을 알기만 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성경을 알아야, 성경에 있는대로 믿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고, 구제 봉사도 할 수 있고 교회도 될 수 있다.

- 결국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인생의 근원이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이런 기도 제목이 있었다.

- 우리는 세상의 잡다한 것으로 울고 웃는데, 어떤 것으로도 울고 웃지 않고, 오직 예수님으로만 울고 웃기를.

- 우리 인생의 판단 기준이 예수님뿐이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 그런데 본문의 예수님은 정말 그렇게 살고 계신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까?

-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 그렇게 살 수 있는 때도 있고, 엉망으로 살 때도 있을 것이다.

- 변화되길 원하지만, 그 변화는 항상 일정하지 않고 오락가락 기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라는 판단 기준을 알게 되면 확실히 변화되는 한 가지가 있다.

- 예수님을 판단 기준 삼아 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 또한, 예수님을 판단 기준 삼아 살고 있지 못한 자신을 보며,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이 예수님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항상 예수님을 기준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변함없이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죄송한 마음 중 하나를 가지고 살 수 있다.

- 둘 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정말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 제목을 세밀하게 정한다면,

- 성경을 읽고 알아 깨닫게 되기를.

-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의 의미를 알게 되기를.

-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기를.

-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 그래서 하나님을 기준 삼아 살게 되기를

-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죄송한 마음으로 살기를.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죄송함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