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에게 영생불사, 전지전능이 생겨서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만족할까?
- 그래서 원하는 것을 다 갖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가장 높은 권력을 얻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과 찬양을 받는다면, 만족할까?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바라며 투신하지만, 실상은 자유가 만족을 주지 못한다.
- 그 삶은 마치 개미 세계에 혼자 떨어진 사람 같다.
- 사랑, 존경, 찬양을 받으면 처음에는 엄청 만족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루해질 것이다.
- 너무나 큰 수준 차이 때문에, 누구와도 공감하며 관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 누구를 봐도, 개미 이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개미에게 사랑받는 것이 과연 좋을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유를 주어 관계를 맺으며 영원토록 산다면, 만족할까?
- 그 삶은 초호화 리조트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토록 휴양하는 것과 같은 인생일 것이다.
- 아무리 좋은 리조트라도, 일주일 지나면 전율이 사라지고, 한달이 지나면 지루해지고, 일년이 지나면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난다.
- 그래서 만약 일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초호화 리조트로 옮긴다해도, 천 번 옮기도, 만 번 옮기면, 그 조차 지루해질 것이다.
- 떠나고 싶어 죽겠지만, 어디로도 떠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 상태가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 즉, 완전하다는 것은 지루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 물론 천국은 완전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사람이 추구하는 자유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를 비판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과 똑같은 자유를 가진 사랑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딪힐 것이다.
- 각각이 가진 자유가 너무나 완벽해서, 서로의 자유를 계속해서 침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똑같이 고독함, 지루함,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게 될 것이다.
- 지금과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다.
정리하면, 사람의 머리 속에는, 영생불사, 전지전능, 자유가 있으면 반드시 만족이 온다는 논리가 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때져보면, 영생불사, 전지전능, 자유가 있으면 반드시 불만족이 온다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자유가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 이 세상에서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도 결코 만족은 없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어지면 필요로부터 해방될까?
- 지구 상에, 온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어지면 만족하게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만족을 위해서는 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야 한다.
- 다르게 말하면, 우리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있어야 한다.
- 그 존재로 인해, 우리가 예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주어져야 한다.
- 그래서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 그래야 지루함을 벗어나 새로움을 느끼며 만족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만족이 지속되려면, 새로움의 대상이 지속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 즉, 알아도 알아도 새로운 존재, 무한한 존재여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지속적으로 새로울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뿐이다.
-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사라진다.
- 우리에게 영원토록 재미와 만족을 줄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과의 교제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답정너지만, 신앙만이 유일하게 사람에게 만족을 준다.
정리하면,
① 영생불사, 전지전능, 완전한 자유는 만족의 조건이 될 수 없다.
② 오히려 제한된 능력이 만족의 조건이다.
③ 그렇게 제한된 능력으로 무한한 존재를 추구할 때에만 영원한 만족이 가능하다.
④ 그런데 모든 존재 중에 무한한 존재는 하나님 뿐이다.
⑤ 따라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만이 영원토록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여기서 ① ② ③은 성경을 배제하고 경험과 논리로만 추론한 것이다.
- ④만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마지막 ⑤는 앞의 추론을 종합해 도출한 결론일 뿐이다.
- 따라서 신앙이 없고 성경을 인정하지 않아도 ① ② ③은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 영생불사, 전지전능, 완전한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은 한없이 만족하실 줄 알았는데, 홀로 계신 하나님은 참 불만족하실 수도 있겠다.
둘쩨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다.
-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지, 연약한지, 어리석은지, 보잘것 없는지, 죄인인지 알도록 하신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도록 하지 않으시고, 찔끔찔끔 조금씩 계속해서 알아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항상 하나님에 대한 모르겠음, 알고 싶음, 답답함, 뭔가 모를 찝찝함을 갖도록 하신다.
- 이러한 상태가 정상적이란 뜻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착각이다. 우리가 만족할 때는 역설적으로, 다 갖지 못했을 때, 조금씩 얻어질 때, 아직 얻지 못한 것이 무한이 많을 때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주권자에 자유가 제한되고 종속되어, 하나님과 관계를 아주 쪼금씩 쪼금씩 계속 맺어나가는 사람만이 영원토록 만족할 수 있다.
- 이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만족을 주는 신앙 생활이다.
마찬가지로, 본문은 자유를 말하고 있는데, 그 자유가 아무런 제한도 없는 완전한 자유가 아니라, 악마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 '종속'되는 '자유'이다.
- 다시 말하지만, 완전한 자유는 우리에게 불필요한 자유이다.
-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한 자유는 섬세하게 재정의되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참 자유는 부자 관계를 맺는 것이다.
- 부자 관계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인 주종 관계와 다르다.
- 서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 하나님과 같이 훌륭한 수단을 포기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라는 수단을 포기하기 위해서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 이렇게 자유는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렇게 참 자유가 무엇인지 본문에서 확인해보겠다.
내용 정리
31-32절: 예수님의 핵심 선포 -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알아 자유케 될 것이다.
7장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공격에 최소한의 방어만 하셨지만, 8장에서는 먼저 공격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머물러 있어야만,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아 자유케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전체이겠지만, 의미를 한정하면 문맥 상 '내가 곧 나'라는 말씀이다.
[8:28]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는 중보자라는 말씀이다.
- 이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이다.
② 머물러 있음
[37]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43]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내 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 안에 말씀을 담아두고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 즉 십자가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 자유케 된다.
③ 진리를 아는 것
[40] 그러나 지금 너희는, 너희에게 하나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말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45] 그런데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46]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진리는 지금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인데, 그 중에 특히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④ 자유케 되는 것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42]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자유는 직관적인 의미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자유롭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수님 말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자유, 즉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이 말씀을 깨닫는 것만이 생명과 죽음, 의와 불의, 옳음과 틀림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 이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자유롭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후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선포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33-36절: 자유의 의미
- 37-41절: 자유가 없는 종의 결과
- 41-47절: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원인
이러한 설명을 통해, ①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②믿음의 결과, ③믿음 없음의 결과, ④믿음 없음의 원인을 다룬다.
33-36절: 자유의 의미 - 죄의 종에서 벗어나 예수님 말씀에 머무는 것이다.
자유롭게 될 것이란 예수님 말씀은 현재 상태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현재 유대 사람들이 종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은 조상 아브라함을 근거로 종이 아니라고 반론한다.(33)
-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시조이다.
-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수 많은 강대국의 종이 되었었고, 현재도 로마에 속박된 상태다.
- 따라서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종교적, 영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이렇게 혈통을 근거로 자신의 영적 상태가 무결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반박하시는데, 방법은 종과 자유를 나누는 기준을 새로 정립하는 것이다.(34, 36)
- 유대 사람들의 기준은 '혈통'이었다.
- 하지만 예수님의 기준은 '죄'와 '아들'이다.
[34]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36]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여기서 기준이 두 가지로 제시되는데, 이 둘은 결국 하나이다. 예수님이다.
- 죄는 2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아들을 모르는 것이 죄이다.
- 예수님은 예수님을 기준을 가지고 종과 자유를 구분하였다.
죄를 짓는 사람, 즉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유대 사람들은 종이다.
- 그래서 종은 주인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 여기서 주인 집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 따라서 혈통을 근거로 자유하다고 주장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예수님을 근거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져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반면에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 여기서 아들은 원어로 'the son'이다.
- 즉, 일반적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 예수님께서 언제나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자유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6)
- 예수님만이 종을 자유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중보자시니까.(8:19)
따라서 본문에서 자유는, 예수님으로 인해, 예수님을 알고 믿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전체 과정을 뜻한다.
- 자유의 주도권도 예수님, 자유의 컨텐츠도 예수님, 자유의 결과도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관계 회복이다.
자유는 모든 인간의 지향점, 이상향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
- 그 말은, 자유라는 단어 안에 너무 많은 편견, 선입견이 뒤섞여 있다는 뜻이다.
- 그래서 본문에서 말하는 자유를 이해하기가 더 까다롭다.
- 자유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하면, 본문의 맥락이 이상하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고, 신앙을 가지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 그렇게 자유케 되어서, 결국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는 상상을 한다.
-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정의할 때 더 철저하게 본문에 근거한 해석이 필요하다.
- 본문의 유대 사람들도 그런 생각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오해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설명하는데 왜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 결론적으로, 자유는 신앙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이다.
신앙은 예수님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참 관계를 맺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리는 것이다.
- 마치 남녀간의 연애처럼 세상 전부가 흑백으로 변해버리고 상대방에게서만 빛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필요와 관심이 없어지고, 하나님께만 향하는 것이다.
-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무한히 자기 자신을 공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가지면, 내가 원하는 것이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 그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마치 짝사랑하던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었을 때, 세상 전부를 다 가진 것처럼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핵심적인 전제 조건은 사람이 세상에서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 연애를 통해 만족을 느끼려면, 한 여자만 지극히 사랑할 때인 것처럼.
즉, 모든 것을 가져서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니다.
-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서 자유케 되는 것이다.
- 그것이 신앙을 통해 얻은 자유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자유는 절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 연애의 목적은 연애를 통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연애 대상이지.
- 연애의 목적이 감정이 되면, 카사노바, 자유 뷰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계속 연애 대상을 바꾼다.
자유는 신앙의 목적이 아니다. 신앙의 부산물일 뿐이다.
-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목적이다.
- 자유는 그 목적의 수단이며 또한 결과일 뿐이다.
37-41전반절: 유대 사람들이 종인 이유 - 진리를 말해 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이렇게 자유를 정의하신 예수님은 자유 없는 종인 '너희'에게 초점을 둔다.
- 현재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다.(37, 40)
- 예수님은 이를 근거로, 유대 사람들이 자유(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종(너희 아비의 자녀)이라고 판정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37절에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39-41절에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임을 부정하신다.
-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것은 혈통을 기준으로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혈통임은 인정하신다.
- 하지만 혈통은 참 자녀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 야곱과 에서 모두 순수한 아브라함 혈통이었지만, 에서는 배제되고 야곱만 선택되었다.
이렇게 참 자녀의 기준은 혈통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 그런데 유대 사람들은 참 자녀의 기준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죽이려 했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이 참 자녀, 즉 아브라함의 자녀임을 부정하신다.
정리하면, 유대 사람들은 혈통을 기준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예수님을 기준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즉 외형적으로만 자녀일 뿐, 본질은 자녀가 아니었다.
- 이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의 기준이 혈통이 아니라는 점은 구약에서 이미 제시되었다. 유대 사람들도 마땅히 아는 바이다.
- 즉, 예수님께서 혈통을 무시하신 것은 유대 사람들조차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 따라서 유대 사람들이 성경을 정말 믿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안되었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죽이려고 했다.(40)
- 이는 단지 예수님을 부정한 것을 넘어 성경을 부정한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는 참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38, 40)
- 또한 이는 유대 사람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임의 단서가 된다.(41)
이들은 왜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을까?
- 우리 입장에서 보기에, 이들의 행동은 너무 지나쳐 보인다.
- 아무리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아무리 자신에게 중요한 혈통을 무시한다고, 아무리 자신의 신앙을 부정한다고, 굳이 죽이기까지 했어야 했나?
그 이유를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의 과욕이라 쉽게 단정한다.
-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라고 결론 짓는다.
- 과욕이 부른 참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 자신에게는 누군가를 죽일만큼의 욕심이 없다고 단정한다.
- 그만큼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 해도, 믿지 못했을망정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못 알아볼지언정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 자신에게 죄가 많지만, 예수님을 죽일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안위한다.
만약 성경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왜 죽으셨는지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 자신이 예수님을 죽일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반드시 죽어야 할 죄인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예수님 일생 전체 그리고 성경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유대 사람들의 살의가 얼마나 현실적인 감정인지 아는 것, 그래서 현 시대에도 똑같은 살의가 모든 사람에게 매 순간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도 매 순간마다 유대 사람들과 똑같은 살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이미 반복해서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크리티컬 포인트다.
- 그것을 알 때, 하나님을 죽인 살인마인 내가, 신성모독으로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 형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며 죽어야 할 합당한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 그럴 때에만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소망할 수 있다.
- 그래야 현재 인생에서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이 없어진다. 육신의 생명조차도 말이다.
- 그래야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생명조차 필요 없는, 완전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
왜 이러한 완전한 자유가 필요하냐?
- 이미 말했지만, 자유는 수단일 뿐이다. 쓰고 버리는 것이다.
- 참 관계가 유일한 목적이다. 참 관계를 위해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 참 관계에 자유가 필요하냐?
- 참 관계는 상대방에게 참된 관심을 갖는 것이다.
- 여기서 참된 관심이란, 내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 나의 경험, 가치관, 시각, 편견 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의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 이러한 관심이 아니면 참 관계가 아니다.
- 성경에서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 것도, 자신의 시각과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자신의 경험, 가치관, 시각, 편견으로부터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자신의 본질 전체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하다.
- 이 자유가 참 관계를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자유는 현실 세계에서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믿음, 생명도 필요 없다는 믿음, 십자가 죽음 부활의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 세상 전부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만 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참 관계를 맺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만,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참 기쁨과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기독교 신앙 없이 맺는 관계는 다 가짜이다.
- 주변에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가끔 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면, 그 관계는 100% 가짜이다.
- 상대에 관심이 있어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기 위해 관계 맺는 것이다.
-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 뿐이다.
- 관계가 좋아 보이는 사람은, 상대방을 적절히 이용하고 상대방에게 적절히 이용당해주기를 잘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 부부의 관계도, 너희 부부의 관계도, 우리의 관계도,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전부 서로 이용하는 가짜 관계이다. 관계가 아니다.
- 단, 우리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가짜 관계에 만족하며 서로 이용하기를 즐기고 있지만, 우리는 가짜 관계인 현재 상태를 혐오하여 가짜 관계에서 벗어나 참 관계를 소망하며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우리가 지금은 여전히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지만, 하나님 그 분 자체에 초점을 두고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소망을 예수님께서 성취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41후반-47절: 유대 사람들의 근본 - 아비가 악마이기 때문이다.
참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참 자녀가 맞다고 주장한다.
- 근거는 자신들이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염두한 사람은 다음 두 사람으로 보인다.
① 이스마엘: 아브라함의 자녀이지만, 본처 사라가 아닌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아들
-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음행으로 태어나 이스라엘 민족에서 배제되었다.
② 사마리아 사람들: 원래는 같은 혈통이었으나, 앗수르에 정복 이후 이방 혈통이 뒤섞인 사람들
- 유대 사람들은 이들에게 혈통적 자부심을 가졌으며, 이방 민족과 똑같이 개나 돼지로 취급했다.
따라서 유대 사람들의 주장은 계속해서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자신들의 아버지이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 논리는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 예수를 사랑한다.(42, 47)
② 왜냐하면 나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이다.(42)
③ 하지만 너희는 나 예수의 말을 듣지 않는다.(43)
④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악마의 자녀이다.(44)
⑤ 그런데 악마는 살인자이다.(44)
⑥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진리를 말하는 날 믿지 않는 것이다. 살인하려는 것이다.(45, 46)
⑦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악마의 자녀이다.(47)
예수님 말씀을 정리하면 한 마디로,
- 너희는 악마의 자녀이다. 그 결과로서 나를 믿지 않고 죽이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논리는 역시나 순환 논리이다.
- 믿지 않아서(원인) 악마의 자녀가 되었다고(결과) 말하지 않는다.
- 원인은 악마의 자녀이고, 결과로 믿지 않음이 생겼는데, 믿지 않음의 결과 더욱 더 악마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7:14-30에서 말했듯이, 순환 논리는 진리를 말하는데 필수적이다.
- 만약 일반적인 인과 논리라면, 믿지 않아서 악마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면, 이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을 함의하게 된다.
- 본질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다.
- 이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로 인한 사람의 본질 변화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순환 논리를 통해서, 믿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십자가로 인한 본질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은, 45절의 논리가 요상한 구절이다.
[45] 그런데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 진리를 말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은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 또 다르게 표현하면,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이었겠지만.
좀 더 세밀하게 말하면,
-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누구나 그것이 진리임을 느낀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 동시에 그 진리가 참 진리이기에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 계산한다. 무의식적으로.
- 그리고 그 영향력이 얼마나 자신이 싫어하는 것임을 직감한다. 무의식적으로.
- 그래서 그 진리를 믿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낸다. 무의식적으로,
- 이렇게 사람은 진리인지 알기 때문에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이다.
-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살인까지 불사한다.
이러한 속마음을 나는 어떻게 아냐?
-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그랬고, 믿은 이후에도 그랬다.
-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생각을 계속 반복해서 하고 있다.
- 안그러려고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 여전히 합리화하고 있다.
- 때로는 '나는 특별해, 나는 충분해!'라는 자기애로, 때로는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못났어!"라는 자기비하로 합리화한다.
- 나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는 핑계로 진리를 부정하고, 나는 '아직' 진리를 모른다는 핑계로 진리를 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 왜냐하면 진리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기 때문이다. 거짓 진리를 찾아서.
- 아이러니하게도 참 진리를 말하지 않고 거짓 진리를 말해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 물론 이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 그래서 교회는 참 예수님을 숨기고, 거짓 예수님을 전한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물론 사람들이 모인다고 다 나쁜 교회이고, 떠난다고 다 좋은 교회라는 것은 아니다.
- 많은 사람들이 떠난 우리 교회를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 목사 자질이 부족해서 떠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 교회에서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를 목사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전부 진리 탓을 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리가 생각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 말했듯이, 진리는 오히려 혐오스러운 것이다. 살의를 불러 일으킬만큼.
- 진리의 매력 뿐만 아니라 진리의 혐오스러움을 알아야, 진리를 올바로 아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혐오스러움 때문에, 예수님은 8장 끝에 날아오는 돌을 피해 도망가야만 했고,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되는 것이다.
주제
① 자유에 대한 망상
자유라는 단어가 가진 마력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차분히 따져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② 그로 인한 믿음에 대한 오해
사람들은 믿으면 자유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성경은 분명히 믿음이 자유를 준다고 말한다.
- 하지만 그 자유는 사람이 생각하는 자유가 아니다.
- 성경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자유를 빼앗기는 자유이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
- 즉, 사람들은 하나님과 끊어지기 위해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③ 오해의 결과 - 살인
자유를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 자유를 선포하신다.
- 참 자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거짓 자유를 빼앗으신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유인에서 종으로 만드시는 예수님께 적개심을 품고, 살의를 갖고, 죽인다.
-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대상을 죽이는 것은 합당한 반응이다. 정당 방위, 생존 본능이다.
-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일은 200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오늘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다.
④ 오해의 근본 원인 - 악마의 자녀
자유를 오해하고, 참 자유를 거부하며, 참 자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단지 결과이다.
근본 원인은 우리의 본질이다. 모든 사람이 악마의 자녀,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이다.(엡 2:3)
원래 이렇게 지어졌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⑤ 참 믿음 - 예수님 뿐
우리의 존재 본질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 속에서 절망해야만, 한 줄기 빛이신 예수님이 그제서야 보인다.
- 현실 직시, 절망 없이 본 예수님은 100% 우상이다. 거짓 자유를 주는 우상일 뿐이다.
죽음 부활을 통한 본질 변화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그제서야 이해한다.
- 거짓 자유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지, 참 자유가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래야 모든 세상이 암흑으로 보이고, 예수님만 보인다. 예수님만 믿는다.
이것만이 참 믿음이다.
⑥ 참 믿음의 결과 - 참 자유
세상 어떤 것에 미혹되지 않고, 마음껏 자유롭게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 참 자유이다.
이 자유만이 영원토록 자유롭게 한다.
이것만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것이다.
결론
유대 사람들이 믿지 못한 것은 결국 자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에 투신하지 못하는 이유도 자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때, 신앙에 투신하여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참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할 대상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거짓 자유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을 뽑고 내려올 수 있는 거짓 자유와 싸워 이기시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처참한 죽음을 '자유롭게' 맞이하신 것이다.
우리의 소망도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거짓 자유에서 벗어나, 구질구질하게 예수님께 매여 살 수 있는 자유임을 기억하자.
이 자유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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