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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논문 리뷰 - 4:43-45의 논리적 연결

정창욱, 요한복음 4:43-45의 논리적 연결(44절, 45절의 두 연결사 번역을 중심으로), 대한성서공회 성경원문연구, 2008.


들어가는 말

43 이틀 뒤에 예수께서는 거기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셨다.

44 [γὰρ] (예수께서 친히 밝히시기를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셨다.)

45 [οὖν] 예수께서 갈릴리에 도착하시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였다. 그들도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께서 거기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원어에는 44, 45절 앞에 접속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가르]는 for, [운]은 therefore로 번역한다.

한글 번역에는 이 접속사를 다 제거했지만, 영어 번역에는 간혹 있다.

번역본

[가르]

[운]

번역본

[가르]

[운]

번역본

[가르]

[운]

NIV

now

-

KJB

for

then

NASB

for

then

ESV

for

so

NRSV

for

-

MSG

now

so

그런데, AMP 번역본은 although - however로 번역했다.

이렇게 번역이 다양하다. 이는 곧 본문 자체가 모호하다는 의미이다.


본문의 논리적 뒤틀림

접속사를 가장 기본 의미로 번역하면, 본문의 흐름이 이상하다.

- 43: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셨다.

- 44: 왜냐하면, 그 이유는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 45: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다.

문제는 두 가지다.

① 43절과 44절의 관계: 자기 고향에서 존경 받지 못하리라는 이유 때문에 갈릴리로 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② 44절과 45절의 관계: 예수님이 고향에서 존경 받지 못한 것 때문에, 갈릴리에서 환영을 받으셨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그래서 다양한 해결 방안들을 학자들이 제시했다.


제기된 해결 방안

① '고향'이란 단어의 재정의

예수님의 고향을 갈릴리가 아닌 예수살렘이나 유다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그곳이 영적인 의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 뜻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셨는데(43), 그 이유는 유다나 예루살렘에서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다.

이것의 문제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출신이 갈릴리라고 나온다는 것이다.(1:46, 2:1, 7:42, 19:19)

② 갈릴리 사람들의 환영에 대한 의심

일단 44절의 [가르]를 진정으로(indeed)로 번역하여,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환영받지 못할 것을 인정한다.

- 그 근거로, 45절에서 갈릴리 사람들은 기적에 근거한 신앙을 가졌음으로 진정성이 없는 것이며, 이는 결국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 2:23-25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었으나, 그 믿음은 거짓이었다고 고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의 문제는, [가르]가 '진정으로'로 번역된 경우는 없다는 것과, 45절의 환영에 진정성이 없다는 근거가 45절에는 없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한계가 있다. 따라서 다양한 성경 구절을 통해 접속사 자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가르]의 의미

성경에서 '왜냐하면(for)' 혹은 '그런데(now)'로 번역된다. 

그런데, [운]을 '그러므로'로 번역하면, 둘 중에 어느 것으로 번역해도 논리적인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

따라서 [운]에 대한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운]을 '그러나'로 번역할 때 더 자연스럽다.


[운]의 용법 연구

① 요한복음 9:18

17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18 [운] 유대 사람들은, 그가 전에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마침내 그 부모를 불러다가

한글 성경에서는 [운]을 번역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많은 영어 성경에서는 '그러나'로 번역한다.

② 요한복음 11:6

4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5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런데[운]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그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

개역개정은 번역을 하지 않았고, 새번역은 '그런데', 공동번역은 '그러나'로 번역했다. 일부 영어 성경도 'yet'으로 번역했다.

③ 사도행전 23:21

20 그가 대답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바울에 관해서 좀더 정확하게 캐물어 보려는 척하면서, 내일 그를 의회로 끌어내어 오게 해달라고 대장님께 청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21 그러니[운] 대장님은 그들의 말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마흔 명 남짓 매복하여 바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준비를 다 하고, 대장님에게서 승낙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그러나'로 번역한다.

④ 로마서 10:14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4 그런데[운]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역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그러나'로 번역한다.


결론

[가르]는 '그런데'로, [운]은 '그러나'로 번역하는 것이 성경 용법 상으로도, 논리적 흐름 상으로도 적절하다.

- 의미는,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로 가시면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러 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환영에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예수님의 예언은 부정되는 듯 보였지만, 나중에는 사실로 확인된다.

따라서 [운]을 '그러나'로 번역할 때 문장 사이의 논리 연결도 자연스럽고, 전체 주제에도 위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