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개관
절 |
등장 인물 |
내용 |
27 |
예수님, 제자들 |
음식을 구해 돌아온 제자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눈 예수님을 보고 놀라지만, 묻지는 않는다. |
28-30 |
여인, 동네 사람들 |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자,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간다. |
31-33 |
예수님, 제자들 |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가져온 음식을 거절하시자, 제자들은 당황해한다. |
34-38 |
예수님, 제자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증언자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
39-41 |
예수님, 동네 사람들 |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여 교제하였다. |
42 |
동네 사람들, 여인 |
동네 사람들은 여인을 통해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예수님과 교제하였다고 말한다. |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양분된다.
①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
②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으며, 증언하기까지 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동네 사람들
- 이렇게 본문은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을 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대비 사이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다.
- 역시나 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본문의 핵심일 것이다.
이번 본문에서도 제자들, 여인, 동네 사람들, 예수님의 입장으로 나눠서 설명하겠다.
내용 정리
제자들 입장(27, 31-33절)
① 27절: 놀랐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는 제자들
제자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많이 놀랐다.
- 여자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탈무드)
- 여자, 심지어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시간 낭비이며, 지옥에 떨어지게 할 수 있는 큰 악이다.
- 딸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은 매춘하게 하는 것만큼 부적절한 것이다.
제자들이 놀란 이유는 율법과 전통 때문이다.
- 이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던 상황과 똑같다.
- 율법과 전통을 깨시는 예수님 때문에 여인이 당황했었던 것처럼, 제자들도 당황했다.
하지만 여인과 달리 제자들은 묻지 않는다.
- 묻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로 상상 가능하다. 여인에 대한 배려, 예수님에 대한 존경 등.
- 하지만 본문은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질문하지 않는 모습 자체를 부각하고 있다.
왜 제자들의 질문 없음을 부각했을까?
- 먼저 단순하게, 질문하는 것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다.
- 모르는 것, 낯선 것, 이해 안되는 것,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있으면 언제나 즉시 질문하자.
- 내가 다 아니까 다 물어보라! 가 아니라, 함께 모르는 것을 나누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자.
- 질문을 해야, 서로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있고, 또 거꾸로 설교하는 내가 무엇을 잘못 말했는지, 무엇을 모르고 말했는지 나도 알 수 있다.
- 이를 통해, 우리가 서로 알 수 있고, 서로 이해할 수 있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
질문하지 않는 문제의 본질은, 결국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 모르는게 들킬까봐 부끄러워서, 상대방에게 폐가 될까봐, 내가 오해했을까봐, 이미 안다고 생각하니까 등.
-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근원은 나는 이미 무지한 사람이고, 이미 상대방에게 폐가 되며, 잘 오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즉,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나에게 '나 없음', 나의 무지, 피조물 됨, 육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황당한 행동을 하시는 예수님께 제자들은 질문하지 않았고, 니고데모도 질문하지 않고, 찬양하는 시늉만 했다.
-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영생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 서로 많이 질문하자. 또한 내가 너무 많이 질문해도 이해해달라.
- 관심 없으면 질문 안한다. 질문 안하는 것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야기 잘 듣고 질문하자!
② 31-33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참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먹을 양식으로 오해한다.
- 이는 마치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배 속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오해한 것, 그리고 여인이 생수를 우물에서 퍼마시는 물로 오해했던 것과 같다.
- 여인은 결국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알게 되었지만, 니고데모와 제자들은 여전히 오해 속에 있다.
- 이렇게 본문은 제자들을 무지하고 믿음 없음을 상징하는 인물로 계속 묘사한다.
여인의 입장(28-29절)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갔다.
- 물동이는 야곱의 우물을 마시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상징한다.
-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 율법의 한계에서 벗어나, 율법을 초월해 영생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 이는 믿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증언이다.
- 1장에서 침례 요한도, 제자들도 예수님을 증언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갑자기 전도해야한다는 부담감이 불쑥 생긴다.
- 전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
-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배운 전도는 현실적이지 않다.
- 노방 전도도 현실적이지 않고, 신앙 생활을 오래 하면 주변에 전도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어지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전도보다 증언을 말한다.
- 전도는 설득을 해야하는 상대방에 초점이 있다면, 증언은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나에게 초점이 있다.
- 예수님이 전부고 그 외에는 아무 가치 없음을 믿는 믿음, 그리고 믿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회개도 증언이다.
- 상대방이 신앙에 매력을 느끼도록 설득하는 전도는 어려운 일이지만, 상대방이 이해하건 못하건, 삶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나의 신앙을 말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 증언은 전도처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직장, 가족)이 아니어도 할 수 있으며, 한번 전도했다가 실패했던 사람(가족, 친한 친구)에게도 반복해서 할 수 있다.
- 삶에서 생기는 고민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니까.
따라서 우리도 증언하자!
동네 사람들 입장(30, 39-41절, 42절)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여인의 증언을 듣고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 동네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정보는 없다.
- 물론, 여인의 말을 듣고 바로 예수님께 갔던 것으로 보아, 동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을 것이다.
- 따라서 동네 사람들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단순한 펙트다.
- 물론 이 펙트도 중요하다. 복음이 혈통을 초월하여 전해졌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좀 특별한 것은 42절이다.
-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에 굳이 여인을 배제하려는 태도이다.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믿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 여인이 증언은 했지만, 그 이후 여인의 역할은 사라졌다.
- 이는 마치 침례 요한 같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특수성을 갖지만, 증언만 하고 '쇠해야 하는' 제한성을 갖는다.
- 이렇게 본문은 증언자의 제한성, 즉 배제될 운명을 강조한다.
또한, 예수님과 믿는 사람과의 직접적인 관계도 강조한다.
- 예수님과의 직접적, 주체적 관계만이 신앙이다. 예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것도 있으면 안된다. 증언자, 설교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강조는 성도와 목사 모두에게 경고한다.
- 성도는 설교 듣고, 기도 받고, 돌봄 받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한다.
- 예수님과 직접적, 주체적 관계 안에서 스스로 설교하고, 스스로 기도하고, 스스로 돌봐야 한다.
- 그래서 우리 교회는 최대한 이렇게 하려고 한다.
- 그리고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 어디 와서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한다.
- 이는 예수님과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사탄적 행동이다. 무당이나 하는 짓이다.
- 반면에 축하해주러, 놀러, 구경하러, 교제하러는 누구에게든 간다.
목사의 목표는 요한과 같이, 여인과 같이 쇠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
- 목사 때문에 예수님 믿게 되었다는 소리는 사탄적인 고백이다.
- 성도가 예수님과 직접 관계를 맺고, 목사의 역할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
- 목사가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서서 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한 자신도 지옥에 떨어지고, 성도까지 지옥에 보내는 최악의 삶이다.
예수님의 가르침(34-38절)
본문 전체의 핵심이다.
키워드는 '양식'이다.
- 양식은 요한복음 전체, 특히 6장에서 중요한 단어이다. 6장에서 양식은 3번, 빵은 21번이나 나온다.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 33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34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 50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 55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대략 양식의 뜻은 생수와 같다.
-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도 하고, 예수님 자체기도 하다.
-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 이번 본문은 하나님의 뜻과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34)
-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6:29)
- 따라서 양식은 예수님을 믿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양식 자체에 대한 설명은 6장으로 미루고, 이번 본문은 <양식을 얻기 위해 농사를 짓는 사람>에 초점을 둔다.
양식, 즉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파종과 추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 파종하는 사람: 예수님을 증언하였지만, 믿음에까지는 이르게 하지 못한 사람
- 추수하는 사람: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한 사람
- 비유가 가진 전제: 파종, 즉 <예수님을 증언만 하는 사람>과 추수, 즉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사람>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파종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추수만 한다.
- 속담은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① 속담(35-36절): 파종과 추수의 연결성 강조
- 현실에서 파종과 추수 사이에는 일정 기간이 필요하다. 단절되어 있다.
- 파종한 사람은 수고만 하고 열매를 얻지 못하지만, 추수하는 사람은 파종하지 않고 열매 얻는 기쁨을 누린다.
- 하지만 예수님은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 방금 여인이 예수님을 증언을 했는데, 이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 연결성이 강조하는 것은 '함께 기뻐함'이다.(36) 특히 파종하는 사람이 얻는 기쁨이다.
- 함께 기뻐함의 핵심은, 추수하는 사람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다.
- 파종을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에 추수도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만 기뻐하셔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추수하도록 하셔서 사람에게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 현실에서는 파종한 사람이 수확의 기쁨을 얻지 못한다.
- 하지만 천국에서는 파종하는 사람도 기쁨을 얻는다.
- 따라서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기만 하고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사람도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 핵심은, 추수를 통해 사람도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핵심의 전제는, 원래 사람은 파종하지 않았고, 추수에 참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이러한 일은 현실에 정말 많다. 대표적으로 침례 요한이 그렇고, 따지고보면 예수님도 그렇다. 고생만 하고 결실을 보지 못했다.
- 우리도 예수님 바르게 증언하려고 쌩고생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실은 없다.
- 하지만, 이런 우리에게도 천국에서 누릴 기쁨이 있다고 위로, 격려하는 말씀이다.
② 속담(37-38절): 파종과 추수의 단절성
- 현실의 불합리 때문에, 파종하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 다르다.
- 그래서 파종하는 사람은 수고만 하고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하지만, 추수하는 사람은 불노소득을 얻는다.
- 예수님은 이 원리를 긍정하면서, 추수하는 사람이 거둔 결실은 불노소득임을 강조한다.
- 이는 추수하는 사람은 파종한 사람의 수고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 추수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파종하신 것을 거저 수확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따라서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도록 한 사람은 자신의 수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수고 때문인 것이며, 이전에 예수님을 전하기만 하고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 여인이 예수님을 믿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인의 수고가 아니다. 이전에 전도했던 많은 사람들 때문이다.
- 우리가 정말 많이 하는 착각이다. 내가 전도해서 예수님 믿으면 내가 잘해서 그런것 같다.
- 착각하지 말고, 겸손하자.
정리하면, ① 열심히 전도했지만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천국에서는 기쁨이 있을 것이며, ② 전도해서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 결실은 불로소득이며 자신보다 앞선 전도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
① 전통, 율법, 상식, 경험, 가치관 등, 이런 것들을 한 마디로 하면 '나'인데, 제자들과 같이 '나'에 매여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쌓은 경험과, 그러한 경험을 쌓도록 한 환경, 율법, 전통과, 그것을 토대로 한 상식과 가치관 전부를 부정하신다.
-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다. 자살보다.
과학을 사용해서 설명하면, 뇌는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왜냐하면 사용 에너지가 너무 커서.(몸 전체의 25%)
- 이는 다르게 말하면, 뇌는 가능하면 최소로만 동작하려고 한다. 왠만하면 동작하지 않으려 한다. 에너지를 아끼려고.
- 뇌가 에너지를 아껴야 몸 전체가 살 수 있다. 생존 본능이다.
- 최소로만 동작하는 방법은, 문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상황을 새롭게 분석하고 판단하지 않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이전에 분석하고 판단했던 결과를 가져와서 그대로 한다. 이것을 경험, 상식, 가치관, 편견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범위를 늘리는 것이다.
-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덧셈을 배운다는 것은, 1+1=2라는 것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다른 말로, 배움이란 편견을 더 많이 쌓아서, 뇌의 동작은 최소로 하고 더 많은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 따라서 편견은 생존 본능이다. 뇌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배우는 것은 다르다.
- 평생 배웠던 모든 것을 전부 다 까먹는 것이다. 경험, 상식, 가치관, 편견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 문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전에 판단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새롭게 분석하고 새롭게 판단하는 것이다.
- 그래서 모든 상황을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이라 가정하고, 아무런 편견 없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이는 뇌를 굉장히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뇌의 동작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뇌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 이는 생존 본능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 자살이라는 선택은, 뇌로 가는 에너지를 완전히 차단하는 최고 효율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쉽다.
- 하지만 신앙은 뇌에 가장 큰 부하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② '나'를 포기한 사람, 그래서 편견이 없는 사람이 가장 잘 하는 것은 질문이다.
그래서 아기들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질문만이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질문만이 예수님을 이해하게 해주고, 서로를 이해하게 해주어,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해준다.
③ 전도하기보다 증언하려 힘쓰자.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에 초점을 두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에 초점을 두면, 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
- 먼저 가장 편한 가족에게 증언하자. 또 교회에서 증언하자. 이것이 교제이다.
- 그리고 가장 쉬운 나 자신에게 증언하자. 이것이 기도이다.
- 이것이 익숙해지면, 그 다음에 범위를 차츰 넓혀가자. 그것이 전도가 될 것이다.
전도는 말 잘하는 사람이 잘 하지만, 내 이야기를 하는 증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④ 신앙은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것이다.
그 사이에 어떤 것도 없어야 한다. 목사도, 예배 형식도, 특별한 경험도.
내가 직접 설교하고, 내가 직접 기도하자.
- 나와 예수님 사이에 하나라도 끼어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우상이 되고, 그 우상과 함께 지옥 불에 떨어진다.
⑤ 예수님을 증언했지만 전도 못했다고 실망하지 말자. 반드시 기쁨이 있을 것이다.
⑥ 전도했다고 교만하지 말자. 나 때문이 아니라 이전의 수 많은 증언자들의 수고 덕분이다.
결론
신앙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 대충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 세상의 상식과 편견에 맞서는 것이다. 이는 세상 전체, 인류 전부와 싸우는 것과 같다.
우리 뇌는 끊임없이 편견을 만든다. 그리고 편견은 결국 우상이 된다.
- 그러한 뇌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입하고 뇌를 동작시켜서, 편견과 우상의 허상을 드러내야 한다.
그 방법은 질문이다.
- 그렇게 끊임없이 싸울 때에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 싸움을 멈추는 순간, 우리의 뇌는 우리를 우상 속에 파 묻을 것이다.
- 그 곳이 지옥이다.
그러니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우리 뇌와 싸워 이기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자.
그리고 전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증언부터 시작하자.
-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증언하자.
- 그 증언이 쌓여서 전도가 되는 것이다.
- 증언 없이 전도가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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