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전체 개관
구절 |
등장 인물 |
주제 |
설명 |
1-6 |
|
배경 |
|
7-26 |
예수님 사마리아 여인 |
예수님의 정체성 |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여인을 통해 올바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
27 |
예수님 여인 |
제자들의 편견 |
여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
28-30 |
여인 동네 사람들 |
제자의 정체성 |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반응한 여인을 통해 제자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
31-38 |
예수님 제자 |
제자의 정체성 |
무지한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제자의 정체성을 가르치신다. |
39-42 |
예수님 동네 사람들 |
동네 사람들의 반응 |
동네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제시한다. |
예수님, 사마리아 여인, 제자, 동네 사람들까지 등장인물이 참 많다.
-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다각도로 관계 맺는다. 총 5가지 관계를 맺는다. 각 관계마다 새로운 주제를 제시한다.
메인 주제는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제자의 정체성이다.
- 그것을 보조하는 여러 보조 주제가 있는데, 제자가 되기 위한 구원과 영생, 왜곡된 성전 인식을 통해 참 예배, 믿음의 올바른 반응인 증언, 전도 태도를 제시한다.
따라서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① 각 단락의 보조 주제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과, ② 그 주제들을 알맞게 연결시켜 메인 주제를 알아내는 것이다.
본문 설명을 준비하는데 어려웠던 점 두 가지
① 본문 이야기가 긴데, 이야기 안에 다양한 주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 주제를 모두 찾아내고, 적절하게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 주제들을 바르게 연결하여 하나의 틀로 조직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 메인 주제는 보조 주제들을 조직적으로 연결해야 선명해기지 때문이다.
- 구슬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그런데, 과연 여러 주제들을 어렵게 연결, 조직화 해야하냐는 의문이 있다.
- 저자가 정말 단순한 이야기 하나에 그렇게 많은 주제를 의도적으로 설계하여 조직적으로 배치했을까?
- 성경의 치밀함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있다.
- 성경의 치밀함을 믿고 그것을 밝히려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차별점 중 하나다.
- 반면, 다른 교회는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지만, 정작 성경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치밀함을 여러번 설명했지만,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 물론 나도 의심할 때가 있다. 하지만 가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확신이 있어서 포기하기 힘들다.
- 설명으로는 한계가 있다. 스스로 느끼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나의 경험을 빌어 얘기하면, 아무런 연관성 없이 이어져 있었던 본문들이 절묘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낄 때, 그리고 그 연결을 통해 개별적인 본문으로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깨달을 때, 게다가 새롭게 깨닫게 된 개념이 성경 전체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때, 성경의 치밀함을 인정하게 된다.
- 예를 들어, 매트릭스 같은 영화만 봐도, 여러 번 보면 볼 수록 알지 못했던 메시지를 보게 된다.
- 초반의 의미없어 보이는 장면이 후반의 장면과 연결되어 의미가 생긴다. 장면들이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상업 영화 따위도 그런 치밀함을 갖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이유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성경 본문에서도 연결성을 고민하게 된다.
- 물론 모든 본문이 다 그렇게 연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현대 글에서 경험하는 치밀함의 수준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의 치밀함이 있을 것이다.
- 이는 단지 종교 경전에 대한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고대 문서가 현대 문서보다 전반적으로 더 높은 치밀함을 갖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한복음에 이렇게 주제가 복잡하면서도 응축되어 나올 수 있는 이유를 상상해보면 다음과 같다.
- 사도 요한은 당연히 일반 성도도 아니고, 일반적인 목사도 아니며, 앉아서 글만 쓰는 작가는 더욱 아니었다.
- 수 많은 사람의 공격 속에서 증언 배틀을 하며 50년 이상을 버텨온 베테랑이다.
- 약간 비하하면, 닳고 닳은 말쟁이다.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앉아서 고민해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 대중 앞에서 수천번도 더 말하면서, 수 많은 사람에게 반박, 공격 당하면서, 수십년 동안 수정에 수정을 더한 것을, 글로 간결하게 옮기기 위해, 살을 완전히 발라내어 뼈대만 남겨놓은 것이다.
- 종이를 아끼기 위해 최대한 간결하게, 최대한 함축적으로 썼을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응축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그것을 손상 없이 해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욱 더 정교한 시각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현대에 쓰여진 글을 읽을 때보다 더 높은 치밀함을 염두하여 더 높은 집중력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② 해석서의 설명이 미흡했다.
해석서들은 두 가지 미흡함을 가지고 있었다.
i) 본문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이야기 안에 있는 주제를 조직화하지 않고 끝내버렸다.
-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구슬 이야기만 실컷 하고 끝낸다.
- 구슬을 채굴해서 세공한 후 목걸이를 만들어 팔면 훨씬 돈을 많이 벌텐데, 구슬만 헐 값에 판다.(어리석은 채굴업자)
ii) 본문 이야기는 대충 훑고, 주제를 조직화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 조직화를 위해 본문을 조금씩 왜곡한다.
- 마치 이쁜 목걸이를 만들겠다고 주먹만한 보석을 손톱만하게 자르는 꼴이다. 제 가치를 잃는다.(어리석은 세공업자)
올바른 해석은 이야기 속에 있는 보석을 있는 그대로 채굴하여, 그것 그대로 목걸이를 만드는 것이다.
- 내 눈에 이쁜 목걸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목걸이를 만드는 것이다.
- 애초에 저자가 의도한 목걸이를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다.
- 본문 이야기에 집중하면서도, 본문의 주제를 잘 조직화하는 것이다.
- 이러한 해석서의 미흡함을 보완하려고 노력했는데, 나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너무 어려웠다.
본문 해석 방법
- 이번 본문은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 부분만이다.
- 구슬과 목걸리를 둘 다 잘 보기 위해, 예수님과 여인의 입장을 나눠서 설명했다.
내용 정리
1) 여인 입장
표면적 내용
여인은 예수님께 세 차례 질문을 한다.
질문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절 |
상반되는 키워드 |
제한된 인식 |
|
9 |
사마리아 |
유대 |
민족, 혈통 |
여자 |
남자 |
성별, 율법 |
|
11-12 |
두레박 |
당신 |
물리적 한계 |
야곱 |
당신 |
이스라엘 전통 |
|
20 |
이 산 |
예루살렘 |
장소 |
- 이러한 질문은 여인이 율법과 전통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인이 이러한 질문을 한 이유
-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이 여인의 가치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 여인의 가치관에, 유대인 남자는 이방 여인에게 말을 걸면 안되고, 이스라엘 민족의 근원인 야곱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으며, 분명히 예배는 한 장소에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제한을 초월하여 말씀하셨고, 그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움 속에서 비판적인 질문을 한 것이다.
내면적 내용: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여인에 대한 기존 입장: 창녀
- 육체적, 성적, 정서적 결핍을 가진 부도덕한 사람
- 과거에도 불만족으로 5번이나 남편을 바꿨고, 현재 남편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 그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정오, 즉 가장 더울 때 물을 길으러 오는 사람
이에 대한 비판
- 여자는 자의로 이혼을 할 수 없다. 이혼은 남자만 할 수 있다.
- 게다가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이혼해주지 않는다. 그냥 버린다.
- 버려진 여자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 그런데, 여자에게 아무런 흠이 없어서 최대한 배려를 해줄 때, 남자는 이혼 증서를 써준다.
- 이는 이혼 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결혼하여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이렇게 이혼은 아무 여자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그 정도로 부정한 여인이라면 돌 맞아 죽었어야 마땅하다.
- 따라서 여자가 죽지 않고 5번 이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새로운 제안
- 여자가 6명의 남편을 가질 수 있는 현실적인 상황은 형사취수제 밖에 없다.
- 이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율법이다.
- 이는 혈통도 잇고, 또한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 성경에 유다와 다말 이야기, 룻과 보아스 이야기, 사두개인과의 부활 논쟁(마 22)의 예가 있다.
여인은 5번이나 남편이 죽었으나, 율법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형제들과 5번이나 새로 결혼한 것이다.
- 그만큼 율법을 바르게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삶은 더욱 비참해진 비운의 여인이다.
- 그랬기 때문에, 야곱에 대한 칭송, 예배 장소에 대한 고민을 마음 속 깊이 했던 것이다.
게다가 여인의 전도에 동네 사람들이 반응을 하려면, 동네 사람들이 여인을 적어도 '사람'으로는 취급해야 한다.
- '창녀'는 사람 취급 받지 못했다. 아마도 여인은 '재수 없는 놈' 정도의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여인은 부도덕의 상징이 아니라, 율법의 상징이다.
- 율법을 위해 평생을 애썼지만, 율법의 한계에 정면으로 맞닥뜨린 여인이다.
나의 생각
- 새로운 제안이 요한복음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 요한복음은 개인의 죄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 예배에 대해 질문한 사람을 욕정에 빠진 사람보다 율법을 위해 애쓰는 사람으로 보는 것 더 적절하다.
게다가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완전히 달라진다.
- 부도덕한 여인은 우리와 동일시하기가 어렵다.
- 물론 우리 안에도 부도덕, 욕정이 있지만, 표출하지 않는다. 5번이나 이혼하는 것은 남 일 같다. 감정이입이 안된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기 위해, 신앙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아무런 소득 없어 허망해진 여인의 모습은 우리와 같다.
- 여인은 율법의 피해자이다. 우리가 기존 교회의 피해자인 것처럼.
- 우리는 신앙을 위해 교회에 헌신했지만, 교회는 우리를 이용하기만 하고, 소진되면 버린다.
- 따라서 여인을 율법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 현재 삶에 더 와닿는 메시지를 준다.
이렇게 볼 때, 여인은 니고데모와 같이 율법과 전통의 한계 속에 있는 사람을 상징한다.
2) 예수님 입장
표면적 내용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
예수님 |
여인 |
설명 |
7: 물 좀 줘! |
9: 너 뭐야? |
예수님에 대한 관심 유발, 물이라는 키워드 제시 |
10: 생수 주는 사람. 10: 그런데, 물 달래야 할 사람은 너야! (왜냐하면 내 물은 마르지 않으니까!) |
11, 12: 니가 어떻게 줘? | 예수님의 소개1 - 생수 주는 사람 |
13, 14 내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야. |
15: 있으면 줘보시지! (그런 물을 니가 어떻게 주냐고!) |
예수님의 소개2 - 생수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 |
16, 18: 너 남편 6명이지! 난 다 알아! (그러니 물도 줄 수 있어!) |
20: 그래? 그럼 어디서 예배 드려야 해? |
여인의 상태 간파를 통한 예수님의 능력 증명 |
21-24, 26: 나한테 드려! |
(그래!) |
생수를 얻는 방법 제시 - 예수님을 통해 |
대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① 예수님의 정체: 예수님은 누구냐? 목마르지 않는 생수 주는 사람이다.
-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물을 달라는 요청을 통해, 자신이 물 주는 사람임을 알게 하신다.
-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의 상태를 간파하시는 능력을 보이심으로 자신에게 물 주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신다.
② 생수 얻는 방법: 생수를 어떻게 얻냐? 예수님을 통한 예배로 얻는다.
- 예수님은 여인의 목 마름을 드러내심을 통해, 물 얻는 방법을 제시하신다.
- 예수님은 여인의 상태 간파를 통해, 여인에게 정말 생수가 필요함을 자각하게 하신다.
- 그러자 여인은 자신의 갈급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자 갈급함의 원인이 되는 예배에 대해 질문한다.
- 결국, 물 얻는 방법은 율법을 통한 예배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예배임을 가르쳐주신다.
내면적 내용
그림으로 보면,
여인의 현재 상태는, 야곱을 근원으로 하는 우물에 의지해 살고 있다.
- 우물은 매일 반복해서 퍼야하는 것으로서, 당장은 해갈되지만, 다시 목마른 한계가 있다.
- 이는 마치 여인이 매년 반복해서 산에서 드리는 예배와 같으며, 반복해서 남편을 바꾸는 모습과 같다.
- 우물, 산에서 예배, 6명의 남편은 야곱으로 상징되는 율법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근원으로 하는 생수를 제시하신다.
- 생수는 한 번 마시면,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는 물이다.
- 생수를 마시는 것의 의미는, 매년 드리는 예배가 아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즉 예수님을 통해 드리는 예배이다.
- 따라서 야곱, 즉 율법이 아닌 예수님을 통한 예배만이 진정한 채워짐을 줄 수 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21-24절의 상세 설명
- 본문을 보면, 21, 23절은 '때'에 관해, 22절은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24절은 23절의 반복이다.
- 따라서 22절을 빼면, 21, 23, 24절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오히려 22절이 끼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원문을 보면 더 그렇다.
21 believe (to me), woman ___ that hour comes ___ ___ when neither (in the mountain this) nor (in Jerusalem) you will worship (to the father) |
21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___ 그 때가 온다. ___ ___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혹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 |
___ 23 buthour comes and (now) is ___ ___ when the true worshippers will worship (to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___ ___ ___ also, for, the father such seeks those worship him ___ ___ ___ 24 spirit the one God ___ ___ ___ and those worshipping him (in spirit and truth) it is necessary to worship |
___ 23 오히려그 때가 온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다. ___ ___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___ ___ ___ 왜냐하면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___ ___ ___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___ ___ ___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
- 21절과 23절에 hour comes when~(그 때가 온다)이 반복해서 believe(믿어라)에 연결되는 것이 보인다.
따라서, 이 구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때가 온다.
- 요한복음에서 '때'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의 때이다.
그런데,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 예수님의 죽음 전이지만, 이미 지금도 예수님의 역할이 실현되고 있으니까 그 때는 이미 온 것이기도 하다.
그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냐? 참 예배가 드려진다.
참 예배는 무엇이냐?
① 율법에 근거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 예배이다. 율법을 초월한 예배이다.
②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는 마땅히 영으로 드려야 한다. 육으로는 안된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이냐?
- 이것이 핵심 질문이다. 하지만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다. 골치 아프다.
일단, 영과 진리가 뭐냐?
- 영은 육과 반대되는 것으로, 3장 6절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육에서 난 것은 육, 영에서 난 것은 영>에서의 영이다.
- 이는 하나님 나라로서, 영만 들어갈 수 있는, 육은 반드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 게다가, 이 세상에서 영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말했었다.(3:13)
- 진리도 1:14, 17에서 예수님을 의미한다.
- 따라서 영과 진리는 결국 예수님이다.
그럼, 율법을 초월하여 예수님으로 드리는 예배는 뭐냐?
- 이것도 니고데모 이야기를 근거해서 생각해보자.
- 하나님 나라는 영이기 때문에 영으로 거듭나야 들어간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거듭난 유일한 사람이다.
- 따라서 사람은 스스로 거듭날 수 없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에 속한 율법으로는 예배드릴 수 없다.
- 오직 유일한 영과 진리시며, 유일하게 거듭나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
- 따라서 장소, 전통, 율법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게 뭐냐? 사실 이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일텐데, 아직 답하지 않는다. 더 기다려보다.
-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거듭남도, 예배도 불가능하며, 예수님을 통해서만 예배드릴 수 있고, 그런 예배를 통해서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생수를 마실 수 있다.
하지만, 22절이 그 사이에 불쑥 들어와서,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난다고 말한다.
- 즉, 참 예배는 율법, 전통, 이스라엘을 초월한 것이지만,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계승하는 것이라는 것도 지적한다.
- 이는 2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초월하신 뿐만 아니라 계승하신다는 구절을 통해 이미 확인한 것이다.
주제
율법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만이 참 예배이다.
- 그 예배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예수님 없이 율법과 전통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당장은 해갈되지만 또 다시 목마르다.
- 여인은 평생을 율법과 전통에 헌신하여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목이 말라 물을 길으러 나오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었으며, 예수님으로 예배를 드려,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었다.
결론
아직 세부적인 결론이 다 나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영원한 목마름을 해갈시켜주실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심을 기억하자.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자. 얼마나 이 여인 같이 살았는지.
- 교회에서 하라는 성경 공부, 전도, 기도회, 봉사 활동 다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목마르다.
-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또 다시 물을 길으러 나간다. 율법과 전통으로, 네이버로, 유튜브로, 쇼핑으로, 돈으로, 명예로, 세상으로.
- 교회에 헌신하느라, 돈도, 몸도, 마음도 다 소진되고, 주변 사람들의 수근거림만 남았다.
- 주변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처럼 위로와 정죄를 섞어서 건내지만, 이제 그런 할 말조차도 떨어졌다.
- 더 이상 신앙에 헌신할 힘은 없지만, 포기하지도 못하고 근근히 이어가기만 하고 있다.
- 하지만, 마음 속에는 신앙에 대한 갈급함이 여전하며, 신앙 생활은 무엇인지,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어떻게 성경 공부, 전도, 기도를 해야 나아질 수 있을지 고민이 가득하다.
이런 사람이 지금도 교회에 많다.
- 우리가 그런 사람 아닌가?
- 신앙에 대한 진지한 마음으로 교회가 하라는 것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고 했다.
- 누구는 아침엔 성가대, 아동부 교사, 오후엔 청년부 리더로, 주중에도 성경 공부, 전도, 기도회로 애썼다.
- 뭔가를 할 때는 그 안에서 느끼는 성취감도 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도 있고, 적어도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괜찮지만, 돌아보면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이 목마름, 갈급함이 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 열심과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 더 열심히 해라! 혹은 신앙은 원래 갈급한 것이다. 그냥 참아라!
- 교회는 이렇게 소진된 사람들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 자기 신앙 탓이라고 돌리며 무시한다.
그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다.
- 너무 뻔한 답 같고, 다른 교회가 하는 짓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찝찝하지만, 그래도 답은 예수님 뿐이다.
- 예수님 알려 줄게! 도 아니고, 예수님 알아라! 도 아니라, 함께 예수님 알아 가자! 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예수님은 목 마르지 않는 생수시란다.
- 이 말씀 믿고 가보자.
- 우리는 매일 목마름에 허덕이는데, 그래서 여기 저기서 물 구걸하며 살고 있는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기대하며 한 걸음만 더 같이 내디뎌보자.
예수님께서 그런 여인에게 다가가 생수를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반드시 오셔서 생수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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