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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8) 3:22-36 믿는 사람의 특징인 증언

지난 본문 요약

믿음 없는 사람의 특징 - '나' 있음

-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인과관계를 알 수 있으며, 그 원인이 '나'라고 생각한다.

- '나'가 있는 사람은 두려워서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숨는다.

- 그래서 이들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심판 받아 멸망당한다.

강조하고 싶은 것: 믿음 없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의 본질 - '나' 잃어버림

-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으로 완전히 대체되어 내 안에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믿음 없는 사람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나'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 '나'를 잃는다는 것은, '나'는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며, '나'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 즉, 이 세상에서 '나'가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영향력도, 아무런 정체성도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정말로 싫어하는 것이다.

- 사람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영향력을 주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존재이다.

-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예) 빵보다 자유를 달라.

- 나 역시 가장 절망적일 때가, 돈도 못벌고, 아들 노릇도 못하는데, 게다가 설교도 못하고, 교회에서 영향력도 없으며, 신앙 생활도 못할 때,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내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밥만 축낸다고 느낄 때이다. 

'나'를 잃었다고 다 믿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는 사람은 '나'를 잃는다.

- 따라서,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림, 즉 '나'의 무가치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 없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

정리하면, 예수님께 나아감 = '나' 잃어버림 = '나'의 무가치함 인정 = 사람을 가장 절망적이게 하는 것

- 그러한 믿음 없는 사람의 모델로 니고데모 이야기가 제시되었다.

- 그리고나서 이번 본문에서는 믿는 사람의 모델로서 침례 요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요한복음 중간 정리

 1장

 서론

 1-18

 프롤로그 -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19-51

 예수님에 대한 증언들 - 믿는 사람의 정체성(특수성/제한성)과 예수님의 정체성(하나님과 연결성/사람과의 연결성)

 2-4장

 가나 사이클

 2:1-11

 a: 가나의 혼인 잔치 -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계승/초월하시는 예수님

 

 2:12-25

 b: 성전 정화 - 성전을 계승/초월하시는 예수님

 

 

 3:1-21

 c: 니고데모 이야기와 요한의 설명 -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 - '나'

 

 

 3:22-36

 c': 침례 요한 이야기와 요한의 설명 - 믿는 사람의 특징 - '나' 없음/증언

 

 4:1-45

 b': 사마리아 여인

 4:46-54

 a':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

1장 서론을 지나, 2-10장은 표적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단락이다.

그 중에 2-4장은 '가나 사이클'로 불리는데, 가나에서 시작하여 가나에서 끝난다.

- 장소 개념을 통해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다는 표시를 하고 있다.

2-4장은 또 교차대구 구조이다. a - b - c - c' - b' - a'

- a, b, a', b'는 예수님의 특성을, c, c'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특성을 말한다.

- 알다시피, 양 가의 예수님의 특성을 통해 가운데 사람의 특성을 강조하는 구조이다.

-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으면 믿음 가지고 똑바로 살라는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래야 나답게 똑바로 살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에 근거해, 이번 본문은 분명히 믿는 사람에 대한 것일 것이고, 다음 본문인 4장은 예수님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내용 정리

22-24절: 발단/배경 설정 - 예수님의 무리와 침례 요한의 무리의 만남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시고, 니고데모와의 만남도 가지신 후, 유대 지방에 머물면서 침례를 주었다.

때마침 침례 요한도 함께 침례를 주고 있었다.

이 때는 침례 요한이 아직 옥에 갖히기 전이다.

- 마가복음 1:14에 의하면, 예수님은 침례 요한이 잡힌 이후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말한다. 

- 그래서 보통 예수님과 침례 요한의 사역 기간은 겹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둘의 사역이 겹치는 기간이 있었고, 그로 인해 생긴 약간의 갈등을 이야기 소재로 하고 있다.

25-26절: 전개/문제 제기 -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침례 요한에게 문제를 제기

이렇게 예수님의 무리와 침례 요한의 무리가 비슷한 장소에서 침례를 주었으니, 다양한 사람이 몰렸을 것이다.

그 때에 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 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 정결예법에 대한 것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논쟁인지 모르겠다.

- 그러나 요한과 제자들의 대화에 근거해 볼 때(26), 예수님과 침례 요한의 침례 의식을 비교하는 논쟁일 가능성이 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인기를 빼앗기고 있는 요한에 대해 걱정과 불만을 드러낸다.

- 이러한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 통해 믿는 사람의 특징을 말해준다.

27-29절: 절정/문제 해결 - 요한은 제자들의 오해를 바로잡고, 예수님에 대해 가져야 할 바른 태도를 제시한다.

요한은 총 4번의 답을 한다. 답은, 단순하게 말해, 그래야 한다. 이다.

- 처음에는 요한의 인기 예수님보다 더 많았지만, 예수님이 흥하고 요한은 쇠해야 한다는 것이다.

편의상, 용어를 정리, 통일하려고 하는데, 이게 어렵다.

- 본문은 예수님과 요한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27절

 28절

 29절

 30절

 정리

 하늘

 그리스도

 신랑

 그(예수)

 영?

 사람

 그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

 신랑의 친구

 나(요한)

 육?

그 동안의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구분할 때 사용한 용어는 다음과 같다.

- 빛 / 어둠, 영 / 육, 하늘 / 땅

- 그래서 이러한 구분에 따라 예수님과 요한도 영과 육으로 구분하려고 보니, 모호한 것이 있다.

요한은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믿는 사람은 영과 육 중에 어떤 것으로 구분될까?

-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자신만이 거듭났고, 따라서 자신만이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 그리고 같은 본문에서,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고만 했지, 거듭나서 영이 된다는 언급은 없었다.

- 또한, 믿는 사람을 영으로 분류하면, 예수님과 믿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말할 수 없게 된다.

- 따라서 예수님 외에 모든 것은 다 육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믿는 요한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니고데모와 침례 요한을 모두 같은 육으로 분류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구분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마음 속의 결론은, 믿는 사람은 영과 육을 모두 가진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 영과 육이 아닌 중립적인 제 3의 존재가 아니라, 영과 육 모두를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다.

- 그래서 상상컨데, 믿는 사람을 영으로 분류할 때는, 믿지 않는 사람과 차별성을 강조하게 될 것이고, 육으로 분류할 때는, 그리스도와 차별성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이후의 본문을 통해 지켜보려고 한다.

① 27절: 하나님의 주체성

- 하늘, 즉 하나님은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주체성을 가지고 사람을 조종한다.

- 사람은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조종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종속되고 제한되어 움직일 뿐이다.

- 따라서, 지금 현재 상황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② 28절: 사람의 특수성 - 증언

- 요한은 제자들에게 특수성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특수한 것이 있다. 바로 증언이다.

- 증언 내용은, '나' 없음과 그리스도의 전부 되심이다.

- 이것이 믿는 사람의 역할, 사명이다. 이는 니고데모와 정반대의 태도이다.

③ 29절: 요한의 제한성

- 혼인 잔치 비유이다. 등장 인물은 신랑, 신부, 신랑 친구다.

- 신랑은 예수님, 신부는 믿는 사람, 신랑 친구는 요한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두 가지다.

- 첫째로, 요한은 신랑의 친구지 신랑이 아니다. 즉, 예수님과의 차별성을 부각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 둘째로, 요한은 신랑의 친구지 신부가 아니다. 즉, 믿는 사람과도 구별한다. 이것은 좀 아리송하다.

이러한 요한의 정체성은 현실에서 대상을 특정하기 어렵다. 

- 우리의 세계관에는 예수님,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밖에 없다.

- 현실에서는 신랑의 친구와 신부는 구분되지 않는다.

-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이 구분에서 찾아야 한다.

요한이 자신을 신부, 즉 믿는 사람과 구분지은 것은, 자신의 역할을 엄밀하게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 요한은 신랑이 아니기에, 신부, 즉 믿는 사람들의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 또한 요한은 신부도 아니기에, 신랑, 즉 예수님을 마냥 누릴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것 뿐이다.

- 영광스럽기도, 비극적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알아보기에 영광스럽고, 예수님을 누리지 못하기에 비극적이다.

우리도 이러한 위치에 있다.

- 예수님을 마냥 누릴 수 없다. 이것은 종말 이후 천국에서 할 수 있다.

- 사람들의 인기도 누릴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다.

- 주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소식, 예수님의 말씀 뿐이다. 믿는 사람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에 제한된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기쁨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참 기쁨, 영원한 기쁨이다.

30절: 결론 - 예수님의 주체성과 요한의 제한성

요한의 인기가 낮아지는 것에 불만을 품은 제자들에게 요한은, 결국 모든 인기는 예수님이 받으셔야 하고, 요한의 인기는 사라질 수 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 요한의 역할은 환호를 받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환호를 하는 믿는 사람도 아니라, 믿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연결시켜주기만 하고 사라지는 역할이다.

- 이렇게 요한은 예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춘다.

이와같이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런 영광도 얻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운명이다.

- 하지만, 이렇게 예수님을 높이는 역할을 맡는 것이 이 세상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믿는 사람만의 영광이다.

- 그러니, 세상 영광 바라지 말고, 진짜 영광 바라며 예수님 높이자.

31-36절: 3장 전체 결론 - 하나님 아버지 ↔︎ 아들 예수님 ↔︎ 믿음 있는/없는 사람의 관계

31절: 위와 땅의 관계 - 위의 주체성과 땅의 종속/제한성

32-33절: 그리스도와 믿음 있는 사람과의 관계

- 그리스도: 본 것과 들은 것, 즉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신다.

- 믿음 없는 사람: 그리스도가 증언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믿음 있는 사람: 그리스도가 증언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 이는 곧,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이 왜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한 것이냐?

34-35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 - 상호 종속 관계

-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그리스도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주셨는데, 특히 성령을 주셨다. 

- 이렇게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종속되신다.

- 그에 따라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에 종속되신다.

- 따라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상호 종속 관계이다.

36절: 그리스도와 믿음 없는 사람과의 관계

- 믿음 있는 사람: 영생을 얻는다.

- 믿은 없는 사람: 생명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진다.


주제

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상호 종속적 관계다.

모든 올바른 관계는 반드시 상호 종속적이다.

- 상호 종속 관계를 벗어나는 순간, 상하 관계 혹은 끊어진 관계 중 하나로 바뀐다.

- 그런데, 상하 관계는 끊어진 관계와 똑같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셔서 예수님께 종속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만 증언하여 하나님께 종속되셨다.

② 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사람의 관계도 상호 종속적이다.

믿는다는 것이 곧 하나님과 예수님과 상호 종속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 이는 상호 종속 관계라는 선순환, 혹은 순환 논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그 관계는 점점 더 가까워진다.

③ 상호 종속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관계가 더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끝은 둘 간의 구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구분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과 믿는 사람도 구분이 되지 않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이렇게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되가는 과정이 신앙 생활이다.

④ 믿는 사람이 예수님이 되간다는 의미는?

'나' 없음이다.(30)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 이 세상에서 '나'는 아무런 존재 가치, 영향력이 없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만 유일하며 전부임을 믿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유일한 원인은 오직 예수님이다.

⑤ 이런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역할은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32) 즉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다.(34)

- 따라서 믿는 사람의 역할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다.(28)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고, 그 외의 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일, 가정, 육아 다 포기하고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포기하고 전도하는 것도 좋다.

- 일, 가정, 육아는 예수님이 유일하고 전부라는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수단이라는 것이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 없음과 예수님 증언이 영원토록 반복되는 것이 영생이다. 믿는 사람은 이러한 반복 속에서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반면에 이러한 반복에서 배제된 것이 심판이고 멸망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반복 외의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결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27)

'나' 없음이라는 것은 말이 쉽지, 자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 없으니 한 마디만 더 하면, '나' 있음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어리석은 것인지 아는 것 자체가 예수님과 상호 족속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이다.

- 이것을 점점 더 알게 되면, '나' 없음이 시작될 것이고, '나' 없음이 계속되면, 예수님이 전부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내 안에 예수님이, 예수님 안에 내가 거하는 상호 종속 관계, 하나로 연합 관계가 완성될 것이다.

완성될 그 때를 바라보면, 너무 까마득해서 숨이 막히고 포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완성은 끝이 없이 영원토록 계속될테니까.

- 하지만, '나'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우리를 보면, 느리지만 변하고 있는 우리를 보면, 소망이 생긴다.

지쳐서 넘어졌으면, 넘어진 김에 쉬고 가자. 쉬고 나서 일어나자. 일어나서 또 가자.

- 넘어지면 이런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옆에서 누군가가 카운트 다운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 지금 당장 일어서지 않으면, 큰 일날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있다.

- 하지만 그런 카운트 다운 소리는 사탄의 속삭임이다.

- 예수님은 카운트 다운 하지 않으신다. 허리를 굽혀 우리를 일으키신다.

느리지만 끝까지 가자. 포기하지만 말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어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