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핵심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긴 범법이라 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회복이라고 했다.
-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아무 일이나 하는 범법자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하는 순종자라고 생각했다.
-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아 하나님께 반역한다고 했고,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순종한다고 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무수히 제기할 수 있다.
- 예배 형식을 바꾸는 것은 예배 본질에 대한 회복인가, 예배 규범에 대한 범법인가?
- 내가 교회와 예배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나 혼자 잘났다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인가, 세상의 악에 저항하여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가?
- 나는 교회와 예배를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막 하는 범법자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다 하는 순종자인가?
- 이렇게 예수님의 행위를 두고도 그에 대한 판단이 범법과 순종으로 나뉘었다.
- 따라서 우리 교회의 행위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범법과 순종으로 나뉠 수 있다.
당연히 예수님은 회복자, 순종자이다. 본문은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 반면에, 나와 우리 교회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죽을 때까지 기다려보는 것 뿐이다.
- 분명한 것은, 내 안에 범법자와 순종자가 공존하고, 순종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범범자와 순종자를 나누는 '기준'이다.
- 기준을 바르게 알아야, 지금의 몸부림을 통해 순종자가 될 수 있다.
- 그렇지 않으면, 결국 범법자가 된다. 이번 본문의 유대인들이 그랬다.
이번 본문에서는 문제 제기만 한다.
- 본문은 같은 사건이라도 기준이 다르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문제만 제기한다.
- 올바른 기준에 대해서는 다음 본문에서 자세히 알아보겠다.
서론
'가나 사이클'에 이어 '명절 사이클'이 나온다. 5-10장까지이다.
- 유월절(6:4), 장막절(7:2), 수전절(10:22)이 나온다.
- 이러한 명절을 통해 뿌리박혀 있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명절 사이클'의 주제는 예수님에 대한 유대 사람들의 적개심이다.
- 5:18에서부터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 먹기 시작하여, 10장에서는 실제로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한다.
- 그리고나서 11장부터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신다.
1장 |
서론 |
요한복음 전체 개관 |
2-4장 |
가나 사이클 |
예수님의 정체성 증언과 여전히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상태 고발 |
5-10장 |
명절 사이클 |
예수님에 대한 유대 사람들의 적개심과 더욱 더 분명해지는 예수님의 정체성 |
11장~ |
십자가행 |
십자가 죽음 준비 시작 |
이러한 적개심과 반대로, 예수님의 가르침도 계속 이어지는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엄청나게 긴 강화(강의)다.
- 이번 본문도 1-18절까지의 치유 사건과 19-47절까지의 강화가 나온다.
- 이렇게 간단한 사건 하나와 그와 관련된 긴 강화가 각 장마다 계속된다.
- 따라서 사건 자체를 이해하는 것보다, 강화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그런데, 강화가 길기도 길 뿐만 아니라, 괴상하고 복잡하다. 또 다시 고생 길 시작이다. 화이팅!
내용 정리
1~4절: 발단 - 배경
이스라엘 전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 유대 사람의 명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 38년 등에 이스라엘 전통 분위기를 풍긴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병자를 이스라엘 전통의 피해자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 비슷하다.
- 반면에,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연못, 그리고 주랑 다섯 개가 발굴되었기 때문에, 단순한 사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명절인지 명확치 않지만, 어쨋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양의 문 곁 베드자다라는 연못에 가셨다.
- 양의 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특히 제사에 쓸 동물이 들어가는 문이다.
- 동물들이 다니는 길이니, 다른 성문과 달리 지저분했을 것이며, 보통 사람은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 그 문 앞에 동물을 씻기 위한 연못이 있었는데, 그것이 베드자다 연못이다.
- 베드자다의 뜻이 치유 효과 때문에 '자비의 집'이라는 사람과 연못 모양 때문에 '물줄기의 집'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 연못에는 신비한 치유 능력이 있었다.
- 동물을 씻긴 물이니 더러웠지만, 제물을 씻긴 물이니 신비한 능력이 있을 거라는 미신이 있었던 것 같다.
- 그런데 더러운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이니 혐오스러운 일이다.
- 따라서 돈 있는 환자는 오지 않았을 것이고, 돈 없는 환자들만 오는 비참한 곳이었을 것이다.
5~9절: 전개 - 치유 기적 사건/안식일 범법 사건
그런 곳에 38년 된 환자가 있었다.
- 38년은 모세가 광야에서 떠돈 기간이다.(신2:14) 따라서 이스라엘 전통 냄새가 나지만, 단서가 부족하다.
예수님은 낫고 싶나고 물으셨는데, 예수님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다.
병자는 한탄 혹은 짜증을 낸다.
- 낫고 싶은데, 몰라서 물어?
예수님은 자리를 걷어가라시며 말씀으로 치유하신다.
그런데 하필 이 날은 안식일이라 자리를 걷어가면 안되는 날이었다.
10~13절: 위기 - 사건 원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추궁과 병자의 무지
유대인들은 '치유 사건'을 '안식일 범법 사건'으로 인식하고 병자를 심문한다.
하지만 병자는 치유자 혹은 범법 교사자를 알지 못했다.
14-16절: 절정 - 예수님에 대한 병자의 깨달음과 유대인들의 적개심 발발
예수님이 병자에게 자신을 알리자, 병자는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고발하였고,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범법자로 박해하였다.
문제는 14절에 예수님에서 '죄'와 '더 나쁜 일'의 해석이다. 그런데 다른 근거가 없어서 해석이 어렵다.
- 일반적으로,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더 나쁜 일은 종말 이후의 멸망 심판을 의미한다.
- 따라서, 치유는 되었지만, 완전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님을 경고하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맥락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17~18절: 결말 - 예수님의 해명과 더 커지는 유대인들의 적개심
범법자라는 고발에 대해 예수님은 해명을 하는데, 그 해명 때문에 유대 사람들의 적개심은 더 커진다.
예수님의 해명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것은 범법이 아니다. - 당연하다.
② 그런데, 내 아버지와 나 예수는 동일하다(equal). - 충격적이다. 신성모독이다.
③ 따라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내가 안식일에 일하는 것도 범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②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것을 근거로 범법자가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 여기서, ①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②이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범한 것도 열 받는데, 해명한다고 한 말이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한 것이라서 더 화가 났다.
- 안식일 범법은 실수로 할 수 있는 범법이지만, 하나님과 동일시는 신성모독으로서, 죽을 수도 있는 죄이다.
- 따라서 이 말을 듣고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이어서 다음 본문부터, 예수님의 강의가 시작된다. 주제는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함 증명'이다.
주제
① 병자의 입장
과연 병자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는지에 의문이 든다. 병자의 내면을 들여다볼 이렇다 할 단서가 없다.
- 이스라엘이 광야 시간만큼 고생을 하였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조차 치유 받지 못한 이스라엘 전통의 희생자를 상징할 수 있다.
병자의 행동은 세 가지다. ① 예수님의 물음에 횡설수설 ② 예수님 말씀에 순종 ③ 치유를 받고도 치유자를 모름 ④ 치유자를 고발
- 그러나 믿음 유무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예수님께 호의적인 순종자인지, 악의적인 고발자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② 예수님의 입장
예수님이 왜 이 병자를 선택하셨는지에 대한 단서가 없다.
- 이스라엘 전통의 한계로부터 병자를 건져내신다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죄 짓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목적도 분명하지 않다.
- 병자의 배신에 대한 경고, 혹은 육신의 치유와 영생 간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 행위의 핵심은 치유 기적과 안식일 범법이 혼동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 안식일 치유 사건은 복음서의 단골 메뉴다. 그만큼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나도 여러번 말했다.
- 병자를 위한 치유라면, 하루 먼저 와서 해주시지. 그럼 병자도 욕 안먹을텐데.
- 전도를 위한 치유라면, 안식일 피해서 해주시지. 안식일에 하시는 바람에 모든 유대인의 적대감을 일으킨다. 전도 실패.
-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에 하신 이유는 병자를 위한 것도, 유대인을 위한 것도, 전도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내가 누군지 최대한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 병자의 배반과 유대 사람들의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만이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서.
- 이 방법만이 진정으로 병자와 유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서.
알다시피, 이 방법의 핵심은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들기'이다.
- 사람의 가치관 중에 무의식 속에 있어서 인식하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충돌되는 가치관들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살인은 정말 나쁜 것이다. 하지만 전쟁 시에도?
- 또,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 재산을 도둑질할 자유도?
- 또, 평등은 지켜져야야 한다. 하지만 재산을 거지와 나눠야 한다면?
- 예수님은 믿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예수님은 이런 사역만 골라 하신다.
-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시는 것, '의로운' 바리새인 니고데모를 '정죄'하시고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을 '칭찬'하시는 것 등.
- 이를 통해,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인정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 살인은 정말 나쁜 것인가? 자유와 평등은 정말 좋은 것인가? 믿음은 정말로 사람에게 좋은 것인가? 다 답하기 어렵다.
-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 사람들을 비롯해 제자들조차 결국 예수님을 거역, 배신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너무 불편해서.
반면에 이렇게 기분 더러운 과정을 거치고, 나의 가치관과 생각이 터럭 만큼도 쓸모 없다고 느낀 후,예수님이 전부임을 인정한 제자들은 신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 기분 더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내 얘기를 좀 하면, 이미 알겠지만, 나도 내가 사람들의 기분을 얼마나 나쁘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이건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지.
- 사람들이 복음 듣고 떠나가지 않도록 붙잡아 두려고 얼마나 고민 많이하는지 모를 것이다.
알다시피, 사람들은 다 내가 기분 나쁘게 해서 나간 것이다.
- 그런데, 기분 더러운 과정은 믿음을 갖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어쩔 수 없었다. 꼭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들 잡으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솔직하게 말해서, 적어도 우리 중에는 이 사람들 잡으려고 나만큼 노력한 사람은 없다.
- 내가 가장 많이 만났고, 통화했고, 대화했고, 기도했다.
- 그래서 그 사람들 나간 것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더 속상하다.
- 내가 시간, 돈, 마음, 열정 바쳤던 소중한 사람들인데, 함께 신앙 생활 할 수 없다는게 정말 속상하다.
- 소중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바른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복음 때문에 멀어진게 속상하다.
게다가, 이런 기분 더러운 과정은, 반드시 나에게도 또 올 것이고,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올 것이다.
-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은 나를 원망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아내조차도 나에게 그랬다.
- 제발 부탁인데, 나 미워하지 말아달라.
- 나 교회 목사 해서, 돈 벌 생각도, 유명해질 생각도, 개인적인 목적을 이룰 생각도 없다.
- 난 예수님 증인으로서 예수님 전한다는 생각 밖에 없다.
- 난 누군가에게 상처 줄 생각, 기분 나쁘게 할 생각 없다. 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내 말 듣고 기분 나쁘더라도, 서로 진솔한 대화를 통해 잘 해결하자.
- 대화를 통해 내 진심을 알면, 왠만한 문제는 해결될 거라 믿는다.
- 아내도 똑같은 이유 때문에 나에 대해 굉장히 많은 오해를 한다. 그 오해가 풀리는데 몇 달씩 가기도 한다. 여전히 반복된다.
- 그런데 오해가 풀릴 때 드러나는 것은, 아내가 기분 나빴던 나의 행동이 알고보니 아내에게 정말 필요한 행동이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아내를 정말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내가 정말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 분명히 앞으로 날 오해할 날이 올텐데, 그때 꼭 내 마음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 기분 나빴던 나의 행동이 여러분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 괴롭히려고 악의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더 좋은 것을 주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③ 유대 사람들의 입장
본문은 예수님을 '낫게 해준 분', 즉 치유자라고 반복해서 부르는 반면, 유대 사람들은 '자리 들고 가게 한 사람', 즉 범법자라고 부른다.
-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외면하고, 범법 행위만 추궁한다. 사건의 한 면만 본다.
- 그리고 이러한 편견을 결국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유는 고정관념, 편견, 경험, 상식, 너무 효율적이어서 움직이지 않는 뇌 때문이다.
- 이는 남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다.
- 우리도 보고 싶은대로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대로만 기억한다.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왜곡되어 있다.
따라서 기억과 경험에 의지해서 사는 삶은 운전대 없는 자동차처럼 위험천만하다.
- 우리는 본문 전체를 보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을 비웃지만, 웃을 일이 아니다.
- 우리도 저 상황 안에 있으면 이들과 똑같이 행동한다. 이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다.
- 따라서, 절대로 우리의 기억, 생각, 경험, 판단 의지하면 안된다. 그러면 예수님을 죽이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굉장히 사탄적, 악의적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철저히 상식적, 경험적, 전통적, 문화적, 시대적으로 바르게 판단했다.
-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
우리도 평범하다. 우리가 유대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죽였을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는 매 순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우리를 자기 소유로 만드시려는 예수님을 죽이고, 나를 내가 가지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상식적, 경험적, 전통적, 문화적, 시대적으로 바른 판단을 하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
- 상식에서 벗어난 판단을 해야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결론 밎 적용
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기분 더럽게 만들기라는 것을 기억하자.
신앙 생활은 종말 이후의 행복을 위한 것이며, 현실에서는 그 행복을 불완전한 형태로 맛보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 생활의 실상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처럼, 기분 더러움이다.
- 내 안에서 나의 가치관들이 끊임없이 충돌해서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 예를 들어, 자유와 평등의 가치관이 부딪힐 때, 자유를 포기하면 좌파가, 평등을 포기하면 우파가 된다. 이것은 신앙 생활 아니다.
- 이렇게 풀리지 않는 더러운 고민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그래서 신앙은 기분 더러운 것이다.
그러니 기분 더럽게 만든다고 예수님 탓하지 말고, 또 저 미워하지 말아 달라.
- 이것이 신앙 생활임을 믿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향해 몸부림치자.
- 그러한 몸부림이 예배이며, 신앙 고백이며, 예수님 증언이 될 것이다.
② 그러한 신앙 생활은 예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 하나만 꼽자면, 솔직함이다.
더러운 기분을 예수님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 말해야, 더러움 속에 파뭍히지 않고, 더러움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건짐 받을 수 있다.
교회 안에서 더러운 기분을 함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 우리 중 누구도 악의를 가지고 교회 오는 사람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기분 더러운 일이 생겨도, 솔직히 터놓고 대화하면 오해는 풀릴 수 있다.
관계 안에 마찰, 균열, 오해, 상처가 생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풀면 된다.
- 진짜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 대화하지 않으면, 관계는 끊어진다.
관계 안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아픔을 참고 대화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용기가 필요하다.
- 하지만, 참 신앙은, 멋있게 전도하고 선교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교회 안의 관계에서 용기를 내어 솔직해지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를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실 것을 믿음으로 솔직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참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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