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교회는 기적이 전하는 메시지를 오해한다.
- 특히 '사랑'으로 오해한다.
-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고 착각하게고 그렇게 가르친다.
- 그래서 만약 교회에서 아픈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면,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찬양한다.
하지만 치유가 정말 사랑일까?
-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데, 그 기적이 나사로에게 좋은 것일까?
- 나사로의 살아남은, 마치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 영광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에 다시 내려와 영광과 기쁨 다 빼앗긴 꼴이다.
- 그런 사람에게 치유는 회복이 아니라 박탈이다.
- 사랑이 아니라 저주이다.
- 바울 역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빌 1: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이것이 말하는 것은, 치유는 항상 저주라는 것이 아니다.
-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치유나 기적을 항상 사랑이라고 단정짓는 사람의 본능이다.
-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을 무조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이다.
- 반대로 치유나 기적을 항상 저주라고 단정짓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이다.
- 물론 그런 사람은 적지만 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기적을 그런식으로 사용하시지 않는다.
- 성경 전체에서 기적은 일관되게 딱 한 가지만 전한다.
- 구약에서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 본문에서 기적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 그 외의 다른 목적은 없다.
- 특히 하나님이 특별히 장애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런 것은 아니다.
- 단지 그 장애인이 메시지를 전하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일 뿐이다.
- 나쁘게 말해서, 장애인은 하나님에 의해 이용당한 것 뿐이다.
- 하나님이 장애인을 특별히 사랑하셔서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 메시지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격려로 느껴진다.
-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박해 받는 사람은 이 메시지가 이렇게 들린다.
- 사랑하는 자녀야, 나 믿느라 힘들지? 정말 잘하고 있다. 지금처럼만 나를 사랑해다오. 너로 인해 기뻐 어쩔줄 모르겠구나. 곧 만나서 더함 없이 사랑을 나누자꾸나. 라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같은 메시지가 다르게 들린다.
- 저주와 정죄로 들린다.
- 독사의 자식아,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뿐만 아니라, 나를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너는 나에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도움을 구하고 있다. 너가 살아남을 줄 아느냐? 라고 말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을 소망하며 죽음의 위협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면,
- 기적은 예수님을 더 잘 믿도록 격려하시는 사랑의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반면에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다면,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믿지 않고, 죽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데 인생을 쏟아 붓고 있다면,
- 기적은 예수님을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정죄와 경고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본문이 이에 해당한다.
- 기적이 일어났다.
- 사람들은 놀랐다.
- 그러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행 3:10]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
-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믿지 않았고, 그리스도라는 것도 몰랐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세 가지를 말한다.
- 첫째로, 이 기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일으키셨다.
- 둘째로, 그런데 당신들은 그 예수님을 죽이는 가장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 셋째로, 그러니 회개하라!
이것이 본문에서 기적이 전하는 궁극적인 메시지이다.
- 회개하라는 경고만이 우리가 기적 속에서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 복음서에서건 서신서에서건 성경에서 기적은 항상 그랬다.
- 기적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이 다가오실 때, 우리의 반응은 회개일 수 밖에 없다.
- 바울조차도 자신을 괴수로 보게 만드는 것이 복음의 위력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을 죽인 흉악범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고 언제나 죄책감에 파뭍여 괴로워하며 비관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이 역시 전형적인 불신앙이다.
- 부활까지 해가시면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 회개한답시고 비관적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 자신이 너무나 거룩한 존재라서 죄인이라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에 빠지는 것이다.
- 그들은 회개조차 과시용으로 이용한다.
정말로 회개하면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된다.
- 자신이 스스로는 구제 불능의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통해 구제 불능 죄조차 구제할 수 있으며,
- 우리 죄 역시 완전히 용서되었음을 믿게 된다.
그 결과 죄로 인한 죄책감과 죄 용서로 인한 해방감을 동시에 갖게 된다.
- 그래서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것처럼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동시에, 바울이 자신을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셨다'고 말한 것처럼 자기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 다르게 표현하면, 죄책감에 빠져도 금방 회복되고, 자부심에 빠져도 금방 다시 나오게 된다.
- 또 다르게 표현하면, 죄책감에도 잘 안빠지고, 자부심도 잘 갖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 회개하여 바르게 예수님을 믿도록 말이다.
- 이것만이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기적은 바른 믿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믿음이 궁극적인 목적이고, 기적은 수단이다.
-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수단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
- 그래서 기적 없이 다른 수단으로 믿게 된 사람도 많이 있는 것이다.
- 오히려 기적은 마음이 강팍하여 들을 귀가 없는 사람, 그래서 아무리 말을 해도 듣기조차 거부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요 20: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 즉, 기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 답답해서 주시는 것이다.
우리를 되돌아보자.
- 따지고보면, 기적을 바라는 것은 기적이 없으면 믿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 믿기 위해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 위해 바라는 것이다.
- 기적이 안일어나면, 믿음 없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는다.
- 또 다른 기적만 구할 뿐이다.
- 마치 바리새인처럼 말이다.
[마 12:38-39]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서도 기적 이면에 있는 메시지를 보자.
- 기적은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들러리일 뿐이다.
- 진짜 신부는 예수님이다.
- 그러니 본문을 통해서 신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기적 이야기와 기적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으로 나뉜다.
- 기적 이야기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 외에 아무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 이야기 안에서 인물에 대한 평가나 해석이 없다.
- 따라서 기적 단락은 서론 역할 밖에 안하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다음으로 베드로의 해석 단락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1-12절: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문제 제기 - 여러분, 어찌하여 이상하게 여깁니까?
② 13-18절: 기적의 근원이신 예수님에 대한 반응 - 무지함으로 그리스도를 죽임
③ 19-26절: 권면 -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라!
단락 전체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 베드로는 먼저 기적을 보고 놀라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지적한다.
- 결론부터 말해서, 기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니 전혀 이상하지 않고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 반대로 말해서, 기적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 반응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논리로 베드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인 죄를 지적한다.
- 그리고 이를 무지함이라고 말한다.
- 왜 무지함이냐면, 구약을 알았다면 마땅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했는데, 사람들은 무지함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 따라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 구약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마땅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 이렇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 기적을 통해 전한 베드로의 메시지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 첫째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 둘째로, 그러나 무지함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였다.
- 셋째로, 따라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 이 세 가지를 논증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이 세 가지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 첫째로, 우리 역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상당 부분 이미 알고 있다.
- 둘째로, 그러나 실상은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거부하고 부정하며 세상에 그리스도는 없는 것과 같이 살고 있다.
- 셋째로, 따라서 우리도 삶에서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죄를 인정하고, 우리 삶을 그리스도 중심의 라이프 스타일로 전환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본문을 읽어보자.
1-10절: 기적 이야기 -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
이야기의 핵심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이다.
[행 3:10]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
- 본문은 '이상하게 여겼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 이것을 드러내는 것이 기적 사건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이다.
아쉽게도 이 이야기의 핵심에 기적의 주인공인 못 걷는 사람은 배제되어 있다.
- 일단 대사가 없다.
- 뿐만 아니라 과거에 장애 때문에 얼마나 절박하게 살았는지, 그리고 현재 얼마나 절박하게 구했는지, 그리고 미래에 믿음으로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 아무 것도 없다.
- 또, 베드로가 기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은 딱 하나이다.
- 선천적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 이 역시 이 사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어난 기적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 만약 선천적 장애가 아니었다면, 기적의 진실성이 위협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택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는 이것이다.
- 이 사람의 장애가 굉장히 심각했고, 그 사실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다는 것 뿐이다.
- 그래서 이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났을 때,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룰 것은, 베드로가 기적을 일으키면서 했던 말이다.
[행 3:6]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붙였다.
이 말을 이렇게 오해하면 안된다.
- 이 문구를 말하는 것 자체에 기적을 일으키는 효험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 단지 기적의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 뿐이다.
- 이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 뿐이다.
- 기적의 주문이 아니라 신앙 고백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 고백은 반드시 필요했다.
- 기적의 목적이 못 걷는 사람의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고백을 통한 전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문구가 사용된 것이다.
이제부터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언을 시작한다.
11-12절: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문제 제기 - 여러분, 어찌하여 이상하게 여깁니까?
베드로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두 가지 지적한다.
[행 3:12]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 첫째로, 사람들이 기적이 일어난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 둘째로, 사람들이 기적의 주체를 베드로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문제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 기적을 일으킨 주체가 베드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랬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자 베드로를 주목한 것이다.
- 그리고 또 베드로와 같은 별볼일 없는 사람이 이런 신비한 기적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지적한 사람들의 문제점은 '기적의 주체'에 대한 오해이다.
- 이런 질문을 시작으로 베드로는 기적의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한다.
13-18절: 기적의 근원이신 예수님에 대한 반응 - 무지함으로 그리스도를 죽임
본문은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
②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 기적의 주체이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샌드위치 구조로 설명한다.
- 13-15절과 17-18절은 ① 메시지, 16절은 ② 메시지이다.
- 다시 말하지만, 샌드위치 구조는 남편이 교통 사고 나는 장면 사이에 아내가 접시 깨는 장면을 삽입하는 것이다.
- 그래서 남편의 교통 사고를 더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따라서 본문은 ②를 양념으로 ① 메시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풀어서 해석하면,
- 기: 기적의 주체는 예수님이시다. 이 예수님은 이렇게 강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 승: 그런데 너희가 그 예수님을 죽였다. 너희는 이런 분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다.
- 전: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셨다. 이를 통해 구약의 메시야 예고가 성취되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 결: 그러니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라.
- 참고로 기-승-전까지가 이번 단락이고, 결론은 다음 단락에 나온다.
여기서 다시 핵심을 뽑으면 '승'과 '결'이다.
① 승: 너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② 결: 그러니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 '기'는 기적 이야기에서 보여줬고, '전'은 2장에서 충분히 다뤘다.
이 둘 중에 또 메시지 하나만 뽑는다면, ① '승' 메시지이다.
-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나아가서 현실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것이다.
- 이것을 깨달을 때, 그 다음 단계인 회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메시지가 3장 전체의 핵심 메시지이다.
- 본문을 읽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예수 살인범'이라고 이성적으로 깨닫고, 감정적으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다.
일단, 베드로 앞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 살인범'이라는 것은 비교적 알기 쉬웠다.
-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알면서도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람도 있었고, 소극적으로 방조한 사람도 있었지만,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즉,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소위 '살인 방조죄'를 범한 것이다.
- 물론 실제 형법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책임감과 심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5000명이 회개를 한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예수님 살인에 동참한 이유를 '무지함' 때문이라고 한다.
[행 3:17] 그런데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뭐가 무지했냐?
- 첫째로,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신다고 나온 구약에 무지했다.
- 둘째로, 구약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에 무지했다.
- 한 마디로, 낫 놓고 기억자도 몰랐던 것이다.
- 구약 성경과 예수님을 눈 앞에 두고도 그리스도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면, 죄를 묻기 힘들다.
-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알 수 있는 충분한 단서가 있었는데, 알지 않은 것이다.
- 확실한 의도가 있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단순히 실수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 이는 '미필적 고의로 인한 살인'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고대하지 않는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까?
- 유대인처럼 당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직접 듣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을까?
본문은 아직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 지금은 유대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 구약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은 논외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이방인을 전도하는 장면에서는 이 부분을 다룰 것이다.
- 그때 왜 우리 역시 '예수 살인범'인지 제대로 확인해보자.
다만 로마서를 통해 대략적으로 보면,
[롬 1:19~23]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22]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23]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다 알려주셨다.
- 그런데 사람은 썩어 없어질 우상, 다른 말로는 가치관에 매물되어 우상 혹은 가치관을 하나님 삼는다.
- 그 결과 사람은 뻔히 보이는 진짜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 그렇게 눈이 가려지고, 지각 없어지고, 머리가 굳어져 버린 사람은 무지해져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 이 역시 확실한 의도를 가졌다고 보기도,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필적 고의'로 인한 하나님 부정인 것이다.
- 우리가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진 않았지만,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우리 역시 당시 유대인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이렇게 당시 유대인을 필두로 인류 전체를 '예수 살인범'으로 정죄하고 있다.
19-26절: 권면 -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라!
하지만 성경이 사람을 이렇게 극악무도한 살인범으로 매몰차게 몰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다음에 완전한 용서가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예수 살인범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살인죄를 무효화시키시기 때문이다.
- 즉, 예수님의 죽으심에 내가 동참했음을 인정할 때, 예수님의 부활에도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3:10~11]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회개하라고 선포한 이유이다.
[행 3:19]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 그 이후에 완전한 죄 용서, 완전한 회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 회복이 어떤 것인지 20절부터 설명한다.
- 20-21절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 그리고 22-23절은 모세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오실 것과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선포한다.
- 게다가 24절은 같은 예언이 모세 뿐만 아니라 사무엘을 시작으로 모든 예언자에게서도 예고되었음을 주장한다.
- 마지막 25-26절은 '아브라함의 복'을 언급하며, 예수님으로 인해 그 복이 내렸고 그 복으로 인해 용서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결국 회개하면 얻게 될 회복은 창세기에서부터 예고된 아브라함의 복이라는 것으로 베드로의 선포가 끝난다.
- 구약의 모세, 아브라함을 근거로 한 증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 모세와 아브라함에 대한 유대인의 신뢰는 상당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에게는 그만큼의 효력은 없다.
- 하지만 적어도 구약과 신약 성경이 상당한 일관성을 가지고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 성경의 세계관에 들어갈지 말지는 선택의 영역일 수 있지만, 성경의 세계관에 들어갔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선택할 수 없다.
-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이다.
- 베드로의 증언이 이정도의 효력은 있다.
주제
회개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우리의 죄는 단순한 살인죄 이상이다. 살'신'죄이다.
- 정확하게는, 전제 왕권에 대한 '반역죄'이다.
- 더 정확하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난 '간음죄'이다.
- 더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본질인 관계를 포기한 '반인륜적 죄'이다.
본문은 이를 유대인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는 민족 정체성의 본질 중의 핵심에 해당한다.
- 그런데 그 그리스도를 단순히 잃어버리기만 해도 상실감이 클텐데, 그 그리스도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이는 마치 자신의 부모 혹은 자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범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은 상황이다.
- 슬픔, 상실감, 절망감, 좌절을 넘어 죄책감을 지나 자기 혐오에 이를 수 밖에 없다.
- 이는 마치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를 자신이 죽였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뽑으며 울부 짖었던 절규와 같은 것이다.
- 아니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내가 죽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 그것도 멀리서 편안하게 무위도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을 말이다.
물론 본문을 보고 회개하는 유대인을 공감하기는 힘들다.
-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마도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이방인 전도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공감가는 증언이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가 이런 것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아두자.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류 전체의 상태이다.
- 눈을 뽑으며 절규할 수 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 의식을 갖지 않은 상태이다.
- 내 자식이 죽었고 그 범인이 나인데,
- so what~? 그래서 어쩌라고? 라며, 어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
- 그러면서 친구들을 만나 농담하면서 커피를 마시며 향기에 심취해 있는 모습이다.
- 내 자식을 죽여놓고도 말이다.
그래서 '반인륜적 죄'라고 표현한 것이다.
- 사람이길 포기한 죄이기 때문이다.
-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라면 내 자식을 죽이면 안되고, 만약에라도 화김에 자식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죄책감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 사람이라면 죄를 범해서도 안되고, 죄를 범하고도 뉘우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보여주고 있는 태도이다.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예정하셨다.
- 세상 기준에서는 매도되고 추방당해야 마땅하다.
- 하지만 하나님은 용서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 그러니 돌아오라는 것이다.
피하재이신 하나님은 가해자인 우리를 용서를 해주시기 위해 별짓을 다하신다.
- 부활까지 일으키시고, 성령까지 보내주신다.
- 이게 무슨 의미냐면,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주겠다고 바로 앞에까지 따라오는 꼴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용서 필요 없다고 밀쳐내는 꼴이다.
- 세상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 신세 참 처량하다.
- 날 죽인 죄인을 용서해주려고 따라가는데, 그마저도 거부당하는 신세이다.
- 이보다 더한 굴욕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다.
- 처량해지는 것이고, 비굴해지는 것이다.
- 낮아지는 것이고, 구걸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이다.
- 하나님을 그만 처량하게 만드는 것이다.
-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처량한 하나님을 당당한 하나님으로 세워드리는 것이다.
-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만들어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를 과연 우리는 할 수 있을까?
- 한편으로는 참 멀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 가까워 보인다.
- 과연 내가 이렇게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 하지만 만약 내가 정말 이런 죄인이라면, 어찌 회개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 말씀을 통해 머리로라도 죄를 깨닫는 것이 첫째이고,
- 기도를 통해 이해된 죄가 공감되도록 구하는 것이 둘째이다.
-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수 밖에.
회개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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