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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03) 2:1-21 오순절 성령 강림 이유 - 종말과 증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너무 잘 알려져 있지만, 반대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본문이다.

- 사건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한 번만 들어도 머리에 확 꽂힌다.

- 교회 다녀본 사람치고 이 사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매력에 너무 빠져, 사건의 의미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 왜냐하면 껍데기가 너무 화려하면 본질이 가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도 의도적으로 껍데기를 추하게 만드셨다.

- 그 때문에 말 구유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십자가에서 벌거 벗겨져 추하게 죽으신 것이다.

- 하지만 세상은 껍데기가 추하면, 본질도 추한 것으로 취급되는 곳이다.

- 그래서 예수님도, 복음도 추한 것으로 취급받기 일쑤이다.

- 또한 추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추하게 취급 받는다.

그래서 언제나 그렇듯,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의미에 집중해서 볼 것이다.

- 그래야 성령 강림을 기다린다는 핑게로 신앙에 헌신하지 않는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우리의 겉모습은 추하지만, 본질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 강림 사건 자체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 우리에게 반복해서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만약 성령 강림 받는다고 다 구원 받는다면, 초대 교회 신자들의 배교를 설명할 수 없다.

- 반대로 성령 강림 없다고 다 구원 받지 못한다면, 믿음은 헛 것이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 강림 사건의 의미이다.

- 사건이 제시하는 메시지를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령 강림 사건을 일으키신 이유이다.

- 막연히 수동적으로 성령 강림만 넋놓고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성령 강림의 의미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의 의미가 뭐냐?

- 종말과 증언이다.

- 종말이 임박했으니, 빨리 잘 증언하라는 것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 요엘서에 근거하여, 성령 강림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 첫째로,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이다.

- 그런데 예언, 환상, 꿈의 목적은 모두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 둘째로, 종말이다.

-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은, 곧 '마지막 날'이라는 뜻이며, 종말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 이를 종합하면, 종말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서둘러 예수님을 증언하여 나도, 남도 구원 받도록 하라는 것이다.

종말과 증언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주제이다.

-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하신 첫 말씀도 종말 선포였다.

[막 1:14-15]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은 증언 명령이었다.

[행 1:8-9]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9]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이 두 가지가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따로 있을 때에는 그렇게 큰 영향력이 없다.

- 만약 정말 내일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삶을 정리할 것이다.

- 매일 하던대로 말씀 보고 기도하며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할 것이다.

- 또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 지금과 비슷하게, 만나는 사람에게 전도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음으로 미루며 포기할 것이다.

- 지금 우리가 전도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가, 전도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종말과 증언을 알았다고 해도, 우리 삶이 극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생긴다.

- 지금이 증언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오늘 밖에 남지 않은 때임을 말한다.

- 그래도 우리 삶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 그래도 전도를 내일로 미룰 수 있을까?

이 두 가지를 함께 믿는 사람은 남은 모든 시간을 전도하는데 쓸 것이다.

- 베드로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 일상에서도 많이 쓰이는 원리이다.

- 물건을 팔 때에도 판매자는 두 가지를 이용한다.

- 첫째로, 이 물건이 얼마나 좋은지 최대한 설명한다.

- 그리고 둘째로, 이 물건이 얼마나 지금 당장 사야하는지 설득한다.

- 만약 첫째 방법만 쓰면, 사람들은 '오, 좋다~ 나중에 필요할 때 사야지.'라며 사지 않는다.

- 만약 둘째 방법만 쓰면, 사람들은 '와, 이거 빨리 사야겠다. 다른 더 좋은 걸로 사야지.'라며 사지 않는다.

- 예를 들어, 우산을 판다고 하면, 이 우산이 얼마나 튼튼하고, 작고, 가볍고, 비를 잘 막아주는지 설명하면서, 그런데 지금 밖에 갑자기 비가 오고 있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이 두 가지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기 위해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 성령 강림 사건만 보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주절거리기만 하는 것으로 보기 쉽다.

- 하지만 사건의 본질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가지고 목숨 걸고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목사, 선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 세상과 끊고 전도에 올인하라고 말한다.

- 혹은 산에 들어가서 경건 생활에 올인하라고 말한다.

- 또는 신앙 생활은 곧 교회 생활이니, 교회에 올인하라고 말한다.

- 단지 사이비 종교 교주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 목사들이 이렇게 말한다.

- 이는 마치 지금이 바로 종말의 때냐고 묻는 제자들과 같은 것이다.

     - 또한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 승천하신 자리에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꼴이다.

바른 자세는, 종말이 임박했다는 믿음과 함께 장기적인 계획을 함께 갖는 것이다.

- 마치 바울이 매 순간마다 죽음을 감수하며 복음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로마까지 갈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 우리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도, 10년 후에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계획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즉, 세상은 복음을 전하여 배척하고 대적해야 할 대상임과 동시에, 세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용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또 이렇게 오해한다.

-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는 핑게로, 세상과 뒤섞여 세상에 이용 당하는 자신을 합리화한다.

- 비록 처음에 세상으로 들어간 의도는 좋았을지라도, 결국 복음은 전하지 못하고 세상에 안주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가 정말 어려운 것이다.

- 세상을 이용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세상에 이용 당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정말 많다.

- 세상을 이용한다는 핑게로, 세상에 이용 당하고 있는 사람은 많다.

- 그리고 세상에 이용 당하면 안된다는 핑게로, 세상을 등지고 복음도 전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 전자는 보통 '직장 생활'을 하고, 후자는 보통 '선교 단체'에 있다.

- '직장'에 다니면, 전도에 대한 마음은 있지만, 항상 일에 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선교 단체'에 있으면, 항상 전도를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 주는 영향력은 없다.

- 물론 직장에도, 선교 단체에도 세상을 이용하며 이용 당하지 않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 하지만 적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 강림을 통해 방언을 말하도록 하신 것이다.

- 여기서 방언은 세계 각국의 말로서, 세상을 이용하는 도구이다.

- 세상의 도구를 이용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방언은 종말의 증표이다.

- 베드로는 이를 요엘서 말씀을 근거로 선포한 것이다.

-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욱 열정적으로 전하고, 또한 사람들이 하루 빨리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현 시대에 방언이 있냐 없냐는 논쟁은 의미 없다.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방언의 의미이다.

- 방언 사건을 통해 선포된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를 정리하면,

- 종말이 곧 올 것이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 그래서 종말이 올 세상을 배척하여 목숨 걸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 그러나 종말이 곧 온다고 세상을 배척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 세상을 이용하여 세상에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이용 당하면 안된다.

- 세상에 이용 당하는 순간 예수님과의 관계는 끊어진다.

이것이 성령 강림과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뉜다.

① 1-4절: 성령 강림 -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② 5-13절: 방언에 대한 놀람과 조롱 -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③ 14-21절: 방언에 대한 논란 해명과 해석 -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자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그러자 사람들은 자기네 지방 말을 듣자 놀랐으나, 오히려 술 취했다며 조롱했다.

- 그래서 베드로는 사건을 해석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며, 종말의 증표임을 설명한다.


1-4절: 성령 강림 -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제자들은 열흘간 모여 대열을 정비했다.

- 아마도 폭풍같은 열흘이었을 것이다.

- 당장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당장 천국에 갈 것 같은 환희 속에 있었을 것이다.

- 말씀 보고 기도하며 쉴새 없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 아마 밥 생각도 안나고 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 눈 앞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봤는데, 어느 누가 제정신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또 사건이 터진다.

- 예수님의 예고대로, 하지만 예고 없이 갑자기 성령이 강림한 것이다.

- 예고된 일이 예고 없이 일어날 때만큼 놀랄 때가 어딨겠는가.

그렇다면 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일어났을까?

-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없고, 추측만 가능하다.

- 오순절은 '율법 수여 기념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이다.

- 따라서 구약 시대에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갔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성령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갈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본문은 성령 강림을 여러가지로 표현했다.

- 세찬 바람, 소리, 불, 혓바닥, 혀들

- 바람, 소리, 불은 모두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것이다.

- 혓바닥과 혀들은 불이 타오르는 모습과 비슷한 것으로서, 방언과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성령 강림으로 인해 방언이 시작된다.

- 그리고 방언이라는 수단을 통해 성령 강림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나머지 본문의 내용이다.

다시 말하지만, 방언은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 우리는 방언 사건을 보고, '나도 방언 해야지.'와 같은 1차원적인 해석을 하면 안된다.

- 방언 이면에 있는 성령 강림을 봐야 한다.

- 역시 성령 강림만 보며 무작정 성령 강림만 기다려서도 안된다.

- 하나님께서 성령 강림을 일으키신 이유를 알아야 한다.

- 그 이유가 종말과 증언이다.

- 우리는 종말의 땡에 증언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 그것이 본문이 쓰여진 목적이다.


5-13절: 방언에 대한 놀람과 조롱 -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오순절은 큰 명절이다.

-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3대 명절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킨다.

당시에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많았다.

-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멸망, 바벨론 포로, 다시 귀환의 과정에서 주변 여러 나라들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 그렇게 흩어진지 500년 이상 지나자, 유대인들은 현지화 되어 타지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 그러나 동시에 회당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하기도 했다.

- 그래서 명절에는 여전히 경건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게 된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현지화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 언어인 히브리어도 몰랐고, 현재 예루살렘 지역 언어인 아람어도 몰랐으며,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로마의 헬라어도 몰랐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자기네 지방 말 소리를 들은 것이다.

- 게다가 그 소리의 뜻은 하나님의 큰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행 2:11]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 하나님의 큰 일들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14절부터 시작되는 베드로의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삼으셨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 이렇게 하나님은 방언이라는 세상의 방법을 이용하여 세상에 예수님을 증언하신 것이다.

그들은 너무 놀랐다.

-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긴 어렵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사람들을 통해' '자기네 지방 말 소리'를 듣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 그래서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상황을 왜곡해서 받아들였다.

방법은, 상황을 놀라운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들이 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행 2:13]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일은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다.

-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은 맹목적으로 그 신비를 추종한다.

- 방언을 구하고, 신비를 바라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 신비를 무조건 무시하고 거부한다.

- 방언은 술취한 것이고, 기적은 우연으로 치부한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둘 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은 이러한 신비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셨다고 착각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러한 신비는 절대로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두 부류 다 하나님을 잘 안다는 착각으로 인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고 기적을 부정하는 것도 아닌, 기적 이면에 있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 본문에서 베드로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 베드로가 방언 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지 보자.


14-21절: 방언에 대한 논란 해명과 해석 -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은 한 마디로 이것이다.

- 방언은 요엘서에 나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베드로는 두 가지를 논증한다.

- 첫째로, 방언이 왜 술 취한 것이 아닌지.

- 둘째로, 그러면 왜 방언이 일어나게 된 것인지.

그런데 베드로의 논증을 보기 전에, 베드로는 이것을 어떻게 깨달았을까?

- 기도하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한 순간에 깨닫게 되었을까?

- 이미 예상하겠지만, 120명이 함께 말씀, 기도, 교제하다가 깨달았을 것이다.

- 함께 말씀을 두고 대화, 논쟁, 논박, 갈등, 싸움, 화해, 공감, 동의, 합의를 통해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성령님께서 주도하셨을 것이다.

- 하지만 성령님의 개입 역시 이성적으로 논쟁하고, 감정적으로 싸우고 공감하고 포용하며, 육체적으로 협동하는 과정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면?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 본문에는 베드로가 혼자 말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12명의 사도가 함께 말한 것이다.

- 이는 12명의 사도가 충분히 동의하고 공감하며 협의했다는 것을 뜻한다.

- 그리고 이는 그 이전에 12명의 사도가 충분히 논쟁하고 반박하고 싸웠다는 것을 전제한다.

- 또 이는 그 이전에 120명의 제자들이 함께 충분히 교제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 이렇게 120명 제자들의 깨달음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전도를 한다면,

- 우리의 선포 내용도 그래야할 것이다.

- 여지껏 많이 논쟁하고 반박하고 싸웠으니, 이제는 동의, 공감하는 내용을 정리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베드로가 말씀을 선포하는 상황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 하지만 나의 이성적 예측과 감정적 바람을 버무려서 상상해보면, 12명이 함께 했을 것 같다.

-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 편의 설교 하모니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 그것이 듣는 사람에게 더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이고, 그래서 3000명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 같다.

- 그런데 그 12명의 긴 설교 한 편을 글로 옮기기 위해 최대한 요약해서 베드로 한 사람의 설교로 압축해놓은 것이 우리가 읽고 있는 사도행전이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 함께 한 편의 전도 설교를 함께 만들게 되었으면 좋겠다.

먼저, 베드로의 주장은 방언이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행 2:16]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 그래서 사람들이 술에 취했거나, 정신이 나갔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일으키셨냐?

-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첫째로, 방언은 지금이 마지막 날, 즉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표이다.

[행 2:17]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 즉, 모든 사람에게 성령 강림이 일어난 것은 지금이 마지막 날이라는 뜻이다.

[행 2:19-20]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20]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 또한 이렇게 어두워졌던 일은 얼마 전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있었던 어둠을 의미한다.

[눅 23:44] 어느덧 낮 열두 시쯤 되었는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 따라서 베드로의 선포의 첫 번째 핵심은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둘째로, 종말에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증언이다.

[행 2:17-18]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18]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의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 대상과 하는 일이다.

대상은 성별, 나이, 신분을 초월한다.

- 그 전에는 특별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성령이 내렸다.

-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진다.

- 이제 조건 없이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하게 된 것이다.

하는 일은 예언, 환상, 꿈이다.

- 이 셋이 어떻게 다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모두 방언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 그리고 방언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다.

- 그 중에 특히 예언, 환상, 꿈은 세상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도구이다.

- 따라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예언, 환상, 꿈을 통해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두 가지 메시지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다.

-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는데, 증언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곧 종말이 임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루 빨리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이다.

- 그것도 대충 하면 안되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이는 또 두 가지 메시지를 갖는다.

- 첫째로, 전도자의 입장에서이다.

- 종말 이전까지 충실하게 증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 그래야 종말 이후 심판대 앞에서 충성된 일꾼으로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또한 둘째로, 피-전도자의 입장에서이다.

- 예수님께 헌신하는 시점을 언제까지 미룰 수 없다.

-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빨리 듣고 믿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렇게 전도자 입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증언할 때, 그리고 피전도자 입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믿음을 고백할 때에만 우리는 종말의 심판대 앞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행 2:21]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 여기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전도자가 될 수도 있고, 예수님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피전도자가 될 수도 있다.

다음 본문에서는 본격적으로 증언의 대상이신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 나올 것이다.

- 우리가 전해야 할, 혹은 우리가 듣고 믿어야 할 예수님을 어떻게 증언할지 기대해보자.


주제

성령 강림과 그로 인한 방언의 의미 - '빨리' '잘' 예수님을 증언하라!

- 여기서 '빨리'는 종말이 곧 오기 때문이다.

- 그리고 '잘'은 방언과 같이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의 방법으로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다.

- 첫째로, 전도는 막연히 먼 미래로 미루고, 예수님만 멍하니 바라보기 때문이다.

- 둘째로, 전도를 하긴 하는데, 세상과 등진 채로 세상이 이해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 '빨리' 하려 하면 '대충' 하게 되고, '잘' 하려고 하면 '미뤄서'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 '빨리' 하려는 열정도 없고, '잘' 하려는 지식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결론

우리는 왜 이러나?

-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런가?

- 아니면 '빨리' 할 수 있는 열정이 없어서 그런가?

- '잘' 할 수 있는 방법만 알면 '빨리' 할 수 있을까?

- '빨리' 할 수 있는 열정만 있으면 '잘'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께서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셔야 할까?

- 아니면 우리가 '빨리' 할 수 있도록 열정을 내야 하는 것일까?

- 우리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도 도와주실까?

- 아니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려주시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잘 할 수 있을까?

- 나도 막막해서 늘어놓는 하소연이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 성령이 임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우리 영역 밖이다.

- 본문에서처럼 성령이 강림하길 바라지만, 성령 강림에 우리가 줄 수 있는 영향력은 없다.

- 단지 기다리는 것 뿐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이다.

- 열심히 '빨리' 하는 것 뿐이다.

- 정답을 찾기 위해 숙고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 '잘' 하는 것은 성령의 영역이다.

- 정답을 찾기 위해 '빨리' 시행착오를 겪는 것만이 우리의 영역이다.

- 아무거나 할 수는 없지만, 뭐든 해보는 것이다.

전도를 위해 지금 당장 '빨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 아무거나 막 해서 다른 교회들과 같은 실수를 똑같이 범하면 안되겠지만, 뭐든지 다 해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전도가 무엇일지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