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도행전

사도행전(01) 1:1-11 서론 - 너희는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첫 시간이다.

- 어떤 성경이든 첫 번째 시간은 떨린다.

- 떨리는 것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다.

- 마치 지도와 나침반만 달랑 들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신대륙을 향해, 1년 이상 걸리는 긴 항해를 떠나는 선장의 마음이 든다.

- 일단 길도 모르고, 도중에 있을 거센 파도와 폭풍우도 두렵고, 배에 타고 있는 다른 선원들의 생사도 걱정 된다.

- 모든 것을 다 책임져야 하지만, 나 역시 앞 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첫 발을 내딛는 방향 설정이 너무 어렵다.

- 일단 출발하고 나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이전 선택에 의해 제한된다.

- 그리고 출발지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래서 선택이 쌓이면 쌓일수록, 다음에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점점 줄어든다.

-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은 점점 쉬워진다.

그런데 가장 첫 번째 선택에는 선택지가 이론적으로 무한대이다.

- 마음만 먹으면 어떤 곳으로도 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어려울 수 밖에 없고, 신중해야 하며, 막막할 수 밖에 없다.

-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도 첫 수의 계산량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성경 하나의 책 안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본문 메시지가 명료해지고 쉬워진다.

- 반면에 초반부에는 갈피를 잡기 힘들고 불분명하다. 

특히 긴 성경을 시작하는 것은 더 힘들다.

- 마치 1달 짜리 항해보다 1년 짜리 항해가 더 어려운 것과 같다.

- 1년 짜리 항해는 1년 동안 있을 다양한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 6장 짜리 에베소서보다 28장 짜리 사도행전에 더 다양하고, 포괄적이며, 더 근원적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다고 해서 항해하지 않을 수도 없다.

- 항해하지 않고 신대륙을 개척하지 않으면, 당장 식량을 얻을 수 없어 굶어 죽을 수 있다.

- 망망대해를 항해하듯 새로운 성경의 바다로 들어가지 않으면, 영적 양식을 얻지 못해 영적으로 굶어 죽는다.

많은 교회가 죽어가는 이유도 매번 아는 구절, 익숙한 성경만 반복해서 보기 때문이다.

- 이미 알고 있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듣기 때문이다.

- 그런 익숙함 속에서 자기는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 실상은 많은 것을 먹는 것 같지만, 헛물만 들이키고 있는 꼴이다.

이러한 항해는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하지 않는 것도 위험하다.

- 항해를 하면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있고, 항해를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 우리에게는 이런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다.

- 두 선택지의 차이는, 후자는 살 확률이 0%이지만, 전자는 살 확률이 작게나마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빠져 죽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새로운 성경의 바다로 뛰어 드는 것이다.

우리는 항해 도중 파도에 휩쓸려 길을 잃고 파선할 수 있다.

- 그만큼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다.

-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손길을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복된 길이다.

- 우리는 나름대로 성경을 열심히 읽겠지만, 우리에게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 열심히 해석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좌로 우로 치우칠 뿐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미양', 즉 좌나 우로 치우치는 어리석은 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폭우와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신다.

- 우리의 엉뚱한 성경 해석을 통해, 참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 그래서 우리 계획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 교회를 이끌어 주실 것이다.

- '미양', 즉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해주실 것이다.

이러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망망대해로 항해를 떠나는 것이다.

- 그 곳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 마치 광야에서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나타나셨던 것처럼 말이다.

너무 거창하게 얘기했는데, 한 마디로, 사도행전 열심히 읽자는 뜻이다.

- 처음 읽으면, 언제나 그랬듯이, 막막하고 어려울 것이다.

- 본문을 겉으로만 읽지, 속 깊은 의미는 알기가 어려울 것이다.

- 때로는 성경이 이상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나는 왜 이렇게 성경 이해가 힘들까 자책하기도 할 것이다.

- 하지만 참고 계속해서 읽어 나가자. 

- 처음에는 다 어렵다.

- 사도행전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쌓이면, 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사도행전 전체 구조

항해를 시작할 때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을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전체 지도를 보는 것이다.

- 그래야 출발점과 도착점을 중심으로 효율적인 기착점과 중간 경유지를 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전체 구조를 봐야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 그러기 위해서 이야기 흐름이 끊어지는 부분을 알아야 한다.

- 각 구분된 이야기의 개별적인 메시지를 알고, 각 메시지가 하나의 메시지로 연결될 때, 본문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다.

사도행전은 다양한 기준으로 다양하게 구분한다.

- 워낙 기니까, 나누는 방법도 다양한다.

① 지역을 기준으로 구분

- 1:6-8:1 -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 8:2-11:18 -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활동

- 11:19-28:31 - 땅 끝 로마까지의 활동

② 전도 주체를 기준으로 구분

- 2-12장 - 베드로 행전

- 13-28장 - 바울 행전

③ 전도 대상을 기준으로 구분

- 2-7장 -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 8:1-25 - 사마리아인

- 8:26-40 - 내시

- 9장 - 핍박자

- 10-28장 - 이방인

④ 요약 문구를 기준으로 구분

- 사도행전에는 3개의 중요 요약 문구가 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 12:2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행 19:20]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

- 이 문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퍼져 나간다는 요약 정리를 해준다.

- 이를 기준으로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1:1-6:7 - 유대인에게 퍼져 나가는 하나님의 말씀

- 6:8-12:24 - 유대인을 넘어 사마리아인, 이디오피아 내시, 헬라인에게 퍼저 나가는 말씀

- 12:25-19:20 - 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퍼저 나가는 하나님의 말씀

- 19:21-28:31 - 땅 끝까지 퍼저 나가는 하나님의 말씀

정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다양한 주체에 의해서, 다양한 대상에게, 다양한 지역으로, 어떤 상확 속에서도 계속해서 퍼저 나간다는 것이다.

- 이것이 사도행전의 핵심이다.

-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 이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사람과 많은 상황이 이용된다.

- 기적적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통해 증명되기도 하고, 말씀을 배척함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퍼저 나가는 상황을 통해 증명되기도 한다.

- 즉, 베드로나 바울이 보여주는 기적과 대담함의 매력에 빠져서 말씀 자체가 갖는 능력을 간과할 수 있는데, 오히려 반대로 말씀의 능력에 몰입하여 베드로나 바울이라는 인물을 간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 이것이 사도행전을 읽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다.

- 다이나믹하게 일어나는 현상의 매력에 빠지지 않고, 그 기저에서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말씀에 몰입해야 한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도 하에 성령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도행전의 핵심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사도행전 전체의 서론이다.

- 어떤 점에서 그렇냐면, 누가복음 끝 부분과 중복되기 때문이다.

- 누가복음을 차용하되 살짝 변형해서 사도행전의 방향을 제시한다.

참고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은 하나의 책으로 본다.

- 근거가 많지만 다 알 필요는 없고, 대표적으로 두 책 모두 데오빌로에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승천을 중심으로 누가복음은 이전을, 사도행전은 이후를 다룬다.

- 따라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장선 상에서 봐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번 본문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연결하는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이다.

- 이야기 전개 순서와 뉘앙스만 다를 뿐, 완전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렇다면 왜 반복, 변형했냐?

- 이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사도행전의 방향성은 무엇인가?

-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번 본문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24:36-53)과 사도행전(1:3-11)을 비교해보면, 

- 사도행전의 대부분의 내용이 똑같이 누가복음에서도 발견된다.

- 하지만 몇 가지 구절(1:5, 6, 7, 10-11)은 사도행전에만 나온다.

- 이것을 통해 누가는 사도행전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 이것이 정말 사도행전의 방향성인가를 지금 당장 전부 증명할 수 없다.

- 사도행전을 끝까지 봐야 알 수 있을 뿐이다.

- 하지만 이것의 진위여부를 판별하는 것이 사도행전을 읽는데 또 하나의 즐거움을 줄 것이다.

- 그것을 염두하면서 사도행전을 재밌게 읽어 보자.


1:1-2 표제 - 데오빌로에게 쓰는 헌정사

누가는 누가복음을 언급하며 사도행전을 시작한다.

-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출생부터 승천까지 모든 일을 기록했다고 말한다.

- 그러면서 3-11절까지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까지를 빠르게 훑는다.


1:3-5 예수님의 명령 -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 많은 것들을 가르치셨다.

- 우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가르치셨다.

- 누가복음을 보면, 구멍이 난 손과 발을 만져 보라고 하시고, 직접 식사까지 하셨다.

-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을 증명하시려는 퍼포먼스다.

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도 말씀하셨다.

-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없다.

-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구약을 근거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신 것 뿐이었다.

[눅 24:25-27]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26]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눅 24: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들은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사도행전도 전체에서 동일하다.

[행 8:12]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니, 남자나 여자나 다 그의 말을 믿고서 침례를 받았다.

[행 28:23]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

[행 28:31]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동일시 하고 있다.

- 물론 단어를 둘로 구분한 것에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 강조점이 다를 것이다.

- 그러한 미묘한 차이점은 사도행전에 대한 지식이 쌓인 후에 생각해보자.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이다.

- 성령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체불가한지 요한복음과 삼위일체 책에서 충분히 나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성령님인 것은 자명하다.

-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런데 5절에서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은 요한의 침례가 언급된다.

- 요한의 침례는 예수님의 사역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 예수님은 요한의 침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 시대 이전의 사역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갖는다.

- 새 시대를 준비하게 할 수는 있지만, 새 시대로 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새 시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님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갑자기 요한의 세례를 추가했을까?

- 요한의 세례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기에 뭔가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인데, 비판 대상은 무엇일까?

- 나는 이 비판 대상이 사도행전 전체 방향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 이것을 비판하기 위해 사도행전이 기록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비판 대상은 '안주'이다.

-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것에 '안주'하는 것이다.

- 자신이 죄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은 '안주'가 아니라 '확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이 하나됨에 이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① 5절에 요한의 세례가 갖는 의미 때문이다.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이다.

[눅 3:3]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죄 사함' 안에 '성령 강림'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눅 3: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침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오.

- 즉, '죄 사함'의 침례는 옛 시대를 끝내는 마지막 시점이지만, 새 시대를 시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의 침례는 옛 시대에 '안주'하는 것을 뜻한다.

- 성령을 통해 새 시대로 넘어 가는 것을 배제한채 말이다.

- 사도행전은 이러한 '안주'를 비판하기 위해 요한의 침례를 추가한 것이다.

② 6절에 제자들 질문의 문제점 때문이다.

일단 제자들의 질문은 틀렸다.

- 왜냐하면 7절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알 바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 물어보면 안되는 질문이었다.

-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 잘못된 생각이 제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게 뭘까?

- '때가 지금인지'를 물어보는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이 뭘까?

- '그 때'를 기다리는 신앙 생활을 끝내고 '안주'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 때', 즉 종말이 이미 왔다면, 더 이상 무언가를 성취할 필요 없이 '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행 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 내 증인이 되어, 나를 증언하라고 말이다.

- 그것도 내 주변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이방 지역인 온 유대와 사마리아, 게다가 땅 끝인 로마와 스페인까지,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에게 남김 없이 증언하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자신이 죄 용서 받은 것은 신앙 생활의 끝으로서 안식하고 안주해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 지금은 참 신앙 생활의 시작이며, 진짜 신앙 생활은 이제부터라는 것이다.

- 성령을 통해 만물에게 복음을 전해서, 만물이 하나 되도록 하는 것이 제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진짜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안주'할 때가 아니라, 새롭게 일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③ 11절에 승천하신 예수님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제자들의 태도 때문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한다.

- 여전히 '안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천사들은 제자들을 책망한다.

-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안주'하지 말라고 말한다.

- 그렇게 나오진 않았지만, 성령을 받아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천사들이 제자들의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제자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안식의 날, 안주의 날, 곧 종말은 반드시 올 것을 확인시켜준다.

- 그 때에는 정말 계속 그 자리에 머물며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가 지금은 아니다.

-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천국을 맛보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천국의 맛이 취해 안주할 때가 아니다.

- 오히려 더 열심히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할 때이다.

-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기록 당시에는 이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 지금은 안식의 때인가 아닌가를 두고 충돌했던 것이다.

-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은 것에 만족해하며, 증인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논쟁은 굉장히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 만약 지금이 안식의 때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죄 사함 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하야 한다고 말하다보면,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까지도 과소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지금 복음을 증언하는 것에 밀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찮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또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죄 사함 받은 것에 몰입하면, 안주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 너무나 좌로나 우로 치우치기 쉬운 예리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만큼 오해도 컸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 칼빈주의자들은 죄 사함의 은혜를 강조하며 안주에 빠질 위험에 있다.

- 반대로 안미니안주의자들은 증언을 강조하며 예수님의 은혜을 간과할 위험에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우리는 누구도 자신을 칼빈주의 혹은 알미니안주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 하지만 마음 속 가장 밑바닥에는 반드시 둘 중 하나에 치우쳐있다.

- 예수님 믿고 안식하고 싶다고 바라던지, 반대로 예수님 믿고 더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우리에게도 사도행전이 필요한 것이다.

-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이미 치우쳐있고, 또 치우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말이다.


1:6-8 제자들의 잘못된 질문과 예수님의 올바른 답 - 내 증인이 될 것이다.

6, 7절은 이미 설명 했으니, 8절만 보자.

-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능력을 받게 된다.

-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면 유능한 '액션 히어로'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 하지만 성경은 그 능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이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의심이 들 수 있다.

- 이 능력 있다고 해도,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고통스러우며, 여전히 죽기 때문이다.

- 이 능력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도 그랬고, 베드로와 바울도 배고프고 고통 당하며 죽었다.

- 이런 관점에서 이 능력은 쓸모 없다.

- 따라서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신앙은 쓸모 없다.

그래서 이 능력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 배고픔, 고통 당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 베드로, 바울처럼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 능력이 굉장히 절실하다.

- 왜냐하면 그들에게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의 뜻,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 그것을 위해 예수님을 증언하는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만이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기대하고 바라며, 능력이 주어졌을 때 기뻐할 수 있다.

- 그래서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내내 자신을 증언하다가 죽으신 것이고, 베드로, 바울도 똑같이 죽음을 감수하고 예수님을 증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오해한다.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는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 주시며, 기적을 일으키시기도 하고, 많은 것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기도 한다.

- 그런데 그 목적은 딱 하나이다.

-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 돈을 벌고, 명예를 얻어, 만수무강하며, 세상에서 인정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지가 되고, 조롱 당하고, 건강을 잃어서,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통해 예수님이 증언되기 위해서이다.

- 예수님, 베드로, 바울의 인생이 그렇게 이용된 것처럼 말이다.

성령 충만은 이런 것이다.

- 먼저 우리가 돈, 건강, 명예,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빼앗기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건강, 명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인생을 사용하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인생을 사용하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얼마나 참된 것인지 증언하는 것이다.

- 이것 외에 성령 충만은 없다.

그러니 조심하자.

- 성령 충만 함부로 구했다가 큰일 난다.

-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 것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예수님, 베드로, 바울의 인생이다.

- 그러니 신중하게 잘 생각해서 성령 충만 구하자.

-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 충만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다른 기도에 미적지근하셔도, 성령 충만을 구하는 기도에는 즉각적이시기 때문이다.


1:9-11 예수님의 승천 -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후 승천하신 상황에서 우리는 굉장히 고민스럽다.

- 우리는 내일 예수님이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할까?

- 혹은, 과거 2000년 동안 안오셨기에, 앞으로 2000년 동안도 안오실 것처럼 살아야 할까?

- 예수님이 내일 오실 것처럼 일상을 완전히 외면하고 신앙에 몰두하며 살아야 할까?

- 아니면, 먼 미래에 오실 것이지만 지금은 당장은 아니니까, 일상에 최대한 충실하게 살아야 할까?

이 문제는 우리보다 초대 교회 당시 뜨겁게 논란이 되었던 문제였다.

- 우리에게는 2000년 동안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전례가 있다.

- 그래서 '당장 내일은 안오시겠지.'라고 생각하며 맘 편히 산다. 물론 근거는 없지만 말이다.

- 하지만 초대 교회 당시에 곧 오시겠다는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우리처럼 편하게 살 수 없었다.

- 언제나 '내일 오시면 어짜지?' 하는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 그렇게 약 30년이 지난 상황에서 사도행전이 쓰여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두 부류가 생긴 것이다.

- '내일 안와'파와 '그래도 내일 와'파가 나뉜 것이다.

- '내일 안와'파는 신앙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일상에 충실하며 살았다.

- 반면에 '그래도 내일 와'파는 더욱 극단적으로 일상과 동떨어진채 신앙에 몰두했다.

- 그러면서 '내일 안와'파는 세속주의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래도 내일 와'파는 극단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 그러니 교회 안에서 이 문제로 인한 분쟁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사도행전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 다른 복음서에까지 관련 내용이 나온다.

-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결론이 뭐냐?

- 이미 예상했겠지만, 두 가지 마음을 다 갖는 것이다.

- '내일 안와'의 심정으로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차분히 복음을 전하며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

- 동시에 '그래도 내일 와'의 심정으로 오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는 각오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복음에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둘 중 하나에 치중하면 어떻게 되냐?

- '내일 안와'에 치중하면, 미래를 준비한다는 핑게로 오늘 헌신에 소극적이 된다. 

- 죽음을 감수하고 신앙에 몰입하는 도전을 내일로 미룬다.

- 반면에 '그래도 내일 와'에 치중하면, 깊이 있는 신앙에 이르지 못하고 충동적이 된다.

- 그러다보면 지나치게 소모되어 롱런하지 못하고 도중에 신앙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본문은 두 가지 생각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 7절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지금이 아니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 반면에 11절에서는 그래도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며 긴박감을 불어 넣는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에게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차분함과 단기적인 관점에서의 열정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 그렇게 차분함과 열정이 공존할 때에만 신앙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의 차분함도, 단기적인 관점의 열정도 없다.

-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보며 땅 끝까지 증인이 되지도 않고, 단기적인 관점에서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신앙에 열정을 쏟지도 않고 있다.

-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는 그냥 신앙 생활 하기 싫다.

- 그냥 대충 적당히 하루 하루를 때우며 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본문은 경고한다.

- 장기적인 관점에서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내 증인이 되라고.

- 동시에 단기적인 관점에서 종말과 재림은 반드시 곧 올 것이니, '안주'하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대비하라고.

이 두 가지 반대되는 메시지가 사도행전 전반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 정말 맞나 본문을 통해 계속해서 확인해보자.


주제

우리는 언제나 '안주'하려 한다.

- 장기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세운 장기 계획에 '안주'하며, 계획을 충실히 이행하기만 하면 인생에 별 문제 안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 반면에 단기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오늘 하루 충실했던 것에 '안주'하며, 미래 계획이야 어찌됐든 이렇게 열심히만 살면 별 문제 안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 인생은 절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 아무리 좋은 계획을 가졌고, 오랫동안 그 계획대로 일을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코로나와 같은 예상 밖의 일로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이 계획이다.

- 또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산다고 노력에 대해 보상 받지 못한다.

- 평생 최선을 다해 배의 노를 저었는데, 내려서 알고 보니 해적선이었다는 예화처럼, 노력은 우리를 배신할 수 있다.

- 인생에서 계획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 계획과 노력을 믿고 안주하려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뿐이라는 점이다.

- 신앙이건 일상이건, 장기적인 관점에서 최선을 다해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단기적인 관점에서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 그러니까 인생은,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어떤 방법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어서 '안주'하며 하던대로 어리석게 사는 것 뿐이다.

이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 그것을 위해 종말은 '내일 안와'도 아니고, '그래도 내일 와'도 아니며, 동시에 둘 다 맞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 그래야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단기적으로 '몰입'하며, 동시에 계획과 몰입 둘 다 소용 없고, 오직 '성령'만이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사람의 신앙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가 망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

그러나 현실은 이 셋 중에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 우리에게는 제대로 된 장기적 계획도 없다.

- 또한 오늘 하루만이라도 집중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 게다가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사도행전은 그런 우리에게 동기 부여하는 책이다.

-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얼마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차근차근 퍼저 나가는지 보여준다.

- 또한 그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제자들이 내일은 없는 것처럼 얼마나 말씀에 몰입해서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 게다가 그 모든 일을 성령님께서 얼마나 섬세하기 이끌어 가시는지 보여준다.

- 그래서 하나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우리로 하여금 세 개를 전부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전체 틀이다.

- 물론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본문을 통해 함께 직접 확인해보자.

- 잘못된 틀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니까.

바라기를, 사도행전이 끝나갈 때에는 이 세 가지에 대한 동기가 불러 일으켜지기를,

- 그래서 장기적인 계획, 단기적인 열정, 성령님에 대한 믿음이 모두 완성되기를 바란다.

- 그래서 신앙에서 승리하고, 인생의 참 맛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