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사실상 단순하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 그래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권한다.
- 사람들이 이를 따른자, 함께 신앙 생활하는 공동체가 생겼다.
- 그러자 더 많은 사람이 구원 받게 되었다.
따라서 메시지는 딱 두 가지이다.
- 복음이 전해지니, '회개'가 일어났고, '공동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도 회개하고 공동 신앙 생활 하자! 가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단순한 이야기 속에 엄청난 전환이 있다.
-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세례 의식을 받고, 함께 모여 말씀, 기도, 교제하며, 식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 이야기 자체로만 보면 별거 없다.
-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다.
- 우리 교회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왜냐하면 내가 이 본문을 통해서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겉모습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의 진짜 메시지는 겉모습의 변화가 아니라 본질의 변화에 있다.
- 단순히 세례 의식을 받은 것 자체가 아니라, 죽을 수도 있음에도 세례 의식을 받을 수 있게 한 내적인 변화이다.
- 또한 단순히 교제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서로 함께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내적인 본질의 변화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해설서의 너무 많은 부분이 겉모습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세례 의식은 어떻게 받았고, 공동체 모임은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는 거의 말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또 불만이 하나 더 있는데,
- 그렇게 겉모습에 초점을 두다 보니 '회개'와 '공동 신앙 생할'을 연결시키지 못한다.
- 두 가지는 확연히 다른 겉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두 가지를 따로 떼어놓고 해석한다.
- 그러니 둘 다 바르게 해석하지 못한다.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고, 공동 신앙 생활은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다.
- 즉, 복음 선포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모두와의 관계 회복이 일어난 것이다.
- 따라서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을 일으킨 본질의 변화는 관계 회복이다.
이렇게 관계 회복이 일어나자 다양한 겉모습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 먼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알아도 이용했던 과거를 회개하고,
- 앞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겠다는 고백으로서 세례를 받고,
- 그와 같은 관계를 사람들과도 맺기 위해 지식적으로는 성경 공부, 육체적으로는 식사와 공동 소유, 정서적으로는 교제와 찬양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본질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 그래서 다양한 겉모습의 변화를 개별적으로 이해하면,
- 그래서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을 분리해서 이해하면,
- 분리되어 일관성 없는 신앙을 갖게 된다.
- 개인 신앙 따로, 공동체 신앙 따로가 된다.
신앙에 일관성이 없어지면 굉장히 무서워진다.
- 왜냐하면 일관성 없는 틈에 자신의 주관이 침투하기 때문이다.
- 좋게 말해서 주관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앙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 왜곡이란 말을 순화하면, 신앙을 취사선택 한다는 것이다.
- 즉, 유익이 되는 것만 취하고,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버린다는 뜻이다.
- 이것이 일관성 없음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다.
취사선택 해서 왜곡된 신앙의 대표적인 예가 율법주의 바리새인이다.
- 그들은 성경 중에서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율법만을 선택해서 차등 적용했다.
- 그래서 예수님은 할례법과 안식일법을 예로 드시며, 안식일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다.
이렇게 취사선택된 신앙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될 수 밖에 없다.
-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순간이 반드시 온다.
-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취사선택으로 배제된 신앙의 일면을 직면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손해를 감수하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신앙의 일관성을 회복하던지,
-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 자신의 유익을 지키던지.
-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는 전자를 선택했고, 나머지 바리새인들은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신앙에 일관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 일관성 없는 틈에 욕망이 침투하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도 일관성 없음에 가려서 신앙이 변질된 것조차 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결국 아무런 죄책감 없이 변질된 신앙으로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 자신의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니, 예수님을 죽이면서도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한다.
- 회심 이전에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가?
- 당연히 관계 회복이라는 키워드로 묶인다.
- 그런데 이는 너무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라 막상 적용하려면 막막하다.
그래서 대신에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표현을 제시한다.
- 결론적으로 말해서,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은 우리의 삶 속에서 라이프 스타일을 전환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 다시 말해서, 라이프 스타일이 전환될 때에야 비로소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이 완성된 것이다.
왜 굳이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었냐?
- 찾아보니까, 이는 '개인이나 집단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마케팅 용어로 많이 쓰이는데,
- 이 용어의 장점은, 너무 추상적이지 않으면서 너무 구체적이지도 않다는 것이고, 너무 집단적이지 않으면서 너무 개인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 어느정도 구체성을 띄면서도 본질을 담고 있고, 개인이 어느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서도 집단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는 비슷한 의미지만 너무 집단적인 용어이다.
- '교회 문화'라고 하면 교회라는 집단이 모였을 때 드러나는 현상이다.
- 개인은 배제된다.
반대로 가치관은 너무 추상적인 용어이다.
- '관계'는 가치관 범주에 속하는데,
- 그래서 머리 속에서는 개념이 분명하지만, 삶 속에서 실천하려면 너무 추상적이라 막막하다.
반면에 '라이프 스타일'은 우리 삶 전반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으로 눈에 그려볼 수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 가치관과 문화와 같은 본질를 반영하면서도,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방식까지 포함한다.
그렇다면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은 라이프 스타일을 어떻게 전환하는가?
-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필요 없는 라이프 스타일에서, 하나님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로 전환된다.
- 또한 공동 신앙 생활을 통해, 공동체 없이도 혼자서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에서, 공동체 없이 혼자서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로의 전환된다.
도대체 그렇게 전환된 라이프 스타일이 뭐냐?
- 그건 아직 나도 잘 모르겠다.
- 고민 중이다.
- 바울은 분명히 하니님 없으면, 공동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을 가졌다.
- 인생 전체가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해 재설계 되었다.
-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 바울의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 본질은 담되, 우리 시대와 우리 교회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이 있어야는데,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 없이 유지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을 떠올릴 수 없으면, 회개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 공동체 없이 유지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을 떠올릴 수 없으면, 교회 생활 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 바울처럼 전환된 라이프 스타일대로 실제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논외로 하자.
- 적어도 머리 속에서만이라도 상상할 수 있어야 회개와 공동체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의식주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의식주가 없으면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 반면에 신앙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이 없어서 무너지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 실제로 우리 삶에서 신앙이 그렇게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없으면 무너질만큼 신앙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없으면 무너질만큼 우리가 신앙을 의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지금 내가 이렇기 때문이다.
- 하나님, 가족, 교회 이 세 가지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 적어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 그런데 문득 이 세 가지가 내 인생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된 것이다.
- 하나님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는데 방해를 받고, 가족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데 방해를 받고, 교회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 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할 때는 가족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가족과 있을 때는 교회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교회와 있을 때는 가족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나에게 하나님, 가족, 교회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을 뿐이었다.
- 하나님, 가족, 교회가 없어도 내 삶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 관계가 전부라고 말하는 나 역시 하나님, 가족, 교회 관계를 전부로 삼고 있지 않았다.
- 단지 내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 내 라이프 스타일은 여전히 관계가 아닌 나를 중심으로 거래, 이용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은 초대 교회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 2000년 전의 일이라 선명함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 이들의 삶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몰입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 공동 소유를 하였기에, 이들은 실제로 공동체가 없으면 의식주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 각자 따로 살던 사람들이 회개를 통해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라이프 스타일로 전환한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도 라이프 스타일의 전환이 필요하다.
- 나를 중심으로 타일을 이용, 거래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를 중심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 하지만 우리는 지금 신앙 생활하기 이전과 거의 똑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 바뀐 것이라고는, 하루에 말씀 한 장과 15분 기도, 그리고 주말에 말씀 준비하는 것이 전부이다.
- 우리에게 하나님과 공동체가 없어진다고 해도, 라이프 스타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신앙 생활 이후 성경 지식도 늘었고, 가치관과 생각도 바뀌었다.
-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라이프 스타일의 전환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 속 마음은 바뀌었을 수 있지만, 살아가는 방식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지적하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그 동안 충분히 열심히 달려왔다.
- 우리의 가치관과 너무 달라서 아무리 들어도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관을 깨닫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
- 가치관이 조금씩 바뀌었다.
- 여기까지 온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 나는 감히 하나님이 내려주신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 삶의 일부에 신앙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 삶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 의심해보는 것이다.
- 제로 베이스에서 모든 것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 그런 후에 새로운 가치관에 맞게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다.
정말 실제로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냐 없냐는 나중에 고민해보자.
- 먼저 머리 속에서 상상만이라도 해보자.
- 내 일이 아니라 남 일이라고 가정하고 고민해보자.
- 만약 완벽한 신앙의 모델인 바울이 지금 태어났다면 어떤 라이프 스타일로 살았을까 상상해보자.
- 그래야 좀 더 객관적으로 우리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상상할 때, 상상한 것 중에 딱 하나만이라도 삶에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왜 이렇게 고민해야 하냐?
-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급변하기 때문이다.
- 현재 다수의 교회가 보여주는 신앙 생활이 현재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런 방식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가치를 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복음의 가치를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 신앙과 일상이 괴리되어 일관성 없는 신앙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 교회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 변화된 세상에 변화된 신앙의 모습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 반면에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며 안주하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이 고민하고 있다.
- 그런데 문제는 아직 아무도 답을 내지 못했다.
- 이 문제가 당장 답을 내지 않아도 기다릴 수 있는 문제라면 여유있게 차분히 생각할텐데, 혹은 누군가 답을 내려주길 기다릴 수 있을텐데, 그렇지가 않다.
-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기다릴 여유가 없는 문제이다.
- 그래서 우리라도 빨리 열심히 고민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
- 안그러면 우리가 죽으니까.
본문은 2000년 전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
- 그렇다면 2020년의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의 라이프 스타일은 뭘까?
- 관계를 중심으로 신앙과 일상을 통합하고, 하나님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뭘까?
- 함께 고민해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뉜다.
① 37-40절: 복음에 대한 반응 - 회개
② 41-47절: 회개로 인한 결과 - 공동 신앙 생활
- 복음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 그러자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되어 공동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균형잡힌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다.
- 복음이 전해지면 무조건 회개하고 공동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고,
- 반대로 이러한 회개는 지금은 일어날 수 없는 신비한 일로 치부하는 것도 문제이다.
현실은 좀 다르다.
- 복음이 전해진다고 곧바로 회개가 일어나지도 않고,
- 회개가 일어난다고 곧바로 신앙 공동체가 생기지도 않으며,
- 공동체가 생긴다고 문제 없이 잘 유지되지도 않는다.
- 전도, 회개, 공동체의 모든 과정마다 예상할 수 없는 좋은 일 혹은 나쁜 일이 생기고,
- 그 과정마다 혼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 자동으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 복음을 올바로 듣고 믿으면, 반드시 회개하여 삶이 완전히 재설계되어야 한다.
- 회개 없는 믿음은 없다.
- 그리고 회개를 했다면, 반드시 공동 신앙 생활이 있어야 한다.
- 드러나는 모습은 다를 수 있어도, 회개를 통해 재설계된 삶은 공동체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
- 이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떤 지역, 어떤 문화권, 어떤 시대에도 동일하다.
회개와 공동 신앙 생활은 항상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 이렇게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을 때, 본문의 회개 사건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37-40절: 복음에 대한 반응 - 회개
베드로가 구약을 근거로 그리고 방언을 근거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했다.
- 그것을 사람들이 믿자 여러 가지 반응이 일어났는데,
- 그 중에 가장 1차원적인 반응은 '찔림'이다.
[행 2: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 '찔림'이란 단어는 katanussó로서 pierce-down이란 뜻이다.
- 즉, 마음이 바늘에 깊이 찔린 것처럼 아픈 감정을 말한다.
복음을 듣고 왜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람마다 다른 이유 때문에 찔림을 느꼈을 것이다.
- 어떤 사람은 예수를 죽이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어떤 사람은 예수가 죽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해서, 어떤 사람은 예수가 죽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 어떤 사람은 예수가 죽임 당함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하게 자기 일만 해서, 어떤 사람은 예수가 죽임 당함에도 나서서 말리지 못해서 등 가장 적극적인 자세로부터 가장 소극적인 자세까지 각자의 입장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깊은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 모두 자기가 죽였다고 생각했다.
- 그들은 회당에서 함께 모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평생 동안 반복했다.
- 말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수도 없이 고백했다.
- 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리는 사람은 정말 한 사람도 없었다.
- 모두 암묵적 동조자였을 뿐이었다.
-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다.
- 전제 군주제에서 반역죄가 가장 큰 죄이듯, 모든 사람은 죄 중에 가장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이 이렇게 증명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해결 방법을 묻는다.
[행 2: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 글로 보니 엄청 점잖다.
- 하지만 추정컨데, 절규에 가까운 울부짓음이었을 것이다.
- 비유를 하자면, 자신이 부모를 죽인 살인자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의 절규였을 것이다.
- 마치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찌를 때의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의외로 간단하다.
- 회개하고 세례 받으라! 가 전부이다.
- 이게 번역문에서는 모호한데, '회개하라'와 '세례 받으라'만 명령형 동사이고 나머지는 수식어구이다.
[행 2:38, NIV] Peter replied, “Repent and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forgiveness of your sins). And you wi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Spirit.
- 여기서 회개는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전환이고, 세례는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외적인 전환이다.
- 부차적으로, 이러한 전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죄 용서를 수반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답변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 그것은 베드로의 답변 이면에 있는 전제이다.
- 베드로의 답변이 유효하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받아주셔야 한다.
- 어쩌면 회개하고 세례 받으라는 메시지보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회개할 때 용서하신다.
- 자신을 죽인 사람도 용서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다.
-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부활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 부활해서라도 내가 너를 용서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 이렇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우리는 회개할 수 있다.
회개가 먼저냐, 믿음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있다.
- 정답은 쉽다.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질문이다.
- 서로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맥락에서 회개보다 믿음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다.
-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뻣는 것이다.
- 용서에 대한 믿음이 먼저 있을 때에만 죄를 고백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믿는 용서의 크기만큼만 우리 죄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다.
- 만약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거짓말을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면, 그때에야 비로서 거짓말한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다.
- 또 만약 내가 하나님을 살인까지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을 때, 살인한 죄를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회개로 인한 죄 용서를 '약속'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행 2: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 죄 용서의 약속을 믿을 때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인류의 죄는 명확하다.
-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죽인 죄이다.
- 따라서 본문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죽인 죄에 대해 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회개보다 더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을 죽인 죄도 용서하신다는 믿음이다.
-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용서 못하실 죄는 전혀 없다는 믿음이다.
- 그 믿음이 근원적인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 그 믿음만이 나의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준다.
41-47절: 회개로 인한 결과 - 공동 신앙 생활
베드로의 가르침 따라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 그러자 두 가지 전환이 일어났다.
- 첫째는 공동체 내적인 전환, 둘때는 공동체 외적인 전환이다.
공동체 내에서는 공동 신앙 생활이 시작되었다.
- 특징은 세 가지이다.
[행 2: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① 사도들의 가르침 - 말씀
②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 - 교제
③ 기도
- 참고로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의 정확한 번역은 서로 사귀는 일 '곧' 빵을 떼는 일이다.
-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 사이에 and가 없다.
이렇게 공동체는 관계를 회복했고, 그 결과 말씀, 교제, 기도에 몰두하고 힘썼다.
-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심이 들기도 한다.
- 말씀, 교제, 기도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과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일까?
- 이 세 가지는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항상 하던 것 아닐까?
- 회당에서 하던 것을 방향만 살짝 바꾼 것이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추측한다.
- 회당에서도 하브루타를 통해 관계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배웠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과의 관계는 수단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목적이다.
하지만 본문의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을 수단 삼지 않는다.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만큼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 소유와 같은 라이프 스타일이 나온 것이다.
[행 2:44-45]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 만약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공동 소유는 낭비이다.
- 사람에게는 최대한 돈을 아끼고, 남은 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더 유익이다.
- 그러나 이들은 전 재산을 사람에게 썼다.
- 사람과의 관계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 그런데 딱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시한다.
- 절대로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 교회 예배를 장식하기 위한 도구로, 교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일꾼으로 사용한다.
- 좋은 도구, 좋은 일꾼을 만들기 위해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할 뿐이다.
하지만 본문의 교회 공동체는 함께 모여서 먹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행2: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 물론 모여서 신앙을 나눴을 것이다.
- 하지만 그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 다른 사람과 신앙을 나누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되었다.
내가 왜 이렇게 신앙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하냐면,
- 만약 사람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수단이 되면, 너무 추해지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결혼에서 배우자와의 관계가 수단이 되고 다른 것이 목적이 되면, 그러한 관계는 매춘과 다르지 않다.
- 사람을 유희의 수단 삼는 것이 매춘의 본질이다.
- 사람을 수단 삼는 신앙과 매춘은 모두 사람을 통해 유익을 얻는다는 점에서 똑같다.
- 사람을 통해 얻는 유익이 하나님과의 관계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 따라서 언제나 사람과의 관계는 본질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또 사람과의 관계를 목적 삼다 보면 생기는 문제가 있다.
- 어느덧 하나님을 수단 삼게 된다.
- 만남은 하나님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사람과의 관계가 너무 좋아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 사람이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나는 신앙만 분명하다면, 이러한 변질은 큰 문제 없다고 본다.
- 사람과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신앙을 더 많이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신앙 없이는 절대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 변질되었다고 하더라도 금세 다시 바른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면, 그것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 교회에서는 마음껏 사람을 목적 삼았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공동체 외적인 전환도 일어났다.
[행 2: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행 2: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 공동 신앙 생활로 인해 드디어 세상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 그러니 전도도 되었다.
- 이렇게 공동체의 관계 회복은 전도의 본질이다.
전도를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반만 맞다.
- 예수님과 함께 공동체가 전해져야 한다.
-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 모두인 것처럼, 전도의 본질도 예수님과 공동체이다.
-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예수님과 공동체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제
라이프 스타일의 전환이 필요하다.
- 그리고 전환의 방향은 당연히 '관계'이다.
-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고, 공동 신앙 생활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신앙 생활 하고 있지 않다.
- 우리는 신앙을 지나치게 말초적, 지엽적, 실천적 행위로 생각하던지,
- 반대로 지나치게 이념적, 영적, 교리적 지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 그래서 나는 예배 잘 드리고, 말씀 기도 잘하며, 전도 봉사 하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던지,
- 반대로 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고, 언제나 예수님 생각 뿐이며, 성경을 잘 알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실천적 행위도 필요하고, 교리적 지식도 필요하다.
-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충분하지는 않다.
- 충분하려면 우리의 삶 전체가 같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어야 한다.
-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잘 때까지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 언제 일어나고, 무엇을 먹고, 언제 어디를 가고, 왜 가며, 언제 돌아와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어떻게 쉬다가, 언제 잠을 잘 것인지까지 전부 새로워져야 한다.
- 이러한 총체적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본문은 공동 신앙 생활의 모습을 최대로 축약해서 보여준 것이다.
신앙을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그래서 살던대로 살면, 머리, 몸, 손 발이 다 따로 움직이게 된다.
- 머리는 거창한 영적 이념에 잠겨 있는데, 몸은 어뚱하게 자본주의에 쩔어있고, 손 발은 교회 일 하느라 정신 없게 된다.
- 이것이 지금 교회에서 잘나가는 신자들의 실태이다.
- 이렇게 일관성 없는 신앙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의 일관성을 회복하여 라이프 스타일 전체를 전환할 수 있을까?
- 아직 나도 모르겠다.
- 성경에서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못 봤다.
- 2020년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
- 너무 알고 싶다.
전환되어야 공동체 내적으로 정체성 회복과 공동체 외적으로 전도가 된다.
- 본문에서 공동 신앙 생활을 하니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던 것처럼 말이다.
- 이러한 전환만이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론
이것을 찾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 한국 교회의 발전, 인류 구원과 평화 때문이 아니라,
-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이다.
- 우리 시대, 우리 상황, 우리 현실, 우리 교회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을 찾았으면 좋겠다.
특히 제로 베이스에서 모든 선입관을 배제하고 성경과 우리 딱 둘만 놓고 그 안에서 찾았으면 좋겠다.
- 바꿀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 바꿀 수 있는 것은 전부 바꿨으면 좋겠다.
- 그래서 하나님 없이는, 공동체 없이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앙이 전부라는 것 너무 잘 알지만, 현실에서 신앙은 그렇지 않다.
- 악세사리, 취미, 동호회, 유희, 문화 생활과 전혀 다르지 않다.
-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운 정도이다.
- 안하자니 찝찝하고, 몰입하자니 귀찮은 정도이다.
-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가 결코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바뀌어야 한다.
- 뭘 어떻게 바꿔야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 왜 특히 어렵냐면,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 따라해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 적어도 영감을 줄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급변했기 때문이다.
- 맨 땅에 헤딩하며, 온 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어,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 구닥다리 신앙 생활을 전부 뒤엎고,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 만약 성공한다면, 기독교 역사에 기록될 일 아닌가.
고생 길이지만, 영광의 길을 함께 가자.
- 예수님께서 가셨던, 죽음의 길임과 동시에 영광의 길을 함께 가자.
- 그 끝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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