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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07) 4:1-22 룰 브레이커이신 예수님 - 박해와 부흥의 관계

먼저 말할 것은, 이번 본문은 논증이나 설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신지 논증하지 않으며,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 이는 2장의 방언을 통해서, 그리고 3장에서 기적을 통해서 충분히 제시되었다.

-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대신 상황을 담담히 보여주기만 한다.

- 사도들이 붙잡히는 상황, 그럼에도 5000명이 믿는 상황,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심문하는 상황, 사도들이 담대히 증언하는 상황,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경고하고 위협하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증언하는 상황,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상황 등이다.

- 사건들의 인과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사건 자체만 간략하게 서술하고 지나간다.

- 그래서 이야기만 보면 핵심적인 메시지를 찾기가 어렵다.

- 단지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제시한다.

왜냐하면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시며, 기적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수단이라고 충분히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제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 먼저는 박해이다.

- 사도들의 전도가 영향력이 생기자, 그 때문에 피해를 본 지도자들은 박해를 시작한다.

- 사도들을 잡아들이고,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한다.

-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와 완전히 똑같다.

다음으로, 그러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은 더욱 더 많아졌다.

[행 4:4]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

[행 4:21] 백성이 모두 그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므로

- 박해 때문에 부흥을 했는지, 박해에도 불구하고 부흥을 했는지 인과 관계가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박해와 부흥이 동시에 있었다.

- 이러한 일은 초대 교회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이번 본문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가 아니라, 복음이 선포된 이후의 상황이다.

- 복음이 선포된 이후 동시에 일어나는 박해와 부흥이다.

왜 이러는가? 혹은 왜 이래야만 하는가?

- 다시 말해서,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런 상황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가?

- 단순하게 생각하면, 박해가 일어나면 부흥이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 상식적으로는 박해와 부흥은 반대인데, 왜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가?

- 또한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해서, 박해와 부흥의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보통 박해와 부흥의 관계를 두 가지로 오해한다.

- 정-상관 관계 혹은 역-상관 관계로 오해한다

어떤 사람은, 박해를 부흥의 적으로 생각한다.(역-상관 관계)

- 그래서 박해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을 기독교 박해라고 생각하여 반대 시위를 하는 경우이다.

- 차별금지법이 정말 기독교 박해냐에 대한 이견이 많지만, 만약 박해가 맞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아무 상관 없다.

- 아무리 금지해도 전도한 다음에 적법한 처벌 받으면 된다.

- 본문에서 베드로도 전도 금지를 당했고, 그럼에도 전도를 했고, 그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 전도를 금지하는 지도자들을 향해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 박해를 적극적으로 막고자 하는 것은 처벌이 싫기 때문이고, 이는 신앙 때문에 손해 보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며, 결국 이는 예수님께 희생하고 싶은 않은 불신앙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박해를 부흥을 일으키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정-상관 관계)

- 그래서 박해를 받으면 기뻐하고, 더 나아가서 박해를 자처한다.

- 물론 성경도 이를 어느 정도 지지한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전도로 인한 박해와 죄로 인한 처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잘못해서 문제가 생기면 잘못을 바로 잡아 고쳐야 하는데, 이를 박해로 착각하여 남 탓하기만 하고 자신의 문제를 되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가 건물 안에 있는 교회가 찬양한답시고 스피커 볼륨을 너무 높인 것이다.

- 그래서 주변 상인들이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 그런데 이를 찬양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이라고 착각하여 더 크게 찬양하는 경우이다.

- 또 예를 들어, 불신 가정에서 한 아이가 교회를 가게 된 것이다.

- 그런데 교회 다니느라 성적이 떨어진 것이다.

- 그래서 부모가 교회 가지 말라고 하자, 박해라 생각하여 반항을 하는 경우이다.

- 또, 코로나 때문에 정부가 집회를 금지하는 것을 박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그래서 죽음을 감수하고 집회를 하는 몇몇 교회가 있다.

- 이렇게 박해라는 핑계로 자신의 잘못된 욕구를 해소하려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박해와 부흥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가?

- 결론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

- 박해는 부흥의 적도 아니고, 부흥을 일으키는 수단도 아니다.

- 정-상관 관계도, 역-상관 관계도 아니라 상관 관계가 없다.

- 박해가 부흥을 사그러들게도 하지 못하고, 박해가 부흥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 부흥은 부흥이고, 박해는 박해이다.

- 세상 권세는 언제나 부흥을 저지하려고만 한다. 

- 이는 상수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

- 반면에 하나님은 세상이 아무리 저지해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부흥을 일으키신다.

- 이 또한 상수이다. 하나님은 세상 권세의 어떤 방해에도 우직하게 갈 길을 가신다.

문제는 그 사이에 있는 우리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기도, 세상의 박해를 경험하기도 한다.

-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박해가 일어나자 우연히 부흥이 사그러드는 경험을 한다.

- 그런 사람은 이 둘이 역-상관 관계에 있다고 착각한다.

- 반대로 어떤 사람은 박해가 일어나자 오히려 부흥이 일어나는 경험을 한다.

- 그런 사람은 이 둘이 정-상관 관계에 있다고 착각한다.

- 우연히 만들어진 단편적인 경험 때문에 세상과 신앙의 원리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노력하면 세상의 박해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 그래서 정부에서 코로나 때문에 집회를 금지하면 이를 저지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흥이 사그러들 것이라고 착각한다.

-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다.

게다가 이렇게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 하나님 뜻대로 될 거라며 오히려 박해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고,

- 또 부흥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안고, 전도조차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해를 하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다.

- 그래야 박해가 왔을 때 바른 이해 속에서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해는 반드시 온다.

-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선포되면, 세상은 싫어한다.

-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롬 1: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롬 1:25]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롬 1:28]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의 환대를 받으려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 세상의 환대를 받으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 오히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적대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 그래서 박해가 오는 것이다.

그런데 박해가 올 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해서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 무작정 적대시하거나, 지나치게 이용한다.

- 그래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반대로 세상에 휩쓸리게 된다.

- 어느 방향으로나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박해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박해의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 것이다.

- 박해가 우리의 신앙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반대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맑은 날과 궂은 날을 주시는 것이 우리 인생을 방해하시려는 것도, 도와주시려는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 비가 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듯, 박해가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비가 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나봐~ 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미신이고 불신앙이다.

왜 이것을 알아야 하냐면, 그래야 박해에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박해를 적대시하면, 박해 때마다 스트레스 받아서 롱런할 수 없다.

- 반대로 박해를 신앙의 수단 삼으면, 박해 없어지면 신앙 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 그래야 박해가 있던지 없던지 계속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박해와 부흥의 관계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더 있다.

- 예수님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행 4:11]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 이 구절이 이전에는 없었던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표현이다.

- 예수님이 '버림받은 돌'이심과 동시에 '머릿돌'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버림받은 돌'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시고 죽음당하신 예수님을, '머릿돌'은 부활하셔서 그리스도로 등극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이러한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 예수님은 박해와 부흥의 연결 관계를 끊어버린 분이라는 뜻이다.

이를 자세하게 말하면,

- 사람들은 죽음이 오면 생명은 없다고 생각했다.

- 반대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렇게 죽음과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 그런데 예수님은 박해로 죽으신 분이심과 동시에 부흥으로 부활하신 분이시다.

- 즉, 죽으셨지만 생명을 잃지 않으셨다. 생명은 지키셨다.

- 이렇게 예수님은 죽음 부활을 통해 죽음과 생명의 연결 관계를 끊으신 것이다.

게다가 이를 확장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인과 관계가 예수님으로 인해 다 끊어진 것이다.

- 죽음이라는 원인이 생명 없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자명한 사실이 예수님으로 인해 부정된 것이다.

- 이는 죽은 사람이 살아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 죽음과 생명 없음이라는, 모든 인류가 경험하지만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인과 관계를 파괴함으로 세상 모든 인과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 이러한 파괴가 우리의 삶에 주는 파급력은 말할 수 없이 많다.

-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모든 경험, 판단, 삶 자체가 완전히 부정된다.

왜 이런 파괴가 필요하냐면?

- 인과 관계를 파괴해서 세상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것이 아니다.

- 지극히 당연한 인과 관계조차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드러내보시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절대 불변한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세상의 질서를 재설계하시려는 것이다.

- 오히려 어지럽혀진 세상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고 박해를 당함에도 부흥이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시지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4절: 사도들이 잡히는 과정 - 사도들의 붙잡힘과 믿는 사람의 늘어남

② 5-14절: 사도들이 심문 받는 중 - 트집 잡는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도들

③ 15-22절: 사도들이 풀려난 후 - 경고하는 지도자들과 그럼에도 전도하는 사도들

본문은 사도들이 잡혀서, 심문 받은 후, 풀려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 사건 자체는 다이나믹하다.

-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처음으로 받는 박해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서술 방법은 차분하다.

- 심문 받는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면 훨씬 드라마틱한 장면이 보여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왜 이랬을까?

- '개별 사건'이 아니라 '전체 상황'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 각 단락마다 공통적으로 박해와 부흥이 동시에 일어난다.

-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을 때, 심문할 때, 풀어줄 때 계속해서 박해한다.

- 그러나 박해와는 아무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전파된다.

- 이러한 대조를 반복한다.

- 그래서 박해와 부흥은 서로 상관 없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죽임 당하신 버림 받은 돌임과 동시에 부활하신 머릿돌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건은 건조하게 서술하고 상황은 극적인 대조로 표현한 것이다.


1-4절: 사도들이 잡히는 과정 - 사도들의 붙잡힘과 믿는 사람의 늘어남

사도들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증언했다.

- 증언 장소가 성전이었다.

- 아마도 성전이 시끌벅적 했을 것이다.

- 그래서 성전 지도자들이 소란을 해결하기 위해 왔고, 사도들의 '발찍한' 가르침을 듣고 놀랐을 것이다.

특히나 성전 지도자들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것은 바로 '부활'이었다.

-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 바리새인, 사두개인, 열심당원

- 굳이 분류를 하자면, 바리새인은 진보당, 사두개인은 보수당, 열심당원은 노동당 정도가 될 것이다.

- 그래서 바리새인은 신앙 개혁을 외쳤던 것이고, 열심당원은 개혁을 외치는 것을 넘어서 실제 행동에 나섰다.

- 반면에 사두개인은 제사장과 공의회와 성전을 장악했다.

- 따라서 본문에서 사도들을 잡으러 온 제사장, 성전 경비대장, 사두개파 사람들은 모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행 4:1] 베드로와 요한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사두개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뭐냐?

-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다.

[막 12: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 바리새인과 열심당원은 부활을 믿었지만 말이다.

- 참고로, 보수파인 사두개인들이 왜 부활을 부정하는지는 다시 다루겠다.

- 부활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싸우는 장면이 나중에 나온다.

따라서 사도들의 증언은 더욱 더 이들의 심기를 건들였을 것이다.

[행 4:2]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 특히나 사두개인들의 영역인 성전에서 부활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도들은 잡히고, 심문을 하기에 너무 늦어서 하루 동안 갖혀 있는다.

그런데 사도들이 무력하게 잡혀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계속 일하신다.

[행 4:4]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

- 박해와 상관 없이 부흥은 계속된다.


5-14절: 사도들이 심문 받는 중 - 트집 잡는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도들

사도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 말했다시피, 주축 세력은 사두개인이고, 그 중에 대제사장 가문 사람들이 주도했다.

[행 4:6]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심문의 요지는 '권세'와 '이름'이다.

[행 4:7]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 본문은 겉보기에 점잖아 보이지만, 실제는 깡패가 협박하는 말투였을 것 같다.

- 너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누가 그런 일 하래? 누가 시킨거야? 와 같이 말이다.

- 남의 영업장에 와서 영업 방해하는 사람들 내쫓는 '기도'의 말투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여 굴하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끈다.

- 특히 질문의 방향을 약간 틀어버린다.

[행 4:9]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 영업 방해 행위를 '착한 일'로 바꾸고, 영업 방해의 주체를 치유의 주체로 바꾼다.

- 베드로의 말 이면에는 자신의 행위가 성전의 영업 방해가 아니라, 성전의 본질인 착한 치유 행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 후에 자문자답하는데,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도, 논증하지도 않는다.

- 2, 3장에서 많은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 단순히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만 말한다.

- 예수님에 대해 설명할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예수님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을 덪붙인다.

[행 4:11]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 이 구절이 본문 전체의 핵심 구절이다.

- 예수님의 이중성을 설명한다.

- 물론 죽음과 부활도 예수님의 이중성을 담고 있지만 사실 그 자체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반면에 예수님을 '돌'에 비유함으로 '사실 전달'에서 '상징 전달'로 의미를 확장한다.

- '버림받은 돌'은 거역, 박해로, '머릿돌'은 믿음, 부흥으로 추상화된다.

따라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 자체를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 물론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역사 속에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 하지만 그와 더불어 죽음 부활을 통해 전하는 의미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 마디로 '인과 관계의 파괴'이다.

- 한 번 죽으면 계속 죽은 상태가 되는 것이 상식적인 인과 관계이다.

- 이 인과 관계를 인류는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 그리고 이 인과 관계를 모든 인류는 한 번 이상 경험한다.

-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해도, 자기 자신의 죽음은 경험하니까.

- 그만큼 확실하고 보편적인 인과 관계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확실하고 가장 보편적인 인과 관계가 깨뜨리신 것이다

- 이것이 말하는 것은, 결국 이보더 덜 확실하고 덜 보편적인 인과 관계가 모두 부정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 다시 말해서, 인류의 모든 인과 관계가 전부 파괴된 것이다.

이를 '버림 받은 돌'이 '머릿돌' 되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 세상에서 '버림 받은 돌'은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것이 상식이다.

- 그런데 그 상식을 파괴한 것이다.

-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의미의 '룰 브레이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룰 브레이커'가 되셔야만 했냐?

- 왜냐하면 '룰'이 언제나 특정 소수의 사람에 의해 소유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룰'을 소유한 사람은 '룰'을 통해서 '룰'에 종속된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 특히 당시에 그 지배를 유대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지금도 같은 일이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장의 대표적인 예 두 가지를 소개하겠다.

첫째로,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성전이다.

- 사두개인들은 성전의 룰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 이들은 대제사장이 되어 성전의 룰을 정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룰을 지키는 것이 신앙인 것처럼 위장하여 사람들을 지배했다.

- 그것을 통해 이들은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의 파괴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둘째로, 룰 중에 가장 강력한 룰인 사망 권세이다.

-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룰이다.

- 그래서 사탄은 죽음을 빌미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롬 5: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 그런데 그 누구도 위협할 수 없었던 이 룰을 예수님께서 파괴하신 것이다.

- 그래서 사탄의 지배 수단을 제거하신 것이다.

- 이렇게 성전의 룰, 율법의 룰, 죽음의 룰을 파괴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룰 브레이커'가 되신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행 4: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 성전의 룰, 율법의 룰, 죽음의 룰을 파괴하지 않고는 성전의 주인인 사두개인, 율법의 주인인 바리새인, 죽음의 주인인 사탄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이렇게 룰에서 벗어날 때 자유를 회복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룰을 파괴하신 예수님께 온전히 우리를 내어드릴 수 있다.

- 그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구원자로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들의 증언에 대해 지도자들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예수가 처형당한지 불과 50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죄인 예수와 한 패임을 주장하는 사도들을 가만 둘 수 없었다.

- 하지만 눈 앞에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있기에, 사도들을 죄인으로 몰아갈 수도 없었다.

- 마치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다 실패하고 결국 거짓말로밖에 죽일 수 없었던 상황을 다시 보는 것 같다.


15-22절: 사도들이 풀려난 후 - 경고하는 지도자들과 그럼에도 전도하는 사도들

지도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 그래서 기껏 생각해낸 것이, 풀어주되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뿐이었다.

[행 4:18]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 말 그대로 궁여지책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멋드러지게 거절한다.

- 할말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지도자들은 할 수 없이 한 번 더 위협만 하고 놓아 보내준다.

- 왜냐하면 태어나서 40년 동안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걷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이다.

- 그런 상황에 베드로를 가두면,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박해는 계속되었지만, 부흥도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주제

우리는 어떤 '룰'에 지배당하고 있는가? 

지배자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긴다.

- 왜냐하면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보이고, 피지배자가 지배당하는 것을 알면, 지배력은 약해지기 때문이다.

- 간단한 예로, cctv가 보이지 않을 때 오히려 범죄 예방 효과가 커지는 원리와 같다.

- '파놉티곤'이 그런 경우이다.

역사 속에서 지배자들이 자신들은 숨기고 지배력은 높이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많다.

-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교이다.

- 종교가 왕권 강화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종교 행위를 하지만, 결국 모든 종교 행위는 왕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또 다른 예로, 법이 있다.

- 법의 근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다.

- 하지만 법이 지배자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많다.

- 지배자는 단순히 자신의 말 한 마디로 모든 거슬 좌지우지하고 싶지만, 그럴 경우 반발이 생길 수 있다.

- 그래서 자신의 뜻에 맞는 법을 만들고, 지배자 대신 법이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다.

- 그러면 자신의 뜻대로 지배할 수 있으면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의 예는, 성전과 율법이다.

- 사두개인은 성전을 통해, 바리새인은 율법을 통해 지배하려 했다.

- 자신들이 성전과 율법 뒤에 숨을 때, 더 큰 지배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이 있다.

- 사탄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언제나 숨어 있다. 보이지 않는다.

- 대신 인류를 죽음을 통해 지배한다.

- 인류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탄의 지배에 굴복한다.

- 사탄이 직접 나섰다면, 사람들은 전부 도망갈 것이다.

- 그러면 사탄의 지배력은 사라질 것이다.

- 그래서 사탄은 숨고, 죽음이 대신 인류를 지배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지배자는 언제나 숨는다.

- 지배자를 떠올려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실제 지배자를 절대로 찾을 수 없다.

지배자는 성전, 율법, 죽음이 그렇듯,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해서 가까이 있다는 것조차 몰라야 한다.

- 그리고 너무나 자명해서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 당시 유대인 중에 누가 성전과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의심했겠는가.

- 누가 성전과 율법이 없는 삶을 상상해봤겠는가.

- 죽음 역시 그렇다.

- 너무나 친숙하기에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지배자를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있다.

- 그것은 우리가 분명히 어떤 '룰'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내 뜻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현대의 '사두개인', '바리새인'의 권력 강화를 위해 이용당하고 있다.

- 어떻게 이용당하는지조차 모른채 말이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룰 브레이커'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 그 '사두개인', '바리새인'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 그들의 '룰'을 드러내고, '룰'을 통해 그 지배자들의 민낯을 드러내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성전과 율법이 그렇게 이용되고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 하지만 그 실상이 전부 드러난 지금 우리에게는 당시 유대인들이 어리석어 보인다.

이와 같은 일은 분명히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우리가 이용당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비웃을 것이다.

이 어리석음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분 예수님 뿐이다.

- 내 인생이 어느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고, 내 인생을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 뿐이다.

- 그래서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 가장 먼저 내가 '룰'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내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내 인생이 알지도 못하는 지배자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 그래서 내 인생이 마구 짓밟혀 엑기스는 이미 뽑아 먹혔고 점점 껍데기만 남겨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이 시작되는 것이다.

- 만약 내가, 잘하든 못하든, 내 뜻대로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 만약 내가 남부러울만큼 잘살진 못해도, 내 소신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 그래서 만약 내가 나름대로의 내 인생의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결국 악세사리 밖에 되지 못한다.

- 그 악세사리가 수억짜리 다이아 반지 혹은 수억짜리 기계식 명품 시계가 될 수 있지만,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자기 자신보다 명품을 더 아낀다.

-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생사의 길림길에서 명품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품을 집어 던진다.

- 이와 같이 예수님도 내던져질 것이다.

- 마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오직 현재 내 인생이 엑기스는 다 빨아 먹리고 껍데기 밖에 없다는 판단 속에서만 예수님을 참 구원자요, 참 주인으로 삼을 수 있다.

- 이것만이 진정한 회개이고, 이러한 회개를 통해서만 참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 지금 내가 얼마나 가혹하게 이용당하고 있는지 아는가?

- 스스로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