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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08) 4:23-37 박해와 부흥의 관계를 아는 것의 중요성 - 공동체 관계

천둥 번개는 하나님의 진노 소리인가?

- 쓰나미는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가?

- 코로나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라는 음성인가?

- 많은 교회에서 이를 전제로 설교한다.

성경은 이러한 관점을 지지한다.

[출 5:3] 그들이 말하였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무서운 질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자연 재해와 질병으로 이집트의 바로 왕을 심판하셨다.

- 천둥, 번개, 쓰나미, 코로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반대 케이스도 있다.

[롬 1:24-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 [26]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 [28]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

- 하나님은 죄인에게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침묵하신다.

- 일부러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신다.

[막 4:1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12]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이유는 용서 받지 못하고 죄인 상태에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심판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렇게 현실과 하나님의 뜻을 연결시키기도 하고 끊기도 한다.

- 왜 그러냐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쉽게 예상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왜냐하면 예상할 수 있고, 일정한 룰이 파악되면, 그 룰은 특정한 사람에게 소유될 수 있고, 그러면 소유자에게 권력이 생기고, 결국 권력자에 의한 폭력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배 관계와 폭력, 착취, 수탈, 억압이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 그러면 사랑의 관계가 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예상할 수 없게 되면,

- 아무도 하나님을 예상할 수 없고, 룰을 파악할 수 없고, 룰을 소유할 수 없고, 그러면 권력이 사라지고, 그러면 폭력, 억압, 지배가 사라지게 된다.

- 물론 그렇다고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폭력은 일어날 수 있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합리화할 수 없게 된다.

- 폭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폭력적인 지배 관계와 사랑의 관계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 바리새인의 경우 율법을 핑계로 폭력적인 지배 관계를 합리화했는데,

- 더 이상 그런 합리화가 불가능하게 된다.

- 바리새인을 죄인으로 정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 우리는 현실의 상황과 하나님의 뜻을 연결시키는가, 아닌가?

- 과연 천둥 번개는 하나님의 진노 소리인가?

이러한 생각이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터무니 없이 들린다.

- 미신이고 맹신이다.

- 자연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대인들의 상상력일 뿐이다.

- 자연은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자연 재해를 비롯하여 현실의 희노애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일이 잘 안풀리면 잘못한게 있다고 생각하고, 일이 잘풀리면 잘한게 있다고 생각한다.

- 아무 근거 없음을 알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이는 사람의 본능 같다.

이것이 우리를 비롯하여 인류 전체의 어리석음이다.

- 두 가지로 나뉜다.

- 첫째로, 하나님이 없거나, 있어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 이런 경우 현실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을 부정한다.

- 둘째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그 방식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 그래서 박해를 부흥을 저지하는 적 혹은 부흥을 일으키는 수단이라고 쉽게 판단해버린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모두 가지고 있다.

- 두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 문제는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중에 보통 교회는 첫째를 강조한다.

- 하나님은 계시며, 세상을 철저하게 통치하신다고 말한다.

-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의인에게는 복을, 죄인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 우리는 그 동안 다른 교회에서 이 메시지를 주구장창 들어왔다.

- 따라서 안좋은 일이 있을 때는 알지 못하는 죄가 있는지 되돌아보라는 설교를 들었다.

- 그리고 현실에서 박해를 피하고 복을 받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헌신해야 한다는 설교도 들었다.

하지만 성경은 둘째만 주구장창 말한다.

- 하나님의 통치 방식은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특히 율법주의, 바리새인을 비판함으로 이 메시지를 전한다.

- 그들은 율법, 성전 등을 근거로 하나님의 방식을 판단했다.

- 율법과 성전의 룰을 만들어 그것을 소유했고, 소유로 얻어진 권력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 그래서 율법과 성전의 룰을 파괴하시는 예수님을 증오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보통 교회로 돌아와서, 교회는 왜 첫째를 강조할까?

- 교회는 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강조할까?

그 이유는 바리새인이 율법을 강조한 이유와 완전히 똑같다.

- 룰을 소유하고, 소유를 통해 권력을 만들고, 권력을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지배를 통해 착취하고 수탈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 얻어내는 것이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다.

- 또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영광일 수도 있다.

-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교회가 어떤 과정으로 룰을 소유하냐?

-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선포한다.

- 그래서 의인에게는 복을, 죄인에게는 벌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 따라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여기까지는 좋다. 이제부터 꼼수가 시작된다.

꼼수는 크게 두 가지이다.

- 첫째로, 현실의 상황을 자의적으로 복과 벌로 구분하는 것이다.

- 둘째로, 복과 벌의 근거를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 지금 너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벌인데(첫째), 주일성수를 안해서 그런 것이다(둘째).

- 그러니 주일성수하면(둘째) 복을 받아 사업이 잘될 것이다(첫째). 

예를 들어, 

- 너 요즘 사업이 잘 안풀리지?

- 하나님이 너에게 벌 주시는거야.(첫째 꼼수:복과 벌을 자의적 구분)

- 복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아?

- 주일성수 잘 하고, 헌금 잘 내고, 말씀 기도 잘 해야해.(둘째 꼼수:복의 근거를 자의적 판단)

- 안그러면 사업 더 안좋아질거야.

이것이 목사가 교회에서 룰을 소유하는 방식이다.

- 어떤 목사들은 진짜 사악하게 십일조를 뜯어낼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한다.

- 이런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더 많은 목사들은 '선한 의도'로 똑같은 짓을 한다.

- 여기서 선한 의도란, 사람들이 신앙에 더 헌신하고, 복음이 확장되며, 교회가 커져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것이다.

-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이 왜 문제인가?

-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리새인도, 회개 이전의 바울도 정의감으로 사명감으로 충성심으로 '선한 의도'로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이다.

- '선한 의도'로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회개 이전에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예수 믿는 놈들을 잡아들였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자신의 행동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켜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 이는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선한 의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을까?

- 자의적으로 복과 벌을 구분했고, 자의적으로 복과 벌의 근거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이 부분은 이미 여러번 말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관계의 관점에서이다.

- '선한 의도'가 필연적으로 폭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그리고 폭력은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 파괴는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까지 일으키기 때문이다.

- 사람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까지 폭력적으로 대한다.

그렇다면 '선한 의도'는 왜 폭력을 일으키냐?

- '선한 의도'가 정말 선한 것이라면 폭력이 아니라 사랑을 일으킬 것이다.

- 문제는 '선한 의도'가 악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 선은 '관계'이고, 악은 '일'이다.

- 의도가 '관계'에 초점이 맞춰지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된다.

- 반면에 의도가 '일'에 초점이 맞춰지면, 그 일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선한' 일로 보여도, 하나님은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결국 하나님과도 폭력적인 관계를 맺게 되며, 사랑의 관계는 끊어지게 된다.

쉬운 예를 들어,

- 자녀를 무척 사랑하는 부모가 있다.

-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 그래서 부모는 자녀와의 '관계'에 초점을 둬서, 아이를 관찰하고, 아이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아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실에서 부모는 자녀 자체가 아니라, 자녀가 잘되기 위한 '일'에 초점을 둔다.

- 공부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적용하고,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적용하며,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적용한다.

-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녀 자체에 대한 관심은 낮아진다.

- 그러다보면 필연적으로 부모가 제시한 방법과 자녀가 원하는 방법 사이에 괴리가 일어난다.

- 그럴 때 폭력이 일어난다.

- 물론 부모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부모, 표정으로만 드러내는 부모, 차분하게 말하는 부모, 엄하게 말하는 부모, 화내며 소리지르는 부모, 때리는 부모 등 다양하다.

- 하지만 정도의 차이와 상관 없이 결과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파괴된다.

교회 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 '성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목사는 자신의 방식을 제시 혹은 강요한다.

- 각 성도 개인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은채 말이다.

- 그리고 그 방식에 따르는 것을 순종이며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 이런 방식으로 목사는 교회를 폭력적으로 지배한다.

- 이렇게 목사와 성도 간의 관계는 파괴된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목사의 방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생긴다.

- 그때 목사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방식을 간청 혹은 강요한다.

-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 않은채 말이다.

- 그러면서 금식하며, 눈물로 고함치며 기도한다.

-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기도한다.

-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말이다.

- 이런 방식으로 목사는 하나님을 폭력적으로 지배한다.

- 이것이 목사와 하나님의 관계가 파괴되는 과정이다.

목사가 이렇게 행동하면, 그것을 본 교회 사람은 똑같이 서로를 폭력적으로 지배하려 든다.

- 그러한 지배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지배하고,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 또 약한 사람은 더 약한 사람을 지배한다.

- 그래서 집사, 장로, 권사 되려고 쌩난리를 치는 것이다.

- 그래야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선한 의도'의 결과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

-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진다.

- 그래서 결국 교회의 본질을 파괴되고, 교회의 교회됨을 잃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룰 브레이커'가 되신 것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교회의 교회됨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의해 '룰'이 파괴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냐?

먼저 현실과 하나님의 뜻의 관계가 올바르게 바뀐다.

- 하나님께서 현실을 다스리는 것을 인정한다.

- 동시에 하나님께서 현실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무지를 인정한다.

- 다른 말로, 복음을 전하면 세상의 박해가 필연적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박해가 부흥의 적인지 수단인지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만,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다.

- 즉, 아무도 '룰'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 다른 말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된다.

- 물론 세상에서 지위, 권력, 소유 등의 차이는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러면 아무도 서로를 지배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만 관계 맺게 된다.

- 물론 서로 지배하지 않는다고 바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 일반적으로 지배 관계가 사라지고 수직 관계에서 수평 관계가 되면, 무-관심, 무-관계로 전락한다.

- 예를 들어, 직장 상사와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다.

- 퇴사하면 동기들과는 연락해도 상사와는 연락하지 않게 된다.

당연히 지배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넘어가려면, 동일한 믿음이 필요하다.

- 믿음을 통해 서로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보게될 때, 예수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서, 본문의 공동 소유, 공동 생활이 일어난 것이다.

-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나서, 단 번에 짠~ 하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 공동 소유가 일어나기 위한 수 많은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 룰이 파괴되고, 수직적 지배 관계에서 수평 관계로 변화되며, 같은 믿음으로 서로에게 예수님을 볼 때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한 마디로, 공동 생활, 공동 소유는 우리가 목표로 삼는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 많은 조건들을 이뤄갈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공동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 '룰'을 파괴하고,

- 수직 관계에서 수평 관계로의 인식을 전환하고,

- 그래서 서로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볼 때,

- 옆에 있는 사람이 단순히 같이 신앙 생활하는 동료가 아니라, 내가 그토록 구하고 찾았던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 그때에야 비로소 자연발생적으로 공동 소유, 공동 생활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해와 부흥의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관계를 이뤄나가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본문에서 공동 소유가 일어난 것이다.

- 박해에도 불구하고, 또는 박해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 그로 인해 서로 안에 있는 예수님을 발견했으며,

- 그 때문에 서로 더 사랑하게 되었고,

- 그 결과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공동체에게 나눈 것이다.

우리는 공동 소유라는 화려한 결과에 눈이 쏠리게 된다.

- 그러면서 그 이면에는 수 많은 과정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 그래서 수 많은 과정을 지나는 수고는 하지 않으면서, 화려한 결과는 얻고 싶어 한다.

- 결과 안주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결과가 없다고 실망하지 말자.

- 예수님 잘 믿고, 인식을 바꾸며, 라이프 스타일을 전환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화려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 그것 기대하며 차분하게 길게 보며 신앙 생활 하자.

말하는 김에 한 마디만 더 하면,

- 공동 소유하는 초대 교회를 보면 대부분 재산을 '판' 사람에게 시선이 간다.

- 만약 나라면 전 재산을 과연 팔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 전 재산을 팔려면 얼마나 큰 믿음이 필요할까? 

- 만약 나한테 그런 믿음이 생기면 어떻하지? 하며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재산을 '판' 사람 뿐만 아니라 재산을 '받은' 사람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만약 내가 생명에 위협이 될만큼 가난하다면, 과연 필요한 만큼만 가져갈 수 있을까?

- 며칠을 굶은 사람이 딱 1인분의 식사만 하고 숟가락을 내려 놓을 수 있을까?

-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식사를 배려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재산을 판 사람보다 재산을 받은 사람의 믿음이 더 클 수 있다.

- 판 사람은 사람들의 칭찬이라도 받으니 재산을 멋있게 포기할 수 있다.

- 그러나 받은 사람이 숟가락을 내려놓는 믿음은 누구에게도 칭찬받지 못한다.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 오직 예수님에 대한 그리고 성도에 대한 목숨을 건 사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 아무런 보상 없는 헌신을 할 때에만 가능하다.

- 왜냐하면 지금 포기한 밥 한 숟가락이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 숟가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그 공포를 극복한 고귀한 사랑이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이 있기를 기대하며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지난 본문과 이어진다.

-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서 기적을 일으켰고, 기적의 주체를 예수님이라고 선포했다.

- 그러자 성전 지배자인 사두개인들이 와서 잡아간다.

- 그러나 어찌할 방법이 없어 예수님을 전하지 말라는 경고만 하고 놔준다.

- 그런 일을 겪은 베드로와 요한이 공동체로 돌아와서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주제 역시 비슷하다.

- <복음 전도 이후 따라오는 박해>와 <박해 때문에 혹은 불구하고 생기는 부흥>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 바로 <공동체의 관계>이다.

본문은 이 두 가지 주제가 연결되어 있다.

- 즉, 박해와 부흥의 결과가 공동체라는 것이다.

- 박해와 부흥이 일어났고, 그 두 가지를 통해 사람들은 더욱 더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며, 

- 그 결과 공동 소유를 할만큼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한 마디로, <현실의 박해 - 예수님의 부흥 - 공동체 회복> 이 세 가지가 연결되어 서로를 강화하고 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① 23-31절: 박해와 기도 그리고 성령 충만 -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② 32-37절: 공동 소유, 공동 생활

- 베드로는 기적을 통해 복음을 전했고, 그로 인해 박해가 임했으며, 그러자 교회는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성령 충만을 주셨다.

-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고, 그 사랑으로 교회는 더욱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 그 결과 공동 소유, 공동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23-31절: 박해와 기도 그리고 성령 충만 -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 즉 교회 공동체에게로 돌아갔다.

- 거기서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전도 금지 명령과 그에 대해 불복종했다는 것을 전했다.

이때의 교회 분위기는 어땠을까?    

- 쉽게 생각하기를, 다들 자신감 있게 아무런 걱정도 없이 평안했을 것이라 상상한다.

-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특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박해도 쉽게 견뎠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공동체 모두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 지배자들의 말대로 예수님을 전하지 않자니 참을 수가 없고, 전하자니 죽을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 게다가 같은 이유로 예수님이 죽으신지 불과 두세 달 밖에 되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극심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전했던 것이다.

- 공포가 없어서가 아니라, 공포를 극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기도를 한다.

- 이 역시 너무 쉽게 생각한다.

- 이 사람들은 워낙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역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 박해 소식을 듣고 모두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 두려워서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 쳤을 것이다.

-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을 것이다.

- 그러다가 갈등과 분열도 있었을 것이다.

-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외부 문제가 생기면 내부 갈등이 생긴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을 것 같다.

- 특히 기도 내용을 보면 구약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들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말씀을 읽은 것으로 보인다.

- 그러는 중에 박해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은 것이다.

[행 4:25]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인 우리의 조상 다윗의 입을 빌어서, 성령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민족이 날뛰며,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였는가? [26] 세상 임금들이 들고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과 그의 메시아에게 대적하였다.'

- 이 구약 말씀은 박해 받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 박해가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 자신들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고, 결국 박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한 것이다.

- 지금 느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 그리고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 4:29]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 계속 전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기도로 보인다.

- 누구나 전도에 대한 책임감은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면, 이 기도는 죽여달라는 무서운 기도이다.

- 왜냐하면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면 예수님처럼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실제로 이러한 담대함 때문에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11명의 제자는 처형당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 이렇게 이 기도는 실제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 우리는 흔히 이들을 태어났을 때부터 워낙 강골이었던 사람 혹은 성령 강림으로 강골이 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사람으로 치부한다.

- 그래서 이들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 그런데 우연히 박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던 것이다.

- 박해 속에서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나를 예정하셨고, 지금도 날 지켜보고 계시며, 앞으로도 날 자켜주실 것이라는 사랑을 경험한 것이다.

- 그것을 박해가 예정된 구약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랑의 경험이 너무나 특별했던 것이다.

- 이전에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고, 그 감정이 너무나 기쁘고 평안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그 감정을 더욱 더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박해를 계속해서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박해를 받을 수 있는가?

- 예수님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 전도 자체가 가치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하지만 그보다 전도를 해야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더욱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너무 무서워서 담대하게 전도하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앙 생활 할 때에만, 신앙 생활이 올바르게 유지될 수 있다.

- 신앙의 동기가 '관계'일 때에만 신앙이 유지될 수 있다.

- 만약 동기가 '일'이라면, 다른 말로 '결과' 혹은 '성과' 혹은 '효율'이라면, 그 신앙은 반드시 변질된다.

-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랬더니 성령 충만이 일어났다.

[행 4:31]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 이를 기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원하는데 성령 충만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이상하다.

-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언했다.

-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경험했다.


32-37절: 공동 소유, 공동 생활 -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여러 번 말했지만, '일'과 '관계'는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상반된 두 가지 태도이다.

- 즉, 모든 사람은 반드시 둘 중에 하나에 속하여 세상을 살아간다.

- '일'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거래, 지배, 이용의 관점에서 본다. 사랑조차도 말이다.

- 반면에 '관계'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의 관계로 본다. 일조차도 말이다.

그런데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일'에서 '관계'로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 신앙 이전에는 하나님조차도 '일'의 관점에서 본다.

- 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며, 하나님은 내 '일'을 대신 처리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예배, 전도, 선교, 봉사를 통해 신앙 생활을 이어가고, 하나님께 건강, 가족, 일 등에 문제 없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일' 중심 태도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한다.

그러나 신앙 이후에는 '관계' 중심으로 삶의 태도가 바뀐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 동시에 하나님은 나를 알고, 이해하며, 공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만 기쁨을 느끼게 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 그럴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지만, 자연스럽게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된다.

그래서 이번 단락에 공동체 관계 회복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 관계 회복의 예로 공동 소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공동 소유를 특별한 사건으로 생각하지 말고, 다양한 관계 회복 현상 중에 하나로 생각하자.

자신의 소유를 포기한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 '소유'를 잃은 아쉬움보다 '사람'을 얻은 기쁨이 컸을 것이다.

- '일'에서 '관계'로 태도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의 행위의 수지타산을 따져 보았을 때, 이익을 얻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 즉, 희생이 아니라 수익으로 느꼈을 것이다.

- 왜냐하면 함께 신앙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유를 받은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 절대로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제공 받으면서, 그 안에 누군가의 생명이 담겨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나에게 생명이 제공되듯, 누군가의 죽음을 감수한 희생으로 나에게 의식주가 제공되었음을 기억했을 것이다.

- 의식주의 채워짐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의 은혜를 다시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니 어찌 공동체 관계가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서로가 서로 때문에 기쁨을 느끼는데 말이다.

- 모두가 희생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희생한다고 느끼지 못하는데 말이다

- 공동체를 통해서 모두가 제공 받고 있다고 느끼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사람 중에 대표적으로 '바나바'를 제시한다.

- 갑자기 '바나바'를 제시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첫째로, 다음 단락 예고이다.

- 공동 소유의 긍정적인 예를 제시해서, 다음에 나올 부정적인 예를 암시하는 것이다.

- 다음 본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온다.

- 바나바를 통해 이 부부의 악행을 더욱 더 부각한다.

둘째로,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나바를 미리 소개하는 것이다. 

[행 9:27]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 사도들와 연결시켜준 유일한 끈이었다.

- 그리고 1차 선교 여행까지 동했했던 바울의 각별한 동료이다.

- 그를 미리 소개하여, 이후에 있을 바울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또는 박해 때문에 더욱 더 부흥한다.

- 하지만 부흥에는 언제나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 다음 본문에는 처음으로 공동체 내부 문제를 다룰 것이다.

- 이렇게 사도행전은 부흥과 박해, 긍정과 부정을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 이를 통해 복음은 계속 전파될 것이고,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 역시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에서도 이러한 발산과 수렴이 그리고 부흥과 박해가 반복될 것이다.


주제

신앙의 핵심은 '일'에서 '관계'로의 전환이다.

- 결국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도, 공동 소유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관계'로의 전환 때문이다.

- 하나님과의 사랑을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전도한 것이다.

- 또 교회 공동체를 사랑했기 때문에 소유를 나눈 것이다.

만약 여전히 '일'에 매여있었다면?

- '효율'적으로 큰 '성과'를 내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전도를 멈췄을 것이다.

- 또한, 교회는 모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챙기기기보다 먼저 건물을 지어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았을 것이다.

- 전도하는 좋은 방법을 찾는 것과 교회가 건물을 짓는 것을 무조건 나쁘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때로는 '관계'를 위해 이러한 판단을 해야할 때가 있다.

- 그러나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일'로 삼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도 나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에 초점을 두면, 정말 '일'만 빼고 모든 것을 잃는다.

- 교회가 전도하는 일에 초점을 두면 전도는 되고 교회는 커지지만, 하나님도 잃고 사랑하는 성도도 잃는다. 

- 그리고 신앙도 잃는다.

- 부모가 자녀를 공부 잘하도록, 건강하도록, 성공하도록 키우면, 자녀는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성공하게 되겠지만, 부모는 자녀를 잃어버린다.

반면에 '관계'에 초점을 두면, '관계'와 함께 많은 것을 얻는다.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 교회가 관계에 초점을 두면,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얻는다.

- 그러면 교회는 커지기 마련이다.

- 물론 안그럴 수도 있지만 말이다.

- 또, 부모가 자녀와의 관계에 초점을 두면, 자녀는 안정감을 얻는다.

- 그러면 자녀는 안정감 속에서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 도전하다보면 성공하기 마련이다.

- 물론 그 성공이 부모가 바라는 성공이 아닐 수는 있지만 말이다.

- 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자녀의 성공 모두 성취될 것이다.

본문에서 교회는 '일의 성과'보다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 그래서 무식하게 담대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무모하게 전 재산을 포기할 수 있었다.

- '일의 성과'를 고려했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 단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교회 공동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 그렇게 무식하고 무모하게 '관계'만을 원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관계'로 인식, 삶, 라이프 스타일을 전환해야 한다.

- 그래야 나도, 가족도, 교회도, 주변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그리고 나로 인해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결론

하지만 우리는 '일'에 쩔어 있다.

-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내는 것에 집중한다.

- 직장의 일 뿐만 아니라, 부부 관계와 육아에서조차도 말이다.

- 어떻게 하면 적은 힘을 들여서 배우자와 자녀에게 더 큰 만족을 줄까 고민한다.

- 마치 직장에서 일을 할 때처럼 말이다.

우리는 왜 이러냐?

- 우리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냐?

- 맞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용할 뿐이지. 

- 언제나 최소한의 희생만 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관계' 맺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 노력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 사람은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관계'에는 언제나 죽음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 '관계'를 맺으려면, '나'가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고,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소유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 우리에게는 목숨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죽으면 관계건 뭐건 다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 목숨이 여러 개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 그래서 예수님처럼 죽어도, 모든 소유 잃어도 또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 불사신이 될 때에야만 비로소 '관계' 맺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다.

- 관계 맺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일'에서 '관계'로 전환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다.

-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믿을 때에만 '관계' 맺을 수 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 교회 관계를 회복시켜서 교회답게 만들 것이고,

- 가족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