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본문에서 제자들은 방언으로 말했다.
-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 그러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방언을 해석한다.
- 해석 방법은 두 가지다.
- '형식'과 '내용'이다.
- '방언이라는 형식이 전하는 메시지'와 '방언의 내용이 전하는 메시지'를 말해준다.
- 그 중에 지난 본문에서 방언이라는 형식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제시했다.
- 방언이 나타난 사건 자체가 종말이 임박했음을 예고한다고 말했다.
- 그리고 이번 본문에서는 방언의 내용이 전하는 메시지를 다룬다.
방언의 내용은, 지난 본문에서, '하나님의 큰 일들'이었다.
[행 2:11]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일들'이 무엇인지 본문은 상술한다.
[행 2:22]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기적, 놀라운 일, 표징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증명 방법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죽음 부활이었다.
[행 2:23-24]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셨다.
[행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이시고 부활시키셔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신 것이 방언의 내용이었고, 이를 베드로가 구약을 근거로 해석한 것이다.
- 이러한 해석을 통해, 다음 본문에서, 3000명이 회심하는 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본문은 이렇게 극적이고 혁명적인 선포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우리에게 별 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 이 부분이 난감함을 넘어서 절망감을 준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이신지는 논증한다.
- 근거는 구약이다.
- 구약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지만' '죽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예고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논리이다.
- 아마 이 소식은 당시 유대교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을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유대교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그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다.
- 그것이 유대교 전통이었다.
- 그리고 그 메시야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구약을 통해 알고 믿고 있었다.
- 게다가 현실의 상황도 로마 식민지 통치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었다.
-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메시야가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가 구약을 근거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입증하자 열광했다.
- 자신들의 강력한 소망이 성취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 우리는 구약에 메시야가 예고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 우리는 그 메시야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 게다가 우리에게 구원자가 절실하게 필요하지도 않다.
- 그런 우리에게 베드로의 논증은 효력이 없다.
-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보고 소망을 갖게 되기보다, 난감함과 절망감을 갖는 것이다.
- 성경조차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팩트이다.
- 정말 부활이 일어났냐는 것이다.
- 그것이 확실해져야, 그 부활이 전하는 메시지도 효력을 갖는다.
- 그래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도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것도 믿을 수 있으며, 그 구원을 믿어야 세상의 유혹에 속지 않을 수 있고, 예수님께 헌신하며 예수님'만'으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미 알겠지만, 팩트는 확인할 수 없다.
- 타임머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 블랙박스나 cctv가 있었으면 좋겠다.
- 목격자는 예전에 다 죽었고, 그들이 남긴 기록도 성경 외에는 없다.
- 정황 증거가 있다고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간접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많은 설교에서 다시 '믿음'을 강조한다.
-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 그런데 부활의 증거는 많지만, 모두 간접 증거로서 사실을 담보하지 못한다.
- 따라서 부활 역시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 라며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 이는 아무 의미 없는 단순한 순환 논리 오류이다.
정리하면, 성경은 논증 방식은 다음과 같다.
- 대전제: 구약에서 그리스도는 죽고 부활한다.
- 소전제: 그런데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셨다.
- 결론: 따라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전제가 중요했다.
- 소전제는 검증할 필요 없는 팩트였기 때문이다.
- 대전제인 구약 말씀이 깨달아졌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다.
- 그래서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한 것이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소전제가 중요하다.
- 우리는 이미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조건을 알고 있다.
- 특히 부활 여부가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문제는 소전제인 예수님의 부활 여부이다.
- 예수님 부활의 진위여부가 확인될 때에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그래서 베드로의 메시지에 감흥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대전제와 소전제 모두 입증하기는 어렵다.
- 대전제 입증도 어려웠기 때문에, 당시 많은 유대교 구약 전문가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 또한 소전제 입증도 어렵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기는 여전히 힘들다.
따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신앙은 비-과학적, 비-논리적 영역이다.
- 과학과 논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포괄하되 초월하는 것이다.
- 그래서 베드로나 바울 그리고 예수님조차 논리를 사용하는 동시에 비-논리적인 믿음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비-논리적인 믿음과 논리적인 추론 모두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논리적인 완결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 논리가 없으면 비웃음 당한다.
- 그것은 박해가 아니라 무식한 것이다.
- 물론 똑똑하면 더 논리적일 수 있지만, 똑똑하지 않아도 논리적이 될 수 있다.
- 아는 것만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면 된다.
-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가장해서 말할 때 비웃음 당하는 것이다.
- 특히 부활의 증거를 말할 때 그렇다.
- 부활의 간접 증거, 정황 증거는 많이 알아야 한다.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동시에 그러나 결국 간접 증거의 한계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럴 때에만 논리적 완결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다. 비웃음 당하지 않을 수 있다.
둘째로, 비-논리적인 신비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다.
- 2000년 동안 복음이 논리만으로 전해진 적은 없었다.
- 만약 그럴 수 있다면, 2000년 동안 논리는 더욱 더 정교해졌을 것이고, 2000년 동안 정교해진 논리는 더 이상 반박의 여지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 그래서 복음을 듣는 누구나 전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 논리로만 전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언제나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또 언제나 말도 안되게 믿는 사람이 있었다.
- 언제나 신비의 영역이 있었다.
- 그래서 비-논리적인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 그것만이 논리의 한계와 신비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이 두 가지 중에 둘째인 신비의 영역인 기도에 대해서는 1장에서 언급했다.
[행 1:14]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 그리고 기도는 언제나 교회 모임의 중심이었다.
[행 2: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 게다가 신비의 끝판왕 성령 강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논리의 영역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 열두 제자들 회복할 때도, 방언을 해석할 때도,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할 때도 구약을 근거로 논리적으로 접근했다.
- 단순히 기분 따라, 느낌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 뭔가 불길하니까 제자 한 명을 더 뽑아야 해, 방언을 하니까 기분이 좋은데? 그러니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거야. 라고 하지 않았다.
- 연구 논문을 쓰듯 구약 성경을 근거로 해석했다.
- 베드로의 논증이 완벽하냐, 베드로의 논증만 들으면 전부 구원 받을 수 있냐를 떠나서, 최선을 다해서 논리를 쌓았다.
- 여느 교회가 하듯이 은혜를 핑계 삼아 적당히 주장만 늘어놓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 당시 상황에서는 본문의 메시지가 결정적인 촉매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 반면 우리 상황에서는 다른 촉매가 필요하다.
- 본문 메시지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 게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리스도라는 증거'라는 본문의 메시지를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본문에서 다른 것을 강조하고 싶다.
- 본문의 중심 메시지와는 살짝 거리가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 태도이다.
- 가만히 생각해보면, 베드로 당시 상황은 논리적이기 굉장히 어려운 상태이다.
- 예수님 승천 이후, 리더조차 없이 제자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열흘을 버텼다.
- 예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한 기대도 있었겠지만, 유대교 제사장들의 따가운 시선도 만만치않게 두려웠을 것이다.
- 초-긴장과 초-흥분 상태를 오갔을 것이다.
- 그러던 중 또 말도 안되게 세찬 바람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한 성령이 임한 것이다.
- 그러면서 120명이 동시에 방언을 쏟아냈다.
- 그러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그 한 가운데 베드로가 서 있었던 것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10억짜리 사기를 당해서 채권자들을 피해 숨어있는데, 100억짜리 로또에 맞은 상황인 것이다.
- 그때 차분하게 채권자들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대기업 CEO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이제 직분을 가진지 10일 된 초임 낙하산 CEO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 그만큼 논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하지만, 비-논리적인 믿음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논리가 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가?
- 혹시 믿음이나 성령 핑계 대며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 완벽한 논리는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 논증할 수 있는가?
- 적어도 나는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전도가 우리 교회에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니, 이런 생각이 든다.
- 우리 교회에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교회들이 전도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 전도 방법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지만, 오히려 전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니 전도가 오히려 세상의 조롱 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정말 멋진 전도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함께 고민해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22-24절: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 증언
② 25-32절: 증거① - 예수님의 부활
③ 33-36절: 증거② -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 강림
본문 구성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주장과 근거 두 가지가 전부이다.
- 근거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것이다.
- 그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니,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맞다는 논리이다.
이 두 가지 증거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혁신적인 성경 해석이었을 것이다.
- 그랬기 때문에 3000명이나 되는 열혈 유대인들이 개종까지 불사했던 것이다.
- 당시 그들에게 두 가지 증거는 결정적이었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 증거 자체를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증언 자체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성경이 말하는 증거를 알고나 가자.
-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니까.
- 적어도 구약과 신약의 연결성, 일관성을 통해 성경의 권위를 높여준다.
- 그래서 성경의 주장을 강화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맞는 증거를 찾자.
- 예를 들어, 예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로서, 자아 성찰(자신과의 관계), 관계 회복(남과의 관계) 등이 있을 수 있다.
- 만약 복음이 인류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주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음을 논증할 수 있다면 말이다.
22-24절: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 증언
베드로는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다.
- 22절에서는 포괄적으로 기적, 놀라운 일, 표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23절에서는 세부적으로 기적 중에 최고 기적인 부활을 근거로 증언한다.
- 그러니까 베드로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 전부가 증거가 되는데, 그 중에 특히 부활이 결정적인 증거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 <창조, 통치, 종말이라는 하나님의 섭리 전체>,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 그리고 또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 세 가지를 균형있게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 성경은 이 셋 중에 어떤 것 하나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경중을 구분하고 있다.
-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중심에 두고,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의 생애를 해석하며, 또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
- 역순은 허용하지 않는다.
-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전체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깨달을 수는 없다.
-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는 것은 거짓이다.
- 그래서 베드로도 부활을 중심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두 가지 반대되는 실수를 한다.
- 지나치게 부활만 강조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간과하거나, 부활을 간과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 두 가지 문제가 너무 빈번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
-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을 상징하고, 하나님의 섭리는 일상을 상징한다.
- 올바른 인식은, 신앙의 관점에서 일상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신앙과 일상을 통합하는 것이다.
- 반대로 하면 안된다.
그런데 지나치게 부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 신앙의 관점에서 일상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신앙과 일상을 통합하지 않는다.
- 일상을 배척하고, 신앙과 일상이 괴리된다.
- 전형적인 근본주의자들의 모습이다.
- 또한 기독교 복음주의도 점점 이런 모습으로 타락하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는 사람은,
- 신앙과 일상을 통합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 그래서 명목상 신앙과 일상의 통합이지만, 실상은 일상을 꾸미기 위한 악세사리로서 신앙의 역할이 변질된다.
- 이것이 부활에 중심을 두지 않는 사람의 결말이다.
- 전형적인 세속주의자들의 모습이다.
- 신앙의 중심에 부활을 놓지 못하면, 신앙은 일상에 매몰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 부활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 부활은 모른채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고 생각하진 않는가?
- 동시에 부활이라는 관점 안에서 성경 전체와 인생 전체를 해석하고 있는가?
- 부활에만 매몰되어 인생과 괴리되어 있지 않은가?
베드로는 부활 신앙 중심으로 신앙과 일상을 통합하고 있다.
- 그래서 부활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고, 그것을 일상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증언의 중심인 부활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행 2:23-24]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예정 → 사람의 살해 → 하나님의 부활
베드로 역시 부활을 중심으로 일상과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고 있다.
- 부활을 중심으로 볼 때, 그 예수님을 죽인 인류의 악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일상의 실체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 동시에 부활을 중심으로 볼 때,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
-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임 당함이라는 본질로서의 악을 예정하신 분이시고, 그 악을 동전 뒤집듯 뒤집어서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다.
-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이해할 때에만, 하나님의 섭리라는 핑계로 자신의 불신앙을 합리화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자신의 불신앙에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
- 반대로 부활을 배제한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면, 세상의 악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또한 여전히 악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25-32절: 증거① - 예수님의 부활
베드로는 핵심 증거인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결정적인 증거인지 논증한다.
- 말했듯이, 부활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 논쟁의 여지 없이 사실이라고 전제한다.
- 이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베드로의 논증이 이해된다.
논증 방법은 구약 인용인데, 인용문을 보기 전에 해석 먼저 보자.
[행 2:29-30] 동포 여러분, 나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 무덤이 이 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이므로, 그의 후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그의 왕좌에 앉히시겠다고 하나님이 맹세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두 가지 해석의 키를 제시한다.
- 첫째로, 다윗은 죽었고,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 둘째로, 다윗은 예언자였기 때문에, 미래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예언했다는 것이다.
- 이 두 가지를 근거로, 다윗의 부활 예언은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는 논리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활케 하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실 이러한 베드로의 해석은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 그런가보다 하는거지, 인정하기 어렵다.
- 다윗이 '나'라는 주어로 한 말이 사실상 그리스도가 주어라니 말이다.
[행 2: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나는 늘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기 때문이다.
- 그리고 다윗의 표현도 과연 부활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행 2:27] 주님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 버리지 않으시며, 주님의 거룩한 분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행 2:31]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지옥에 버려지지 않았고, 그의 육체는 썩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 누가 썩지 않는 것을 바로 부활로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베드로가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활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정말 참신하고 혁신적이다 못해서 어이 없기까지 하다.
- 논리의 형식에서 문제를 찾기는 어렵다. 논리적이다.
- 하지만 만약 내가 정통 유대교 신자라면, 베드로의 구약 해석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 쉽게 반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쉽게 납득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 단적으로, 다윗이 예수님을 알고 말했다는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 특히나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면서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신비롭게도 이 해석을 듣고 3000명의 정통 유대인이 회심한다.
- 너무 참신해서 누구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논리적 완결성 때문에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것을 논리적 완결성 때문인지, 성령의 능력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말이다.
- 어쨌든 그들은 이 첫 번째 증거를 근거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
33-36절: 증거② -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 강림
이렇게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언했다.
- 그런 후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을 연결시켜서 논리를 강화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셨기 때문에 성령 강림이 일어났고 방언도 나왔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주장이다.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셨다.
[행 2:3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 당시 유대교 사람들도 이를 어느정도 사실로 받아들였나보다.
- 그랬으니 승천 사실을 논증의 첫 단계에 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승천을 '하나님 우편에 앉는 분', 즉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행 2:3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행 2:34-35]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 즉, 부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였던 것처럼, 승천 역시 또 다른 증거가 된 것이다.
게다가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님의 우편 자리를 성령 강림으로 인한 방언과 연결시킨다.
[행 2:33]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승천 후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전부 보기도 듣기도 했던 성령 강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 따라서 성령 강림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 역시 우리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 왜냐하면 성령 강림 자체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 하지만 성령 강림을 눈 앞에서 방금 목격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 그들에게는 성령 강림을 일으킨 사람이 부활 승천한 예수이며, 그들에게 부활, 승천,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언을 마무리한다.
[행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제
신앙의 표현은 언제나 비-논리적 신비와 논리적 해석이 결합되어야 한다.
- 본문은 부활과 성령 강림 그리고 방언이라는 비-논리적 신비를 구약 성경을 통해 논리적으로 해석했다.
- 그래서 신비가 자의적으로 해석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해석되었다.
-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왜 그래야 하냐?
- 전도할 때 유익하다.
- 신비한 경험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될 때에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공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증언의 효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듣고 감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성경에 의해 객관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경험은 자신 안에 갖힌다.
- 나쁘게 표현하면, 쓸모 없다.
- 더 나쁘게 말하면, 망상이고 공상이다.
- 더더 나쁘게 말하면, 사탄의 속임일 뿐이다.
또 왜 그래야 하냐?
- 나 자신에게 유익하다.
- 논리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경험은 잊혀진고 변질된다.
- 경험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받았던 감동도 무뎌지지만, 그 신비한 경험을 통해 논리적으로 깨달은 말씀은 계속 기억된다.
- 그 말씀만이 나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 방황하고 혼란스러울 때에도 너무 멀리 떠나서 파선하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 그리고 그 기억된 말씀 때문에 신비한 경험이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비-논리적 신비한 경험은 논리적으로 해석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반대로 논리적인 성경 개념 역시 비-논리적으로 경험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 사도행전 1장, 2장은 이 두 가지를 충실하게 따랐다.
- 부활과 승천이라는 신비한 경험을 한 제자들은 그것을 성경으로 해석했다.
- 그래서 그 해석을 기반으로 열두 제자들 회복시켰다.
- 그러자 또 성령 강림과 방언이라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 그래서 또 베드로는 경험을 구약 성경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것이 적절히 이뤄지지 않는다.
- 경험되지 않은 이론만 주장하는 사람과 해석되지 않은 경험만 주장하는 사람이 난무한다.
- 두 부류 사람들의 문제점은 동일하다.
- 결국 자신이 깨달은 이론과 자신이 했던 경험만을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 이론과 경험만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을 다 안하고 결론지은 오만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론을 경험하려 하지 않는 것이고, 경험을 이론화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어떠한가?
- 논리적 이론에 치중해 있는가, 비-논리적 경험에 치중해 있는가?
우리에게는 무엇이 더 필요한가?
- 논리적 이론이 더 필요할까, 비-논리적 경험이 더 필요할까?
- 이론을 몰라서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경험이 없어서 이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우리 교회의 리더로서 이렇게 결론짓고 싶다.
- 우리는 이론과 경험을 모두 적절하게 아우르고 있다고 말이다.
- 우리는 충분히 이론을 알려고 노력하며, 그와 더불어 이론을 경험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면,
-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다.
-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론이 여전히 부족하며, 우리에게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적어도 우리는 나의 이론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안다는 오만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적어도 우리는 나의 이론과 경험이 지극히 적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물론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 열정을 갖고 더 열심히 말씀을 통해 논리적으로 깨닫고, 기도를 통해 비-논리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논리와 비-논리를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
- 여전히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이미 충분한 상태이다.
- 하던 것을 더 열심히 하며 기다리면 된다.
- 우리 모두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 교회가, 많은 것이 필요한 상태이지만,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하자.
- 필요한 것을 구하면서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자.
-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지만,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에 기뻐하고 계시다는 것도 생각하자.
- 우리가 하나님께 충분히 귀한 자녀라는 것도 기억하자.
- 아마도 이런 감사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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