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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02) 1:12-26 12의 회복 - 기도와 말씀을 통한 정체성 확인

이번 본문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은, 본문의 위치이다.

-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하시면서 하셨던 성경 강림 예고과 오순절 성경 강림 사건 사이에 있다.

이 시점의 달력을 자세히 보면,

-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 그리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신 후, 승천하셨다.

- 그런데 오순절은 유월절에서 50일 지난 날이다.

- 여기서 '오순'이 50을 뜻한다.

- 따라서 지금 시점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40여일이 지나고 50일이 되기 전 어느 때이다.

이 기간에 제자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아직 성령님은 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 성령님에 대한 약속이 맺어졌지만, 아직 약속이 성취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 약속을 믿었겠지만, 약속 성취를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반대로 약속을 믿기에 약속을 저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 따라 증인이 되어 전도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만을 위해 살 수도 없었을 것이다.

-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진공 상태로도 볼 수 있고, 반대로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역동적 상태로도 볼 수 있다.

- 그래서 제자들은 너무 불안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너무 불안해서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뭐냐?

- 기도와 말씀이다.

- 어떤 관점에서는 가장 어렵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가장 쉽기도 한 것이다.

왜 쉽냐면, 

- 가만히 한 자리에 앉아서, 누구의 방해나 공격도 없이, 눈 감으면 기도를 하고, 눈 뜨면 말씀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전도를 하려면 사방팔방 돌아다녀야 하고, 끊임없이 사람과 상대해야 하며, 그러다보면 욕 먹고 매 맞는 일까지 생기는데 반해서 말이다.

하지만 왜 어렵냐면,

-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불안할 때, 뭐라도 하면 신경이 분산되면서 마음이 좀 놓인다.

- 그런데 기도와 말씀을 하면, 마음이 온통 불안한 상황에 집중된다.

- 불안을 외면하고 싶어도, 불안에 직면하게 되고, 불안이 증폭된다.

- 그래서 차라리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쉽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도와 말씀을 해야 하냐?

- 기도와 말씀은 언제나 해야 하지만, 혼란스러울 때 왜 더 필요하냐?

내부 결속을 위해서이다.

- 말씀을 통해 내부 본질을 재확인하고, 기도를 통해 내부 본질을 내면화하기 위해서이다.

- 혼란스러움은 외부 상황이 급변하여 예측하기 어렵고, 적절한 판단을 하기 어려울 때 온다.

- 그럴 때 만약 외부 상황에 집중하면, 상황에 매몰되어 파선하기 쉽다.

- 모든 것이 변할 때에는 변하지 않는 '나', 즉 내부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 그리고 내부에 집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막연히 나 혼자 명상하는 것이 아니다.

- '나'를 가장 잘 알려줄 말씀을 깨닫고, 기도를 통해 그 말씀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혼란스러울 때에는 기도와 말씀을 통한 내부 결속이 먼저 필요하다.

- 그렇게 혼란스러움을 해결한 후에, 외연 확장을 위한 전도를 해야 한다.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 외부 상황 인식은 정말 불필요한가?

- '나'를 알기만 하면, 과연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 공동체가 내부 결속을 하기만 하면, 외부 문제는 무조건 해결되는가?

- 내부 결속만 하면 자동적으로 외연 확장으로 이어지는가?

물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 내부 결속을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 외연 확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내부 결속이 되었다고 무조건 외연 확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나'를 안다고 자동적으로 외부 상황이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모르면 절대로 외부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 마치 운전해서 목적지에 가야하는데, '나'의 위치를 모르면 절대로 길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또한 마치 육아에서, 자기 것을 자나치게 챙기며 인색한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더 풍성한 돌봄과 채움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 그렇게 '나'가 채움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인색함이 없어지고 베풀게 되듯이 말이다.

- '나'가 선명해지면, 세상을 보는 렌즈가 깨끗해지고, 세상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세상에 대해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문도 마찬가지이다.

- 철저히 믿고 따르던 길잡이셨던 예수님이 없다.

- 신앙을 가진 후 처음으로 홀로 남겨진 것이다.

- 그래서 스스로 외부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다.

- 게다가 제자들을 이끌어주신다는 성령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다.

- 따라서 현 시점의 제자들은 외부 상황을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래서 뭘 했냐면?

- 기도했다.

[행 1:14]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다.

[행 1:16]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 미리 말씀하신 그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기도와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 '유다의 비극적인 운명'과 '유다가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내용이고, 그 이면에 더 근원적인 깨달음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서, 그것은 열두 제자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 12라는 숫자는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 또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 게다가 열두 지파는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을 인류 전체를 대표한다.

- 따라서 새롭게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열둘'이어야 했다.

본질적으로 볼 때, 베드로는 깨달은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이었다.

- 처음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누구며, 어떤 역할을 부여 받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 단지 예수님과 특별히 친한 사람들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통해 베드로는 깨달은 것이다.

- 자신들은 구약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체하는 열두 제자라는 것을 말이다.

- 자신들이 구원 받을 인류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열둘'이라는 숫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숫자를 중요시 한 근거는 본문에서도 볼 수 있다.

[행 1:15] 그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행 1:26] 그리고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되었다.

- 반복해서 12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특히 강조하는 구절은 17절이다.

[행 1:17] 그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직무의 한 몫을 맡았습니다.

- 새번역 성경은 숫자를 강조하는 늬앙스를 담지 못했다.

- 오히려 개역개정 성경이 더 낫다.

[행 1: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 원어 직역 영어 성경(NRSV)은 더 분명하다.

[행 1:17] for he was numbered among us and was allotted his share in this ministry.

- 즉, 유다가 죽은 것은, 단순히 제자 한 명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표하는 12명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훼손된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새로운 제자를 뽑은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단순히 일꾼 하나가 늘어난 것이 아니다.

- 새롭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회복된 것이다.

게다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것이다.

- 즉, 자신이 바로 그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은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을 통해 온 인류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베드로는 성령 강림을 통해 본격적인 외연 확장에 돌입하기 전,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내부 결속을 강화한 것이다.

- 이것이 새로운 제자 선출이라는 표면적인 내용 이면에 있는 근원적인 의미이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 과연 우리는 내부 결속이 잘 이루어져 있는가?

-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바르게 알고 있는가?

- 인류 전체 구원을 위해 내게 부여된 나만의 역할을 인식하고 있는가?

- 한 발짝 앙보해서, 이런 것들을 알지는 못해도, 알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가?

물론 내부 결속이 완벽하게 될 때까지 외연 확장을 미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 제자들의 공동체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바른 외연 확장은 바른 내부 결속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 다른 말로 하면, 바른 복음 전도는 바른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내부 성찰이다.

- 특별히 우리에게만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언제나 필요하다는 뜻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공동체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 그리고 기도를 통해 그것이 우리 교회에 내면화되어야 한다.

- 교회 공동체의 개인이 전부 완전히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

-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반드시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 그럴 때에만 바른 외연 확장도 가능할 것이다.


내용 정리

단락 구분

① 12-14절: 예수님 말씀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씀

② 15-22절: 베드로의 첫 설교 - 유다의 대체

③ 23-26절: 맛디아로 대체 - 열두 제자의 회복

본문은 성령 강림 예고와 성령 강림 사이에 있는 과도기적인 단락이다.

- 그래서 본문은 승천과 성령 강림이라는 매력적인 사건에 가려져 과소 평가 되었다.

- 단지 제자 열두 명을 채우는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 게다가 어렵게 뽑은 맛디아는 이후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 그래서 맛디아의 선출이 쓸모 없다는 평가까지 난무한다.

하지만 본문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 공동체가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한 사건이다.

- 지난 본문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엉뚱한 질문을 했다.

-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어리숙한 모습까지 보인다.

- 그런데 이제 드디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고, 적절한 행동으로 옮긴다.

- 새롭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내부 결속을 다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음 본문의 성령 강림이 다르게 보인다.

- 우리는 그동안 성령 강림을 제자들 변화의 결정적인 트리거라고 생각했다.

- 제자들이 목숨 걸고 인생 걸고 신앙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강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우리에게도 동일한 성령 강림이 임하면, 제자들처럼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면서 은근히 신앙에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성령 강림은 내부 결속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 제자들이 기도와 말씀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그러한 제자들의 헌신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성령이 임한 것이고, 담대히 말씀을 선포한 것이며, 3000명이 회심한 것이다.

그렇다고 성령님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자는 것은 아니다.

- 성령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차 말했었다.

-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할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우리의 눈을 가려버린다는 것이다.

- 그래서 매력적으로 보이는 3000명의 회심만 보고, 그 이전에 있었던 제자들의 말씀과 기도는 간과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서 말씀과 기도는 하지 않고, 성령 강림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만 한다는 것이다.

-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갖는다.

- 너무나 매력적인 두 본문 사이에 있어서, 눈이 잘 안가는 본문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더 필요한 메시지는 이 본문이다.

성령 강림 본문은 재밌기는 하지만, 어쩌면 별 도움이 안된다.

-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알면 좋지만 몰라도 상관 없다.

-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가 몰라도, 우리와는 상관 없이 일어날 일이기 때문이다.

-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없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성령 강림 이전에 했던 제자들의 행동이다.

-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을 했다.

- 말씀을 통해 자신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 그리고 깨달은대로 행했다.

- 너무 단순해서 지루한 메시지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메시지이다.


12-14절: 예수님 말씀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씀

예수은 올리브산 혹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

- 올리브산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방문하실 때 주로 이용하신 숙소이다.

- 예루살렘과 가까워서 예루살렘에 쉽게 다니실 수 있었고, 예루살렘보다 덜 붐벼서 쉽게 숙소를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 아마 비슷한 이유로 부활 후 40일 동안 이곳에 머무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 승천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따른다.

-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린다.

- 그것을 위해 다락방에 모였다.

여기서 다락방은 '마가의 다락방'이었을 것이다.

- 그리고 이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이다.

- 또 그리고 이 마가는 바울의 선교 여행 중에 도망가버려서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놓은 주범이다.

- 추정키로, 1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다락방을 가진 것으로 보아 부자였을 것이며, 그런 안락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혹독한 선교 여행을 버티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 하지만 결국 마가는 돌아왔고, 바울과 관계를 회복하고, 마가복음까지 기록하게 된다.

그곳에서 11명의 제자들과 몇몇 다른 제자들은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를 했다.

- 여기서 말씀은 당연히 구약 성경이었을 것이다.

- 구약 성경을 통해 제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다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15-22절: 베드로의 첫 설교 - 유다의 대체

120명이 모인 다락방에서 베드로는 처음으로 설교를 한다.

- 베드로의 설교를 다루기 전에, 정황을 상상해보자.

- 상식적으로, 120명이 함께 기도하고 있는데, 정적을 깨고 갑자기 베드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제자를 뽑아야 한다고 쌩뚱맞게 주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 본문만 보고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으로 상황을 상상해보면,

- 120명의 제자들은 일주일 남짓의 시간 동안 함께 모여 밥 먹고, 기도하고, 말씀 보고, 교제하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 굳이 예를 든다면, 일반적인 교회 수련회 분위기였을 것 같다.

- 물론 그보다는 무겁고 진지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 '우리 뭐 먹고 살지?'와 같은 현실적인 대화부터, '앞으로 어떻게 신앙 생활하지?' 혹은 '예수님은 언제 오실까?' 등과 같은 신앙적인 대화까지 주제도 다양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유다 이야기도 나왔을 것이다.

- 당연히 유다를 단순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 반대로 자신들이 유다와 다르지 않다고 회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가 어떻게 배신할 수 있냐며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 그 중에는 성경을 근거로 유다를 해석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 안에서 나름의 합의가 생겼을 것이다.

- 구약을 근거로, 유다의 배신과 유다의 죽음은 필연적이었으며, 유다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제서야 베드로가 나선다.

- 베드로가 주도적이고 독단적으로 혼자 고민하고 혼자 깨닫고 혼자 결정해서 혼자 선포한 것이 아니라, 합의된 의견을 공표한 것이다.

- 베드로에게는 아직 공동체 전체를 영적으로 이끌어갈 리더쉽이 없다.

- 하지만 사회자처럼 공표할 정도의 리더쉽은 있었다.

- 베드로는 그런 역할을 한 것이다.

공표된 내용은 단순하다.

- 유다는 원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는데, 배신을 했고, 그로 인해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 이는 예수님 선택의 실패가 아니라, 구약 성경의 성취라는 것이다.

- 따라서 구약 성경에 따라, 유다는 다른 제자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새로운 제자 선출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 다시 말하지만, 120명이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강력한 리더쉽 때문이 아니다.

- 단지, 말씀, 기도, 교제를 통해 충분한 공론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 그래서 합의에 이른 것이다.

- 그러니 행동에 옮기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초대 교회의 모습을 전제왕권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 모든 것을 베드로를 필두로 리더들이 결정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따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 특히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장면을 생각하면 무섭기까지 하다.

- 하지만 그것은 전제왕권적 시스템에 젖어있는 우리의 관점을 투영해서 그렇다.

- 실제로는 민주적이었을 것이다.

- 그렇게 관점을 전환해야 본문 말씀이 조금 더 잘 이해될 것이다.


23-26절: 맛디아로 대체 - 열두 제자의 회복

제자들은 기준에 맞게 요셉과 맛디아를 고르고, 그 중에 제비 뽑기로 맛디아가 뽑힌다.

-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에 시선을 둬야 할까?

- 왜 요셉을 떨어지고, 왜 맛디아는 붙었는지 분석해서, 삶에 적용해야 할까?

- 우리도 맛디아처럼 하나님의 선택 받는 삶을 살아야 할까?

- 제비 뽑기에 하나님의 뜻이 담긴다는 것을 통해, 중요한 결정을 제비 뽑기로 해야 할까?

하지만 성경은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 일단, 요셉과 맛디아가 누군지조차 알 수 없다.

- 다른 어떤 본문에도 이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 왜 요셉을 떨어졌고, 왜 맛디아가 붙었는지 절대로 알 수 없다.

- 또, 제비 뽑기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 어떻게 해야 제비 뽑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 따라서 사람도, 선출 방법도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열둘'이라는 숫자이다.

- 11명에서 12명이 되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이것이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이다.

여기서 '열둘'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 어떤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미완성된 것이었다.

- 배신할 유다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죄를 지을 수 있는 미완의 존재로 만드신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제자 공동체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완성했다.

- 예수님도 못하신 일을 제자들이 한 것이다.

- 이 역시 마치 하나님도 완성하지 못한 참된 인간을,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참된 인간으로 완성시킨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12의 회복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 이제야 드디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완성된 것이며,

- 이제야 드디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며,

- 이제야 드디어 새로운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모든 것을 혼자 하지 않으셨다.

-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은 물론이고, 미완의 인간을 완성된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어서 사람의 역할을 중요시 하였다.

- 처음 창조되었을 때 사람은 언제나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상태였다.

- 하지만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자, 하나님과 관계 맺는 완성된 인간이 되었다.

- 창조에서도 사람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과정 역시 예수님 혼자 하시지 않는다.

- 예수님이 만드신 미완의 공동체를 사람이 완성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실까?

- 길게 말하지 않겠다.

- 한 마디로,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 하물며 천지 창조 과정 마저도, 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12의 회복 역시 예수님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완성되었다.

- 이렇게 완성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것이다.

- 그것의 첫 사건이 다음 본문의 성령 강림 사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냐?

- 결국 또 예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 제자들을 통해 관계 회복이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다.

앞으로 어떤 관계 회복이 일어날지 기대하며 본문을 보자.


주제

말씀과 기도 그리고 교제만이 우리 정체성을 확인하게 한다.

- 여기서 말하는 정체성은 신앙의 영역 뿐만 아니라, 인생의 영역을 전부 포괄한다.

- 그리고 또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 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전부 포괄한다.

- 즉, 말씀, 기도, 교제를 통해 어떻게 신앙 생활 해야하는지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며, 교회 공동체가 누구인지도 알게 되며, 내가 누구인지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본문에서도 제자들은 말씀, 기도, 교제를 통해 자신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았다.

- 그래서 신앙의 영역에서 새로운 제자를 뽑아야 한다는 것을, 

- 인생의 영역에서 평생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 교회 공동체 영역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 개인 영역에서 공동체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것이 '12의 회복' 안에 담긴 메시지이다.


결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동일하다.

- 말씀, 기도, 교제이다.

- 너무 맨날 말하는 거라서 또 말하는게 민망하다.

- 우리에게 지금 특별히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특별히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 모든 인류에게 언제나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생을 네비로 길찾기에 비유하면,

- 목적지에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많다.

- 지도, 자동차, 연료 등 여러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한다.

- 그런데 특히 중요한 것은 '나'의 위치이다.

- '나'의 위치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확인해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 순간적으로 네비가 현재 위치를 못찾고 멍해질 때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모두 잘 알고 있다.

- 이와 같이 정체성 찾기를 멈추는 것은, 인생 자체를 멈추는 것과 다를바 없다.

게다가 말씀, 기도, 교제를 더욱 강조하는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 재밌게 해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원체 재미가 없는 일이다.

- 성령 강림하고, 기적 일어나며, 3000명 회개하면 흥이 절로 난다.

- 그러나 시커먼 골방에 모여 복작되는 것은 나던 흥도 꺽인다.

그렇지만 해야 한다.

- 정말 열심히 해야한다.

- 그래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 그리고 아는대로 행하는데까지 내면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성령 강림을 통한 외연 확장이 이뤄진다.

- 재미있는 일들이 시작된다.

- 3000명이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온다.

먼저 우리 안에서 '12의 회복'이 일어나야 한다.

- 말씀, 기도, 교제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12의 회복'이 뭘지 고민해보자.

-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진짜 신앙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