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 있다.
① 관계가 뭐냐?
② 관계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③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 명확히 구분할 수 없지만, 요즘 이 세 가지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하고 있는 것 같다.
- 관계가 뭔지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 후에, 그것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적용하는 방법까지 알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 그렇게 된다면, 신앙이 뭔지, 신앙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신앙 생활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 또 그렇게 된다면, 결국 인생이 뭔지, 인생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 특히 내가 그렇다.
- 항상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정말 내가 말하는 신앙이 맞나? 관계를 바르게 맺고 있나?
- 이런 질문 앞에 한 없이 약해진다.
- 행복한 순간에도 이러한 찝찝함에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러는 이유는 많다.
- 직업이 다른 사람 보기에 불안정하다는 것
-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하다는 것
- 여기에 더해서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
- 게다가 부모와의 관계도 좋지 않다는 것
- 또한 신앙 역시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 그래서 교회 역시 다르다는 것 등
사람은 스스로 불안정할 때, 외부 세계와의 동일성을 근거로 안정감을 찾는다.
- 내 안에 뭔가 문제를 느낄 때, 쟤도 저러니까 나도 괜찮은 것이구나. 라며 안도한다.
- 나만 돈 없는게 아니네, 내 아이만 아픈게 아니네, 나만 부모와 문제 있는 것은 아니네, 우리 교회만 이상한 것은 아니네 라며 안정감을 찾는다.
- 물론 나도 남들처럼 사지 멀쩡하고, 남들처럼 처자식이 있으며, 남들처럼 방 두칸짜리 집에서 살고, 남들처럼 입고 먹고 자고 산다.
- 이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라도 불안감을 누른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느끼면, 금새 움츠러든다.
정말 불신앙의 전형이다.
- 사람을 통해 안정감을 찾으려는 것이다.
-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감을 믿지 않는 것이다.
-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다보니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니 결국 인생에 대한 회의와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해법은 뭘까?
-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 경제적인 안정감을 찾으며, 부모님과의 관계도 회복하고, 교회도 다른 교회처럼 바꾸는 것일까?
- 아니면 반대로, 아예 더 극단적으로 외부 환경과 차단하고 불안감을 줄 수 있는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않고 더욱 더 고립되어 사는 것일까?
- 세상 속에 뒤섞이는 것도,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도 답은 아니다.
답을 너무 모르겠으니, 단순 무식하게 생각하는 것 밖에.
- 분명한 것은, 세상 속이냐 밖이냐는 절대로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신앙과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것 밖에 다른 해법이 없다.
-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게 되기를 기대하며 믿는 것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본문을 읽은 나의 심정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 바울이 종과 주인에게 권면을 하는데, 그 메시지가 난해하다.
- 바울은 세상이 만들어낸 종과 주인의 수직적인 권력 관계를 가정하는데,
- 이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그 속에 뒤섞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만들어낸 관계를 부정하고 세상에서 벗어나라는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 종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면, 아무리 나쁜 명령에도 순종해야 하는가?
- 주인의 명령이라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야 하는가?
- 죽이는 것은 명백히 나쁘니까 거역해도 괜찮다면, 어디까지는 순종해야 하고 어느 경계부터는 거역해도 되는가?
또한 반대로 생각해서,
- 주인이 종에게 바르게 대해야 한다면, 어디까지 존중해줘야 할까?
- 종이 거역한다면? 혹은 종이 주인을 부정하고 자유를 요구한다면?
- 주인은 종이 가진 자유에 대한 요구도 존중하고 허락해줘야 하는가?
바울의 권면을 따지지 않고 읽으면 너무 멋있는 말이라 바로 인정이 된다.
- 종은 주인에게 순종하고, 주인은 종을 바르게 대하는 것은 마땅하다.
- 그러나 디테일하게 따져서 실제 상황에 대입해보면, 선택을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만약 주인이 종을 때린다면, 종은 가만히 맞고 있어야 할까?
- 반대로 만약 종이 주인을 밀치고 도망간다면,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할까?
- 본문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 그래서 본문은 굉장히 허무한 메시지가 된다. 무가치하다.
항상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느낌을 준다.
- 뭔가 맞는 말 같기는 한데, 막상 현실의 선택에 도움을 받으려고 하면, 아무 도움이 안된다.
-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사업에서 돈을 벌 때, 육아에서, 부부 관계 등에서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말씀을 떠올려 보지만, 어쩌라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 그러나보니 어쩔 수 없이 삶과 신앙이 분리 되는 것이다.
- 삶에 신앙을 녹여내지 못해서 세속적으로 빠지거나 반대로 전도만 하게 된다.
- 반대로 신앙에 삶을 녹여내지 못해서 일상은 등지고 예배, 찬양, 기도만 하게 된다.
-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을 근거로 삶의 지침을 제시하는데, 다 뻥이다.
- 한 구절 말씀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성경에는 그 지침을 부정하는 구절이 분명히 있다.
- 그러니 좀 의식있는 사람들은 목사님의 설교를 믿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 나를 비롯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겪어 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종과 주인의 바른 관계는 뭐냐?
- 주인이 때리면, 종은 가만히 맞고 있어야 하기도 하며 뿌리치고 도망가야 하기도 한다.
- 반대로 종이 도망가면, 주인은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하기도 하며 가서 잡아 와야 하기도 한다.
- 이렇게 성경은 언제나 반대되고 모순되는 지침을 동시에 한다.
왜 이것이 가능하냐?
- 예를 들어, 좋은 부모가 되려면 엄격해야 하냐, 수용적이어야 하냐? 라는 질문을 한다면,
- 답은 엄격할 때 엄격하기도 해야하고 수용적이어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 모순적으로 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다음 질문을 하게 된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
- 여기서 기준을 알기 위해서는 더 근원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좋은 부모는 무엇인가?
- 따라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엄격하냐 수용적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좋은 부모의 본질을 알면, 엄격하냐 수용적이냐에 대한 해법은 상황에 맞게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실질적 처방이다.
- 이래라 혹은 저래라 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 문제 상황에 직면해 있을 때에는 즉시 써먹을 수 있는 단순한 답을 원한다.
그래서 만약 부모는 엄격해야 한다 혹은 수용적이어야 한다 라고 한쪽 편만 말한다면,
- 그 답은 언제나 반만 맞게 된다.
- 정확하게 말해서, 언제나 오답이 된다.
-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선문답 같지만, 그래서 지금 당상 실생활에 유용하지 않지만, 그래서 그다지 흥미롭지 않지만,
- 좋은 부모의 본질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은 해답이다.
- 그래서 성경도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쓸데 없는 소리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 종과 주인의 바른 관계는 여전히 수직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수평적이어야 하는가?
- 수직적이기도 해야 하고 수평적이기도 해야 한다.
- 그런데 그 기준을 알기 위해서는 바른 관계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 본질을 알면, 수직적이어야 할 때와 수평적이어야 할 때를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종과 주인의 행동 규범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직접적인 행동 규범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 성경을 막상 일상에 적용하려하면 어려운 것이다.
- 그렇게 접근하면 허무하다.
- 오히려 성경이 행동 규범을 말해준다면, 엄청난 시대적, 문화적 차이가 있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본문은 관계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그것을 단지 부부 관계에 빗대어서, 부모 자식 관계, 종과 주인의 관계에 빗대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 행동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 그래서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일상에 적용하면 안되는 것이다.
- 적용은 우리의 몫이다.
- 그래서 2000년 전의 권면이 우리에게도 유효한 것이다.
다시 나의 고민으로 되돌아오면,
- 세상과 뒤섞여야 하는가, 아니면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는가?
- 언듯 보기에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면, 나의 불안감이 해소될 것 같다.
- 세상과 뒤섞이면,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줄어서 불안감이 줄어들 것이다.
- 세상과 분리되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느낄 수 없어서 불안감이 줄어들 것이다.
- 하지만 세상 속에서도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여전히 있을 것이고, 세상 밖에서도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여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법은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바른 인생은 무엇인가? 바른 신앙은 무엇인가? 바른 관계는 무엇인가?
- 그 기준에 맞게, 어떤 것은 세상과의 거리를 좀 좁히고, 또 어떤 것은 세상과의 거리를 좀 넓혀야 하는 것이다.
- 그럴 때에야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찾고, 바른 신앙을 가지며, 관계로 인한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한 관계를 과연 하나님도 중요하게 생각하실까?
-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요즘 우리가 관계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본문 자체가 삶에 대한 권면이기 때문이 그렇다.
- 그래서 관계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 사람 입장이 아닌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같은 질문을 조금 더 생각하기 쉽게 바꿔보면,
- 만약 내가 하나님이라면 혹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라면,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할까?
- 물론 현실에서 왕은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한다.
- 돈을 위해, 권력을 위해, 인기와 민심을 얻기 위해, 나라의 내적, 외적 평화를 위해 밤낮 없이 애쓴다.
- 수 많은 공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 자리 지키기도 힘든 것이 왕의 실상이다.
- 그런데 만약 돈도 많고, 실질적 최고 권력을 가졌으며, 인기와 민심도 극도로 좋아서 나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 왕은 무엇을 원할까?
우선,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송 받기를 원할 것이다.
-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좋아해서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바랄 것이다.
다음으로, 후세 사람들에게도 기억되길 바랄 것이다.
- 그래서 역사 책도 새로 쓰고, 오래동안 남겨질 건축물도 지을 것이다.
- 만리장성, 스핑크스, 피라미드, 콜로새움 같은 것을 많이 지을 것이다.
또,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 그래서 불노장생 약을 먹어 죽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렇게 현 세대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본인도 영생하게 되었다면, 그 다음에 사람은 또 무엇을 원할까?
- 이렇게 비현실적인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이렇게 내려진 결론 역시 비현실적이며, 타당하지 않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좀 더 잘 이해하여, 우리를 좀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이다.
- 왜냐하면 현실에서의 우리는 중요하지 않지만 위급한 상황을 처리하느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 마치 조선 시대 왕들을 보면, 왕위를 지키기 위해 충신을 내치거나 나라 전체를 망쳐버린 선택을 하는 것과 같다.
- 우리도 당장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체 인생을 희생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위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전부 해결되었다는 가정 속에서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왕이 가장 마지막에 하는 일은 무엇일까?
-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 그래서 그들과 마음과 생각을 나누고, 함께 고민하고, 관계 맺는 것이다.
- 그래서 그들로부터 참된 칭송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칭송은 일반 백성들로부터 받는 칭송과는 차원이 다르다.
- 예를 들어, '당신 정말 유능하네요.'란 말을 지나가는 동네 꼬마에게 듣는 것과 스티브 잡스에게 듣는 것과의 차이이다.
- 동네 꼬마한테 듣는다면 한번 웃고 지나가겠지만, 스티브 잡스에게 듣는다면 인생 전체가 바뀔 것이다.
내가 왕으로서 듣고 싶은 말도 바로 이런 것이다.
- 그런데 이 말을 듣기 위해서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 그래서 왕은 사람들을 키우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이르게까지 말이다.
- 사람들을 너무 사랑해서도 있겠지만, 그보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 받고 싶어서이다.
그렇게 참된 칭송을 받기 위해 참 관계가 필요하다.
- 왜냐하면 상대방이 나와 같이 유능해야 한다.
- 그리고 상대방의 유능함을 내가 잘 알아야 한다.
- 또한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도 내가 알아야 한다.
- 이렇게 서로에 대한 신뢰가 명확할 때에만 상대의 칭송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도 있지만, 또한 영광 받고 칭송 받는 것을 너무 원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일하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를 자신만큼 유능하게 하시는 것이다.
-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 이렇게 서로 완전히 신뢰하고 깊은 관계 속에서 하는 찬송과 영광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칭송은 꼬마의 칭찬과 다르지 않다.
-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 맺지 못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무의미하다.
-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 천국에서 영원토록 함께 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관계를 중시하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처럼 서로 관계 맺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 그렇게 관계라는 큰 관점에서 본문을 볼 때에만 본문을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두 가지 관계에 대한 권면을 한다.
① 1-4절: 부모 자식 관계
- 1-3절: 자녀에게
- 4절: 아버지에게
② 5-9절: 주인 종 관계
- 5-8절: 종에게
- 9절: 주인에게
다시 말하지만, 이는 각 사람에게 제시하는 실질적, 실용적 규범이 아니라, 근원적, 본질적 관계 모델이다.
- 본질적인 관계 모델을 구체적인 관계에 빗대어 설명한 것 뿐이다.
- 이 말씀은 종에게 평생 주인 뒤치닥거리나 하며 살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일에서든 자녀는 부모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본문은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과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 왜 이렇게 말하냐면, 현실 상황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 한 공동체 안에 주인과 종이 함께 있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있었다.
- 이는 교회 밖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래서 모두가 다 어색하고 불편했다.
- 종은 종 나름대로 불편했고, 주인도 주인 나름대로 불편했다. 그들을 보는 사람도 불편했다.
- 그런데 바울은 그런 불편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역시 바른 관계라는 것이다.
-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합당한 관계를 맺을 때 교회 공동체가 한 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인정하는 것도 아닌, 한 몸을 강조하는 것임을 기억하며 본문을 보자.
1-4절: 부모 자식 관계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한다.
- 이러한 권면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 부모와 자녀는 명확히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 동시이 부모와 자녀는 반드시 관계 맺고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 한 마디로, 다양성과 하나됨이 권면의 전제라는 것이다.
- 이 두 가지는 바른 관계에 필수 요소이다.
그러니까 전체 맥락 안에서 본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 부모 자식 간의 좋은 관계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니다.
-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수단이다.
- 그리고 교회의 하나됨은 하나님과 하나됨의 수단이다.
- 따라서 하나님과 만물의 하나됨이 궁극적 목적이다.
이러한 메시지에는 전제가 있다.
- 규범에는 상위법과 하위법이 있다는 것이다.
- 이는 예전에 요한복음 7장에서 안식일법과 할례법 논쟁에서 이미 다뤘었다.
- 안식일법과 할례법 모두 중요한 율법이지만, 할례법이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만물의 하나됨이 가장 상위법이고, 부모 자식 관계는 하위법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 상황에 따라서 자식은 부모를 순종하지 않을 수 있고, 부모는 자식을 바르게 양육할 수 없기도 하다는 것이다.
- 부모 자식 관계보다 교회의 하나됨, 만물의 하나됨이 더 우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부모 자식 관계는 교회의 하나됨을 촉진한다.
- 그렇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잘해야하는 것이다.
-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말이다.
-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상하 관계를 잘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우리도 서로 잘해야 하는 것이다.
-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이다.
그 말을 다르게 말하면,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불행을 감수하고 서로에게 책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마치 불행을 감수하고 부모가 자식을 책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 또한 반대로 자식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결국 부모 자식 간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5-9절: 주인 종 관계
두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
① 바른 관계는 서로가 그리스도께 하듯 서로에게 하는 것이다.
[엡 6:7]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
② 서로에게 어떻게 했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심판 받는다.
[엡 6:8]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각각 그 갚음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됨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두 가지 전제의 전제는,
-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일관성 있는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는 것이다.
- 즉,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도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그렇다.
- 반대로 말해서, 사람과는 좋은 관계를 갖는데 하나님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없고, 하나님과는 좋은 관계를 맺는데 사람과는 관계 맺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며,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 역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전제 아래서 두 가지 전제가 나온 것이다.
① 그래서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과 맺는 관계와 같은 방식으로 맺는 것이다.
②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도 맺지 못한 것이고, 이는 결국 지옥 심판 대상이 된다.
- 그래서 종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 순종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인과 맺는 바른 관계를 깨닫는 것이 목적이다.
주인에게 하는 권면도 같다.
[엡 6:9] 주인 된 이 여러분, 종들에게 이와 같이 대하고, 위협을 그만두십시오. 그들의 주님이시요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① 주인도 종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한다.
- 주인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리스도 대하듯 종을 대하라는 것이다.
② 주인도 종과 바른 관계 맺지 못하면 심판 받는다.
- 자신이 종을 대하는 행동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차별 없이 심판 받는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큰 관점에서 보면 바울이 종과 주인에게 하는 권면은 같다.
- 권력의 상층에 있던 하층에 있던, 권면은 같다.
- 남자건 여자건, 부모건 자녀건, 주인이건 종이건, 서로가 서로에게 주께 하듯 대해야 한다.
- 하나님은 아무리 높은 권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권력을 남용하면 심판하신다.
- 동시에 반대로 낮은 권력을 가졌다고, 더 많이 용서해주시지 않는다.
- 차별 없이 심판하신다.
그리고 궁국적으로 한 사람은 하나의 관계 방식만을 갖는다.
- 수직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은, 아랫 사람에게 함부로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한다.
- 반대로 수평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은, 아랫 사람에게 배려하고 윗사람에게 드리 받는다.
- 모든 사람은 둘 중에 하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하나님과도 자기만의 왜곡된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을 굉장히 엄격하게 생각한다.
- 반대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만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바른 관계는 수직도 수평도 아니다.
-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수평적) 주께 하듯 대하는 것이다(수직적).
- 이것이 구체적으로 뭐냐라고 한다면, 참 말하기 어렵다.
- 대표적인 모델로 예수님, 베드로, 바울 등을 말할 수 있다.
- 하지만 정작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냐는 것은 차원이 다르게 어려운 문제이다.
- 그래서 행동 규범을 찾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쉽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다.
-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우리는 분명히 수직 혹은 수평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 만약 자신이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관계의 대상이 있다면, 오히려 그 관계를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 되돌아보자.
- 나는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지.
주제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를 인정하시기도 부정하시기도 한다.
- 이는 하나님이 오락가락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초월하신다는 뜻이다.
- 마치 보통 사람이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캐주얼을 입을까 정장을 입을까 고민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어느 것을 입어도 상관 없다며 검정색 티셔츠를 입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보다 더 중시하시는 상위 가치를 가지고 계신다.
- 그것은 관계이다.
- 세상의 질서는 관계를 맺기 위한 도구이다.
- 때로는 세상의 질서를 인정함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또 때로는 세상의 질서를 부정함으로 관계를 맺으신다.
그래서 성경에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구절과 부정하는 구절이 모두 있다.
- 이번 본문은 겉보기에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 종에게 순종을 권면하기 때문이다.
- 반면에 빌레몬서의 경우, 바울은 종에게 자유를 줄 것을 권면한다.
- 바울이 종 오네시모가 자유를 얻어 함께 일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질서를 인정할 때와 부정할 때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 관계이다.
- 에베소 교회에서는 종이 주인에게 순종할 때 교회의 관계가 깊어질 수 있었다.
- 반면 빌레몬서의 경우 종이 자유케 될 때 관계가 깊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에서 권면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인정하고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 겉모습은 그렇지만, 본문 내면에 있는 메시지는 결국 관계이다.
- 부모 자식 관계 회복, 종 주인 관계 회복을 수단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을 이렇게 적용하면 안된다.
- 부모님께 잘해야지. 자녀에게 잘해야지.
- 회사에서 선임에게 순종하고 후임에게 잘해야지.
- 이는 곧 달을 보라 하니 손가락만 보는 꼴이다.
오히려 이렇게 적용해야 한다.
- 교회의 관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 설교를 더 꼼꼼하게 읽어서 비판할 것은 더 가혹하게 비판하고, 수긍할 것은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지.
-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세심하게 들어서, 잘못된 생각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책망하고, 바른 생각에 대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공감해야지.
- 이런 부분은 관계를 위해 내가 양보하고 교회 시스템에 순종해야지.
- 그런데 저런 부분은 관게를 위해 절대 양보 못해. 교회 시스템을 바꾸자고 요구해야지.
-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관계라는 목적을 위해 다양한 수단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
결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① 하나님께 결국 필요한 것도 관계이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관계이다.
② 그런데 관계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이 결론을 나에게 적용한다면,
① 나의 불안감의 원인은 결국 관계이다. 관계의 결핍이 불안감을 만드는 것이다.
② 그런데 관계를 맺기 위해서 현실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교회의 관계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안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도전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상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도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 함께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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