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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에베소서(08) 4:17-32 새 사람을 입으라. - 자유로운 말의 양면성

본문의 키워드는 '자유'와 '말'이다.

- 그래서 제목을 '자유로운 말'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자유로운 말'에는 양면성이 있다.

- 엄청 좋기도 하고, 엄청 나쁘기도 하다.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사람의 근원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서도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 사람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필수적이다.

게다가 특히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에도 필수적이다.

-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면, 그래서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눌 수 없다면, 서로를 절대로 알 수 없고, 관계는 필연적으로 파괴된다.

- 여기서 말하는 관계 파괴는 분열되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은 채로 굳어져버리는 것을 말한다.

- 모여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생동하지 않는다.

- 죽은 채로 앉아만 있는 것이다.

- 어떤 장면을 생각하며 말하는지 충분히 공감될 것이다.

- 따라서 교회 공동체에서는 언제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면, 서로 기분이 상하고 상처를 받아, 결국 싸우고 돌아설 것이다.

- 모든 싸움은 말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 안에 관계 문제는 언제나 생길 수 있다.

- 문제가 생긴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 진짜 문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냐 마냐를 결정하는 것도 역시 말이다.

-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하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쌍욕이 먼저 나오면 그것으로 관계는 끝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표현을 좋아한다.

- "교회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공동체이자 동시에, 아무 말이나 하면 안되는 공동체이다."

- 자유로운 말의 양면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반드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어떤 제약도 없이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관계를 맺어 하나됨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 역시 자유로운 말이다.

- 아무 말이나 하면 안되고,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한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

이는 분명 모순이다.

- 제약이 없어야 하기도 하며, 제약이 있어야 하기도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 자유롭게 말하라는 것인지, 하지 말라는 것인지 헷갈릴 수 있다.

실제로 교회에서 왜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냐며 불만을 제기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 말로는 자유롭게 하라고 하면서 왜 실제로는 말하지 못하게 하냐고 따진다.

- 나의 말과 실제가 다르다며 위선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관계'의 가치가 '자유'의 가치보다 우선한다.

- 관계를 위해서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 동시에 관계를 위해서 때에 따라 자유가 제약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관점을 갖지 못한 시선으로 보면, 일관성 없어 보인다.

- 그러나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일관되다.

성경도 똑같이 말한다.

[갈 5:13]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여러분의 자유를 남용하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지만, 그 자유를 사랑으로 제어해야 한다고 말한다.

- 하나님이 자유를 일관성 없이 줬다 뺏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가치에 차등을 두시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약간 민망한 면이 있다.

- 왜냐하면 비슷한 상황이 교회에서 불과 얼마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 그 상황을 염두한 설교로 오해받기 딱 좋다.

- 하지만 정말 그렇지 않다.

- 본문이 정확하게 이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키워드를 '자유'와 '말'로 뽑았냐?

- 언듯 보면 '자유'와 '말'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더 의심스럽다.

본문에서는 '자유' 대신에 '방탕', '탐욕', '욕정'으로 표현했다.

[엡 4:19]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엡 4:22]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 이 단어들은 자유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다.

- 방탕은 한문으로 '놓여서 흔들리는 상태'이고, 원어로 '제약 없는 악의'이다.

- 탐욕과 욕정 역시 자유를 남용하는 상태이다.

이렇게 본문은 옛사람의 본질을 '변질된 자유'로 표현했다.

-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동기 역시 '자유'였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물론 본문에 옛사람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다.

- 허망한 생각(17), 무지(18), 마음의 완고함(18), 지각의 어두움(18), 더러운 일(19) 등이다.

- 이러한 표현 역시 아담의 원죄를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 그러나 구체성이 떨어진다.

- 따라서 방탕, 탕욕, 욕정이 이 표현들의 범위를 한정시켜줄 수 있는 단어이다.

다음으로 본문에서는 '말' 대신에 '거짓'(25), '참된 말'(25), '화'(26), '도둑질'(28), '나쁜 말'(29), '욕설'(31)로 표현했다.

- 전부 '말'과 관련된 단어들이다.

-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면서, 말에 대한 권면만을 제시한다.

- 단, '도둑질'에 대해 의문이 있을텐데, 그 부분은 본문 설명할 때 말하겠다.

그러니까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하는데,

- 옛 사람의 특징을 '사랑 없이 자유를 남용해서 내뱉는 말'로 표현한다.

- 그리고 새 사람의 특징을 '사랑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덕이 되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 이를 통해 '막말'을 제한하여 교회의 분열을 막고, '덕담'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여 교회의 하나됨을 이끌고자 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게 말은 쉬운데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 자유를 강조하면 자유를 남용하여 '막말'이 난무하게 된다.

- 반대로 '막말'을 막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만들면,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진심을 표현하기 어렵게 된다.

- 말을 할 때마다 자기 검열을 하게 되고, 결국 생각조차 굳어져버린다.

- 비판하지 않게 되고, 주입되고 세뇌되기만 한다.

- 그래서 보여주기식 관용 표현이 난무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교회들은 엄격한 규율로 질서를 유지한다.

- 평소에는 절대로 말을 못하게 입을 막는다.

- 입을 열기 시작하면 논쟁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기 욕구를 해소시켜주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 자유를 너무 억압하면, 반발이 생기기 때문이다.

- 방법은 제한된 시간에만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 그것이 소그룹 모임이다.

- 소그룹 모임에서 자유롭게 교제하는 것이 교회의 엄청난 발전 같지만, 실상은 욕망 쓰레기 하치장일을 만든 것일 뿐이다.

- 입을 너무 묶어 두면 불만족이 커지니까, 불만족은 해소하되 교회 시스템에는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만든 미봉책일 뿐이다.

- 마치 우리나라 군사 독재 시절 반란을 잠재우기 위한 대책으로 프로 야구와 같은 오락꺼리를 만든 것과 같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되, 욕망을 위해 남용되지 않고 하나됨을 위해 활용되는 경우는 없다.

- 다른 말로, 자유를 통해 개인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동시에, 공동체가 온전히 하나 되는 일은 현실에서 찾기 어렵다.

- 또 다른 말로, 자율성과 소속감을 동시에 보장하는 곳은 없다.

-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는 마치 진보만도 아니고 보수만도 아니고 또한 진보와 보수에 모두 관심 없는 중도도 아닌, 진보와 보수를 동시에 추구하는 정치 세력이 없는 것과 같다.

- 만약 있다면 그 세력이 무조건 집권할텐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오직 교회에서만 가능하다.

-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먼저 성취해주셨기 때문이다.

- 가장 먼저는 삼위일체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성취하셨다.

-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그것을 성취하셨다.

- 그런 후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것을 성취하셨다.

그런 하나님의 성취에 근거하여 교회 공동체는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가 된 것이다.

- 그리고 하나님의 성취에 근거하여,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비유적으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한다.

- 다르게 표현하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말한다.

- 하나님께서 사람이 절대로 동시에 가질 수 없는 하나됨과 다양성을 주셨다.

- 그러니 서로 사랑함으로 그것을 지켜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자유롭게 말하되, 오직 하나됨을 위해서만 말하라는 모순된 권면을 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동시에 지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왜 새 사람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말'이냐?

-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반면에 남용되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겠는데, 왜 많은 자유 중에 '말'의 자유에 대해서만 권면하냐?

결론부터 말해서, 결국 관계에는 '말'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 물론 관계에 '말'이 전부는 아니다.

- '행동' 역시 필수적이다.

하지만 ''행동'은 '말'에 비해 구체성이 떨어진다.

- '행동'은 해석이 필요하다.

- 같은 행동을 두고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 또 좋은 동기로 시작한 행동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말'은 비교적 명료하다.

- 메시지를 직접 전달한다.

- 해석의 여지가 비교적 적다.

- 동기가 왜곡될 가능성이 적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다.

-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행동'하셨다.

-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운행하시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행동'이다.

- 하지만 이 '행동'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 정말 하나님의 '행동'인지 아닌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 그래서 신학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간접(일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특별) 계시'라고 부른다.

- 하나님의 말씀이 더 구체적,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 오해의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말이다.

따라서 '말'은 현실에서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끈이다.

- 물론 전선으로 뇌를 직접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오류가 많지만, 현 시점에서는 뇌를 연결시켜주는 최상의 기술이다.

- 말을 통해 나를 표현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인다.

- 복음이 전달되는 것도 '말'을 통해서이고, 성령이 임하시는 것도 '말'을 통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말'에 초점을 둔 것이다.

- 그래서 교회 안에 더욱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한 것이다.

- 또한 동시에 교회 안에서 말하는 자유가 남용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성취되길 바란다.


내용 정리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① 17-24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 17절: 권면 선포

- 18-19절: 옛 사람의 상태 - 방탕, 탐욕

- 20-24절: 새 사람의 상태 - 하나님의 형상

② 25-32절: 참된 말을 하십시오.

- 25절: 참된 말을 하십시오.

- 26-27절: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 28절: 도둑질하지 마십시오.

- 29-30절: 나쁜 말을 하지 마십시오.

- 31-32절: 욕설은 버리고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전체 구성을 보면,

- 17-24절은 큰 틀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비교한 후, 25-32절은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 특히 25-32절은 개별적인 다섯 가지 권면이 아니라, '말' 할 때 주의할 점을 제시하고 있다.

17-24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지난 본문의 권면은 교회 공동체 전체 관점에서 제시된 것이었다.

- 각 개인들이 다양한 역할에 충실할 때 공동체 전체의 하나됨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 개인보다는 공동체 전체에 중점을 두었다.

반면에 이번 본문은 각 개인에게 초점을 둔다.

- 하나됨과 다양성이 공존하기 위해서 각 개인이 무엇을 해야하냐는 것이다.

-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데,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이다.

18-19절에서 말하는 옛 사람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로, '자유'다.

- 방탕과 탐욕을 종합한 키워드다.

- 아담의 원죄의 원인이기도 하다.

- 사람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정작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면, 그 자유로 자신을 파괴한다.

- 하나님은 아담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지만, 아담은 그 자유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영생을 포기했다.

- 만약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스스로 되짚어보자.

둘째로, 자유의 원인인 '무지'이다.

- 무지, 완고함, 지각의 어두움, 수치의 감각을 잃음을 종합한 키워드이다.

- 근원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피조물이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에 대한 무지이다.

-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무지이다.

- 그래서 주인처럼 행세하는 무지이다.

- 비유를 하자면, 취조실처럼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혼자 있다는 착각에 아무렇게나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자신이 현재 공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지이다.

- 자신을 통제하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이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 모르는게 왜 나쁜거냐?

- 모르는 것은 알려줘야지,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는데 뭐가 문제냐?

왜 문제냐면, 이미 알려줬기 때문이다.

[롬 1: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 알 수 없는 초월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세상 전체에서 굉장히 작고 제한적인 일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하나님께서 알려줬는데도 모르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 발 더 양보해서, 무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 초월자가 누군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고 해도, 자신이 다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 즉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이것조차 모른다는 것은, 단순한 무지를 넘어서 무식한 것이다. 교만한 것이다.

- 사람이 바른 신앙을 갖고 믿음에 투신하는 것은 불가능할만큼 어려운 일이다.

- 하지만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은 가능하다.

- 무지조차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무식한 것이다.

- 무지할 수는 있지만 무식해서는 안된다.

셋째로, 자유의 결과인 '타락'이다.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남, 더러운 일을 함으로 표현되었다.

- 아담이 자유를 남용하여 선악과를 먹은 후의 상태이다.

-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 이브 핑게를 대는 더러운 일을 했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다.

- 이는 자유를 추구하는 모든 인류의 상태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 모든 일상이 더러운 일 투성이라서, 자신이 더러운 일을 하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 마치 노숙자가 몇 달씩 씻지 않아도 찝찝해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옛 사람의 특징이며, 현실에서 우리의 모습이다.

반면에 20-24절에서는 새 사람의 특징이 나온다.

- 그런데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 그나마 구체적인 묘사가 24절의 '하나님의 형상', '의로움', '거룩함'이다.

- 게다가 세 가지 표현은 모두 같은 뜻이다.

- 모두 '하나님다움'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새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다움'이다.

- 그것이 무엇인지는 본문에서 밝히지 않는다.

- 그러나 그것이 '관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 자유로움 속에서 그리고 자유를 포기하여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 사람의 특징을 다음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25-32절: 참된 말을 하십시오.

총 5가지 권면을 한다.

- 총 11개 명령형 동사가 나오는데, 몇 개씩 묶인다.

① 25절: 참된 말을 하십시오.

- '참된 말'이 뭘 말하는지 구체적이지는 않다.

- 단순히 솔직함을 말하는지, 아니면 진실 혹은 사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지 모호하다.

그러나 목적이 구체적이다.

- '하나 되는 관계'이다.

그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참된 말의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해진다.

-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관계의 파괴는 자명하다. 

- 의도적이진 않지만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숨기면, 관계의 발전은 멈춘다.

- 따라서 의도적인 거짓말을 안하는 것은 당연하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그러려면, 진실된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 또 그것을 알려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공동체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 그리스도와 공동체 앞에 최선을 다해 진실되게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그 과정 중에 무의식적으로 숨겼던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 무의식적으로 숨겨왔다는 것은, 그 진실된 모습을 스스로가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진실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하지만 공동체에서 진실되는 것은 의무이며, 동시에 부끄러운 진실을 밝힌 성도를 포용해주는 것은 공동체의 의무이다.

따라서 참된 말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각 개인이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 동시에 공동체 전체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진실될 수 있도록 포용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후자가 더 중요하다.

-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진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없던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도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② 26-27절: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 여기서는 4개의 명령형 동사가 나온다. 모든 문장이 명령이다.

- 화내라! 죄 짓지 말라! 화 풀라! 틈 주지 말라!

4개의 명령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화가 나는 것은 괜찮다.

- 일례로, 하나님도 예수님도 많이 화가 나셨었다.

- '화'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기본 감정이다.

- 기쁨, 슬픔, 배부름, 배고픔 등과 같다.

- 그 자체로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다.

- 특히 악에 대한 '화'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이다.

- 감정을 자유롭게 느낄 자유가 있다.

둘째로,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르다.

- 차이는 판단의 유무이다.

- 비유하자면, I-메시지와 You-메시지의 차이이다.

- I-메시지가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You-메시지는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판단하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아이가 우유를 쏟았을 때, "흘린 우유를 닦는게 힘드네. 다음엔 조심해줘."라고 말하는 것과 "너는 왜 이렇게 부주의하니? 컵 똑바로 들어."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이다.

판단하는 것이 왜 문제냐?

-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 자신에게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 따라서 판단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다.

따라서 화가 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진실되게 말하는 것이다.

- 진실되게 말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전부 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왜냐하면 내 생각 속에는 진실도 있지만, 알지 못하는 거짓도 있기 때문이다.

- 내 생각 중에 진실과 거짓을 가려서, 진실만 말하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부주의하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개인의 의견이다.

- 반면에 '힘들다'는 진실이다. 진짜 힘드니까.

- 이 둘을 가려서 진실만 말하는 것이다.

-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이렇게 진실되게 말할 때에만, 관계는 유지된다.

- 만약 진실에 덧붙여 판단까지 말하면, 기분 나빠서 관계는 깨진다.

- 반면에 상대 기분 나쁠까봐 판단 뿐만 아니라 진실까지 숨기면, 관계는 멈춘다.

- 따라서 화가 날 때에도 진실되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 자유롭게 진실을 말하되, 판단하고 싶은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셋째로, 화를 내면 악마에게 이용 당한다.

- 화를 내며 판단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 첫째는 자신의 무지를 잊어버려 무식해진다.

- 둘째는 공동체 관계가 깨진다.

이것이 언제나 악마가 하는 일이다.

-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에 대해 무지하게 되었고, 동시에 이브의 핑게를 대며 관계가 깨졌다.

따라서 화가 났다면 먼저 진실되게 말해야 하고, 진실되지 못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로 잡아야 한다.

③ 28절: 도둑질하지 마십시오.

- 가장 난해했던 구절이다.

- '말'과 '도둑질'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성경에는 이 둘을 연결시키는 상황이 있다. 

-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속이는 저울'이다.

[잠 11:1]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셔도, 정확한 저울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 속이는 저울로 물건의 무게에 대해 거짓말하는 것이다.

- 이는 일종의 도둑질이다.

둘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이다.

- 이들은 교회의 재산을 가져가지 않았다. 오히려 재산을 가져왔다.

- 그러나 '일부'만 가져온 후 '전부' 가져왔다고 거짓말 했다.

- 이 역시 하나님의 재물을 도둑질한 것이다.

저울 추가 잘못된 것과 재산의 일부만 가져온 것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 하지만 잘못된 추가 올바르다고 거짓말 한 것 그리고 일부를 전부라고 거짓말 한 것이 문제다.

- 두 상황 다 진실되게 말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 역시 '말'에 대한 권면이다.

- 어떤 상황에서든 진실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노동의 목적도 제시하고 있다.

- 한 마디로, '구제'이다.

- 본문에 나오진 않지만, '구제' 역시 단순히 도와주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노동은 진실된 방법으로 그리고 바른 목적을 위해 할 때, 노동을 통해 공동체가 하나 되는 것이다.

④ 29-30절: 나쁜 말을 하지 마십시오.

- 권면의 상황을 염두한 권면이다.

- 덕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 여기서 '덕'은 원어로 building이다. 하나됨을 뜻한다.

- 교회 안에 분열이 있어서 하나 되기 위한 권면이 필요할 때, 나쁘게 말하지 말고 신중하게 잘 말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한다.

- 성령을 슬프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한다는 것의 비유적 표현이다.

[사 63:10] 그러나 그들은 반역하고, 그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게 했습니다.

- 게다가 '여러분이 성령으로 이미 인치심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왜 이것을 강조하냐?

- 교회 안에서 서로의 인치심을 부정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약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 그 실수로 교회의 하나됨을 저해할 수 있다.

-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덕을 세워 하나 되기 위해 권면할 수 있다.

- 그 때 잘 말하고 잘 들어서 다시 관계가 회복되면 아무 문제가 안생긴다.

- 오히려 이런 일을 계기로 이전보다 하나됨은 강화된다.

그런데 문제는 잘 말하지 못했을 때이다.

-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실수라면 용납해야 한다.

- 절대 인치심, 즉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까지 부정하면 안된다.

- 그것은 하나님의 뜻까지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원을 부정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었다면 혹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의심해볼 수 있다.

- 심하면 공동체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조차도 신중하게 잘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 권면의 말 때문에 오히려 공동체의 관계가 더욱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이 성령을 슬프게 하는 말이다.

⑤ 31-32절: 욕설은 버리고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 마지막 총정리이다.

- '욕설을 버리라'와 '친절히 여기라'가 명령형 동사이고, '용서하십시오'는 분사 구문이다.

-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나쁘게 말하지 말고 친절하게 잘 말하라는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 용서하라는 것이다.

긴 말이 필요 없다.

- 먼저 마음으로 용서해야 친절히 말할 수 있다.

- 그래야 아무리 상황이 나빠져도 나쁘게 공격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진실되게, 잘, 신중하게, 친절하게 말할 때,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 그런 분위기 속에서만 사람은 더욱 더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 동시에 모든 사람이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자유를 절제하고 제한해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 말이나 하면 안된다'는 말의 뜻이다.

- 그럴 때 각 사람의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동시에 공동체가 하나될 수 있다.


주제

자유로움 속에서 사랑으로 자유를 제한하며 말할 때, 교회는 교회 될 수 있다.

'자유'와 '말'은 모두 양면성이 있다.

-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핵심적인 도구이다.

- 자유가 아닌 억압으로 맺어진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발적으로 맺어진 관계만이 참 관계이다.

- 또한 말은 사람이 가진 가장 진보된 기술이다.

- 무선 연결되고, 실시간 전달 되며, 가장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한다.

- 그래서 아기가 말하기를 가장 늦게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와 '말' 때문에 관계가 깨진다.

- 말하고 싶다고 아무렇게나 말하면, 관계는 깨지고 오해와 상처만 남는다.

- 아담의 원죄도 '자유'와 '말'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유'와 '말'을 없애면?

- 관계가 깨질 위험은 없어지지만, 관계가 맺어질 가능성 자체도 함께 사라진다.

- 마치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것과 같다.

- 감기 걸리는 것이 무서워 자살해버리는 것과 같다.

이것이 현재 교회의 실상이다.

- 거름마를 배운 아기가 자꾸 넘어져 다치니까, 다리를 잘라버린 것과 같다.

- 교회 안에서 점차 관계가 깊어지면서 상처도 함께 많아지니까, 일정 수준 이상으로 관계 맺지 못하도록 시스템으로 막아버린 것이다.

-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교회 시스템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교회 시스템을 바꾸려는 것이다.

- 물론 생각대로 잘 되고 있지 않다.

- 다른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교회에서도 자유로운 말 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는다.

- 어떤 면에서 관계가 깊어지는 정도보다 상처가 쌓이는 정도가 더 큰 것 같다.

- 우리 교회를 나간 사람이 많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본문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잘' 하라는 것이다.

- 자유롭게 말하게 하되, 자유를 남용하지 않고 스스로 절제하라고 말한다.

- 메시지에 무한 공감하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상적인 메시지이다.

그럼 우리도 어쩔수 없는 것일까?

-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일까?

- 이상을 실현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고, 현실에 타협한 다른 교회의 실상은 현명한 것일까?

이러한 예시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 아기가 걸음마를 배울 때 약 2000번을 넘어진다고 한다.

- 어쩌면 우리 교회도 걸음마를 배우는 시기이다.

- 따라서 2000번 정도는 실수해도 괜찮은 것이다.

- 적어도 다른 교회들처럼 넘어지는게 싫어서 걷기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물론 아기 중에 걸음마를 배우다가 넘어져서 평생 불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

- 그런 아기는 평생 걷지는 못할 것이다.

- 그러나 다리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이동하며 사람답게 살 것이다.

반면에 걸음마 자체를 포기한 아기는 다르다.

- 걸음마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배변, 먹기 등 앞으로 있을 모든 배움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사지는 멀쩡하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어떤 수준에 있는지 알 수 없다.

- 여러 사람이 나감으로 이미 불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 하지만 적어도 여전히 배우려고 하고 있다. 도전하려고 한다. 절대 포기하지는 않았다.

- 건강한 사람처럼 뛰어다니지느 못해도 사람 구실하며 사는 사람들처럼, 우리 교회는 언젠가는 교회 구실하며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교회는 실수가 두려워서 현실에 타협했다.

-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시스템으로 차단시켰다.

- 그러면 몸은 다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다.

- 그러나 그 몸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몸이다.

- 장애인보다도 못한 정상인의 몸이다.

- 사람 구실 못하는 사람처럼, 교회 구실 못하는 교회이다.


결론

자유롭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고, 자유를 절제하며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 본문은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 말하는 것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 우리 역시 이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이상 역시 관계 맺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진실되게 말할 수 있으면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관계를 전혀 맺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 진실되게 말하려는 노력과 과정 그 자체가 깊은 관계를 맺게 해준다.

그러니 현재 우리가 진실되게 말하지 못한다고 너무 낙담하지 말자.

- 애초에 불가능한 이상이다.

-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대상일 뿐이다.

동시에 진실되게 말하려고 노력하자.

- 변화된 결과가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을 중시하자.

- 아무리 결과가 없어도 노력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칭하실 것이고, 우리 서로도 그 노력 때문에 감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는 결과가 중요하다.

- 하지만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

- 시간만 지나면 어짜피 모든 결과는 무한대로 다 똑같이 되기 때문이다.

- 방향성이 중요하다. 노력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