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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에베소서(06) 3:14-21 하나님만의 독보적인 능력 - 사랑의 능력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 중에 하나지만, 그 중 가장 근원적인 단어이다.

- 이에 누구도 반박하지 않는다.

-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은 모두 사랑에 종속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표현하는 두 번째 단어가 있다.

- 공의 혹은 정의이다.

- 잘못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한다.

- 그런데 그 심판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사람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보고 두려움, 공포, 거리감, 경외감을 느낀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버리시기 때문이다.

- 대표적인 예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다.

- 그들은 잘못이 밝혀지자 즉사했다. 

- 이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실제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랑과 공의라는 모순된 두 가지 성품이 있다고 말한다.

- 하나님께 따뜻한 면과 차가운 면, 다정한 면과 내정한 면, 잘못을 용서하시는 면과 잘못을 심판하시는 모순된 양면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 만약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며 동시에 혼냈다면, 그 부모가 모순적이기 때문인가?

- 오히려 사랑의 다른 두 가지 모습이다.

- 모순된 것이 아니라 일관성 있는 것이다.

- 그렇다고 사랑을 가장한 학대는 합리화 될 수 없다.

마차가지로 하나님은 모순된 두 가지 성품을 가지신 것이 아니다.

- 일관성 있게 사랑하시는 것이다.

-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과 공의 중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는가?

- 사랑하기 위해 공의로우신 것인가, 공의로우시기 위해 사랑하시는 것인가?

- 사랑을 수단 삼아 공의라는 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인가, 공의를 수단 삼아 사랑이라는 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인가?

- 부모는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혼내는 것인가, 혼내기 위해 사랑하는 것인가?

비슷한 질문을 다시 하면,

- 검찰과 경찰은 시민을 보호하는 조직인가, 처벌하는 조직인가?

- 보호하기 위해 처벌하는가, 처벌하기 위해 보호하는가?

당연히 목적은 보호이다.

- 공의로운 처벌은 보호의 수단이다.

- 법 지키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법 안지키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 그래서 모두가 보호 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 그래서 아무도 처벌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도 사랑이다.

-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공의, 심판, 냉정함, 냉혹함, 엄격함이 필요한 것이다.

- 안그러면 사람이 사랑을 빌미로 오히려 방종하고 하나님을 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 '손자를 귀여워하면 할아버지 수염을 뽑는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리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도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즉 하나님과 사람이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공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에는 공의가 필요할까?

- 인생은 짧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왜 사랑하는 사람을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해야 할까?

- 왜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혼내야 하며, 공권력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처벌해야 할까?

- 왜 할아버지가 손자를 귀여워하면, 손자는 결국 할아버지 수염을 뽑게 될까?

결국 사람의 죄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귀여워해주시기만 하면,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수염을 뽑을 것이다.

-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다.

그렇다면 죄는 뭘까?

- 도대체 죄가 뭐길래 사랑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의라는 수단이 필요할까?

-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자 할까?

- 이렇게 죄를 알아야 공의의 역할을 알게 되고, 그래야 공의를 통해 완성된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죄의 원형인 선악과 사건을 보자.

-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대표 명령으로서,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끈이다.

- 왜냐하면 아담은 선악과를 통해 자신에게 제약이 있다는 것과, 또 그 제약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 사랑하셔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 결과적으로, 아담에게 선악과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런 점에서 선악과는 아담이 하나님을 알고 믿어 구원 받는 유일한 끈이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고, 그 행위는 인류 죄의 원형이 되었다.

- 왜 먹었을까?

- 간단하다.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 아담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좋은 것은 너무 잘 알지만, 그래도 먹고 싶었다.

- 먹고 싶은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 한 번도 안먹어본 과일을 보고 먹고 싶다고 느끼는 것에 왜? 라고 질문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

-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먹고 싶은 것일까?

- 먹고 싶은 마음의 밑바닥에는 뭐가 있을까?

- 선악과가 맛있을 것 같아서? 아니다.

- 선악과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과일이다. 맛을 모른다.

- 먹어보지 않은 음식은 먹고 싶을 수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싶은 이유는 뭘까?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 이것이 선악과 먹은 행위의 본질이다.

- 하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하고 싶었던 것이다.

- 자유가 제약된 것에 불만을 느꼈고, 더 큰 자유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유를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 그래서 하난과의 관계를 깨고 마음껏 먹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이 죄의 원형, 죄의 본질이 된 것이다.

정리하면, 선악과는 두 가지 역할을 갖는다.

-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통해서 사람과 '관계의 끈'을 맺으셨다.

- 그러나 아담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에 관계의 끈을 끊어버리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따라서 선악과 사건은 '관계'와 '자유'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다.

- 하나님께서는 '관계'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려 하셨지만, 사람은 '자유'를 위해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고 떠난 것이다. 

- 그 종착지가 지옥인지도 모른채 말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의의 본질은 '관계'이고, 죄의 본질은 '자유'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 마디만 더 하면, '자유'와 대척점에 있는 '관계'라는 것이 무엇일까?

- 언듯 생각하기에, '자유'의 반대는 '억압'인데, '관계'는 '억압'이란 말인가?

- 업악하고 짓누르고 학대하는 것이 관계란 말인가?

괜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당하며 돈도, 직업도, 사랑하는 사람도 뺏겨서 고통스러워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섣불리 믿음에 헌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냐면, 자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자유를 생각할 때 수직 관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 수직 관계에서 자유란, 필연적으로 상위 계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 수직 관계에서는 항상 윗 사람이 아랫 사람보다 더 자유롭기 때문이다.

- 윗 사람은 아랫 사람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지만, 아랫 사람은 윗 사람의 통제 안에 있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 반대가 억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자유가 박탈되면 낮은 사람이 되어, 윗 사람이신 하나님의 억압 속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그래서 신앙 생활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수평 관계에서는 다르다.

- 수평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관심 없음' 혹은 '관계 없음'을 의미한다.

- 예를 들어, 배우자가 있음에도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배우자에 관심 없다는 뜻이다.

-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 반대는 '관심 갖음' 혹은 '관계 맺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성적 자유를 헌납하고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다.

- 배우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또 자유를 반납하고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다.

-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관계가 자유보다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구원에 대한 표현으로서 '자유'를 사용한다.

[요 8:32]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여기서 '자유'도 수평 관계에서의 자유이다.

- 즉,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돈, 명예, 건강, 목숨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 '세상 안에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이다.

- 그래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정말로 자유를 원한다.

- 자유를 원하는 것은 본능이다.

- 나 자신의 영역을 계속해서 확장하길 원한다.

-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범위를 넓히길 원한다.

- 그래서 돈을 벌어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사람은 모두 적이다.

- 나의 자유를 위해 적을 제거한다.

- 목숨 걸고 달려든다.

- 빵(목숨)보다 자유가 더 소중하니까.

적을 제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죽이는 것이지만, 죽이지 않고 제거할 수 있는 방법도 많다.

- 적보다 한 단계 위로 올라서면 된다.

- 돈이건, 명예건, 지식이건, 힘이건, 능력이건 위로 올라서면, 아랫 사람을 제거하지 않고 제어할 수 있다.

- 그래서 사람들이 올라서려 하는 것이다.

- 적어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다.

- 조금 더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적을 제압해 가다보면, 끝판왕이 나온다.

- 바로 하나님이다.

- 사람은 결국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 우리 인생에 개입 혹은 침범 또는 침해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 그리고 하나님 역시 제압하려고 한다.

아무도 무식하게 하나님을 대놓고 제거하지 않는다. 

- 세련되게 제거한다.

- 자신이 하나님을 제거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게 제거한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제압하여 이용하려는 목적이다.

- 이렇게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더 자유롭게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유명하다.

-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 그러면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다.

-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제압 혹은 제어할 수 있다.

어떻게 하냐면,

- 1단계: 하나님과 율법의 권위를 같다고 주장한다. 율법을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 2단계: 율법을 규정한다. 나에게 맞게.

- 3단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 나에게 맞게 만들었으니 지키기 쉽다.

- 4단계: 율법 위로 올라선다. 율법을 정복하는 것이다.

- 5단계: 자연스럽게 하나님 위에서 하나님을 정복한 사람이 된다.

- 그렇게 바리새인들은 최고의 지위에서 최고의 권위를 누렸고, 누구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 이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율법에 열성이었던 것이다.

- 율법이 그들의 자유를 보장, 확장해주기 때문이다.

- 신비주의, 복음주의, 칼빈주의, 자유주의 다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렇게 혼신을 다해 구축해놓은 시스템에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똥물을 튀긴 것이다.

-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을 조롱하셨다.

- 만약 율법과 성전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 오히려 율법과 성전이 바리새인의 '자유 보장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조롱하신 것이다.

- 율법과 성전을 조롱해서 바리새인의 보이진 않는 계략을 드러내 부수고, 참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성공했다.

- 바리새인의 실체가 드러나, 2000년 동안 욕을 먹고 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실체도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 중에 바리새인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예수님을 저지, 제어, 제압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 처음에는 세련되게 제압하려고 수차례 시도했다.

- 예수님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려고 여론을 선동했으나 실패했다.

- 예수님은 언제나 팩트(말씀)로 위기를 벗어나셨다.

- 뿐만 아니라 그때마다 바리새인의 민낮은 더욱 더 드러났다.

- 그럴 때마다 바리새인의 자유는 야금야금 박탈당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바리새인은 강제 진압에 나섰다.

- 세련된 방법을 포기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바꿨다.

- 그것이 바로 제거하는 것이다.

- 자신들이 가진 권위와 돈으로 여론을 선동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예수님을 직접 죽음에 내몰았다.

- 그리고 죽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의 최후이다.

-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죽이고 만다.

- 단지 2000년 전 바리새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개입, 간섭, 침입, 침범하신다.

- 우리와 관계 맺고자 하신다.

-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서, 누구의 간섭도 받기 싫어한다.

- 무한한 자유만을 위해 달려간다.

-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도 외면하고, 잠도 포기하고, 밥도 안먹고, 건강도 희생시킨다.

- 사람에게는 자신의 전부보다 자유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방해하는 하나님 따위는 죽여버려야 마땅한 것이다.

- 자기 자신의 목숨마저도 희생하는 판에, 다른 누구의 목숨이 소중하겠는가!

- 그렇기 때문에 죄의 본질이 자유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죽이고서라도 자유를 얻어서 행복해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무리 위로 올라가도 언제나 또 다른 사람이 위에 있다는 것이다.

- 내가 돈을 가장 많이 가졌다고 해도, 나보다 지식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있다.

- 돈과 지식을 가장 많이 가졌다고 해도, 권력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있다.

- 돈, 지식, 권력을 가장 많이 가졌다고 해도, 인격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있다.

- 돈, 지식, 권력, 인격까지 다 가졌어도, 그 시간 동안 건강을 잃어버리게 된다.

- 그래서 결국 죽음 앞에 모든 자유를 뺴앗긴다.

- 즉, 자유를 얻으려고 아무리 올라가도, 결국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자신 위에 또 다른 사람이 있고, 자신의 자유는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침해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 사람은 원하는 자유를 결코 얻을 수 없다.

- 자유를 위한 노력은 헛수고일 뿐이다.

-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위해 산 사람은 결국 좌절하고 실망하며 불행해진다.

둘째로, 만약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고 해도,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 왜냐하면 사람은 관계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람에게 왜 자유가 줄 수 없는 행복을 관계가 주는지 논증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미 많이 경험했다.

- 예를 들어, 대학 입시가 끝나고 마음껏 잘 수 있고,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고, 마음껏 티비를 볼 수 있게 되면, 이렇게 자유가 주어지면, 잠이 안오고, 책과 티비가 재미 없게 된다.

- 그러면 뭐하냐? 친구와 약속을 잡는다.

- 즉, 자유를 버리고 관계를 선택한다.

- 자유가 없을 때는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자유를 포기하고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 사람이다.

- 자유 자체로는 사람에게 아무런 행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자유가 관계를 선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만 행복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왜 자유를 원할까?

- 무식해서 그렇다.

- 그래서 바울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엡 3:18-19]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 자유가 필요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관계로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에게 손가락질 한다.

-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버리고 찰나의 쾌락을 위해 선악과를 먹는 아담이 무식해 보인다.

- 아담의 무식한 선택 때문에 우리까지 죄로 고생한다며 원망한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도 매일 무식한 선택을 하며 산다.

- 자유를 위해 관계를 포기한다.

- 돈 좀 더 벌려고 사랑하는 식구들을 멀리한다.

- 잠 자는 자유를 누리려고 하나님과의 기도 시간을 포기한다.

- 아담의 무식함에 손가락질 하는 것은 자신의 무식함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번 본문이 필요한 것이다.

-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기를,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기를.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엡 3:18]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 즉, 하나님과 우리의 양방향의 관계가 맺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자유는 아무런 행복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 오직 관계만이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도 응답이 이뤄지길 바라며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① 14-19절: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

② 20-21절: 하나님께 영광 - 하나님의 능력

여기서 기도 부분이 또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4-15절: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기도 시작

② 16-17절: 하나님께 바라는 기도 - 에베소 교회를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③ 18-19절: 교회에 바라는 기도 -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를

이번 본문은 에베소서 전반부를 끝내는 단락이다.

- 1-3장은 하나님께 찬양과 교회를 위한 기도를 하고, 4-6장은 윤리적, 실천적 권면을 한다.

- 그래서 3장 마지막에, 능력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멘'으로 끝내고 있는 것이다.

14-19절: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환난 때문에 낙심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를 걱정했었다.

- 그래서 그들이 낙심할 필요 없는 이유를 설명했었다.

- '그러므로' 이번 본문에서는 그들이 낙심하지 않기 위한 기도을 한다.

그래서 먼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 기도 시작할 때의 찬양은, 기도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기도의 신뢰성을 높여준다.

-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능력 있으시기에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갖게 해준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라고 찬양한다.

[엡 3:15]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하지만 강조하는 방법은 '관계'를 통해서이다.

-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버지'의 역할이다.

- 따라서 하나님은 전제 군주 혹은 지배자로서 능력 있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능력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 지배자의 관계 목적은 이용하는 것인 반면, 아버지의 관계 목적은 사랑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뭐든지 다 해주실 분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그 하나님께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기도를 하는데, 두 기도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 주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 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어에서 16절은 '하나님'으로 시작하고 18절은 '여러분'으로 시작한다.

- 따지고보면 두 기도는 같은 기도인데, 하나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교회의 사랑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 결국 바울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회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란 것이다.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 낙심하는 상황에 있는 교회에 꼭 필요한 기도이다.

그 방법을 설명하는데, 문장 구조가 복잡하다.

- 원어를 보면 그나마 이해되는데, 번역은 더 복잡하다.

- 16-17절이 한 문장인데, 번역에서는 이상하게 문장을 끊었다.

원어 문장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16] he may give you (according to the riches of the glory of him)

___ to be strengthen (through the spirit of him) (into the inner man)

___ [17] to dwell Christ (through the faith) (in the heart of you)

___ ___ (in love) being rooted and being founded.

[16] 하나님께서 (그분의 풍성한 영광으로)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바란다.

___ (그분의 성령을 통해) (여러분의 속 사람을) 강건해짐을

___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심을

___ ___ (사랑 안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핵심만 추리면, 

- 바울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강건함'인데,

- 그것은 '그리스도의 머무심'을 통해서 이뤄지며,

- 또 그것은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 즉, 자유가 아닌 사랑을 추구할 때에만 환란과 위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 때에만 강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도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 본문은 표현이 장황한데,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 그래야만 강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 중에 꼭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하는가?

-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 첫째는 순수성, 둘째는 개방성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지만, 예수님의 사랑만이 순수하게 상대방만을 위한 사랑이다.

-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하지만, 예수님은 안그러셨다.

물론 순수한 사랑을 하나님도 하셨다.

-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개방성이 없다. 가려져 있다.

-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죽으시는 장면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은 많아도, 죽음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 이러한 개방성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독보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유일한 모델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바울이 궁극적으로 이뤄지길 원했던 것은 이것이다. 

[엡 3:19]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충만해지는 것'이 뭐냐?

- 소유로서의 충만함이 아니다.

- 또 수직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할 때 누리는 자유의 충만함이 아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하나 될 때 경험하는 충만함이다.

- 연애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과 비슷한 충만함이다.

- 내가 상대방을 완전히 가졌지만, 동시에 내가 상대방에게 완전히 속박되었다는 안정감 속에서 얻는 충만함이다.

이 '충만함'에 대해서는 이미 1장에서 다뤘었다.

[엡 1: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 여기서도 '충만함'은 통일, 하나됨이었다.

- 즉, 통일되게 하시는 그리스도로 인해 교회 공동체가 통일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최종 목적은 '하나됨'이다.

- 하나님과 하나됨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이다.

- 그것을 위해 하나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는 것이며,

- 그 사랑을 알기 위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며,

- 그리스도와 관계 맺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며,

- 그래야 환난 속에서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신앙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말하고 싶었던 신앙의 개념이다.

- 4장부터는 이러한 개념에 근거한 실제적 권면을 할 것이다.

20-21절: 하나님께 영광 - 하나님의 능력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 첫째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둘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분'으로 표현한다.

-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 표현이다.

- 이는 그만큼 기도 응답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 낙심하고 있을 교회 성도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 이러한 고백을 통해 기도하고 있는 자신에게 그리고 기도를 듣고 있는 교회에게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갖도록 한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다.

- 엄밀하게 말해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는 같은 곳이다.

- 왜냐하면 지금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하나 된 공동체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관계를 위해 애쓰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이 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결국 '하나됨'이다.

- 하나님의 영광은 기도 응답을 통해 드러난다.

- 그런데 바울의 기도는 낙심하지 않고 강건해지는 것이다.

- 그런데 강건해지려면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셔야 한다.

-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공동체가 하나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울은 그 '하나됨'을 이루실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본문을 끝맺는다.


주제

하나님의 독보적 능력은 사랑의 능력이다.

-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과 '우리를 사랑하도록 만드시는 능력'이다.

-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도 대단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우리가 사랑하도록 만드시는 능력은 더 대단하다.

이 사랑의 능력으로 비로소 우리는 영원 불변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 행복 말이다.

- 나를 사랑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인생인데,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다면, 그때 느끼는 충만함은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충만함은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필요 없게 할 것이다.

- 자유조차도 말이다.

- 욕구 자체가 없어지는데, 욕구 충족 수단인 자유가 왜 필요하겠는가.

동시에 충만함은 사람을 정말로 자유하게 할 것이다.

- 세상으로부터, 욕구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충만함이 없는 사람은 욕구에 매여 있게 된다.

-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아랫 사람과 내가 철저히 복종해야 할 윗 사람이다.

- 아랫 사람은 마음대로 부려서 이용하고, 윗 사람은 비위를 맞춰서 또 이용해 먹는다.

- 사람을 철저히 이용하기 위해 윗 사람인지 아랫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 그래서 욕구에 매여 있는 사람은 수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즉, 누구와도 관계 맺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충만해지면 비로소 수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사람을 이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람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니, 수직 관계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

- 모든 사람을 나의 유익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 사람 자체로 본다.

- 그러니 관계가 맺어질 수 밖에 없다.

- 그러니 사랑하게 될 수 밖에 없다.

- 그러니 행복해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이다.

- 다른 사람을 도구로 수단화 하지 않고, 사람 자체로 목적화 하도록 하는 것이다.

- 그제서야 비로소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제서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인식 속에서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다.

- 하나님을 욕구 성취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로 볼 수 있게 된다.

-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볼 수 있다.

-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알 수 있다.

- 특히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비로소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다.


결론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충만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사람을 도구로 본다.

- 사람이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

- 수직 관계에 사로 잡혀 있다.

- 언제나 자유에 목말라 하고 있다.

- 욕구의 지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 조금이라도 지위가 낮아져 자유가 박탈될까봐.

- 그래서 욕구를 이루지 못할까봐.

- 특히 하나님께서 자유를 빼앗아 가실까봐.

이렇게 위기 의식 속에서 생존 본능이 발동하여 사니, 주변 사람이 보일리 없다.

- 그래서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 단지 생존에 도움을 줄 도구로 볼 뿐이다.

특히 하나님도 하나님으로 볼 수 없다.

- 하나님 역시 생존에 도움을 줄 도구로 본다.

- 욕구 성취 수단으로 본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부 다 깨지는 것이다.

- 그래서 불행의 구렁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 그래서 지옥이 아닌 현실에 살면서도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의 능력'이다.

-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기도한 것이다.

- 하나님께는 사랑해 달라고, 교회에게는 사랑을 깨달으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이 아니다.

- 생존 욕구는 아무리 채워도 여전히 목마르다.

- 오직 사랑이다.

- 삼류 소설 같은 말이지만, 사랑만이 우리를 숨쉬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 뿐임을 믿을 때에만 구원에 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