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할까?
- 신앙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이고, 신앙은 우리 삶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줄까?
질문의 범위를 더 확장해보겠다.
- 관점을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종교로 넓혀보겠다.
- 그리고 우리에서 인류로 넓혀보겠다.
왜 인류는 종교 생활을 했을까?
- 인류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를 가졌고,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 인류는 왜 구석기 시대조차 벽화를 그리며 종교 생활을 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 욕구가 있고, 욕구를 전부 이룰 수 없는 현실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배불리 먹을만큼 음식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동물이나 열매 그림을 그려놓고, 이런 것들을 얻게 되기를 바랬는 것이다.
- 그것이 종교의 시작이며, 우리의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 따라서 사람에게 욕구가 있고, 욕구를 제약하는 현실이 있는한 종교는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종교에는 사람의 욕구가 반영된다는 것이다.
- 동물 벽화를 그리는 이유는 동물을 원하는데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 아데미 여신에게 젖가슴을 많이 붙여놓은 것은 아이를 많이 갖고 싶은데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람의 욕구로 인해 종교가 생기고, 거꾸로 종교의 모습을 통해 사람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의미이다.
- 종교의 본질은 사람의 욕구이다.
- 그리고 종교의 영향력은 욕구를 이루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위로, 극복, 해결하는 것이다.
-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욕구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상상 속에서라도 욕구를 채우는 것이 종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종교가 참 한심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 이루지 못한 욕구를 상상 속에서 이룬다는 말 자체가 한심하다.
- 속된 말로, 종교는 '정신 승리'의 수단으로 보인다.
- 게다가 우리에게는 그렇게 절박한 욕구가 없다.
- 굳이 종교를 통해서까지 구질구질하게 욕구를 채우고 싶지 않다.
- 왠만한 욕구는 다 채워졌고, 채워지지 않은 욕구는 어느정도 절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기술 발전으로 자연이 정복되어서 많은 욕구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 또 윤리, 도덕, 시스템의 발전으로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사회로부터 주입, 세뇌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루지 못한 욕구가 있어도 예전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다.
- 예를 들어, 고대 소설에 많이 나오는 소제 중에,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목숨 걸고 복수하는 이야기가 많다.
- 복수 욕구를 해소하기위해 평생동안 무술을 연마해서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해서 같은 방식으로 복수하지 않는다.
- 복수 욕구를 절제한다.
- 왜냐하면 사회 시스템이 어느 정도 복수를 해주기 때문이며, 동시에 사회가 정한 수준 이상으로 복수를 하려는 욕구는 윤리, 도덕, 법으로 철저하게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만큼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 종교의 역할을 상당 부분 사회 시스템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 사회 시스템이 사람의 욕구를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 사회 시스템은 종교보다 훨씬 더 세련되게 우리 욕구를 채워준다.
- 하지만 본질적으로 종교와 사회 시스템은 같은 것이다.
- 둘 다 사람의 욕구를 해소하는 수단이다.
- 그렇기 때문에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욕구 불만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종교의 역할은 점점 더 축소될 것이다.
- 그러면 종교의 역할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 대표적으로 죽음 문제이다.
-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으로 인한 이별, 죽은 사람을 보고 싶은 욕구는 종교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
- 물론 기술이 더 발전하면, 이러한 역할 역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하면 사람은 어떻게 되냐?
- 정신병에 걸린다.
- 현실에서도, 상상 속에서도, 사회 시스템으로도 욕구를 채울 수 없으면, 욕구를 느끼는 뇌의 영역을 자체적으로 마비시킨다.
- 기절할 수도 있고, 강박 증세를 통해 욕구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하며, 중독을 통해 욕구를 외면하기도 한다.
따라서 종교는 한심하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인간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마지노선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이렇게 종교는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는 가장 마지막 단에 있는 안전 장치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종교 안에 사람의 가장 마지막이며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종교의 모습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욕구를 알 수 있다.
그러면 시대 별로 종교의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동물이었다.
- 배가 너무 고파서 동물들을 잡아 먹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는 뜻이다.
- 수렵 채집 생활에서는 언제나 식량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다음에는 태양이었다.
- 더이상 사냥이라는 우연이 아니라 농사라는 안정된 음식 환경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날씨라는 불안 요소가 있었다.
- 그래서 농사에 알맞은 날씨가 있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었다는 뜻이다.
다음에는 젖가슴이었다.
- 기본적인 생존이 안정되었다.
- 그러니 번식 욕구가 드러난 것이다.
다음에는 신전이었다.
- 안정적인 생존이 보장되고, 번식을 통해 세력 집단이 만들어졌다.
- 그러자 자연스레 세력 집단 간의 경쟁이 일어났다.
- 누가 더 강한 세력인지 드러내고자 하는 권력 욕구가 생긴 것이다.
- 그래서 크고 화려한 건물을 통해 권력 욕구를 채우려한 것이다.
- 그러한 상황이 중세 시대까지 이어진다.
다음에는 '95개조 반박문'이다.
- 종교 개혁의 상징물이다.
- 종교의 모습이 건물에서 글로 바뀌었다.
- 이는 사람들의 욕구가 집단의 권력에서 개인의 지식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 이전에는 없었던 '나'에 대한 욕구가 생긴 것이다.
- 이때부터 사람들은 주체성과 자유 욕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 물론 현대라고 해서 이전의 욕구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고대라고 해서 자유의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중심 욕구가 바뀌는 흐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 따라서 현대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흐름의 연장선에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이렇게 종교의 모습 변화를 보면, 사람들의 욕구 변화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모습은 어떠한가?
- 표면적으로 드러나있는 우리 신앙의 모습을 보면, 보이지 않는 우리 안의 욕구를 되짚어볼 수 있다.
- 우리의 신앙을 되짚어보면, 몰랐던 나를 도리어 알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상징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꼽으면 다음과 같다.
-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doing)
- 모든 것을 '아시는' 분(knowing)
-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having)
- 가장 높은 '지위'에 계신 분(position)
이러한 인식 이면에는 우리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욕구
-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지식 욕구
-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소유 욕구
-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은 지위 욕구
그런데 또 이러한 욕망 이면에 우리의 죄가 숨겨져 있다.
- 그것은 무능하고, 무식하고, 가진 것 없고, 낮은 지위의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마음이다.
-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무시 당하지 않으려고 능력, 지식, 소유, 지위를 위해 발버등치는 것이다.
-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욕구를 갖게 된 동기가 나쁘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의, 죄, 구원, 천국, 지옥 등 신앙의 모든 개념을 좌우한다.
- 의와 죄에 대한 인식을 능력, 지식, 소유, 지위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고, 알고, 갖고, 어떤 지위에 올라갔을 때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능력, 지식, 소유,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 천국 역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 알 수 있는 곳, 가질 수 있는 곳, 높은 지위를 갖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도 같은 방식으로 한다.
- 강한 사람, 똑똑한 사람, 부자, 권세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의인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이러한 인식 이면에는 여전히 악한 동기가 숨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 혹은 반대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을 하나님께 표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으면,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도 죄악 안에서 쳇바퀴를 돌게 될 수 있다.
- 대표적으로 바리새인이 그랬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 그래야 그것을 기준 삼아 '나'를 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드러나는 욕구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짜 순수하고 원초적인 동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규격의 자를 가진 것과 같은 것이다.
- 모든 사람이 길이를 측정하지만, 모든 사람의 측정 결과가 전부 다른데, 그 중에 무엇이 정확한지 아무도 알 수 없어서, 각자가 자기만 맞다고 싸우고 있는 꼴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본문은 하나님을 뭐라고 하나?
- 본문은 그 기준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표현했다.
[엡 3:4] 여러분이 그것을 읽어보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무엇인가?
-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됨'이다. 혹은 '관계'이다.
[엡 3:6]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다.
- 혹은 '관계 맺게 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인식이 신앙 전반에 어떻게 영향을 주나?
- 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이용, 거래하는 것이다.
- 의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 구원은 다른 사람을 이용 밖에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랑할 수 있는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 천국은 모든 사람과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곳이다.
- 지옥은 누구와도 일말의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속이기만 하는 치열한 약육강식의 장소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하나님을 '관계'로 표상할까?
- 이를 반대로 말하면, 사람에게 '관계' 욕구가 있다는 뜻인데, 과연 그런가?
- 능력, 지식, 소유, 지위의 욕구와 관계 욕구의 관계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성경은 관계 욕구가 사람의 근원적인 욕구라고 말하는 것이다.
- 다른 모든 욕구는 관계 욕구에 하위 욕구라는 것이다.
- 무능하고, 무식하고, 거지에다, 하층민이라도,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만 하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 우리가 능력, 지식, 소유, 지위를 가지려는 것도 결국 사랑 받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 그래서 능력을 가지면 지식이 갖고 싶고, 지식을 가지면 소유를 갖고 싶지만, 관계를 가지면 다른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욕구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 정말 나에게도 그런가?
과연 그런지 스스로 생각해보자.
- 정답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해줄 수 없다.
- 스스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 정말 나에게도 관계가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지 고민해보자.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런 사람에게만 성경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무가치한 책이 될 것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7절: 바울이 사명을 갖게 된 과정 - 하나님께서 계시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려주심
② 8-12절: 바울이 사명을 이루는 과정 - 그리스도의 비밀인 하나됨을 위해 이방인에게 전도함
③ 13절: 바울의 바람 - 바울의 환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기를
본문의 구성이 복잡한데, 핵심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가장 거시적으로 볼 때, 바울의 투옥 때문에 낙심한 성도를 향한 위로이다.
- 바울의 투옥은 하나님 계획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 하나님의 계획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표현했다.
- 그 비밀은 '하나됨'이다.
[엡 1: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이방인이 공동 상속자, 함께 한 몸,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 되는 것이 필요했다.
-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전도에 헌신했다.
그런데 이방인 전도는 필연적으로 환난을 수반한다.
- 두 가지 측면에서 공격을 받는다.
첫째는, 유대인으로부터이다.
- 유대인에게 이방인 전도는 금기시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방인으로부터이다.
- 이방인은 종교에 자유롭지만, 딱 하나 금기시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유일신이다.
- 왜냐하면 유일신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믿는 신을 무시하는 것이고, 특히 신으로 등극한 로마 황제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공격을 받는다.
- 그래서 바울은 지금 로마에 투옥된 상태이다.
- 투옥 과정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나와 있다.(행 21-28장)
따라서 바울이 환난을 당하는 것은 이방인 전도를 잘 했다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공하고 있다는 뜻이다.
- 그러면 결국 만물이 통일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환난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다.
[엡 3:13] 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을 보고서, 여러분이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이렇게 성도들을 위로하는 과정 중에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 바울이 환난을 당하는 것은 바울 자신의 사명을 잘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설득하려는 것이다.
이런 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1-7절: 바울이 사명을 갖게 된 과정 - 하나님께서 계시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려주심
지난 본문까지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며, 그 능력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말했었다.
- 하나님의 능력은 상상 초월이고, 특히 능력 중의 능력은 관계 회복 능력이며, 그 결과 이방인조차 하나님과 관계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여전히 불안했다.
-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의 장벽 앞에 움츠러들었다.
- 특히 자신들의 스승 바울이 투옥되었다는 것이 그랬다.
- 바울조차 하나님이 보호하지 못하신다면, 과연 자신들을 보호하실 수 있을까 의심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투옥을 강조하며 본문을 시작한다.
[엡 3:1] 그러므로 이방 사람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나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데 맥락만 보면, 1절은 13절로 연결되어야 한다.
- 갇힌 나 바울이 말한다.
- 나 갇혔다고 낙심하지 말라.
- 이것이 영광이 될 것이다.
- 이렇게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더 설득력 있는 위로를 하기 위해 2-12절을 삽입한 것이다.
- 7절을 중심으로, 2-6절은 사명 받기 이전, 8-12절은 사명 받은 이후에 대해 말한다.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명 받는 과정에 대해 이미 말하였음을 밝힌다.
- 중요 키워드는, '은혜', '계시',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인트는 바울이 사명을 받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이미' 말했다는 것이다.
-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 사실을 알기만 하면, 바울의 환난에 대해 낙심할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5-6절에서는 그 비밀의 특징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는, 이전에는 계시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 본문에 나오진 않았지만, 두 시기를 가르는 기준은 예수님이다.
- 예수님의 삶과 사역일 통해, 그리고 그것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심을 통해 이전에는 부분적으로만 밝혀졌던 그래서 숨겨졌던 하나님의 비밀 계획이 이제는 모두 밝혀진 것이다.
- 예수님께서 안식일 율법을 어기시고, 성전을 파괴하시는 사역 등을 통해 변질되고 왜곡되었던 하나님의 계획이 올바로 선포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계획은 율법과 성전의 제약을 초월하는 온 인류를 향한 복음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 그래서 만물이 통일되도록 하는 것이다.
[엡 1: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방인이 공동 상속자 되어 구원 받는 것이다.
- 만물 통일의 대표적인 사건이 이방인이 구원 받는 것이다.
- 그러니까 이방인의 구원 사건 속에는 단순히 이방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통일되는 영광스런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바울은 이방인 전도에 투신한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방인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 로마서에서 자세히 다뤘었는데, 바울은 항상 만물의 통일, 그 중에서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의 구원을 염두해두고 있었다.
[롬 11: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롬 11:2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26]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 [30]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31]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하나님의 계획은,
-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을 완고하게 해서, 복음을 거부하게 만드신다.
- 그래서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 돌아가게 하신다.
- 그래서 이방인을 구원하신다.
- 그런데 이방인이 구원 받는 것을 보고 유대인에게 질투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다.
- 그래서 유대인도 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어 모든 인류가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 긴 과정의 일부분으로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다.
- 큰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의 사명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첫 사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복음이 전해지는 전체 과정 중에서, 그 중에서도 이방인이 복음을 듣는 과정 중에서, 시작 부분만이 바울이 맡은 부분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 전도가 끝나지 않았고, 이방인으로 인해 유대인의 질투가 유발되는 과정, 유대인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래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는 과정, 마지막으로 이러한 하나됨을 시작으로 만물이 하나 되는 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
- 이러한 과정은 고스란히 우리 몫으로 남아 있다.
- 바울이 대단한 것 같지만, 한편으로 그리 많은 일을 한 것도 아니다.
- 하나님의 계획이 다 이뤄지려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 많다는 것이 고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은 영광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큰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바울은 '일꾼'이 된 것이다.
[엡 3:7]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입니다.
- 그리고 바울은 자신에게 일꾼이라는 역할이 주어진 것을 은혜라고 생각했다.
8-12절: 바울이 사명을 이루는 과정 - 그리스도의 비밀인 하나됨을 위해 이방인에게 전도함
이렇게 사명을 받은 바울은 이방인에게 전도를 한다.
[엡 3:8]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 그래서 복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을 이루고자 했다.
그런데 바울의 바람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엡 3:9-10]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10]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 바울의 시선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인류를 넘어서 만물을 향해 있었다.
- 만물은 식물, 동물, 해, 달, 별, 우주 등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의미한다.
-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만물에게 하나님의 비밀 계획인 만물의 통일을 밝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특히 그 대상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로 특정하고 있다.
- 이들은 만물에 속한 것 중에 '하늘', 즉 영적인 영역에 있는 존재로서 보이는 것을 다스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엡 2: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엡 6:12]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 이렇게 바울은 사탄을 '공중' 혹은 '하늘'의 통치자라고 표현하였다.
- 이들은 만물을 다스리는 사탄이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이 그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 바울의 이방인 전도가 결국 만물의 통일까지 이르게 되니, 만물의 통일을 반대하는 사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일이 진짜 영적인 일이다.
- '사탄아, 떠나가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 계획을 깨닫고 그것을 위해 힘쓰는 것이 사탄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이다.
- 교회 공동체가 하나 되려는 노력이 가장 영적인 일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엡 3:10]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비밀 계획인 만물의 통일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할까?
- 만약 개인을 통해 만물이 통일된다면, 만물은 또 다시 개인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 그렇게 된 통일은 하나됨이 아니라, 개인에 종속되는 것 뿐이다.
- 공동체를 통한 통일만이 계속해서 하나된 공동체를 지향하게 된다.
- 그런데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는 교회 뿐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만 만물을 통일하시는 것이다.
- 반대로 말해서, 하나님의 계획은 교회 밖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이렇게 장엄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것이다.
[엡 3:11]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감, 즉 관계 회복을 얻게 된 것이다.
[엡 3:1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 예수님을 통해 관계 회복을 얻고, 그래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루고, 그래서 만물이 통일되고, 그래서 만물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갈 날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삶이다.
13절: 바울의 바람 - 바울의 환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기를
그러니 바울이 환난을 당한다고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 계획대로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 바울의 투옥은 하나님이 무능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제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 바울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고, 그래서 만물이 통일되고, 그래서 만물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고, 그래서 그 찬미하는 공동체에 에베소 교회가 속하게 되면, 그것이 에베소 교회에게 최고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의 환난이 에베소 교회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다.
[엡 3:13] 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을 보고서, 여러분이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라는 위로로 본문은 끝난다.
주제
그리스도의 비밀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됨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오답은 다음과 같다.
- 사람의 구원, 죄 용서, 의롭게 하심 아니다.
-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도 아니다.
- 하나님께서 영광, 찬양 받으시는 것도 아니다.
정답은 하나됨이다.
- 인류의 하나됨을 넘어서, 모든 피조물(만물)의 하나됨을 넘어서, 창조주와 피조물 전체의 하나됨이다.
- 통일된 피조물이 한 마음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조차 수단이다.
- 피조물이 창조주께 영광 돌리면, 창조주는 그 영광을 피조물에게 다시 되돌려 준다.
- 그렇게 창조주와 피조물이 서로 영광을 주고 받는 순환을 통해 결국 성취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하나됨이다.
이러한 하나됨과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됨은 완전히 다르다.
-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됨은 다수가 한 사람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 그래서 공동체 전체가 한 사람으로 소거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기업이 그렇다.
- 대기업이 최고로 열심히 해서 하나됨을 이루면, 결국 모든 사람이 사장의 뜻대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 사장의 복제 인간을 많이 만드는 것이 대기업의 목표이다.
- 그래서 기업에서는 기업 문화를 직원에게 세뇌하는 정신 교육을 반복해서 한다.
- 모든 직원을 사장으로 소거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 그런 방식으로 기업 전체를 하나 되게 만드려고 한다.
- 많은 교회들이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됨은 하나님으로 소거되지 않는다.
- 공동체 각 개인의 인격, 개성, 주체성, 독립성이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완벽하게 보존된다.
- 그 상태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데, 굳이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부부 두 사람이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전적으로 배우자에게 헌신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잃기는 커녕, 서로를 통해 자신을 더욱 확고하게 찾게 되는 관계이다.
- 현실에서 보기 힘들지만, 많은 사람이 꿈꾸는 이상적인 부부 관계이다.
이렇게 완전히 하나됨과 동시에 완전히 '나' 됨이 공존하는 상태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됨이다.
- 그러한 관계를 만물과 하나님,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맺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완전한 유대감을 느끼며 동시에 완벽한 '나' 됨을 지킬 수 있다면, 그곳이 정말 천국이 아닐까!
결론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금 그런 관계를 맺고 계신 것이다.
- 유대감과 '나' 됨이 동시에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 말이다.
-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만물에까지 확장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뭐냐?
- 교회이다.
-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 된 몸된 공동체이다.
- 이러한 완벽한 관계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맺을 수 있는데, 예수님으로 관계 맺는 유일한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교회에 모여서 하는 일이다.
- 바울이 만물의 통일을 위해 이방인 전도를 했듯이, 우리도 같은 목적을 위해 모이고 있는 것이다.
모르고 보면, 바울의 이방인 전도와 만물의 통일은 상관 없어 보인다.
- 그래서 이방인 전도가 하찮아 보인다.
-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박해 받은 것이고, 때로는 교회로부터까지 공격당했다.
마찬가지로, 모르고 보면 우리 교회 모임과 만물의 통일은 상관 없어 보인다.
- 우리가 모이는 것이 하찮아 보인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하찮은 모임이 하나님의 비밀 계획인 만물의 통일을 이뤄가고 있다고 말한다.
- 모임이 너무 작은 것이 때로는 불안하고 낙심하게 되지만, 그러지 말라고 본문은 위로하고 있다.
-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 될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러니 각자의 주어진 상황이 그리고 함께 모이는 것 자체가 힘들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보자.
- 우리 모임이 하나님의 비밀 계획 안에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끝까지 가보자.
분명히 그 길 끝에 하나님께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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