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베소서

에베소서(04) 2:11-22 구원의 방법2 - 성도가 '함께' 건물을 이룸

본문은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는데, '건물'하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이다.

- 그렇게 배우기도 했고, 본문을 봐도 그럴듯 하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해설서도 그렇게 본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 당연히 정답은 없다. 

- 2000년 전의 타 지역, 타 문화, 타 인종의 직관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단지 몇 가지 증거로 추측하는 것 뿐이다.

분명한 것은, 에베소 교회 사람 대부분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 변방에 힘 없는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의 종교 건물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 물론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들어는 봤을 것이다.

- 워낙 유대인들이 극성스러웠으니까. 

- 이는 당시 많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골치 아픈 인간들로.

- 그들이 특정일에 성전 순례를 한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 그러나 볼품 없고 영향력 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을 떠올렸을 것이다.

-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은, 폭 70m, 길이 130m, 높이 20m나 되는 건물로,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컸다.

- 대략 태현 공원 크기의 7층짜리 건물이었으니, 사람들은 이 건물을 보면 뇌리에 박혔을 것이다.

비유는 어려운 내용을 쉽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 그래서 상대방에게 친숙한 대상으로 비유한다.

- 에베소 사람들에게 아데미 신전이 자랑거리며 잘 알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건물' 비유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웅장한 신전에 수 많은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을 생각하며, 구원 받은 성도가 서로서로 얼마나 의지하고 연결되고 사랑해야 하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건물'을 아데미 신전으로 보는 사람은 소수이다.

- 바울이 '건물' 비유를 어떤 의도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 '건물'하면 무조건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는 것도 비약이지만, 큰 신전이 있다는 이유로 '건물'을 신전과 연결시키는 것도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지나치게 직관을 믿는다.

- 성경에서 '건물' 혹은 '성전'이라고 하면,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한다.

- '정말 그럴까?'라며 되묻지 않는다.

- 이것이 직관의 위험성이다.

사람은 직관 없이 살 수 없다.

- 직관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 맹수를 만나면 직관적으로 위험한지 아닌지 생각나야 잡혀 먹히지 않고 살 수 있다.

- 또 어떤 단어를 들으면 직관적으로 어떤 대상이 생각나야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이렇게 직관은 사람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기능이다.

- 그래서 너무 위급해서 고민하고 판단할 시간이 없을 때 직관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그리고 직관적인 판단은 대부분 맞다.

- 왜냐하면 수 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관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 현재의 상황이 과거 경험했던 상황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일 때에는 직관이 틀리게 된다.

- 이렇게 다른 시대, 다른 문화, 다른 지역 사람들을 생각할 때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쉽게 하는 실수이다.

- 성경이 2020년 한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 쓰여진 것이라는 착각이다.

- 내가 그렇듯, 에베소 교회 사람들도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렸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 에베소 교회 사람들도 나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을 잘 알았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비슷한 착각이 번역에도 나온다.

- 본문은 누가 봐도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하나됨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엡 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엡 2: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 정확하게 말하면, 에베소 교회 안에 이방인과 유대인이 있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는데, 그 분열의 주동자인 이방인에게 하나됨을 권면하는 것으로 보인다.

- 대부분의 해설서가 이렇게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다른 성경에 대한 지식 때문이다.

- 사도행전,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나오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무시했다.

하지만 에베소서는 이러한 갈등을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 물론 에베소 교회에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같은 갈등이 있었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특히 에베소서 안에서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등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 에베소서에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착각을 더욱 강화시키는 번역이 있는데, 2장 14, 18절의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이다.

- 이 구절은 원어에는 없는 번역이다.

- 그냥 '둘'이라고만 했다.

[엡 2:14] he made the both into one.

[엡 2:18] th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in one Spirit.

즉, 바울의 의도는 '둘이 하나 되는 관계' 그 자체였다.

- 예수님께서 하나 되는 참 관계를 가능하게 하셨고, 그로 인해 에베소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교회 안의 모든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여기에는 갈등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다.

그런데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부각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나됨'의 의미가 퇴색된다.

- 단지 민족 간의 통합 혹은 교회 내부 갈등의 봉합 정도로 이해된다.

- 그래서 민족 간의 갈등과 교회 갈등이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나됨'이 필요 없게 된다.

- 이미 가진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바울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모든 한계를 초월한 '하나됨'이다.

- '나'와 '너'가 하나의 새 사람인 것 같이 완전히 연결된다는 것이다.

[엡 2:15]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엡 2:21]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 그래서 이러한 관계를 '뇌가 전선으로 연결된 상태'에 비유한 것이다.

- 그에 대한 예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과 하나님 없이 산 이방인 간의 하나됨을 제시한 것 뿐이다.

- 그런데 이 심오한 의미를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라는 구절이 가려 버리고 있다.

따라서 이번 본문의 핵심 역시 '관계'이다.

-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지난 본문의 핵심 역시 '관계'였다.

- 구원의 방법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실 때 우리도 '함께'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번 본문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다.

-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것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 그렇게 관계가 회복될 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이 된다는 것이다.

[엡 2: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엡 2:22]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나는 이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존재의 본질, 창조의 근거, 하나님의 본질 모두 관계였다.

- 관계이신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다.

구원의 동기, 구원의 방법 모두 관계였다.

-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구원하신 것이며, 사람이 그리스도와 관계 맺을 때 구원 받을 수 있다.

구원의 결과, 구원의 목적도 관계이다.

- 구원의 결과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또한 사람과 하나 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과 관계를 반복해서 맺으며 살도록 하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신앙이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 물론 참 의미까지 알지는 못해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다 가르쳐준다.

하지만 실제 신앙 생활에서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 먼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세 분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전혀 알지 못한다.

- 그러다보니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전제군주제의 쟐대 왕으로 생각한다.

- 절대 복종을 당연시하며, 맹목적인 찬양과 숭배를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 하나님께 복종하고 찬양하는 것은 한편으로 필요하니까.

진짜 심각한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 하나님과 자신이 맺었던 관계 방식 그대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전도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 피전도자를 전제군주제의 농민 혹은 노예로 생각하고, 전도자인 자신을 중간 귀족 정도로 생각한다.

-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을 '소유'했고, 피전도자는 하나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귀족이 노예를 대하듯 전도한다.

- 때로는 은혜를 베풀듯 자비롭게 필요를 채워준다.

- 반대로 때로는 노예를 부리듯 계몽을 강요하며 신앙을 주입한다.

- 피전도자의 인격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고, 단지 피전도자가 신앙에 몰입하는 행동 변화에만 초점을 둔다.

- 그래서 변화가 생겼을 때 절대 왕에 복종한 귀족의 성과라며 만족한다.

- 이것이 지금까지의 전도였다.

- 지금도 여전히 수 많은 교회에서 그리고 수 많은 선교지에서 이런 방식으로 전도하고 있다.

물론 전도 방법을 세련되게 바꾸는 교회도 많다.

- 그러나 그것은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또는 대통령제로 겉모습을 바꾸는 것 뿐이다.

- 본질적인 속성은 수직 관계, 거래 관계, 지배-복종 관계이다.

- 지배를 힘으로 유치하게 드러나보이게 하느냐, 아니면 은근한 동기 부여로 세련되게 암묵적으로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 마치 전제군주제와 대통령제가 모두 본질은 힘의 논리인 것처럼 말이다.

- 군주의 힘으로 장악하느냐, 사법, 행정, 정치, 언론으로 장악하느냐의 차이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

-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본질이 관계라는 것을 몰라서이다.

- 구원의 동기, 구원의 방법, 구원의 목적이 관계라는 것을 몰라서이다.

- 우리가 하나님과 맺어야 할 관계가 마치 부부처럼 사랑 안에서 복종해야 하는 것을 몰라서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 마치 왕과 신하처럼 사랑 없이 복종만 하는 것이다.

- 그러면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복종을 사랑으로 치장한다.

- 사랑해서 순종해야 하는데, 복종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랑을 짜낸다.

이런 현상이 단순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 정말 큰 문제이다.

- 목사는 왕처럼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성도는 신하처럼 순종하고 지배 당하는 것을 신앙 좋은 것이라고 착각한다.

- 그런 성도는 리더가 되어, 목사와 똑같은 방식으로 아래에 있는 성도에게 군림한다.

- 삼위일체의 내부와 외부가 모두 관계이듯, 성도의 신앙과 사역 모두 관계라는 것을 몰라서이다.

- 그래서 교회 안에 바른 관계를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 이것이 현재 교회의 현실이다.

이것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이번 본문이다.

- 본문이 말하는 '하나됨'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너무 철저히 일어나서, 아무런 이견이나 논쟁이 없는, 그래서 목사가 명령하는 것을 성도가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그래서 마치 하나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대부분의 교회가 '하나됨'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 그래서 대부분 교회에서 이 본문을 근거로 결국 복종을 또다시 강요한다.

본문은 벽돌이 서로 연결되어 벽을 만드는 '하나됨'을 말한다.

- 너무나 평등해서, 끝없이 싸워도 아무도 이기거나 지지 않는 팽팽한 관계이다.

- 또한 너무나 사랑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히 복종하는 관계이다.

- 어떤 사람도 이룰 수 없는 관계이지만, 모든 사람이 바라는 관계이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 이 정도 가치는 되어야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기하신 대가로 이루신 성과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1-12절: 과거의 상태 - 언약의 약속에서 외인

② 13-18절: 상태 변화의 원인 -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

③ 19-22절: 현재의 상태 -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하나된 건물

- 본문은 그리스도로 인한 상태 변화의 초점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음을 밝힌다.

11-12절: 과거의 상태 - 언약의 약속에서 외인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이방인'이었다.

- 그러니 당연히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고, 당연히 하나님과 관계도 없었다.

13-18절: 상태 변화의 원인 -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

그런데 상태가 변했다.

- 하나님과 가까워졌다. 관계를 맺게 되었다.

원인은 그리스도이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 것이다.

[엡 2: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관계 회복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 그런데 본문은 그 두 가지 사건 사이에 하나의 사건을 끼워 넣고 있다.

- 단순히 끼워 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그리스도 사역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 그것은 바로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이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구원은 세 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부활

- 둘째,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

- 셋째,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

그런데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이 강조되어 있다.

[엡 2:14]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엡 2:15]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엡 2: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 사이의 관계를 평화롭게 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핵심 사역이기 때문이다.

- 단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렇저렇 잘 지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된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그 동안 십자가 사건의 목적이 '죄 용서'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만 배웠다.

-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잘못 배운 것이다.

- 죄 용서는 십자가 사건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다.

- 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십자가 사건을 수단으로 성취되는 최종 목적이다.

- 십자가 사건의 목적은 사람 간의 관계 회복이다.

그러한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보여준 것이다.

-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는 나쁠 수 밖에 없는데, 예수님으로 인해 그러한 관계조차 회복되고 하나 된다는 것이다.

- 단지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본문의 참 의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신 일이며, 그러한 회복을 수단으로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최종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왜 하나님은 사람 간의 회복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이뤄지도록 계획하셨을까?

- 그래야만 한 목소리, 한 뜻,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만 한 하나님과 한 마음을 가진 하나의 새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만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19-22절: 현재의 상태 -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하나된 건물

그리스도로 인해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 그래서 성도와 같은 시민(together-citizens of the saints),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 이렇게 회복된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에서조차 '관계'를 강조한다.

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건물에 비유한다.

- 비유에서 건물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

- 기초와 그 위에 쌓아 올려진 건물이다.

- 20절에서는 기초에 대해서, 21-22절에서는 위에 올려진 건물에 대해서 설명한다.

먼저, 기초에 대한 설명이다.

[엡 2: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 기초를 '사도와 예언자들이 놓은' 것이라고 하고, 그리스도 예수가 모퉁잇돌이라고 한다.

- 기초와 모퉁잇돌은 같은 뜻이기 때문에, 기초는 '사도와 예언자들이 놓은 그리스도 예수'이다.

이는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된다.

[고전 3:10-11]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 바울이 건물의 기초를 놓았는데, 그 기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관계의 기초는 예수님이다.

-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관계를 처음 시작하신 분이시며,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도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건물에 대한 설명이다.

- 건물의 핵심은 '상호 연결'이다.

[엡 2:21-22]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22]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 '서로 연결되어서(join-together)'와 '함께 세워져서(build-together)' 모두 수평적, 상호적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관계의 핵심은 '상호 연결'이다.

- 벽돌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여 건물을 이루듯, 서로 연결되어 하나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가 왜 필요하냐?

- 그래야만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곳, 곧 성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절대로 교회 건물을 떠올리지 말자.

- 성전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상징하는 표현일 뿐이다.

이렇게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는 것을 강조하며 본문은 끝난다.


주제

구원의 방법 - 성도가 '함께' 건물을 이뤄서 관계를 회복하는 것

우리는 교회 공동체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진 않는다.

- 무슨 말이냐면, 신앙 생활에서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지켜야 할 여러가지 중에 하나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교회에서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관계가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관계를 구원의 결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구원의 원인으로서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본문은 공동체의 관계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표현한다.

- 즉, 공동체 관계 회복이 안되면 하나님과 관계 회복도 안되서, 결국 지옥 간다는 뜻이다.

- 관계가 구원의 결과가 아니라 구원의 원인으로서,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 신앙 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가지 중 하나가 아니라, 구원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신앙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 따라서 우리도 본문과 같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관계가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많이 말했으니까 생략하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교회 올 때 설교 '들으러' 오지 않는다. 말씀 '나누러' 온다.

- 설교 듣고 지식 쌓는 것보다 말씀으로 맺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니까.

전도할 때에도 '설교'하려 하지 않고, '대화'하려 한다.

- 전도 대상자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도 대상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관계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예배 드릴 때에도 '예배'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 참 예배 되는 방법은, 올바른 예배 형식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계 맺을 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사람들과 '협력'하려 한다.

-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미명하에 자기 고집 부리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들과 협력하려하면 필연적으로 싸움이 일어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고집이 꺽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양 교회 모토가 만들어진 것이다.

① 예배 대신 예수님

② 설교 대신 성경

③ 건물 대신 사람

- 예배 대신에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며, 설교 대신에 성경으로 나누는 교제가 더 중요하며, 언제나 사람들과 관계 맺고 협력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그럴 때에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누군가는 관계에 대한 강조를 의심할 수 있다.

- 너무 사람 사이의 관계만 강조하여 인본주의에 빠지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관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아무리 강조해도 신앙의 변질과 왜곡을 가져올 수 없다.

-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참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면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질 수 밖에 없다.

- 그래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우여곡절 끝에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사람을 통해서 바른 관계를 배운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도 바른 관계를 추구한다.

- 바른 관계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관계의 참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추구한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지 않는다.

-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닫도록 계획해 놓으셨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결국 교회 공동체의 관계이다.

- 예수님의 죽음 부활로 관계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음을 믿음으로 공동체 관계에 헌신해야 한다.

- 그래서 많이 싸우고, 관계를 위해 많이 기도하고, 많이 화해해야 한다.

- 그래서 서로의 뇌가 전선으로 연결될 때까지 계속 서로 알아가야 한다.

-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다.

특히 그래야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 사람은 자기 얼굴을 스스로는 볼 수 없고, 거울에 반사 되어야만 볼 수 있다.

- 그래야 이에 낀 고추가루도 뺄 수 있고, 자기 외모에 만족할 수도 있다.

- 마찬가지로 누구도 스스로를 알 수 없다.

- 다른 사람에 비춰 봐야 한다.

-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거래 관계에서는 불가능하다.

- 왜냐하면 서로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이 거울 역할을 못한다.

오직 사랑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 서로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 그런 관계 속에서만 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따라서 결론은 관계이다.

- 관계 속에 모든 것이 있다.

- 신앙도, 구원도 있고, 나를 알아가는 자아성찰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우리에게 생명이다.

- 단지 숨만 쉬는 좀비로서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게 해준다.

-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다.

- 이것이 예수님 죽음의 참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