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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에베소서(03) 2:1-10 구원의 방법1 -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본문은 에베소 성도들의 구원 전과 후를 비교한다.

- 이전에는 죄로 죽었던 사람이었다.

-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 그러한 변화를 하나님의 '은혜', '자비', '선물', '사랑', '작품'이라고 표현한다.

- 본문에 '능력'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다양한 표현을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에베소서 1장에서도 핵심 소재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 전반부에서는, 복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다.

[엡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후반부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기를 기도했다.

[엡 1: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미 알고 찬양했던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달라고 기도하는 순환 논리로 말했었다.

- 그런데 이번 본문에서는 그 순환 논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방법이 뭐냐?

- '함께' 살리심, 즉 관계이다.

[엡 2:4-6]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살리심', '구원', '하늘에 앉게 하심'에 쏠리기 마련이다.

-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 언제나 신앙을 죄로부터의 구원, 죽음에서 살리심, 그래서 천국에 거함 등으로 배웠다.

- 나에게 주어지는 것, 내가 소유하는 것, 나에게 생기는 변화 등 '나' 중심으로 배웠다.

- 소유, 지배, 거래의 관점으로 배웠다.

- 내가 자유를 얻고(소유), 사탄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며(지배), 믿음과 헌심의 대가로 얻는 보상(거래)으로 배웠다.

- 게다가 소유, 지배, 거래의 관점은 사람의 본성이다. 타고난 것이다. 

- 모든 사람은 아무 것도 배우지 않으면, 이런 관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본문은 '함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을 주는 방법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관계의 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에베소서 1장을 다시 보면,

- 전반부에서는, 우리를 상속자 삼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다.

- 여기서 상속자가 상징하는 것은, 완전히 남남이었던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다.

- 따라서 바울이 찬양했던 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관계의 능력이었다.

- 후반부에서는,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했다.

- 하나님의 관계 회복 능력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관계의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① 1-3절: 죄로 죽어 있었던 상태 - 세상의 풍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육신의 정욕

② 4-7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상태 - 하나님의 자비

③ 8-10절: 극단적인 상태 변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 - 하나님의 은혜

- 죄로 죽어 있었던 상태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상태를 비교한다.

- 그리고 그러한 극단적인 변화가 드러내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밝힌다.

우리가 많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 우리는 변화에 초점을 둔다.

- 우리는 '나'의 구원에 목적을 둔다.

-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일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을 수단 삼는다.

- 구원을 통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 바울의 목적은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 이것이 바른 신앙의 전형이다.

이게 말이 쉽지, 참 어렵다.

-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때는 잘 참아도, '나'의 구원이 공격 받으면 참기 어렵다.

- 교회 안에서 이미 많이 경험했고, 나를 봐도 그렇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 우리도 내가 소모되고 소외되어도 하나님만 드러나길 바라는 신앙을 갖면 얼마나 좋을까!

1-3절: 죄로 죽어 있었던 상태 - 세상의 풍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육신의 정욕

본문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과 에베소 성도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설명한다.

- 그것을 극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구원 이전과 이후를 비교한다.

구원 이전을 '죽음'으로, 구원 이후를 '삶'으로 표현한다.

- 죽은 사람이 산 것처럼 성도들의 변화가 컸음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하고, 실제로 사라질 존재에서 유지될 존재로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의 초점은 사람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 극적인 변화를 이뤄내신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다.

- 본문에서 사람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 보이는' 수단 역할을 한다.

[엡 2: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이전의 상태는 어땠었냐?

- 바울은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 1-2절에서는 '여러분'의 경우, 3절에서는 '우리'의 경우로 구분한다.

'여러분'의 경우 죄에 대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 이 세상의 풍조,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영

- 이런 것들의 영향력을 받는 것을 죄라고 말했다.

반면에, '우리'의 경우 표현이 다르다.

- 육신의 정욕,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것

- 이것에 영향 받고 사는 것을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라고 표현했다.

-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죄가 내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 이런 표현의 차이가 있을까?

'여러분'은 에베소 성도로, 이방인이며 우상 숭배의 본거지에 사는 사람이다.

- 따라서 그들의 죄는 우상 숭배로 드러난다.

- 하지만 여기서 우상 숭배는 단순한 의미의 종교 행위를 넘어서 일상이다. 

- 우리가 유교 때문에 예의 범절을 지키는 것이 일상인 것처럼.

- 우리가 자본이라는 우상의 영향력 아래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처럼.

그래서 죄를 '세상의 풍조'와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라고 표현한 것이다.

- 이는 죄가 세상 전체, 공중(air) 전체에 깔려 있다는 뜻이다.

-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전체가 우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 아마도 화폐, 옷, 음식, 집 등에 우상의 자취가 있었을 것이다.

- 우리의 일상 속에도 그런 것처럼 말이다.

- 배산임수라는 풍수지리, 장례식에는 검은 옷, 화폐에 있는 그림, 열 두 간지 등과 같이 말이다.

- 우리는 누가 우상 숭배 한다고 하면 비웃지만, 실상은 우리도 우상 숭배에 쩔어 있다.

특히 죄를 '영'으로 표현한다.

- 이들에게는 수 많은 영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에 아데미 여신이 가장 강력했을 것이다.

- 이들에게 영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실제적이었을 것이다.

- 실제로 마법이나 요술이 많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과학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았던 것들을 우상의 영적인 영향력으로 이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현재 우리와 다르지 않다.

- 우리도 우연히 일어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도 이해되지 않는 일을 영적인 일로 생각한다.

- 우리도 전형적인 고대인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 그룹이다.

- 그들의 일상은 성경에 근거했기 때문에, 명목상 우상 숭배는 하지 않았다.

-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다른 영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의 실제 우상은 '나'였다.

- 그래서 '육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 이들은 우상 숭배 하지도 않았고, 율법에 따라 행동했다.

- 그러나 우상 숭배 하지 않은 이유도, 율법을 지킨 이유도 모두 '육신의 정욕' 때문이었다.

- '나'라는 우상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 '나'를 높여서 '나'가 왕 되기 위해서였다.

이방인처럼 세상에 풍조, 유행, 관습, 상식에 따라 사는 이유도, 유대인처럼 세상과 다른 신앙에 따라 사는 이유도 모두 죄 때문이라는 뜻이다.

- 그래서 바울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실체를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 우상이냐 율법이냐,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와는 상관 없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질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 사람의 현실이다.

4-7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상태 - 하나님의 자비

뭘 해도 죄이고 이미 죽은 상태로 태어난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 초점은 살리심의 근거가 하나님께만 있고 사람에게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 사람의 역할이 철저히 배제되었다.

- 이를 하나님의 자비, 사랑, 은혜로 표현했다.

[엡 2:4-5]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 그런데 각 단어의 의미가 중요해 보이지는 않고, 단지 구원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구원의 방법은 '그리스도와 함께'이다.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살리셨다.

[엡 1:20-22]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21]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 단순히 살리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고,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셨다.

- 이는 하나님의 독보적 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그 능력을 발휘하실 때, 그리스도 옆에 사람도 살짝 끼워 넣으신 것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 능력, 상태를 갖도록 하신 것이다.

- 이것이 구원의 방법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죽음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 삼으셨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재등극하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취되었다.

-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내부 결속'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동시에 '외부 확장'이 일어난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과정 속에 사람의 구원도 일어난다.

왜 이렇게 하시냐?

- 이 방법만이 내부 결속과 외부 확장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만약 내부 결속이 먼저 일어나면,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져서 외부 확장이 어려워진다.

- 반면에 외부 확장이 먼저 일어나면, 진입 장벽이 너무 낮아져서 내부 결속이 와해된다.

- 그래서 언제나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 신학 용어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함께 일어나야 한다.

- 그래야만 하나님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온 인류를 아우르실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 중에 나온 '부산물'이 구원이다.

- 우리에게 구원은 우리의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목적이지만, 인류 역사 전체에서 보면 완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하나의 수단이다.

구원이 하찮은 것이라고 치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그만큼 광대하다는 것이다.

- 구원을 지나치게 중시하면, 광대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없다.

-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없으면, 결국 구원으로부터도 멀어진다.

-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구원이 맞다. 누구나 그렇게 느낀다.

- 하지만 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의 구원을 하찮게 여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 '나'를 하찮게 여기는 용기를 얻도록 말이다.

바울에게 구원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엡 2: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 자비와 은혜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단순하게 '주도권'이라고 볼 수 있다.

- 구원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목적을 이룰 때 가치가 있다.

-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도적으로 이루셨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 그것을 통해 외부 확장을 이루시는 것이다.

'나'의 구원에 초점을 두면, 신앙이 불안정해진다.

- '나'의 구원은 시시때때로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 상황이 좋으면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이고, 나쁘면 구원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전체에 초점을 두면, 신앙이 안정된다.

- 하나님께서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흐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확실하게 이루고 계시며, 물론 보이지는 않지만, 같은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계심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 그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자비, 은혜, 사랑이라는 표현을 반복하는 것이다.

특히 에베소 성도들의 상황 때문에 더 그렇다.

- 우상 숭배의 본거지이며, 보이는 모든 것이 우상인 상황, 우상 숭배 하지 않고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다른 어떤 것보다 우상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해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 그런 상황만 보면, 구원은 요원해 보인다. 불가능해 보인다.

- 신앙의 용기를 내보려고 해도, 언제나 현실의 장벽에 좌절하게 된다.

-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누구라도 신앙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그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메시지가, 하나님의 자비, 은혜, 사랑, 주도권이다.

- 우리의 시선이 '나'가 아닌, 인류 전체, 그리고 인류 전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

- 현실을 떠나면 안되지만, 시선은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 그래야 신앙이 '유지'될 수 있다. 

- 안그러면, 필연적으로 신앙에서 떠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일도 그것이었다.

- 현실에 계시면서도, 현실에 집중하기보다 인류 역사 전체를 내다보시려고 하셨다.

- 왜냐하면 예수님께도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니까.

- 현실은 마지막 남은 열 두 제자조차 예수님을 배신하니까.

- 그러한 현실에 집중하면, 예수님조차 신앙을 유지하기 힘드니까.

- 그러나 자신을 통해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이 드러날 것임을 예수님은 아셨다.

- 그것만이 예수님의 진짜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마음을 갖기를 바라신다.

8-10절: 극단적인 상태 변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 - 하나님의 은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다.

- 사람의 행위가 아니다.

-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행하신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 '작품'이라는 용어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

- 작품(masterpiece)은 만들어진 대상의 가치에 초점을 두게 한다.

- 구원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인상을 준다.

- 아마도 구원의 매력에 취해서 잘못 번역한 것 같다.

정확한 번역은 행위(work)이다.

-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즉, 구원 그 자체가 아닌,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원 '행위'를 하신 목적이 뭐냐?

- 참고로, 7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 메시지의 대상이 앞으로 올 모든 세대였다.

- 즉, 인류 역사 전체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봤다.

그런데 9절에서는 자랑할 수 없게 하시려고, 10절에서는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이다.

- 메시지의 대상이 성도 개인이다.

- 즉, 미시적으로 편지를 받는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 9절은 부정어 표현, 10절은 긍정어 표현을 통해 실질적 권면을 하는 것이다.

첫째로,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 구원의 목적이 '나'를 수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자랑은 잘못된 것이다.

- 자랑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행위 이면에 있는 구원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것이다.

- 구원은 수단일 뿐며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 따라서 구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결국 구원 받지 못한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로, 선한 일은 '하나됨', '통일'이다.

- '선한 일(good works)'이라는 단어 자체는 너무 흔해서 많은 의미를 담지 않는다.

- 오히려 '살아가는 삶'에 초점이 있다.

- 하나님께서 구원 행위를 하신 이유가 사람의 삶의 관점에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 단지 운만 띄우고, 뒤의 4장에서 말한다.

[엡 4:1-16] 그러므로 …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 [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 [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 [16]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 한 마디로, 선한 삶은, 그리스도의 몸, 성령,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 주님, 믿음, 침례, 하나님 모두 하나인 것과 같이, 하나 되는 것이다.

- 성령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다른 역할을 주셨지만, 각각 다른 지체가 연결되고 결합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듯, 하나 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됨'이 왜 중요하냐?

- 구원 받은 피조물의 하나됨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의 내부 결속과 외부 확장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외부 확장을 위해 수 많은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셨는데, 각 피조물의 관계가 분열되면, 하나님의 내부 역시 분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하나됨'은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내부 결속 완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렇게 성도가 하나 될 때에만 하나님의 내부 결속과 외부 확장이 완성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주제

구원의 방법 -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 이렇게 구원의 목적도 관계, 구원의 근거이신 하나님도 관계, 구원의 방법도 관계, 성도의 삶도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상속자 삼으셨다.

- 그래서 완전히 끊어진 남남 관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셨다.

[엡 1:1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독생자, 유일한 자녀였다.

- 그러나 자녀의 자격을 포기하고 자기를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빌 2:6-8]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에게 다시 자녀의 자격을 회복하여 주셨다.

[빌 2:9-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 그런데 그 회복의 과정에서 맏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생들(상속자)까지도 같은 회복을 받게 하신다.

[롬 8: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이렇게 예수님의 역할은, 맏아들로서 하나님의 회복을 이끌어내어 동생들인 우리까지도 회복 받도록 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실제로 우리 안에서 일하는 분이시다.

- 하나님처럼 창조 전에 멀리 떨어진 채 계획만 하시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처럼 우리 옆에서 동행만 하시는 것도 아니라,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리 안에서 모든 구원의 과정을 실제로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 것이다.

[엡 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

- 지혜와 계시의 영, 즉 성령님만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깨달아 믿고 따르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 하나님은 가장 근원적으로 계획하시면서, 가장 멀리서 관계 맺는 분이시다.

- 예수님은 가장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드러나게 행동하시면서, 우리 옆에서 관계 맺는 분이시다.

- 성령님은 가장 실제적으로 움직이시면서, 가장 가까운 우리 안에서 관계 맺는 분이시다.


결론

따라서 구원은 뭐냐?

- 세 분 하나님과 각각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인데,

- 그러기 위해서는 세 분이 각각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셨는데, 어떤 역할을 맞으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세 분 하나님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 그 중 특히 예수님은 형제이다.

- '함께' 살리심을 받아, 자녀의 지위를 회복하는 분이시다.

-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모두 뭉뚱그려 아버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아버지가 아닌 형제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

-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우리를 대신해서 뭔가를 해주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 직접 우리를 고쳐주시고 바꿔주실 수 없다.

- 우리의 기대보다 예수님은 무능하시다.

그러나 예수님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다.

- 누구보다도 우리의 입장을 잘 아신다는 점이다.

-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셨고, 우리와 함께 회복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중보하고 변호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요일 2:1]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공감이다.

- 예수님의 공감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