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 사랑의 관계로 하나 되는 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며, 진리이고, 유토피아, 천국이며,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며, 하나님의 본질이고, 사람의 본질이기도 하다.
- 영적, 초월적, 신앙적, 영원의 관점에서도 중요하고, 인간적, 일상적, 제한적, 경험적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 신앙 생활 할 때, 교회 안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떠서 물을 먹을지, 화장실을 갈지 결정할 때조차도 '하나됨'은 중요한 기준이 된다.
- 그만큼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 '관계'를 중요하게 여길 때에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 되라고 권면한다.
[엡 4:1-3]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 [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는데, 우리를 '상속자'로 부르셨다.
- '상속자'가 의미하는 것은, 상속'물'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상속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이다.
- 그래서 상속의 주이신 하나님과 관계 맺고, 또 첫 아들이신 예수님과 관계 맺고, 그래서 형제들인 다른 상속자들과 관계 맺도록 하신 것이다.
- 이렇게 성령으로 하나 된 관계를 힘써 지키라고 권면하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됨을 위한 구체적 실제적 방법으로서,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무엇이냐?
- '다양성' 인정이다.
[엡 4: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 사람마다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할 때 '하나됨'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교회를 비롯하여 어떤 조직이든 하나됨과 다양성은 둘 다 필수적이다.
- 만약 조직에 하나됨이 없으면, 내부 분열로 와해된다.
- 하나됨이 있어야 뚜련한 방향성을 갖고 진보할 수 있다.
- 만약 다양성이 없으면, 획일화로 부패한다.
- 다양성이 있어야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됨과 다양성은 반대이고 모순이다.
- 하나됨을 강조하면, 다양한 개성이 훼손되고 획일화된다.
- 주로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됨을 강조한다.
- 그래서 민족주의, 극우파, 배타주의가 생긴다.
- 반대로 다양성을 강조하면, 중구난방으로 분열된다.
- 주로 진보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성을 강조한다.
- 그래서 성평등을 넘어 동성애 옹호까지 주장한다.
현실에서는 보통 하나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 그래서 정치에서도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
-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수와 진보를 동시에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드러내놓고 주장할만큼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 동성애 예를 들면, 세상에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그리고 관심 없는 사람 뿐이다.
- 동성애를 옹호하는 동시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 그만큼 사람이 하나됨과 다양성을 모두 갖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본문은 두 가지를 다 갖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라고 말한다.
- 자신의 역할, 능력, 개성을 알아야 하고, 또한 상대방의 역할, 능력, 개성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만큼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자기 역할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 즉, 다양성이 인정, 존중, 보호, 발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철저히 하나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완전히 독립되고 분리된 개인이 나 자신이 아닌, 오직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서만 자신의 역할, 능력, 개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 것이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오로지 상대방을 위해서만,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만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양면성을 들으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 바로 삼위일체이다.
- 하나님은 너무나 달라서 중복된 것이 전혀 없는 완벽히 독립된 세 분이며, 동시에 서로 구분될 수 없을만큼 완벽히 한 분이라는 것이 삼위일체의 뜻이다.
- 즉, 하나님 역시 하나됨과 다양성이 완벽하게 공존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하나됨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 벤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할 수 없다.
- 이를 다르게 말하면, 현실 안에서 상상하거나, 비유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 또 다르게 말하면, 이는 곧 사람의 뇌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의 본질을 담고 있는 개념을 표현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문제이다.
하지만 하나됨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기도 한다.
- 여러번 말했지만, 사랑의 관계에서이다.
- 배우자를 만나서 점차 서로를 알아가다가,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그리고 그 마음이 서로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가 특히 그렇다.
- 그 때 우리는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심장도 빼줄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헌신의 마음을 갖게 된다.
- 상대방에게 내가 완전히 매몰되어 하나됨을 느낀다.
- 그러며서 동시에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 세상이 전부 다 내 것 같이 느껴진다.
- 내가 드디어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완전한 '나'가 되었음을 느낀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다.
- 하나됨과 다양성을 공존하게 하는 힘이다.
- 이 둘은 너무나 상극이어서 자석의 같은 극성처럼 서로를 강력하게 밀어낸다.
- 그런데 사랑은 그보다 더 큰 힘으로 이 둘을 묶어둔다.
- 그래서 사랑 안에서 사람은 나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과 내가 완전히 확장되는 느낌을 동시에 갖게 된다.
삼위일체도 이와 같은 것이다.
- 세 분은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독립적이고, 너무나 자유로워서 절대로 한 공간에 묶여 계실 수 없는 분들이다.
- 그러나 그 자유로움보다 더 큰 사랑의 힘이 세 분의 구분을 완벽하게 없애버린 것이다.
- 그래서 삼위일체로, 즉 세 분이시지만 한 분으로 계시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살라고 말한다.
- 쉽게 말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 하지만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너무 왜곡되고 변질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이다.
- 서로를 완전히 존중하고 각자가 독립되데, 서로에게 완전히 침투하고 의존하여 하나 되라고 말이다.
이것만이 사랑이다.
-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맺는 공동체만이 교회이다.
- 만약 교회가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혹은 이러한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교회가 이런 공동체라는 지식조차 없다면,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준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시냐면,
- 완벽한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조차 박살내셨다.
- 우리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보잘 것 없는 역사 유물일 뿐이다.
- 왜냐하면 이미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고, 성경에서 엄청나게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선포하신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완벽 그 자체였다.
- 화려하고 웅장하며 거룩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 그 안에서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 진위여부를 떠나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예루살렘 성전은 완벽 그 자체, 하나님 그 자체였다.
- 성전의 거룩함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반드시 발목에 줄을 묶고 들어갔다.
- 혹시라도 부정함 때문에 죽으면, 줄로 시체를 끌어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성전에 예수님은 저주를 퍼부으셨다.
- 우리는 예수님의 행위가 너무 정당하게 여겨져서, 예수님의 행위가 얼마나 파렴치한 것이었는지 느껴지지 않는다.
- 예수님의 행위를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 왜 예수님이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 그 진위를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 예수님의 행위는 마치 요즘 제일 잘나가는 분당우리교회에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신 것과 같은 것이다.
-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다.
- 그래서 더욱 더 냉철하게 저주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
이유가 뭐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성전을 운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나님 세 분이 얼마나 서로 독립된 분이신지 그리고 얼마나 하나 된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이다.
- 그리고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혈통, 신분, 계급 때문에 서로의 인격과 개성을 무시하며 다양성을 훼손했다.
- 그리고 서로 자기 잘났다며 하나됨을 파괴했다.
이러한 하나됨과 다양성이 없었기 때문이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된 것이다.
- 적어도 예루살렘 성전에 이러한 사랑이 없다는 것조차 몰랐기 때문에 파괴된 것이다.
- 만약 알았다면, 그래서 사랑을 행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사랑 없음에 회개하며 기도했다면, 파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회복의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사랑 없음 때문에 파괴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도 이렇게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 이것이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 그 외의 것이 아무리 완벽해도, 이것 하나 없으면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 마치 아무리 힘이 세고,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사람의 DNA가 없는 동물은 사람이 아닌 것 같이 말이다.
- 반대로 아무리 힘이 없고, 아무리 무식하고, 아무리 무능해도, 장애인이고 식물인간이어도, 사지가 없고, 뇌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DNA만 있으면 사람이라고 인정하듯이 말이다.
기준이 불명확하면, 오랑우탄도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사람이 개미보다 인정 받지 못할 수도 있다.
- 마찬가지로 기준이 불명확하면, 박살날 예루살렘 성전도 하나님의 성전으로 오해될 수 있고, 참 하나님의 교회도 사람들의 무시와 박해를 당할 수 있다.
- 따라서 기준이 중요하다.
그 기준이 뭐냐?
- 사랑이다.
- 특히 하나됨과 다양성의 공존이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성과 개성을 인정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는 하나됨을 강조해야 한다.
- 한 걸음 또 더 나아가면, 하나됨을 빌미로 드러내놓고 폭력을 그리고 감추며 선동을 행하고 있는 현대 교회에게는 다양성이 지켜져야 한다.
- 그럴 때에만 교회는 비로소 교회가 된다.
이는 정말 어려운 것이다.
- 인류 정치 역사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이뤄내지 못한 것이다.
- 즉,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정말 원하는 것이다.
- 인류 정치 역사 내내 바랬던 것이다.
- 각 사람의 인격이 완전히 존중되면서도 분열되고 와해되지 않고 하나 되는 것 말이다.
우리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 마음껏 나답게 살고 싶은 욕구도 있다.
- 동시에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의지하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며 소속감을 갖고 싶은 욕구도 있다.
- 이 두 욕구는 상충되어서, 독립되면 소속감이 그립고, 소속되면 자유가 그리워진다.
그런데 만약 자유롭게 다양성을 발휘하는 것과 하나됨에 소속되는 것이 공존할 수 있다면, 그제서야 사람은 충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처럼 말이다.
- 완전한 소속감과 완전한 자유를 동시에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사람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세 분 하나님을 통해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더욱 힘써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엡 4: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 이것만 있으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돈 없어도, 능력 없어도, 지위 낮아도, 아무 것도 없어도 충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① 1-6절: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권면 - 하나됨
- 1-3절: 하나 되라는 권면 - 부르심에 합당하게
- 4-6절: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 - 모든 것이 하나이니까
② 7-16절: 하나됨에 이르는 실제적 방법 -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
- 7-10절: 하나 될 수 있는 근거 -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
- 11-16절: 하나 되는 방법 - 각 지체가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 가운데 있는 4-6절과 7-10절은 원론적인 이야기이고, 양 끝에 있는 1-3절과 11-16절은 실제적인 이야기이다.
- 따지고보면 3절 다음에 바로 11절로 이어져도 어색하지 않다.
- 그런데 가운데 원론적인 이야기를 통해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1-3절: 하나 되라는 권면 - 부르심에 합당하게
바울은 실제적 권면을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엡 4:1]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 두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한다.
- 따라서 '부르심'이 뭔지 알아야, '부르심'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부르심'이 뭐냐?
[엡 1: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신 것이다.
'상속자로 부르심'은 뭐냐?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속을 하실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를 통해 결국 만물이 하나 되는 관계를 맺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따라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관계'이다.
- 그래서 가장 먼저 교회 안의 관계를 다룬다.
- 왜냐하면 교회가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교회만이 성령님께서 평화의 띠, 관계의 띠로 묶어주셨기 때문이다.
[엡 4: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바울은 관계에 대한 여러 표현을 하는데, 별로 실속은 없다.
- 겸손함, 온유함, 오래 참음, 사랑으로 서로 용납
- 다 좋은 표현이지만, 추상적이고 불분명하다.
- 어쨋든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해 주신 것을 어떻게든 지켜내라는 것이다.
- 사실상 공동체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겸손과 온유 뿐만 아니라 엄격함과 냉혹함도 필요하다.
4-6절: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 - 모든 것이 하나이니까
'하나됨'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를 일곱 번이나 반복한다.
- 그리스도의 몸, 성령, 주님, 믿음, 침례, 하나님
- 하나됨을 강조하기 위해 좋은 것을 다 끌어온 것이지, 개별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즉,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을 비롯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이라는 뜻이다.
- 그러니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만 살펴볼 것은 하나됨에 대한 설명들이다.
첫째로, 4절에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라는 점이다.
[엡 4:4]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 부르심의 소망은 모든 상속자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모여 완전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 즉, 만물의 '하나됨'이다.
-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도가 '하나됨'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6절에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다.
[엡 4:6]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과 '하나됨'의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 먼저 '아버지'라는 표현이 친밀하게 하나 된 관계를 상징한다.
- 게다가 '위에', '통하여', '안에'라는 다양한 전치사를 통해 하나님과 만물이 맺는 다각도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다.
- 하나님께서 만물과 상위 관계도, 하위 관계도, 수평 관계도 맺으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만물은 '하나됨'을 향해 나아간다.
7-10절: 하나 될 수 있는 근거 -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
게다가 '하나됨'을 위해 힘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이미 '하나됨'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 마치 다리 없는 사람이 누워서 생활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사지 멀쩡한 사람이 누워서 생활하면 비난 받는 것과 같다.
- 사지 멀쩡한 사람이 마땅히 걷고 뛰어야 하는 것처럼,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땅히 '하나됨'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를 주시는 방법이 눈에 띈다.
[엡 4: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주신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다른 분량'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11절에서 말하는 여러가지 직분이다.
[엡 4: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 여기에 언급된 직분이 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중요한 것은, 각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다는 것이다.
- 사람들의 다양한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8-10절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
- 7절에서 바로 11절로 넘어가면 더 자연스러운데, 예수님 이야기로 흐름을 끊는다.
- 알다싶이 이러한 전개는 강조이다.
- 각 사람에게 다른 능력이 있다는 다양성을 인정하기 전에 먼저, 모든 능력이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됨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8-10절의 강조점은 두 가지다.
-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신' 후 '올라가셨다'는 것이다.
- 둘째는, 그런데 그렇게 내려오신 후 올라가신 분만이 '선물'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 즉, 성육신 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만이 선물을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 따라서 선물은 모두 다르지만, 그 선물을 주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11-16절: 하나 되는 방법 - 각 지체가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으로
이렇게 각각에게 다른 종류와 다른 분량의 선물이 주어진다.
- 왜냐?
- 공평하게 똑같이 주지, 왜 차별하냐?
- 차별한다면, 차별의 기준이 뭐냐?
- 어떻게 해야 원하는 선물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냐?
게다가 이런 생각을 더 자극하는 사람들이 있다.
- 방언 받는 법, 예언 받는 법 등에 대해 설교하는 못된 목사들이다.
- 이들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 은사의 종류와 분량이 정해지는 것처럼 속이는 놈들이다.
하지만 본문은 분명히 명시한다.
- 은사, 즉 은혜의 선물을 받는 것은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다.
[엡 4: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 그냥 주어진대로 사는 것이지, 선물 달라고 아우성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사는 것이지, 선물이 마음에 안든다고 바꿔달라고 할 수 없다.
- 아우성하지 않는 것, 바꿔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 주어진 선물이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적'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이다.
그렇다면 왜 다르게 주시냐?
- 본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엡 4: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 다르게 말하면, 교회가 '하나됨'을 이뤄서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됨'을 위해 '다양한' 선물이 필요하냐?
- 모두가 다 같으면, 하나 되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을까?
- 다 다른 것이 하나됨을 방해하지 않을까?
- 서로 다름 때문에 상처 받고 피곤해서 지친 우리에게는 참 불편한 말이다.
하지만 하나됨을 위해 모두 같아진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되는 것이다.
- 이는 마치 사람 몸이 튼튼해지기 위해 내장은 다 비워버리고 심장만 10개 채워 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같은 것이 여럿 있으면,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필요 없다.
- 그래서 열 개 심장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해서 이기는 한 놈만 남고, 나머지는 9개는 전부 배설될 것이다.
- 그러면 열 개가 모두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열개 중에 하나만 살아남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다.
- 그래서 세상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 세상에는 하나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 달라야 한다.
- 그래야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을 수 있다.
- 그래야 경쟁하지 않을 수 있다.
- 그래야 모두가 살아 남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 그래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신다.
- 그래서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고, 하나됨 안으로 들어오길 바라신다.
- 그래서 전부 다른 능력을 주시고, 같은 능력이라도 다 다른 분량으로 주신 것이다.
-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할 수 밖에 없도록 말이다.
이것이 '하나됨'을 위해 '다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이다.
- 공동체가 이루는 성과를 기준으로 하면, 모든 성도가 똑같이 최고의 능력을 갖는 것이 더 좋다.
- 하지만 공동체가 이루는 '하나됨'을 기준으로 하면, 모두 다른 능력을 갖는 것이 더 좋다.
- 그래서 그리스도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마지막 13-16절에서 바울은 반복해서 '그리스도의 경지까지 자라나라'고 말한다.
[엡 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 4: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 자라나서 다다르라고 세 번 반복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배웠다.
- 그리스도의 경지까지 자라나는 것을 '능력의 관점'에서 배웠다.
-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말씀 선포도 잘하고, 기적도 일으키고, 용서도 잘하고, 훈육과 책망도 잘하고, 전부 다 잘하는 완벽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목표로 삼았다.
- 그래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좀 더 능력있는 사람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 정말 거짓된 가르침이다.
자란다는 것은, 능력의 관점이 아니라 '관계의 관점'이다.
- 그리스도께서 '하나됨'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됨'을 위해 살라는 것이다.
- 그래서 맡겨진 역할에 충실하되 오직 하나됨에 힘써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완벽한 몸이 되라는 것이다.
[엡 4:16]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머리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께서 머리로서 역할에 충실하되 하나됨에 힘쓰셨던 것처럼, 각 지체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하되 하나됨에 힘쓰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럴 때에만 몸 전체가 건강해지고 잘 자라기 때문이다.
- 이것이 자란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모두에게 자기 역할에서 벗어나 '머리'가 되라고 한다.
- 능력을 최고로 키우라고 말한다.
- 능력 있는 사람만 싸움에서 이길 수 있으며, 이긴 사람만 살아 남는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할까?
- 정말 우리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까?
- 우리가 '머리'가 되는 것이 그들에게도 유익이 되기 때문일까?
- 그들은 정말 우리가 '머리'가 되어 자신들을 지배하길 바랄까?
- 정말로 우리가 살아남길 바랄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 결론부터 말해서, 세상이 우리를 더 쉽게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 우리가 목숨 걸고 능력을 키워 '머리'가 되려고 할 때에만, 우리를 쉽게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이 돼지를 도살장에 끌고 가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 더 쉽게 끌고 가기 위해 주인은 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빵'으로 유인한다고 가정해보자.
- 모든 돼지가 전부 똑같이 '빵'을 좋아한다면, 주인은 모든 돼지를 '빵' 하나로 쉽게 죽일 수 있다.
- 그런데 만약 각 돼지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다면, 혹은 돼지가 음식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돼지를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것이 힘들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주인은 돼지가 '빵'을 좋아할 수 밖에 없게끔, 태어났을 때부터 '빵'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교육을 한다.
- 그래야 더 쉽게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우리에게 '머리'가 되는 것, 성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교육한다.
- 우리가 정말 '머리'가 되어 성공하길 바래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서이다.
- 조금 더 쉽게 도살장에 가서 고기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짓거리이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엡 4:14]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 세상은 '관계의 관점'이 아니라 '능력의 관점'으로 말한다.
- 능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속인다.
- 관계를 무시하고 혹은 관계를 이용해서 능력을 쌓아야한다고 말한다.
- 그래서 관계에 치중하여 능력에 소홀해진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 그래서 세상의 풍조에 흔들려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만든다.
하지만 능력을 쌓는 것의 최종 목적지는 도살장일 뿐이다.
- 아무리 능력을 쌓아도 여전히 공허하고, 더 능력 있는 사람 앞에 자격지심만 느낄 뿐이다.
그러나 관계는 다르다.
-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누구도 도태시키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 바둥대지 않아도 되고, 남보다 못해질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 모두에게 존중받으니 능력을 쌓아 더 높아질 필요가 없다.
오직 '나'로 살면 된다.
- 그리고 나를 '나' 되게 해주는 공동체를 위해 살면 된다.
- 이러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런 삶보다 더 행복한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렇게 다양성과 하나됨이 공존하는 삶이 바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인 것이다.
주제
역시 사랑 뿐이다.
- 사랑만이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한다.
- 사랑할 때에만, 다른 사람과 완전히 하나 될 수 있고, 동시에 완전히 '나'일 수 있다.
- 그렇게 온전한 '나'로서 자유롭게 나를 표현할 때, 그리고 동시에 온전한 '소속감'을 느낄 때에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 사랑 속에서만 하나됨과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살아오신 모습이다.
- 서로가 너무 사랑해서 서로에게 독립성과 자율성을 완벽하게 보장해 주었다.
- 억압하는 사랑, 의존적으로 만드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히 종속되었다.
- 독립성과 자율성이 완전히 사라질만큼 상대방에게 헌신했다.
- 그렇게 하나님은 완벽한 세 분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한 분으로 사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고 싶은 관계도 바로 이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굴복시켜서 종으로 부려먹으시려는 것이 아니다.
- 우리에게 참 독립성과 참 자율성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세상 때문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종속되고 우리도 하나님께 종속되어, 하나 된 관계를 맺으시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다.
- 그래서 독립성과 자율성을 반납하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참 '나' 되셨다. 인류에게 그리스도로 인정받게 되셨다.
그래서 교회도 예수님과 같이 자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 각각의 성도들도 사랑으로 독립성과 자율성을 반납하고 서로에게 헌신하라는 것이다.
- 그렇게 될 때 참 독립성과 자율성을 회복하여, 참 '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즉,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됨과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완성되는 곳이 천국이다.
- 이것보다 더 좋은 곳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 우리는 이것을 역사 속에서 부분적으로 경험하다가, 종말 이후에는 온전히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
신앙이 정말 이런 것이라면, 투신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
- 어떤 사람에게든 매력적이지 않은가.
다른 종교 역시 이와 비슷한 매력적인 목표를 제시한다.
- 깊이 보면, 기독교를 비롯해서 불교, 힌두교 등 메이져 종교들이 제시하는 목표는 비슷하다.
- 이 점에서는 기독교의 차별성이 약하다.
하지만 목표에 이르는 방법에서 차별성이 있다.
- 다른 종교는 사람의 헌신을 강조한다.
- 관계이기보다, 이용, 거래, 보상이 강조된다.
- 반면에 기독교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 역시 '관계'이다.
- 다른 종교에 비해 더 완결성, 일관성 있는 종교이다.
물론 '관계'에 헌신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 그 동안 교육 당하고 세뇌 당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 하던대로 하고 싶기 때문이다.
- 하던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과 과정과 단계가 필요하다.
- 나에게 맞는 작은 노력이 필요하다.
'능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한 걸음이 필요하다.
- 이것은 누구도 대신 고민해줄 수 없다.
-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 하나됨을 위해 다양성이 필요하듯, 나다운 답을 스스로 내려야 한다.
- 가장 나다울 때에만 나에게 필요한 정답을 찾을 수 있다.
- 그리고 정답을 찾을 때에만 비로소 나다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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