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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에베소서(09) 5:1-14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 흑백 논리의 신비

바울은 본문 전체의 권면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한다.

[엡 5:14]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 이 명령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로, 에베소 성도가 현재는 잠자고 있다 혹은 죽어 있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 죽은 것을 잠 잔다고 표현한 부분이 많다.

- 그리고 이 구절에서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동일한 사람을 가르킨다.

- 따라서 잠자며 죽어 있는 사람은 편지를 받는 에베소 성도있다.

- 바울은 에베소 성도를 여전히 죽어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둘째로, 에베소 성도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 일어날 수 있는 생명이 이미 부여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일어나라고 명령한 것이다.

-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녀 혹은 상속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가 이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둘을 정리하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 부르심을 받아 근원적인 변화가 이미 있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의 죽어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 본질적인 변화가 이미 이루어졌지만, 겉모습은 변화 이전 상태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필두로 우리 전체를 '잠자는 사람'이라고 부른 것이다.

-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라'는 명령으로 함축되는 다양한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권면을 통해서, 바울의 머리 속에 이중적 혹은 모순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간 샛길로 빠져서, 바울의 머리 속을 좀 더 드려다보면, 바울은 사람을 세 부류로 구분했던 것 같다.

- 첫째로, 본질의 변화도 없고, 겉모습도 옛사람인 불신자,

- 둘째로, 본질의 변화도 있고, 겉모습도 새사람인 종말 이후의 신자,

- 셋째로, 본질의 변화는 있지만, 겉모습은 옛사람인 종말 이전의 신자.

바울의 권면은 첫째와 둘째 부류의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

- 첫째 부류의 사람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아무리 권면해도 변화될 가능성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 둘째 부류의 사람은 이미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권면 자체가 필요 없다.

-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은 지옥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필요 없다.

반면에 셋째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 한 마디로 말해서, '변화의 가능성'과 '변화의 필요성'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바울의 권면을 두고 오해를 하기 때문이다.

- 오해는 두 가지 양 극단으로 나뉜다.

첫째로, 자신을 지나치게 의롭다고 여겨서 '변화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 자신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고, 변화를 받았으며,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그래서 또 다른 변화의 필요성은 없다는 것이다.

- 물론 좀 더 착하게 살고, 좀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구원 여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런 사람은 바울의 권면을 하면 좋지만 안해도 큰 문제 없는 '선택의 문제'로 생각한다.

- '필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면, 바울의 권면은 가치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아예 없어진다.

- 사람은 '하면 좋지만 안해도 되는 것'을 안하기 때문이다.

- 마치 운동같이 말이다.

그래서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결국 신앙에서 떠난다.

- 이런 사람들이 특히 비극적인 것은, 신앙을 떠나면서도 자신 스스로는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더욱 더 신앙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적다.

둘째로, 자신을 지나치게 죄인이라고 여겨서 '변화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 자신은 전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권면에 순종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오직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 없이 신비로운 기적을 통해서만 권면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바울의 권면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성령님만 순종하도록 하실 수 있는 비현실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 자신의 본질의 변화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겉모습에 새사람을 입는 것 역시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 은혜만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무지하게 찬양한다.

- 하지만 현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산다. 방종한다.

- 오히려 자신의 방종을 하나님께서 은혜 안주신 탓으로 돌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결국 신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 그러면서도 그것까지 하나님의 뜻이라며 자위한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 정도의 차이일 뿐, 두 부류의 성향이 우리에게 모두 있다.

- 우리 역시 바울의 권면을 들으며 이와 같이 반응한다.

- 한편으로는, 나는 예수님 믿으니까, 이런 권면을 반드시 순종할 필요는 없어. 이런 권면에 다 순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어.(변화의 필요성 부정)

- 다른 한편으로, 바울이 말하는 권면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 어떻게 죄 한 번 안짓고 살아. 바울도 하나님 은혜 받았으니까 그렇게 산거지. 그런 은혜 임하면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테지만, 지금은 아니야.(변화의 가능성 부정)

이러한 생각의 치명적인 문제는, 성경의 가치를 박살낸다는 것이다.

- 성경의 가치를 조금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게 만든다.

- 그 결과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 그래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본문의 권면은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 말 그대도 '설교'가 될 뿐이다.

- 교장 선생님의 '잔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함으로, 변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을까?

첫째로, 변화의 가능성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으시며, 모든 것을 다 뜻대로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 엄밀하게 말해서, 믿음의 근거는 없다.

- 그 중에 희미하지만 가장 유력한 근거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이다.

-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나의 변화 가능성도 믿는 것이다.

-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변화 가능성도 믿지 못하게 된다.

- 나와 같은 죄인은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정한다. 자포자기한다.

- 그런 사람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바울의 권면은 무의미해진다.

둘째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 내 상태가 변화가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 다르게 말하면, 지금 내 상태가 너무 추악하고 더럽고 형편 없어서 견딜 수 없어야 한다.

- 또 다르게 말해서, 자신의 현재 상태가 견딜만 하면, 그 사람에게 성경은 가치 없는 책이 된다.

그러면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 난 내 인생이 엄청 훌륭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부끄러워서 불태워버리거나, 지워버리거나,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을만큼 내 인생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 내 인생에 변화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며 부정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 내 인생에는 수 많은 무가치한 순간들이 있지만, 나름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있다.

- 나도 내 인생을 좀 더 가치 있게 바꾸고 싶지만, 완전히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 인생에 가치 있는 순간이 전무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 비유가 적절하다.

- 순도 100%의 생수라도, 똥 1mg만 들어가면 곧바로 순도 100% 똥물이 된다.

- 똥 1mg이 아니라 0.1mg밖에 안들어갔으니까, 이 물도 충분히 생수라고 말할 수 없다.

- 100%의 생수와 99.9%의 생수에 0.1% 똥이 섞인 물은 0.1%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100% 차이 나는 것이다.

- 현재 내 안에 오점이 있다면, 오점의 양과 질은 상관 없이 내 인생은 똥물이 되는 것이다.

이는 흑백 논리와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 완전한 백이 아니면, 모두 흑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 지대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러한 논리를 오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논리를 삶의 모든 영역에 똑같이 적용하면 정말 오류를 만든다.

- 만약 4살된 자녀가 정성껏 아빠 얼굴을 그렸는데, 나랑 안닮았다고 찢어버린다면, 어리석은 흑백 논리의 오류이다.

하지만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르다.

- 전염병이 있어서 마스크를 껴야 할 때, 100번 외출을 한다고 해보자.

- 99번 바르게 꼈어도, 한 번 안끼면 걸릴 수 있는 것이 전염병이다.

- 내가 99번이나 꼈는데, 어떻게 한 번 안꼈다고 전염병에 걸리냐며 원망하는 사람은 없다.

- 이런 상황에서는 99번 잘 낀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 100번 다 껴서 완전한 백이 되는 것 아니면, 1번 안꼈던 100번 안꼈던 모두 똑같이 흑이 된다.

- 백과 흑만 있을 뿐 회색 지대가 없다.

또 예를 들면, 수술 장갑도 한 번 쓰면 버려야 한다.

- 피로 범벅 된 장갑을 버리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 그러나 만약 찢어지지도 않고 깨끗한 장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아니면 수술 하려고 꼈다가 수술이 취소되서 바로 벗은 장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아니면 한 번도 쓰진 않았지만, 살짝 바닥에 떨어뜨렸던 장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충분히 쓸만 하니까, 조금 털어내고 다시 써야 할까?

- 아니다. 무조건 몽땅 버려야 한다.

-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신앙은 이런 것이다.

- 흑백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 완전한 것 아니면, 모두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다.

- 1L의 물에 똥 1mg만이라도 섞인 생수를 우리는 바로 변기에 버린다.

- 똥 1mg 섞인 생수와 똥 1L를 우리는 똑같이 여긴다.

이와 같이 오점이 있는 우리의 인생은 변기에 버려져야 한다.

- 아깝다고 집에 놔두면, 점점 더 썪는다. 악취는 점점 더 심해진다.

- 그 물이 옷에 묻으면, 바로 빨아야 한다. 손에 묻었으면, 빨리 비누로 씻어야 한다.

-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가 신앙의 세계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신앙을 흑백 논리의 오류라고 지적할 수 있다.

- 너무 극단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 그래서 어느 정도의 회색 지대를 인정해주는 사람도 있다.

- 그래서 신앙이 완전하지 않아도, 교회 열심히 다니고 나름대로 봉사 하면 성도라고 불러주는 교회가 수두룩하다.

- 이는 똥 조금 밖에 안들어갔다고 똥물을 생수로 마시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 무식한 것이다. 더러운 것이다. 

신앙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

-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 엄격하게 위생을 관리하는 병원보다 더 엄격하고 냉정하게 백과 흑을 구분해야 한다.

- 흑이 버려지는 것이 아깝다고 많이 안더러우니까 백 쪽으로 옮기면, 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있는 백을 모두 더럽히는 것이다.

- 쓰던 장갑 아깝다고 새 장갑과 섞으면, 장갑 하나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새 장갑 전체를 다 버리는 것이다.

- 우리 인생 중에 아깝다고 나름 가치 있는 몇몇 순간들을 포기하지 못하면, 우리 인생 전체가 망가진다.

따라서 백을 알고 지키려는 노력만큼 흑을 분리해서 버리는 노력 역시 중요하다.

- 아무리 백을 깨끗하게 지켜도, 흑을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 모든 것은 흑이 되기 때문이다.

- 아무리 흑을 잘 구분했다고 하더라도, 바로 버리지 않고 놔두는 순간 언제든 흑이 백을 더럽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백, 즉 진리가 무엇인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이 무엇인지 비교적 잘 가르쳐 준다.

- 교회 나와서 열심히 기도 하고, 찬양하고, 성경 공부하고, 봉사까지 하면, 이미 구원을 따 놓은 당상인 것처럼 칭찬한다.

하지만 흑, 즉 삶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한다.

- 일단 교회 생활 외의 일상에 대해서는 쉽게 알 수도 없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터치하지 않는다.

- 교회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치부까지 드러낼만큼 깊은 대화를 하지 않고, 일상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적당히 격려와 위로만 할 뿐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

- 사람들의 사소한 죄로 인해 교회 전체가 순식간에 똥물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유는 뻔하다.

-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 교회 운영하는데 별로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어짜피 헌금은 나올 것이고, 교회 봉사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오히려 괜히 건드려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보다 눈감아 주는 것이 교회 운영을 위해 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 현실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예를 들어 보면,

-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 안나오는 학생의 특징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 개념 정리 열심히 하고 문제집은 열심히 푸는데, 답을 맞추지 않는다.

- 답은 열심히 맞주는데, 틀린 문제를 다시 보지 않는다.

- 틀린 문제를 다시 보긴 하지만, 대충 보고 넘어가서 나중에 또 틀린다.

- 틀린 문제 기억하려고 오답 노트까지 만들지만, 정작 오답 노트를 보지 않는다.

즉, 문제 풀이를 통해서 내가 뭘 아는지는 확인하는데, 뭘 모르는지를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 문제집은 모르는 것을 찾으려고 푸는 것인데, 아는 것만 확인하고 끝낸다.

- 그러면 기분은 좋은데, 정작 성적은 안오른다.

- 왜냐하면 틀린 문제는 계속해서 틀리기 때문이다.

- 모르는 것은 계속 모르는 채로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대부분 교회가 하고 있는 꼴이다.

이런 학생의 마음은 나도 잘 안다.

- 나도 오랫동안 그랬기 때문이다.

- 문제집 많이 풀면, 다 했다는 성취감이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이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점하고 오답 노트 만드는 것은 재미 없다.

- 일단 성취감이 없다.

- 페이지 넘어 가는 맛이 없다.

- 그리고 막상 틀린 문제의 답을 보면, 대충 알 것 같다.

- 굳이 다시 안봐도 알 것 같다.

- 그래서 정말 보기 싫다.

- 특히 문제를 틀렸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

- 그래서 틀린 문제 보는 것이 더 싫다.

결국 이런 학생은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틀리게 된다.

- 성적이 어느 정도까지는 오르지만, 어느 수준에서 멈춘다.

- 모르는 것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뜨겁게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 배우는 것은 재밌다.

- 성취감이 있다. 뭔가를 했다는 느낌에 뿌듯하다.

- 힘차게 찬양하고 나면, 몸 속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하지만 자신의 일상을 반추하고, 문제를 찾아내어 고치는 것은 재미 없다.

- 지루하고 피곤하다.

- 성취감이 없다.

결국 이런 신자는 어느 정도 수준의 신앙에서 멈춘다.

- 우리가 잘 아는 집사님들처럼 그저 그런 신앙 생활을 이어간다.

이것이 흑백 중에 백은 배우지만, 흑을 제거하지 않는 교회의 신앙이다.

- 가르침, 설교, 격려, 위로, 교훈은 한다.

- 하지만 책망, 비판, 훈계, 정죄,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 백을 가르쳐 줄 때에는 사람들이 모이지만, 흑을 제거하려 하면 사람들이 떠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도 그랬다.

- 사역 초기에 기적을 행하시고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 백을 가르쳐주는 일은 이렇게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다.

- 반면에 사역 후기에 바리새인을 비판하고, 성전을 파괴하고,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시자, 사람들은 다 떠났다.

- 가장 곁에 있었던 열 두 제자들까지도.

- 이것이 흑을 제거할 때 생기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백을 아는 것이 아니라 흑을 제거하는 일이다.

- 가르침, 격려, 위로보다는 책망, 비판, 정죄가 더 필요하다.

- 정답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는, 오답이 뭔지 아는 것이 더 필요하다.

- 우리가 얼마나 선택받은 의로운 성도인지 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아는 것이 더 필요하다.

정답보다 오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 의인인지 아는 것보다 죄인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 결국 정답을 아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 결국 의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 하지만 현재 우리가 이미 정답은 너무 잘 알고, 오답은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계속 잘하지만,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여전히 계속 못하기 때문이다.

-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알기 보다는, 모르는 것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잘하는 것을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 하지만 순간의 행복감 외에는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

반면에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불편하고 괴롭다.

- 특히 다른 사람이 나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더 싫다.

- 하지만 이렇게 채점을 하고 오답 노트를 만들 때에만, 우리의 실력은 올라간다.

- 불편하지만 서로의 문제를 지적하고 정죄할 때에만, 우리의 신앙은 성장한다.

그래서 바울이 본문에서 계속 정죄하며 하지 말라는 권면을 반복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채점을 하고, 틀린 문제를 지적하여, 오답 노트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 우리는 어느 정도 개념 정리도 끝났고, 문제집도 많이 풀었다.

- 하지만 틀린 문제를 반복해서 틀리고 있는 상황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정확한 채점과 오답 노트이다.

- 새로운 것을 더 알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러한 과정은 힘들다.

-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하지만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성장한다.

- 단순히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성장한다.

우리의 문제는 인생 전체로 보면 굉장히 작고 사소한 일부분일 수 있다.

- 그래서 문제를 다루는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 별 것 아닌 일에 열올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오답 노트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그 별 것 아닌 1mg의 똥이 우리 인생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그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우리 인생 전체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① 1-6절: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사십시오. - 헛된 말 하지도 말고 속지도 말라.

- 1-2절: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사랑으로 사십시오.

- 3-5절: 헛된 말을 입에 담지 마십시오.

- 6절: 헛된 말로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② 7-14절: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 어둠과 짝하지 말고 폭로하라.

- 7-10절: 어둠과 짝하지 마십시오.

-11-14a절: 어둠을 폭로하십시오.

- 14b절: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본문은 큰 틀에서 두 가지 긍정적인 권면을 한다.

-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그리고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할 때, 부정적인 권면을 사용한다.

- 각종 헛된 말을 입에 담지 말라고 말한다.

- 그리고 어둠과 짝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이 포인트이다.

- 비유적으로 말하면, 생수답게 살라고 말하는데, 그것을 위해 계속해서 똥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 똥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절대로 생수답게 살 수 없으니, 똥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에 누군가를 이렇게 항변할 수 있다.

- 아니, 세상이 똥 천지인데 어떻게 똥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있냐!

- 그럼 세상에서 살지 말라는 말이냐? 세사을 떠나라는 말이냐?

-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니냐?

- 게다가 나한테는 똥 1mg 밖에 안섞였는데, 왜 자꾸 똥물이라고 단죄하냐?

-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게만 살 수 있냐?

- 세상에 살다보면 똥이 뭍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지.

- 그 정도는 용납해주고 용서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 아니냐?

내가 만약 바울이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 만약 너가 똥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네 그릇에 있는 물을 다 버린다면, 하나님은 완전한 생수를 넣어주실 것이다.

- 너에게 똥이 1mg 밖에 없건, 1kg 전부가 다 똥이건 상관 없이 네 똥물을 버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생수를 채워줄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고, 그런 사랑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너에게 똥이 1mg보다 훨씬 더 적다고, 다 버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겨놓으면?

- 새로운 생수를 부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신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똥물일 뿐이다.

- 왜냐하면 똥이 1mg이건 희석되어서 0.1mg이건, 똑같은 똥물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논리는 이렇다.

- 백답게 살라! 고 말한다.

- 그러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방법으로, 흑 근처에도 가지 말라! 고 말하는 것이다.

- 그런데 만약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면, 바울은 흑백 논리의 오류를 범한 것이 된다.

- 따라서 바울의 말이 논리적이려면, 회색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회색 지대가 없다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 아무리 깨끗한 생수라도, 똥 한 방울만 들어가도 똥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물을 깨끗하게 했던 수 많은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 되기 때문이다.

-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초고층 빌딩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일상에는 하루에도 수백 번도 넘는 유혹의 순간이 있는데, 그 중 단 한 번도 실수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실상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순간을 찾기가 더 어려운데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바울의 권면이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제시하는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 너무 이상적이고, 너무 비현실적이고, 너무 도달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완전히 이상적인 신앙 외에는 모든 것을 다 불신앙, 지옥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만약 그것만이 신앙이라면,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실현 불가능한 것은 다른 말로 가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마치 당첨된 로또의 가치가 수십 억이지만, 당첨 확률이 너무 낮기에 천 원 주고도 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어짜피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면, 포기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다른 교회에서는 신앙의 회색 지대를 용인하여,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 안그러면 사람들이 다 신앙을 포기하고 떠나버리니까.

하지만 신앙의 목표가 실현 가능한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신앙인가?

- 올바른 신앙이라면, 사람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을 갖는 것 아닌가?

- 그렇다면 신앙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 그런데 신앙의 목표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불만을 갖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신앙의 목표는 반드시 실현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 바울의 권면은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실현 가능한 것으로 왜곡하면 안된다.

- 다른 교회들처럼 말이다.

동시에 우리는 신앙의 목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

'실현 불가능함'과 '필히 성취해야 함'이 공존해야 하는 것이 신앙이다.

- 왜냐하면 그래야만 사람이 신앙에서 초월자 하나님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 만약 실현 가능하면, 하나님 없이 사람 혼자서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 반대로 만약 필히 성취할 필요 없으면, 하나님 없이 혼자 잘먹고 잘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고 명령하는 것이다.

- 여기서 사람을 잠잔다고 말한 것은, 실현 불가능함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 그리고 일어나라는 명령은, 필히 성취해야 함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 이 두 가지 모순된 근거 위에서만 신앙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절: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사십시오. - 헛된 말 하지도 말고 속지도 말라.

권면의 최종 목표는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 이 권면은 표현만 다를 뿐, 계속 반복된 권면이다.

[엡 4:1]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 여기서 말한 부르심이 사랑 받는 자녀로의 부르심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 자녀답게 사는 것을 다시 뭐라고 표현했냐면,

-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직역하면, imitator of God이다.

- 즉, 사람보고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여러번 말했지만, 신앙의 최종 목표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 되는 것이다.

- 이 목표만이 '실현 불가능함'과 '필히 성취해야 함'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된다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자녀 되는 것과 하나님 되는 것이 어떻게 같냐고 반문할 수 있다.

- 그러나 관계의 관점에서 자녀되는 것은 관계가 너무 깊은 나머지 동일화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자녀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재산, 소유, 능력, 권위를 다 위임받아, 아버지와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 자녀 되는 것의 참 뜻이다.

바울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간다.

- 하나님 되는 것을 또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으로 확장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죽음 부활로 드러내 보이신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보다, 자신의 신적 지위와 권력보다 '사랑'을 귀하게 여기셨다.

-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만 선택하셨다.

그와 똑같이 우리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의 돈, 명예, 지위, 생각, 목표, 삶을 모두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 사랑을 위해 예수님처럼 수치스럽게 죽임 당하라는 뜻이다.

그것만이 자녀답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만약 이 백에서 터럭만큼이라도 벗어난다면, 모두 흑이 되기 때문이다.

- 그러면 아무리 노력했어도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3-5절에 사랑이 아닌 것을 나열한다.

- 참 많은 표현이 있는데, 한 마디로, 사랑이 없는 모든 말이다.

- 말에서조차 사랑이 없으면,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이는 곧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바울은 엄하게 경고한다.

-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다고.

-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다고.

[엡 5:5]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음행하는 자나 행실이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 숭배자여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습니다.

[엡 5:6]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헛된 말로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이런 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 쉽게 말해서, 지옥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흑백 논리로 말한다.

- 사랑 없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즉 똥이 1mg이라도 섞이면, 지옥이라고.

- 다시 말해서, 흑이라고 말이다.

7-14절: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 어둠과 짝하지 말고 폭로하라.

빛과 어둠 비유는 익숙하다.

- 요한복음에 많이 나왔다.

- 하나님의 세계와 세상의 세계를 비교할 때 사용된다.

본문에서 빛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빛은 어둠과 완전히 분리된다.

[엡 5:7]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짝하지 마십시오.

-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은 있을 수 없고,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있을 수 없다.

- 에베소 교회는 이미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어둠은 조금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 역시 흑백 논리이다.

둘째로, 빛은 어둠 속을 폭로한다.

[엡 5:11]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어둠 속으로 몰려든다.

- 그런데 빛은 어둠 속에 있던 부끄러운 것들을 드러낸다.

이 두 가지 모습으로 사는 것이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 이것이 세상에서 마땅히 가져야할 우리의 모습이다.

이렇게 되기 위한 전제 조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상과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

-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세상의 방식이다.

- 세상의 방식은 사랑이 아닌 거래, 이용을 위해 관계 맺는 것이다.

- 반면에 우리는 언제나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 사람을 이용 수단으로 삼는 것은 모두 똥이다.

- 그 똥은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를 똥물로 만든다.

- 똥과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

둘째는, 세상 안에 있어야 한다.

- 왜냐하면 그래야 어둠 속에 있는 것들을 폭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상과 구분되기 위해 세상을 떠나면, 세상을 폭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사방이 똥으로 둘러쌓인 곳에서 끝까지 생수를 지켜야 한다.

- 그래서 똥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는지 폭로해야 한다.

- 그러다가 똥 세례를 당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이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신 이유이다.

- 반대로, 똥 세례를 받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이미 똥물이 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 마치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람들의 찬양과 칭송을 받았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땅히 하셔야 할 일들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외친다.

[엡 5:14]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 똥물 속에 쌓여 허우적거리고 있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외친다.

- 어둠 속에 파묻혀 쓰러져있는 교회를 향해 일어나라고 외친다.

- 일어나서 똥과 어둠으로부터 구분되어 폭로하라는 것이다.

- 그것이 전도이다.

전도는 굽신거리며 어떻게든 꼬셔서 교회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다.

-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굽신거리는가.

- 인류 전체보다 더 귀한 것 주겠다는데 왜 굳이 꼬셔야만 하는가.

전도는 빛 되는 것이다.

- 악과 구분되어, 악을 폭로하는 것이다.

- 먼저 내게 악을 제거하고, 다른 사람의 악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악을 지적하면, 비난을 받을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이 전도이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 율법과 성전이 악하다고 지적하여, 민족의 대역죄인이 되셨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 그것만이 백이고, 나머지는 흑이다.

- 예수님과 같이 인류의 대역죄인이 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흑인 것이다.

이러한 인생으로 초청하는 것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 무섭지만, 짜릿하다.


주제

흑백 논리만이 잠자는 우리를 일으킨다.

신앙은 흑백 논리이다.

- 회색 지대가 없다.

- 생수 아니면 똥물이다.

- 천국 아니면 지옥이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만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 자신이 완전히 의롭다고 생각하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무조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 문제는 자신이 완전한 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흑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다.

- 나름 착한 일도 많이 했고 성실하게 살았다며, 지옥 갈 정도의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렇기 때문에 애써 하나님 도움 받아 구원 받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 천국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는 없어도, 지옥에서 찌그러져 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회색 지대를 인정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이런 사람 뿐이다.

- 자신이 최선을 다해 착하게 살았지만, 여전히 자신 안에서 악을 발견하며, 그 악 때문에 괴로워 몸부림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는다.

- 백을 향해 인생을 걸고 전력질주 했지만, 여전히 완전한 백에 이르지 못했다는 자괴감 속에서만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

- 완전한 백 아니면 모든 것이 흑이라는 이분법 속에서만 하나님이 필요해진다.

- 깨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여전히 잠자고 있다는 인식 속에서만 벌떡 일어나는 동력이 생긴다.

- 바울의 권면을 완벽하게 행하여 완전한 백에 이르지 못하면 지옥이라는 인식 속에서만 바울의 권면이 우리의 가슴을 친다.

- 본문은 이런 사람 들으라고 씌여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회색 지대에 숨고 싶다.

- 의인도 아니지만 죄인도 아니라고 자위하고 싶다.

- 천국에 갈 자격은 없지만, 지옥에 갈 정도로 자격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 회색 지대에 있으니까, 의인처럼 하나님 사랑은 못 받아도, 죄인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 곧, 회색 지대는 유일하게 하나님이 안계시는 피난처인 것이다.

- 문제는 이곳이 심판으로부터의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피난처라는 것이다.

그렇게 착각하며 잠자고 있는 우리에게 바울은 일어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정말 암담하다.

- 왜냐하면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회색 지대에서 용기있게 백색 지대를 향해 나아갈 자신이 없다.

-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니,,

- 아무리 생각해도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회색 지대에서 솔직하게 흑색 지대로 갈 배짱도 없다.

- 내가 죄인이라서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기 어렵다.

- 내 인생 전부를 싸그리 악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 이것만이 정말 신앙이라면, 신앙 생활 할 맛 정말 안난다.

하지만 신앙 생활은 할 맛 안나야 바른 신앙이다.

- 할 맛 나면, 누가 하나님 의지하겠는가.

- 신앙 생활이 재밌는데, 누가 기도하겠는가.

- 신앙 생활 할 맛 안나고 재미 없게 만들어서 하나님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이다.

하기 싫으니까 기도하는 것이다.

- 너무 재미없으니까 어떻게든 하려고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 암담하고, 어찌할바 모르는 상태에 직면하자.

- 그래서 답답함 속에 사무치자.

-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의지하라고 주신 은혜이다.

- 그 때에야 비로소 참된 기도가 나온다.

- 그럴 때에야 참된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