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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에베소서(10) 5:15-33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의 의미는 부부 관계이다.

[엡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몸'이라는 표현은 원래 다른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엡 5:30]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엡 1: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다.

-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즉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몸이라는 뜻이다.

- 그래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모델로 하여 이상적인 부부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한 몸'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의미로 쓰였다.

[엡 4:25]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뜻한다.

- 특히 절대로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회복을 '한 몸'이라고 표현하였다.

[엡 3:6]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이는 교회 공동체의 관계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나됨'은 더욱 확장된다.

[엡 1: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 만물이 결국 '한 몸' 되는 것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와 만물이 '한 몸' 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 하나님과 만물이 '한 몸' 되는데,

- 만물 안에서 교회가 '한 몸' 되고,

-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 되며,

- 또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 된다는 것이다.

- 즉, 가장 미시적인 개인의 관계부터 시작하여, 교회 그리고 만물을 거쳐서, 가장 거시적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까지 전부 '한 몸'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 중에 성경은 미시의 영역에서 가장 관계 맺기 어려운 두 가지 예시를 든다.

-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이다.

- 이 두 가지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회복되지 못할 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 이를 통해 관계 회복의 끝판왕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회복까지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관계 회복은 사이 좋게 잘 지내는 것 그 이상이다.

- 그렇기 때문에 '한 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표현한 것이다.

- 내가 나를 느끼듯 상대방을 느끼는 것이며, 상대방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 단순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동정하고, 배려하는 것 이상이다.

-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와 계속해서 관계한다.

- 그와 같이 이해가 안되고, 공감이 안되고, 동정, 배려가 안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맺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러한 관계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뇌가 전선에 연결된 상태'에 비유했다.

- 내가 상대방과 뇌가 연결된다면, 표현할 수도 없고 자각하지도 못하는 희미한 감각까지도 전부 다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감각이 행복하게 하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감각이 화 나게 할 때도 있다.

- 마치 내가 느끼는 나의 감각이 나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내가 나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나를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도 내가 이해 안되고 컨트롤 안되서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끝까지 안고 가야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이, 상대방도 끌어 안고 가는 것이다.

- 이렇게 희노애락 등 각종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관계를 맺는 것이 '한 몸' 된 관계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관계 맺으신다.

- 하나님과 우리가 '한 몸' 된 것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 뇌에 전선을 꽂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전선으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들어오는 신호가 뭐였냐?

- 고통과 신음소리였다.

- 사람들이 악과 고통 속에서 외로움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감각이 전해진 것이다.

- 물론 고통을 의식 속에서 느끼는 사람보다 무의식 속에 가진 사람이 더 많다.

-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근원적인 악 때문에 울부짓고 있었던 것이다.

- 사람은 합리화를 통해 자신 내면의 고통 소리를 애써 외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신 것이다.

만약 이 고통의 신호가 익숙해지고 적응되어 무뎌진다면, 하나님은 희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 그러나 사람에게서 전해오는 신호는 손톱 밑의 가시처럼 무뎌지지도, 잊혀지지도, 멈추지도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뇌를 때려댔다.

- 그러니 하나님은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다.

-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본인이 죽게 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희생하신 것이다.

-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내려보내신 것이다.

- 그리고 죽이신 것이다.

- 그래서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건지신 것이다. 구원하신 것이다.

- 그래야만 고통의 신음 소리로부터 자신을 건지실 수 있기 때문이다.

- 즉,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을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한 몸 되어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의 실체이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조차 그리 거룩해보이지 않는다.

- 내가 의도적으로 관계의 명암 중에 어두운 부분을 강조해서 표현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도 이와 같지 않은가?

- 내가 나를 보면 항상 기분이 좋은가?

- 우리는 내가 너무 좋아서 나에게 밥도 주고 옷도 입히고 편하게 쉬게 해주는가?

- 오히려 때로는 배고프다는 아우성이 듣기 싫어서 음식을 입에 쑤셔 넣고, 피곤하다는 몸의 반응이 싫어서 놀고 싶지만 억지고 재우고, 칼바람에 추워서 덜덜 떠는게 싫어서 억지로 불편한 코트를 입지 않는가?

- 긍정적인 감정 때문에 나를 돌볼 때도 있지만,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나를 돌볼 때도 많지 않은가?

정말 가까운 관계는 이런 것이다.

- 상대방의 좋은 신호 때문에 행복해질 때도 많지만, 상대방이 보내는 나쁜 신호 때문에 불행해질 때도 많은 것이다.

- 그래서 그 나쁜 신호를 틀어 막아 내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희생하는 것이다.

- 상대방이 너무 좋아서 희생하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아우성이 너무 싫어서 희생하기도 한다.

-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마치 내가 나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 나 편해지기 위해 상대방에게 희생하는 것이다.

- 즉, 이기적인 목적으로(나 편해지기 위해) 이타적인 마음(상대방에게 희생)을 갖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사장이 회사 복지 수준을 높여 직원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 그것은 사장이 직원을 도구로 생각하여, 도구가 고장나지 않도록 기름칠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 관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용하는 것이다.

- 파괴된 관계의 전형이다.

참 관계는 완전한 연결을 전제한다.

- 그래서 상대방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직결된다.

- 따라서 나의 고통을 없에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고통도 없에야 한다.

- 그런 의미에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타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다.

적당한 관계, 수직 관계, 거래 관계, 고용 관계 등 파괴된 관계에서는 이런 일이 안생긴다.

- 왜냐하면 파괴된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감각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상대방의 감각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의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래서 희생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무에게나 자신 내면 깊숙히 있는 진짜 고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 사람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굉장히 많고 복잡하다.

- 하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약점 잡히기 때문이다.

- 직장에서 불만 투성이 투덜이는 진급도 안되고 놀림이나 당한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내면에 있는 어두움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아도 드러내지 않는다.

-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껍데기로만 관계 맺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산다.

- 그러니 당연히 상대방의 울부짖음을 들을리 없고, 그러니 당연히 상대방을 위해 희생해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평생 적당한 거리 두며 행복하게 살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다.

-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가진 배우자에 대한 원망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

- 젊었을 때에는 부부 간의 적당한 관계가 어느정도 유지되었다.

- 그러나 말년이 될수록 적당한 관계로 인한 고통이 터져 나온다.

이유는 언제나 쌍방 과실이다. 들어볼 것도 없다.

-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관계가 깨져있기 때문이다.

- 양편 다 진솔하게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들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말하고 들었다 하더라도, 자기 일처럼 느끼고 희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된 더 본질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자신 내면에 있는 어두움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갈등의 표면적 원인은 일방적으로 보인다.

- 한 사람은 계속 혼내고, 한 사람은 계속 당한다.

- 하지만 갈등의 내면적 원인은 쌍방 과실이다. 둘 다 문제이다.

이렇게 적당한 관계 속에서 사람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죽어간다.

- 이것이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진짜 현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성령님께서 오신 것이다.

- 그래서 관계의 가장 미시 단위인 부부 관계, 가족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 서로 서로 머리에 전선을 꽂아, 서로의 마음을 말하고 듣도록 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서로의 고통 때문에 몸서리치게 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라도, 서로에게 희생하게 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모두가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역을 교회로 확장하시는 것이다.

- 교회는 남녀노소가 뒤섞인 곳이다.

- 혈통, 출신, 재산, 신분 등이 달라서 함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모인 곳이다.

- 공통의 경험이 너무 적어서 쉽게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모임이다.

- 그런데 그들 사이에 전선을 꽂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곳이다.

- 왜냐하면 전선, 즉 성령 없이는 평범한 대화조차 불가능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 성령님께서는 그런 단절을 초월하여 관계 맺게 하시기 때문이다.

- 마치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결국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전체 만물이 한 몸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 이것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 하나님이 피조물과 한 몸 되어 하나님을 무한히 확장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본질 속에서 바울은 본문의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인간의 본질 속에서 삶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관점에서 권면을 들어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① 15-21절: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 15-17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 18-21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② 22-33절: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 22-24절: 아내에 대한 권면 -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하십시오.

- 25-31절: 남편에 대한 권면 - 자기 몸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 32-33절: 결론 - 서로 사랑하십시오.

전반부의 핵심은 '성령 충만', 후반부의 핵심은 '부부 관계'이다.

- 그런데 이렇게 초점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 모두 '한 몸' 된 관계이다.

- 전반부는 교회 안에서 한 몸 된 관계이고, 후반부는 가정 안에서 한 몸 된 관계이다.

15-21절: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혜로운 사람답게 사는 것은 '한 몸' 되어 사는 것이다.

- 교회 안의 성도들과 '한 몸' 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한 몸'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만 말하면,

- 본문에서 지혜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 본문 안의 문맥으로 봐도 타당하고, 지혜라는 단어 자체의 뜻으로 봐도 타당하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뭐냐?

- '통일'이다.

- 이를 바울은 '한 몸' 그리고 '상속자'로 표현했다.

[엡 1:9-11]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1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 '상속자' 역시 단순한 부자 관계를 넘어서 하나님과 사람이 동일화되는 또 다른 표현이다.

- 그래서 '통일', '한 몸', '상속자'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다.

- 따라서 지혜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 즉 '한 몸' 되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 어렵다.

-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 더 많다.

- 그들이 더 승승장구한다.

- 오히려 지혜로울 때 고난 당한다.

-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엡 5:16]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이는 지난 본문에서 말했었다.

- 세상은 똥밭이다.

- 그래서 아무리 깨끗한 생수라도 세상에 들어가면 오염될 수밖에 없다.

- 더 정확히 말해서, 똥물이 되는 것이 세상 살기 더 편하다.

- 왜냐하면 세상에서 생수는 똥세례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이를 5:7-14에서 빛과 어둠의 비유를 통해 설명했었다.

이러한 현실을 이번 본문에 맞게 재해석하면,

- 세상에는 거래 관계만 있다. '한 몸' 되는 관계는 없다.

- 그래서 세상에 들어가면, 아무리 바른 관계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거래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

- 더 정확히 말해서, 거래 관계를 맺을 때에만 세상에서 살기 더 편하다.

-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결과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다 털린 후 버려지기 때문이다.

풀어 말하면, 만약 우리가 세상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전부 내어주며 희생하면, 어떻게 되냐?

- 세상 사람이 우리의 희생에 감사하며 보답하냐?

- 오히려 정반대로, 목숨은 이미 빼앗고 더 뜯어낼 것 없는지 호시탐탐 노린다.

- 마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께 병사들이 속옷까지 빼앗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 모든 것 다 털리고 개처럼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절대로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안된다.

- 다르게 말하면, 세상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바른 관게를 맺고 있다는 생각은 모두 착각이다.

- 양 편이 적절하게 서로를 잘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거래 관계일 뿐이다.

- 만약 우리가 세상에서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 살아 있어서는 안된다.

- 우리가 여전히 목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주는 바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때가 악하다는 것의 의미이다.

- 세상이 이렇게 바른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세상에는 바른 관계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 그래서 더욱 더 지혜롭게 정신 차리고 바른 관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바른 관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면, 방법이 뭐냐?

- '성령 충만함'이다.

먼저, 바울은 성령과 술을 비교한다.

- 술 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함이 비슷해 보였던 것이다.

[행 2:13]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같은 점은 무엇일까?

- 둘 다 사람이 주도권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 기존의 자기 모습이 아니라 술과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모습을 갖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다른 점은?

- 술은 주도권을 빼앗아 모든 관계를 끊고 자기 세계 안에 가둔다.

- 그래서 술을 마시면 자기 세계 안에서 변질된 자유를 누리는 방탕에 빠지게 된다.

-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롭게 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사람들과 더 편하게 교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실상은 주변 사람들이 완전히 배제된채 나 홀로 있는 세계 속에 갖히게 된다.

반면에 성령님은 주도권을 빼앗아 다른 사람과 관계 맺도록 하시다.

-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다른 사람과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다.

- 자기 자신은 없고 다른 사람과 하나님만 계신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관계 맺는다.

- 그러나 그러한 관계를 통해 오히려 참된 자신을 찾게 된다.

그래서 성령 충만으로 네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본문은 말한다.

①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 성도 간의 관계

②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 하나님과의 관계

③ [엡 5:20]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 하나님과의 관계

④ [엡 5:2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 성도 간의 관계

- ①과 ④는 성도 간의 관계, ②과 ③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 또 ①과 ②는 드러나는 행동, ③과 ④는 감춰진 마음이다.

- 한 마디로, 성도 간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마음과 행동에서 모두 긴밀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관계 맺어 '한 몸' 되는 것이 참 성령 충만이다.

22-33절: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그렇게 '한 몸' 되는 가장 대표적인 관계가 부부 관계이다.

- 관계의 대표로 부부 관계를 제시한 이유는 너무 많다.

- 최초의 인류 아담과 이브를 떠올릴 수도 있고, 종말에 있을 신랑과 신부의 혼인잔치 비유를 떠올릴 수도 있으며, 가장 흔한 관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부 관계 자체에 매이지 않고 해석하는 것이다.

- 본문은 부부 관계에 대한 것이지만, 부부 관계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관계의 본질이다.

- 부부 관계를 예로 들 때 관계의 본질이 비교적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지, 부부 관계만을 설명하기 위한 본문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남녀 경쟁 구도로인한 오해 때문이다.

- 특히 남편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비유 때문에 더 그렇다.

- 남편은 머리, 아내는 몸이기 때문에 남편이 더 높고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고 착각한다.

-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의무인 반면, 남편이 아내에게 베푸는 사랑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동정과 같이 오해되기 때문이다.

부부 관계의 완성은 '한 몸' 됨이다.

- 즉, 완전히 동일해지는 것이다.

- 구분이 없어지는 것이다.

- 남녀의 차이가 극복되는 것이다.

- 남녀의 차이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를 초월하는 하나 된 관계를 맺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남녀 구분은 무의미하다.

- 구분을 두는 것은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본문의 부부 관계를 일반적인 사람 사이의 관계로 바꿔서 이야기 하겠다.

- 부부 관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관계를 더 근원적으로 다루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바르게 규정된 관계에 근거하여, 오해 없이 바른 부부 관계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기본적으로 바른 관계의 모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다.

- 그리스도는 자신의 전부를 교회를 위해 내어준다.

- 동시에 교회는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순종한다.

- 그 결과 그리스도는 자신을 내어줌으로 교회 것이 되고, 교회는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본문의 설명은 복잡하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는 두 개체가 아무 것도 잃지 않으면서 서로가 관계로 꽉 묶인다.

- 반면에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 없고 자신의 필요만 채우면, 관계도 깨지고, 결국 사람에게 진짜 필요한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자세히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 먼저 그리스도는 교회에 관계의 전선을 연결하고 있다.

- 그래서 교회의 고통 소리를 듣고 괴로움이 시작된다.

- 그리스도 입장에서는 교회의 고통 소리가 멈춰야 자신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다.

[엡 5:25-27]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27]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희생하신 목적은 교회의 고통 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 잠재우는 방법은 악과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다.

- 악과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행위는, 한편으로 볼 때, 자기 사랑이다.

- 자신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일 뿐이다.

- 그래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 즉, 그리스도의 행위는 '자기 사랑'일 뿐이다.

우리는 '자기 사랑'을 굉장히 나쁜 것으로 배웠다.

- 죄라고까지 배웠다.

-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힘을 아껴야 하고, 결국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 이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사랑'의 문제는 '하나님 안사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 반면에 본문의 '자기 사랑'은 '자기 아내 사랑'과 '그리스도 사랑'으로 연결된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나냐?

- 핵심은 역시 관계이다.

- '자기 사랑'을 하는 주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관계가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다른 사람이 행복해야만 한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행복하게 만들어서, 자신도 행복하게 만든다.

-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자기 사랑'이 언제나 다른 사람 사랑으로 연결된다.

-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도 이어진다.

반면에 관계가 깨어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없다.

- 자기만 행복하면 다다.

- 그래서 온통 자기에게만 집중하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은 배제된다.

- 그와 함께 하나님도 배제된다.

따라서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 자기 사랑이냐 타인 사랑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 이기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의로울 수 있고, 이타적으로 타인을 사랑하면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

핵심은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느냐이다.

- 내가 다른 사람의 뇌에 전선을 꽂고 있느냐이다.

- 내가 다른 사람의 고통 소리를 듣고 있느냐이다.

- 나에게 다른 사람의 고통 소리가 나의 고통이 되느냐이다.

그렇게 연결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 이기적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타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만 하기 떼문이다.

완전히 적절하진 않지만, 예를 들면, 부모와 신생아와의 관계이다.

- 신생아를 둔 부모의 행복은 언제 오냐?

- 아기에게 완벽한 케어를 해서 아기가 아무런 불편함 없이 곤히 잘 때 온다.

- 밥도 잘 먹어서 배부르고, 쉬, 응가도 다 해서 속도 편하고, 온도도 딱 맞아서 춥지도 덥지도 않고, 목욕까지 해서 개운한 상태이다.

- 그것을 위해 부모는 모든 신경을 아이에게 쏟는다.

-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빼먹으면, 아이는 깨어 울 것이고, 부모도 자다가 새벽에 깰 것이고, 문제를 찾아 해결할 때까지 부모의 행복은 오지 않는다.

- 즉, 부모의 행복은 아기가 행복할 때 온다.

- 아기가 행복하지 않으면, 부모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

- 부모와 아기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럴 때 부모는 아기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사랑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오기 때문이다.

- '자기 사랑'이 곧 아기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 사랑하는 것이 마냥 행복하냐?

- 너무 잘 알겠지만, 피곤, 짜증, 분노, 답답의 연속이다.

- 행복한 순간은 정말 잠깐이다.

- 아기가 조용히 잘 때 정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과 비슷한 것이다.

- 겉으로 나타나는 여러가지 행동, 감정, 상황도 물론 중요하다.

- 하지만 진짜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결된 관계'이다.

- 상대방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직결된 상태가 진짜 사랑이다.

-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나를 피곤하고 지키고 힘들고 화나게 만들어도, 그럼에고 불구하고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어야만 나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관계를 연결하는 것이다.

- 이러한 연결 관계가 사랑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핵심이다.

- 이 핵심에 대한 결과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 또는 '주께 하듯 하는 순종'이 나오는 것이다.

- 이러한 사랑을 억지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관계를 만들면 이러한 사랑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 이러한 연결 관계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뇌가 전선으로 연결되는 것은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부모와 아기의 관계도 연결된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 연결된 관계는 성령님으로부터만 나온다.

이러한 연결 관계를 본문은 '한 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성경은 남녀가 만나 이러한 관계를 맺는 것을 부부라고 부르는 것이다.

[엡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러한 관계를 맺는 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엡 5:32]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가 맺고자 하는 관계도 이런 관계이다.

- 상대방의 아픔에 나도 아파하는 관계.

- 상대방의 아픔과 나의 고통이 직결된 관계.

- 상대방의 아픔이 해결되지 않고는 나의 고통도 해결될 수 없는 상태.

- 그런 상태 속에서 나오는 다양한 반응들이 우리가 맺고자 하는 관계이며 사랑이다.


주제

'한 몸' 되는 것만이 관계이며 사랑이다.

'한 몸' 되는 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긴밀히 연결된 관계이다.

- '한 몸' 됨으로 드러나는 것은 행복, 만족, 기쁨도 있지만 불행, 짜증, 분노도 있다.

-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으로 '한 몸' 됨을 파악할 수 없다.

- 오히려 '한 몸' 되었기 때문에 불행, 짜증, 분노가 일어날 수 있고, 반대로 '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 만족, 기쁨이 생길 수도 있다.

-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불행, 짜증, 분노가 일어나지만, 원수가 아프면 오히려 행복, 만족, 기쁨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한 몸' 되었다는 것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 서로의 뇌에 전선이 연결된 것이다.

- 그래서 상대방이 아프면 나도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연결되면, 희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상대방의 아픔 때문에 내가 죽겠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 나를 위해서라도 상대방에게 희생하게 된다.

- 엄밀하게 말해서, 나를 위한 희생은 희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그러나 연결된 관계 속에서는 이러한 희생 아닌 희생을 하게 된다.

또한 연결되면,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상대방의 필요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아는데, 그래서 상대방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을 때 생기는 상대방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너무 잘 아는데, 어떻게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서라도 희생하게 된다.

이러한 희생을 하게 되면, 자랑하기가 애매해진다.

- 물론 상대방을 위한 희생인 부분도 있지만, 나를 위한 희생이라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 그래서 희생에 대한 댓가를 상대방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 희생을 통해 자신의 고통이 없어진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게 된다.

- 마치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 부모에게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젖을 빠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결된 관계 안에서 희생은 댓가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 희생을 통한 자기 위로, 자기 사랑이 더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이러한 희생이 양 방향으로 동시에 일어난다면, 

- 그래서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희생하면서도 오히려 남편이 고마움을 느끼고, 

- 아내도 남편에게 희생하면서 오히려 아내가 고마움을 느낀다면, 

- 관계로 인한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대화될 것이다.

- 서로가 느낄 친밀감은 극대화될 것이다.

- 이 기쁨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의 최정점에 있을 것이다.

물론 관계가 이렇게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니다.

- 상대방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다보면,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아픔을 느끼게 된다.

- 삶이 더 고단해진다.

- 마치 아이 낳은 부모의 인생이 더 고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이런 고단한 과정이 지나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한 몸' 될 때, 그 때에 누릴 감격 기대하며 힘겨운 육아의 과정을 견디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 과정은 고단할 수 밖에 없다.

- 굳이 내가 챙길 필요 없는 교회 식구들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 나 힘든 것도 벅찬데,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 과정만 본다면, 감정 낭비일 뿐이다.

하지만 과정을 지나 관계가 맺어지고, 그래서 양 방향의 희생이 마주 일어날 때, 

-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시 목숨을 내어줬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을 때,

- 그렇게 서로의 생명이 맞교환 되었을 때,

- 그 때 서로가 느낄 고마움과 친밀함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을만큼 감격적일 것이다.

- 마치 맨날 울기만 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눈 맞추고 웃어줄 때의 감격, 혹은 처음으로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감격, 처음으로 아이가 날 향해 웃으며 달려올 때의 감격보다 훨씬 더 큰 감격에 휩쌓이게 될 것이다.

교회 안의 성도들과 그리고 하나님과 그런 감격의 관계를 소망하는 것이 참 교회이다.

- 그것만이 교회의 목적이다.


결론

우리 교회는 정말 갈등이 많이 일어난다.

- 솔직히 말해서, 나는 매번 모일 때마다 '제발 오늘은 아무 일 없기를' 바란다.

- 매번 갈등 상황마다 버겁고 힘들다.

- 왜 이렇게 의미 없는 감정 소모를 해야하는지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들다.

나도 그런데 다른 사람은 오죽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 나야 소신 가지고, 명분 가지고, 나름의 이유 가지고 해도 이렇게 지치는데,

- 다른 사람은 이유도 전부 공감하지 못한 상황에 이런 감정 소모를 한다면 얼마나 지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너무 미안하다.

- 괜히 내 말 때문에 기분 찝찝해질 사람들을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다.

- 나조차도 계속 이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 그래서 우리 모두가 참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면,

- 그래서 우리가 최절정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눈꼽만큼이라도 있다면,

- 그렇다면 지금 이 갈등이 가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수 많은 과정을 통해 성령님이 임하신다면,

- 그래서 우리 교회가 참 교회 된다면,

-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다면,

-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다면,

-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세상에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할 수 있다면,

- 하나 뿐인 인생 투자할 가치 있지 않겠는가.

나도 이런 실낱같은 소망으로 견디는 것이다.

- 엄청 잘 알아서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는 희미한 기대감 가지고 더듬어 가는 중이다.

만약 이러한 관계에 매력을 느낀다면, 함께 끝까지 가보자.

-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 이러나 저러나 마음 같지 않은 인생, 하나님의 약속에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