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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59) 21:15-25 제자의 삶 - 예수님 사랑, 목양의 사명, 죽임 당함

이제 요한복음 마지막이다.

- 요한복음 특유의 독특함 때문에 끝이 궁금했다.

예상대로 독특하다. 

- 다른 복음서와는 전혀 다르게 끝난다.

- 고기 잡기 이야기와 식사 이야기로 끝난다.

-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메시지까지 독특하지는 않다.

- 메시지는 제자의 삶에 대한 지침이다.

-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 어느 복음서든지 항상 하는 말이다.

-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말씀이다.

21장 전반부에서는 고기 잡기와 예수님과의 관계 이야기를 엮었다.

- 그래서 예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가 선순환 관계라는 것을 밝혔다.

-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질 때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진다는 것이다.

이번 본문 21장 후반부에서는 <예수님 사랑>과 <목양의 사명>을 엮는다.

-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랑 고백을 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신다.

-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목양, 즉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고(당위 명제) 살아가게 된다(사실 명제)는 것이다.

- 그리고 그러한 제자의 운명은 죽임 당함이라고 예고한다.

- 마치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본문은 베드로 개인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 전반적인 이야기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 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베드로는 용서 뿐만이 아니라 사명까지 받는다.

그런데 만약 이를 베드로의 개인 문제로만 한정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 그러면 목양의 사명이 베드로에게만 한정된 특별한 역할이 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베드로는 목양의 사명을 받은 특별하고 유일한 사람이 된다.

- 결국 베드로는 특별한 역할을 갖는 지배층이 되고, 우리를 포함한 나머지 모두는 베드로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층으로 전락한다.

- 이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 계층 질서가 생긴다.

이것으로 인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로, 하나님 대신에 베드로가 찬양을 받게 된다.

- 베드로는 목양의 사명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할 실질적 목자가 된다.

- 그래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최고로 찬양하고, 그 다음으로 베드로를 의지한다고 말한다.

- 하지만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과 같다.

- 마치 배우자를 최고로 사랑하고 그 다음으로 옆집 이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처럼 말이다.

- 이러한 문제는 천주교에 많이 나타난다.

- 성 베드로, 성 요한, 마리아가 그들의 실질적 구원자이다.

둘째로, 교회 공동체 안에 상하 관계가 생긴다.

-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긴다.

- 그러면 공동체를 통치하기 쉬워지고, 그만큼 공동체는 확장된다.

- 하지만 공동체의 본질인 관계는 깨진다.

- 사랑의 관계가 아닌 거래와 이용 관계로 전락한다.

- 이 문제는 개신교에 많이 나타난다.

따라서 본문을 베드로의 개인 문제로 한정하면 안된다.

-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메시지로 확대해야 한다.

- 베드로가 받은 용서에서 인류의 용서와 나의 용서를 보아야 한다.

- 베드로가 받은 사명이 나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올바로 성취될 수 있다.

- 아무도 베드로를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 홀로 찬양 받으실 수 있다.

- 그리고 우리가 모두 목양의 사명을 갖고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그럴 때에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순환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 이렇게 모두가 함께 능동적으로 하나되고자 하는 공동체만이 참 교회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우리의 운명도 예고한다.

- 그리스도인이 되면,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비명횡사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예고가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사실 명제로서, 미래에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단순히 예언이다.

- 어떤 당위나 가치 판단은 없다.

- 예수님도 그러셨고, 베드로와 바울도 그렇게 되었다.

- 요한처럼 장수하다가 자연사 한 사람도 있지만, 그들조차 실상은 죽은듯 살았다.

- 왜냐하면 세상과 반대되는 길로 가기 때문이다.

-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 피할 수 없다.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한.

둘째로, 당위 명제로서, 앞으로 그렇게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절대로 자연사 할 수 없도록, 격렬하게 세상과 싸우며, 그리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최선을 다해 사람들에게 헌신하여 비명횡사 하도록 살라는 것이다.

- 자연사 하지 않도록 남김 없이 헌신하라는 명령이다.

-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렇게 사셨다.

- 인생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사람을 사랑하셨다.

- 그래서 명대로 살지 못하시고 죽으셨다.

- 남김 없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쏟으셨다.

-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인생 길로 따라 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다. 

- 예수님처럼 살 수 없다.

- 십자가에 못 박히기는 커녕, 당장 눈 앞의 배우자와 자식을 위해서 시간 내주는 것조차 힘들다.

-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한 시간 기도하기는 범접할 수 없는 신적 경지이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위로하고 싶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지금 이렇게 살지 못한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자.

- 왜냐하면 결국 이렇게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는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스스로에게 채찍질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당근과 채찍을 모두 주실 것이다.

-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를 경험하도록 해서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실 것이다.

-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주셔서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하실 것이다.

- 우리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제자의 기준은 열심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 성령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경지이다.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히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롬 8:38-39]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 아무 노력할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예정론이나 운명론을 믿는 것도 아니다. 

-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 우리 안의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실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실 것이며, 그러다가 장렬히 순교하도록 하실 것이고, 순교하지 않더라도 죽은듯 살아가게 하실 것이다.

- 이렇게 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조급하지 말고, 천천히,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열심히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이 없는 성령님의 시대에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5-17절: 베드로의 사랑 고백과 예수님의 사명 수여 - 예수님 사랑과 목양

② 18-19절: 베드로의 운명 예언 - 죽임 당함

③ 20-25절: 요한에 대한 헛소문 - 요한복음의 신뢰성 확보

- 베드로를 통해 제자의 삶을 제시한다.

- 현재에는 예수님 사랑과 목양의 사명이 선순환하고, 미래에는 죽임을 당한다.

- 그러면서 화제가 자연스럽게 요한에게 넘어간다.

- 하지만 제자의 삶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은 없고, 괜한 헛소문을 다룬다.

- 이는 요한의 신뢰성을 높이고, 이는 결국 요한복음의 신뢰성을 높이는 것으로 끝난다.

15-17절: 베드로의 사랑 고백과 예수님의 사명 수여 - 예수님 사랑과 목양

예수님과 베드로의 개인적인 대화이다.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신다.

-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 그런 후 예수님께서는 목양의 사명을 주신다.

- 이런 대화를 세 번 반복하신다.

이 대화에 대해 지엽적인 논쟁이 있다.

- 첫째로, '사랑'이란 단어를 '필레오'와 '아가파오' 두 가지로 쓴다는 것이다.

- 이러한 차이를 통해 신적인 무한한 사랑과 인간적인 유한한 사랑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 둘째로, '먹이라'와 '치라'의 구분이다.

- 그래서 전자는 당근, 후자는 채찍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구분은 근거가 없다.

- 예전에는 이러한 구분을 두고 그 차이에 대한 썰을 푸는 논쟁이 심했다.

-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 그런데 지금은 차이를 두지 않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 나는 나무보다 숲을 보겠다.

대화는 단순하지만, 대화 이면에 수 많은 대화가 오갔다.

먼저, 예수님의 첫 질문부터 그렇다.

- 우리도 아무에게나 '너 나 사랑하니?'라고 묻지 않는다.

- 아무에게나 물으면, 그래서 '아니'라는 답을 들으면, 분위기 이상해진다.

일상에서 이 질문을 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면, 썸남 썸녀가 본격적인 관계로 넘어갈 때이다.

-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수면 위로 드러내어, 관계의 도약을 이루려 할 때이다.

- 이런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면, 그만큼 둘 간의 관계는 깊어진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 첫째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해야 한다.

- 둘째로, 상대방이 날 사랑한다는 심증이 있어야 한다.

- 셋째로, 동시에 상대방이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이 있어야야 한다.

- 넷째로, 그리고 그 의심을 하게 된 상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통 썸에서 연인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질투 유발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 상대 이성이 다른 이성과의 접촉을 볼 때이다.

- 그것을 보고 마음이 요동치고, 그로 인해 자신이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상대방을 꼭 잡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용기를 내어 이런 질문을 한다.

따라서, '너 나 사랑하니?'라는 질문에는 '나 너 사랑한다.'라는 사랑 고백이 깔려 있는 것이다.

본문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도 썸 같은 것이다.

- 예수님과 베드로는 서로 사랑했고, 그래서 3년을 동고동락 했다.

- 그러나 베드로의 배신으로 인해 사랑이 의심되고 있는 상황이다.

- 그렇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여전히 사랑하셨다. 

- 그래서 마음이 요동치고, 베드로를 꼭 잡고 싶으셔서, 용기를 내어 베드로에게 다가와 질문을 하신 것이다.

- 그리고 그 질문의 표면은 사랑의 '확인'이지만, 실제로는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 역시 사랑의 고백이다.

[21:15]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미묘한 점이 있다.

- 직접적으로 고백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말한다는 점이다.

- 사랑의 근거를 자신에 두지 않고, 예수님께 둔다.

이런 반쪽짜리 사랑 고백을 하게 된 이유는 베드로의 실패 때문이다.

- 베드로는 당당하게 확신을 갖고 사랑을 고백했던 사람이다.

[13:37]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는 일이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 하지만 자신의 확신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절감했을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의 확신이 아닌 예수님의 전지하심에 근거를 둔 사랑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 사람의 믿음이다.

-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는다.

- 그래서 '나'에 근거를 둔 믿음의 확신을 믿지 않는다.

- '내가 믿는다고 확신하니까, 나는 믿는 것이 확실하다.'와 같은 어리석은 자기 확신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안다.

많은 교회는 여전히 이런 믿음을 조장한다. 

- 그래서 스스로 믿고 있다는 거짓 확신을 강요한다.

- 오히려 믿음의 자기 확신이 없는 것을 믿음 없음이라고 설득한다.

- 그러나 참 믿음은 자기에 대한 믿음 없음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 믿음이 생기냐?

- 베드로의 경우처럼, 실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특히 내가 가장 잘한다고 자부했던 것을 실패해야 한다.

- 게다가 실패의 정도도, 절대로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실패여야 한다.

- 신앙 생활 안에서 말한다면, 자신이 그토록 외쳤던 신앙 고백이 얼마나 위선이었는지 깨달을 때에만 참 신앙이 생긴다.

그렇다고 자신의 위선과 죄에 대해서만 고백한다고 다 신앙은 아니다.

- 그것 위에 신앙 고백을 해야 한다. 베드로처럼 말이다.

- 나는 거짓된 사랑 고백만 하며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때 나오는 고백이 참 고백이다.

- 그제서야 예수님께 근거를 둔 사랑 고백이 나온다.

- 단순히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한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지만, 그 마음조차도 예수님으로부터 왔다는 믿음 안에서 나오는 고백이다.

그렇게 사랑을 확인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양 사명을 주신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왜 이 시점에서 사명을 주셨을까? 이다.

- 사랑을 확인한 후, 이제부터 제대로 부려먹기 위한 것일까?

- 사명을 제대로 이해해야, 사명에 따라 살아가는 제자의 삶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시는 것은, 마치 대기업 회장이 아들에게 회사 경영을 맡기는 것과 같다.

- 졸부가 아닌 이상, 회장은 아들이라고 아무에게 경영을 맡기지 않는다.

- 훈련시키고, 검증하고, 시험을 해본 뒤에, 믿음이 생기면 그때 맡긴다.

- 그리고나서 기업 전체를 물려준다,

따라서 기업 경영을 맡는다는 것은, 단지 일거리를 떠안는 것이 아니다.

- 기업 전체를 물려 받는 것을 의미한다.

- 일을 시키기 위해 기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주기 위해 일을 시키는 것이다.

- 경영을 맡는다는 것은, 합격해서 선택 받았고,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 받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사명을 받는 것은, 단지 일꾼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권세를 물려 받는다는 뜻이다.

- 최고로 영예로운 순간이다.

-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세상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모두 갖는다는 뜻이다.

- 노골적으로 말해서, 세상의 왕이 된다는 뜻이다.

- 그것이 목양 사명의 바른 뜻이다.

그렇다면 목양 사명이 뭐냐?

[10:11-15]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15]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 전부이다.

- 기업 경영이 회장이 하던 일 전부를 하는 것인 것처럼 말이다.

- 특히 서로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아시는 것처럼 말이다.

- 완전한 완계를 맺어, 자신의 전부, 특히 목숨까지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하셨고, 같은 일을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일을 맡기셨나?

- 그에 대해 답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하셨나를 생각해보면,

-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을 행할 때에만 예수님이 예수님 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 또 그것만이 예수님이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재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에게도 이 사명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나다울 수 있고, 하나님께 사랑 고백할 수 있고, 재밌기 때문이다.

또 마찬가지로, 이 사명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 물론 지금은 잘 모른다.

- 목양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부담되고 힘든 일이다.

- 행복해서 자발적으로 하기보다는, 의무감으로 한다.

- 왜냐하면, 이 일 안에 깔려있는 복잡다단한 파급력, 영향력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 일이 실상은 우주를 쥐락펴락하는 결정적인 일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내가 맡게된 기업이 얼마나 큰 기업인지, 얼마나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게 되면, 이 사명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알게 될 것이다.

- 이 사명이 단지 베드로의 임무이며 목사의 임무이지,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게 될 것이다.

- 이 사명이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게 될 것이다.

- 나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 자체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 기쁨을 주기 위해 이번 본문이 기록된 것이다.

- 베드로를 통해 온 인류에게 이 사명이 주어졌음을 깨닫게 하도록 말이다.

18-19절: 베드로의 운명 예언 - 죽임 당함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목양 사명을 물려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 중 최고의 사명인 죽임 당함 사명까지 물려주신다.

[21:18]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을 상징한다.

- 즉, 예수님처럼 베드로도, 우리도 죽임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 그래서 베드로도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하는데,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다.

왜 이 시점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 예수님과 베드로가 관계를 회복하고 사명까지 받은 시점에 왠 날벼락같은 죽음 예고일까?

- 죽임 당함을 비극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적절치 못한 시점이다.

- 하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말한다.

[12:23-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 단순히 죽음을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죽음만이 예수님의 사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 실제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죽임 당함의 사명까지 주시는 것이다.

- 고생만 하다가 죽어버리라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다.

- 너무 사랑해서 주시는 것이다.

- 그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사명을 받은 우리에게도 받은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취할 운명 말이다.

-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바로 그 날 말이다.

정말 죽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섭다.

- 무서운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 안무섭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 사리 분별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무섭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 이 또한 성령님께서 어떻게든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기 노력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성령님께 미루자.

- 죽임 당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성령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이다.

- 죽임 당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를 성령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다.

-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다 죽임 당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20-25절: 요한에 대한 헛소문 - 요한복음의 신뢰성 확보

화제가 요한에게 넘어간다.

- 베드로가 갑자기 요한의 운명을 묻는다.

베드로가 요한의 운명을 묻는 장면이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 아마도 화제를 요한으로 넘기는 것에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이야기는 별 것 없다.

- 예수님 말씀을 오해해서, 요한이 영생할 것이라는 헛소문이 돌게 되고, 해명하는 것이 전부이다.

- 요한복음이라는 긴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이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로, 실제로 그런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 대부분 제자들은 순교했지만, 요한은 이상하리만큼 장수했다. 

- 약 90세까지 살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 지금도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엄청난 장수였다.

- 그 때문에 헛소문이 나돌았고,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로,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복음의 신뢰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 예수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을만큼 요한이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드러낸다.

- 그리고 그 요한이 지금껏 장수하는 바로 그 요한이다.

- 그런데 바로 그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기록은 진실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요한복음이 얼마나 진실할 수 밖에 없는지 증명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자신의 기록의 한계를 인정하며 긴 글을 끝낸다.

-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너무 많고 위대해서 자신의 글로 다 담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주제

제자의 삶 - 예수님 사랑, 목양의 사명, 죽임 당함

요한복음은 이렇게 끝난다.

- 예수님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다가 죽으라고.

이 말을 듣고 때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 세상에 중요한게 얼마나 많은데, 재밌는건 얼마나 또 많은데, 사랑만 하다가 죽으라니.

- 그렇게만 살기에는 인생이 아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은 오셔서 정말 그렇게 사셨다.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시다가 죽임 당하셨다.

예수님이 바보라서,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등살에 떠밀려 그렇게 사신 것이 아니다.

-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가장 행복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 그 능력을 가지고, 그러한 인생을 선택하신 것이다.

- 선택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행복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생을 보면서 부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무지 때문이다.

- 인생이 뭔지 몰라서이고, 행복이 뭔지 몰라서이다.

-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 태어났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목양의 사명을 행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 이러한 행위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 이 행위가 얼마나 행복한 것이길래, 전능자까지도 이 행위를 하려고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말자.

- 알면 하게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결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보여 주셨다.

- 인생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로 같이 가자고 하신다.

그러니 따르자.

-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살아보자. 행복하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