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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57) 20:19-31 부활하신 예수님은 없다. 대신 '말씀'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뭐하고 계실까?

- 신앙 생활 오래 했지만, 이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많이 들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 못했다.

- 이는 마치 대부분의 어린이 동화에서 '그리고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나는 것과 같다.

- 그 이후에 있을 진짜 현실은 외면한채 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아는 것은 부활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해를 일으킨다.

- 지난 본문에서 마리아와 도마처럼 예수님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게 된다.

- 환상으로라도 예수님이 나타나시길 바라며,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

- 감각적인 자극만을 추구하게 된다.

- 실제로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외면한채 말이다.

예수님은 정말 어디 계신가?

- 우리 안에 계시겠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지, 아니면 하나님 우편에 기도하고 계신가? 라는 생각만 막연하게 한다.

- 많은 것을 들었지만, 파편적이다.

-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지, 땅에 계신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데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시다고 말했다.

-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 맞다.

- 예수님은 하나님께 돌아가셨다.

[20:17]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6: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다.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받고 계시다.

[17:5]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영광 받는 자리가 부활 이후에 계신 예수님의 자리이다.

- 더 이상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일하지 않으신다.

- 모든 일을 마치셨다. 다 이루셨다.

- 이제 편하게 놀고 쉬신다. 안식하신다.

그 대신 누가 일하시는가? 성령님이 일하신다.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 성령님께서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신다.

- 특히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가르쳐주신다.

- 감각, 육체, 이성을 초월한 방식으로, '직접' 우리 '안'에서 전극을 꽂아 가르쳐주신다.

이것 때문에 요한복음 20장을 쓴 것이다.

- 우리를 비롯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여전히 예수님이 다시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여전히 감각적인 경험에 미련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것이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 없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0:29]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 예수님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 그런 믿음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믿게 하는 역할을 성령님이 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어떻게 그 역할을 하시냐?

- '말씀'으로 하신다.

- 예수님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가르쳐주는 '말씀'이 있고,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다.

- 감각과 이성을 초월하여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깨닫게 하신다.

그 '말씀'을 위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이다.

[20: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성령님도 '말씀'이 있어야 깨닫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 그래서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소개하지 않은 것이다.

- 그래야 제한적인 감각에서 벗어나, 초-감각적인, 그래서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성령님을 통한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다.

-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 그리고 예수님 대신 '말씀'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 '말씀'이신 예수님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원활하게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 성령님은 교회 안에서의 관계, 즉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신다.

- 실제 감각적인 몸은 아니지만,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몸'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 그 '몸'이 바로 교회이다.

- 그러나 정작 교회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 진짜 예수님의 '몸'은 바로 옆에 두고 말이다.

- 그 때문에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의 '몸'은 역설적으로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 기록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 내 옆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해주시길 기대하고 있다.

- 그러면서 정작 기록된 '말씀'은 보지 않는다.

- 예수님을 그토록 찾으면서, '말씀'이신 예수님은 보지 않는다.

- 따라서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없다는 것과, 그 대신 '말씀'이 있다는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뉜다.

① 19-23절: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령을 주시는 예수님 이야기

② 24-31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 이야기

두 단락은 크게 보면 하나의 이야기로 보인다.

- 예수님은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상처난 몸을 보여주셔서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신다.

- 그런 후에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부활을 재확인시켜주신다.

- 이렇게 본문 전체는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확인시켜 주시는 예수님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21-23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 20장은 부활에 대한 마리아와 도마의 오해를 통해 참 부활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 그런데 21-23절은 그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성령 강림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죄 용서 임무까지 맡기신다.

왜 이렇게 맥락의 단절이 있는 것일까?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결론부터 말해서, 교차대구 구조이다. 샌드위치 구조이다.

- 무지한 제자들 이야기 사이에 이제 곧 파송될 유능한 제자들 이야기가 삽입된 구조이다.

따라서 샌드위치 구조를 감안해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요한복음 기록 당시 사람들의 무지를 비판하면서, 앞으로 유능한 제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메시지이다.

- 그리고 그 변화의 본질은 성령님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① 정신 똑바로 차려서, 부활을 오해하지 말고, 참 부활의 의미를 깨달으라!

②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라!

요한복음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 사람들이 여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기대에 빠져 '말씀'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와 믿음을 주실 것이란 헛된 기대를 가지고 있다.

-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말씀'은 경시하고 있다.

- 우리는 이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비숫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본문이 이러한 우리에게 경고하는 메시지라는 것을 기억하며 본문을 보자.

19-23절: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령을 주시는 예수님 이야기

같은 날 저녁이다.

- 저녁, 어두운 때인 것으로 보아, 또 다시 '어두운' 이야기가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문 꼭 잠그고 숨어 있다.

- 마리아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이 없었다.

- 예수님과 함께 자신들까지 죽게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 제자들에게 아직은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신비롭게 문을 통과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 그래서 자신이 부활하였음을 증명하신다.

이러한 등장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첫째로, 도마의 의심에 대한 복선 역할을 한다. 24절부터 나온다.

- 둘째로, 성령 강림을 위한 준비 역할을 한다. 바로 다음 21절에 나온다.

먼저 21-23절의 성령 강림 선포가 나온다.

- 요약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신다.

- 그런데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안에 넣어서 보내신다.

- 그렇다면 성령님을 통해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

- 죄 용서를 한다.

- 따라서 키워드는 '제자 파송', '성령 강림', '죄 용서' 이 세 가지이다.

세 가지 키워드는 20장 전체 메시지를 규정하는 열쇠이다.

- 샌드위치 구조에서 가운데 햄 부분이 양쪽 빵 부분의 메시지를 규정하는 열쇠이듯 말이다.

- 따라서 세 가지 키워드의 관계를 알아야 21-23절 메시지를 알 수 있고, 그래야 20장 전체 메시지가 해석되는 것이다.

'제자 파송'의 의미는 하나님의 예수님 파송 의미와 같다.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 따라서 제자 파송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 파송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 파송'의 의미는 무엇인가?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23]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가장 근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사람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혼자 힘으로 힘겹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받고 충만하여, 나답게, 사람 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사랑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서(계시) 자신을 믿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제자 파송'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예수님을 믿음으로 일어난다.

-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서 믿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세상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 이것이 '제자 파송'의 의미이다.

그러면 '성령 강림'의 의미는 무엇인가?

-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세상에 이미 다 알려졌다(계시되었다).

- 그런데 문제는 전달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에게조차 전달이 안되었다.

- 이유는 감각의 한계 때문이다.

- 그래서 감각의 한계를 초월하여 예수님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이 필요하다.

두 가지 이유에서 필요하다.

- 첫째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성령님이 필요하다.

- 둘째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성령 강림을 선포하신 것이다.

- 제자들이 전도할 때, 성령님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러한 관계 회복을 '죄 용서'라고 표현했다.

- 예수님이 전해져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죄 용서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 그것이 성령님을 받은 제자들의 역할이다.

- 그러한 전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을 전해 받은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 있다.

- 왜 하필이면 '죄 용서'라는 말로 표현했냐는 것이다.

- 오히려 '전도', '믿음', '앎'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좋아보이기 때문이다.

- '너희가 예수님을 전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될 것이다.'와 같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용서'라고 표현한 이유를 전체 맥락과 연결해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본문의 맥락은 제자들이 '무지'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오해하고 있다.

-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

- 즉, 제자들이 여전히 '죄'에 빠져 있다.

-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죄 용서'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죄 용서'가 요한복음 당시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상황이다. 

- 요한복음 당시 사람들도 제자들처럼 여전히 감각적으로 예수님을 경험하려는 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 메시지를 통해, 먼저 자신의 죄 용서를 받고, 또한 같은 메시지를 전하여 주변 사람들의 죄 용서까지 이뤄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 강림 선포 단락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 요한복음 기록 당시 사람들과 현재 우리가 죄 용서 받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마리아와 도마처럼 부활을 오해한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죄를 지적하고 죄로부터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것이 이 단락의 참 메시지이다.

24-31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 이야기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 여전히 도마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봐야 믿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 여전히 부활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전히 제한적인 감각을 의지하며, 초월적인 성령님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 왜냐하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승천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 승천하셨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를 비롯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있다고 착각한다.

- 이렇게 예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믿고,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가?

- 만약 이 말이 미스테리를 믿듯이, 아무런 근거 없이 막 믿으라는 것을 뜻한다면, 예수님을 이렇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어짜피 아무 설명도 필요 없고 성령님이 직접 신비하게 가르쳐주실 것이라면, 성경 말씀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 즉,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믿음에 있어서 아무 근거도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경험'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경험' 대신에 '말씀'을 주신 것이다.

-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보고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 '말씀'은 필요한 말씀 중 최소한의 것을 추린 것이다.

[20:30-31]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일들 중에 기록된 말씀만 있으면 예수님을 믿는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 이 말씀만 있으면,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아도, 실제로 본 것보다 더 예수님을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각적 경험'에 집착하지 말고, '말씀' 읽으라는 것이다.

- 그렇게 믿는 것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 그래야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있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이다.

- 그래서 요한복음 가장 처음부터 '말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 물론 '말씀'이라는 단어에는 더 깊고 풍성한 의미가 담겨 있다.

- 하나님을 상징하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단어이다.

하지만 그 단어를 왜 하필이면 '말씀'이라고 표현했을까?

- 요한복음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신비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 신비주의라는 명목으로 말씀 보지 않는 게으름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 '예수님 보면 믿을 수 있을텐데.'라는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신비주의의 문제는 신비를 추구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 순수한 마음과 열심으로 신비를 추구하는 사람 중에 신비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참 예수님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다.

- 신비주의든 율법주의든, 예수님을 믿고자 열심을 내는 사람은 신비주의와 율법주의를 극복한다.

신비주의의 진짜 문제는, 핑계 대는 것에 있다.

- 신비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신비하게 믿음이 생길 것이라는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율법주의도 마찬가지이다.

- 율법을 지킨다는 핑계로 정말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 율법만 지킬 뿐, 마음을 다해 기도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 법이다.

- 안식일 율법을 지킨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 안식일의 참 뜻은 아무 것도 안하는 날이 아니라, 정말 꼭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나머지 일을 하지 않는 날인데도 말이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그토록 비판하신 것이다.

우리를 되돌아보자.

- 말씀을 읽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예수님 보기를 기대하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정말로 최선을 다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힘을 다하여, 인생 전체를 걸고 신앙 생활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 핑계 대지 말고,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자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핑계 대고 있다.

- 말씀 열심히 읽으니까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았으니까 충분하다고.

- 또한, 말씀을 좀 더 알면, 예수님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 예수님을 조금 더 경험하면, 예수님께 더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요한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 아무 것도 핑계 대지 말고, 예수님께만 헌신하라고 말이다.


주제

부활 이후의 시대에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말씀'이다.

'말씀'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 예수님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길 바라는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 그리고 의지, 노력, 주체성, 능동성,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읽는 것이다.

- 단순히 성경을 읽고 공부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고 깨닫고 적용하며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 전부를 포괄한다.

하지만 사람은 '말씀'을 두 가지로 오해한다.

첫째로, '말씀'을 아는 것에만 집중한다.

- 아무 것도 안하고 '말씀'만 보려고 한다.

- '말씀' 본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한다.

둘째로, '말씀' 따라 사는 것에만 집중한다.

- '말씀'은 안보고 열심히 살려고만 한다. 

- 열심히 살고 있다는 핑계로 말씀 볼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마리아와 도마가 갖고 있는 오해도 같은 것이다.

-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함께 한다는 핑계로 정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외면한 것이다.

-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 가신다는 것을 알았을텐데 말이다.

- 예수님을 만지겠다는 열성으로 위장하여 예수님 말씀을 외면하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합리화한 것이다.

우리도 똑같다.

- 목사로 위장하여, 육아로 위장하여, 직장으로 위장하여, 사업으로 위장하여, 믿음 없음을 합리화한다.

- 이런 것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예수님 말씀에 소홀해도 괜찮다고 자위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기록 당시의 상황이고, 또한 우리의 현실 상황이다.


결론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희망은 있다.

- 그렇게 여전히 죄에 파뭍혀 있는 제자들을 위해, 성령님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 많은 핑계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다.

- 그 위장의 두께가 너무 두꺼워서 어떤 위장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 스스로를 너무 많이 속여서, 내가 나에게 속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 스스로의 힘으로는 핑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이다.

핑계에 속아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죄인이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다.

-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님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16:7-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8]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9]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 성령님은 우리 죄를 깨우쳐주신다.

- 겹겹이 쌓인 위장의 장막을 벗겨주신다.

-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핑계를 다 벗겨내신 후, 속살을 드러내신다.

그 속살에 뭐가 있냐?

- 믿음 없음이 있다.

- 우리가 가졌던 생각들이 전부 믿음 없음을 숨기기 위한 핑계였음을 알게 하신다.

- 믿음 없음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고된 노력을 했는지 알게 하신다.

- 이것을 밝히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이다.

그렇게 믿음 없음이 드러날 때, 정말 자유로워진다.

- 핑계 댈 필요 없기 때문이다. 

- 믿음 없음을 숨기기 위해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이렇게만 되어도, 어머어마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된다.

- 소모했던 에너지의 대부분이 핑계 대는데 썼왔었기 때문이다.

- 항상 헉헉거리며 살던 인생의 호흡이 잔잔해진다.

- 심장 박동수가 낮아진다.

그래야만 '관계'가 눈에 들어온다.

- 참 '나'를 알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보이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깨닫게 된다.

- 내가 달려왔던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 마치 화가 나서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 진정이 된 후, 화낸 것이 전부 헛되고 후회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후회 될 때 부부는 사과하고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게 된다.

- 마찬가지로 핑계거리로 넘쳐났던 인생이 후회될 때, 그제서야 비로소 제대로 회개하고, 참된 용서를 받으며, 다시 사랑의 관계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말은 쉽지만, 이렇게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길이고, 지루하고 긴 과정이 필요하다.

- 그래서 막막한데, 그래서 성령님이 계시는 것이다.

-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 성령님을 통해 변화된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다.

- 그러니 믿고, 기대하며, 기다리자.

- 그 기다림은 철저히 보상 받을 것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참 자유와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참 구원을 받아, 참 생명을 얻어, 참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