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숨겨진 메시지를 찾는 것이 백미인데, 이번 본문에서는 찾지 못했다.
- 지난 본문에서는 십자가 사건의 역설이 극대화 된 본문이었다.
-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 본문은 다각도의 해석이 없다.
- 찾아보려고 주석, 논문을 봐도,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없었다.
- 그 많던 역설과 중의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다 이루시고 죽으시는 것이 전부이다.
- 그동안 십자가를 향해 어마어마한 힘으로 달려오다가, 정작 죽음 그 자체에서는 힘을 쫙 뺀 느낌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 잘 아는 나로서는 맥이 빠진다.
왜 이렇게 했을까?
- 죽음이 예수님 사역의 핵심인만큼 죽음 사건 자체에 초점을 두려고 한 것 같다.
- 모든 일들이 순리대로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 그것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한 것 같다.
- 그동안 첨예했던 예수님, 빌라도, 유대인 간의 갈등과 논쟁이 전부 해소되었다.
- 명패 문제를 제외하고, 아무런 갈등이 없다.
- 오직 예고대로 죽으시는 예수님께만 초점을 둔다.
그런 측면에서, 본문은 면밀히 다뤄야 할 주제가 없는 시시한 부분이기도 하다.
- 하지만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한다.
- 이로써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예수님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메시지는 관계, 곧 사랑이다.
- 관계의 종류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의 관계이다.
- 이 세 관계가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너무 사랑해서 구분할 수 없을만큼 하나 되지만, 또 너무 사랑해서 서로를 침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지켜주는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 이 세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 하나님과의 관계(믿음)를 께달아 이웃과 나와의 관계까지 확장되는 경우, 이웃과의 관계(봉사)를 깨달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까지 확장되는 경우, 나와의 관계(회개)를 깨달아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로 확장되는 경우 모두 가능하다.
- 그런데 최근 본문에서는 나와의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 죄의 본질은 나와의 관계가 끊어져 나다움을 잃는 것이다.
- 나다움을 잃으면, 의도와 결과의 괴리가 일어난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된다.
- 이러한 비극의 끝에 하나님을 죽이는 죄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이다.
- 그래서 빌라도와 유대인은 결국 하나님을 죽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 반면 예수님은 끝까지 나다움을 지키셨다. 원하는 것을 하셨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으셨다.
-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이다.
- 그 결과 죽임을 당하시긴 했지만, 부활하셔서 영원토록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실 수 있게 되신 것이다.
- 그래서 우리에게도 관계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이다.
이번 본문은 이 메시지를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증명한 것이다.
- 이번 본문의 역할은 이 메시지의 마침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다섯 가지 사건이 나온다,
① 16-18절: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
② 19-22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명패 논쟁
③ 23-24절: 예수님의 옷에 대한 병정들의 분쟁
④ 25-26절: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의 새로운 관계 형성
⑤ 27-30절: 다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
- 본문을 해석하기 어려운 결정적 이유는 각 단락 간의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의 사건들을 배치하고 있다.
- 여러 단락이 하나의 메시지를 담을 때, 메시지가 깊어지고 선명해지고 강력해지는데, 이번 본문에는 그런 것이 없다.
- 대부분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개별적인 단락이다.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나오는 단락이다.
-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하신 마지막 일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 보통 부모님 공경 메시지로 다뤄지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모두 다 안다.
가장 끌리는 해석은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관계를 강조하셨다는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이 단락의 메시지를 강화할 주변 단락의 도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 단락의 참된 의미를 확정짓기 어렵다.
16-18절: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처형 장소까지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 처형 장소는 '해골', '골고다'(아람어), '갈보리'(라틴어)라 불리는 곳이다.
- 예수님 양 옆에 다른 죄수가 더 있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일체 다른 언급이 없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처형 장소로 가는 길에도 십자가를 대신 들어주는 구레네 시몬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배제한다.
- 아마도 예수님의 죽음을 부각하기 위한 생략으로 보인다.
- 하지만 이렇다 할 근거가 없다.
19-22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명패 논쟁
빌라도가 예수님의 명패를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쓰자, 유대인이 반발한다.
- 이는 지난 본문에서 빌라도와 유대인 논쟁의 연장선 상에 있다.
- 빌라도의 의도는 자신을 따르지 않은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러서, 유대인 전체를 무시한 것이다.
- 이에 유대인들은 '자칭' 왕이라며, 유대인과 예수님을 구분지으려 했다.
- 그러나 빌라도는 거절했다.
이러한 논쟁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① 빌라도와 유대인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 결국 빌라도와 유대인 모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리지 못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유대인은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한다.
- 이것이 죄인의 비극적인 숙명이다.
② 예수님의 무죄가 드러난다.
- 죄 없음을 알고 예수님을 살리려는 빌라도의 노력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만 결국 죄를 찾지 못한 유대인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③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난다.
- 예수님의 십자가 형 선고와 십자가 명패를 통해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다.
이렇게 하나님은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강하게 만드시지 않고 약하게 만드신다. 더 극단적으로 아예 죽여버리신다.
- 약한 자 중에 가장 약한 자로, 못난 자 중에 가장 못난 자로, 비극적인 자 중에 가장 비극적인 자로 만드신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가장 강한 자이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가장 약한 자로 만드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 하나님은 일부 특정한 일에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이렇게 하신다.
[고전 1:27-29]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이 방법만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만약 하나님께서 강한 자를 택하셔서 강하게 만드시면, 사람은 강한 자를 찬양하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 또한 모두가 강한 자가 되려고 하지,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한 자가 택하셔서 강하게 만드시면, 아무도 강한 자를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만 찬양한다.
- 모두가 강한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만' 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역설적으로' 행하실 것이다.
- 우리를 진짜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형편없고 보잘것없이 만드실 것이다.
- 우리에게 진짜 믿음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완전히 부수실 것이다.
- 우리에게 진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생명을 완전히 빼앗아 가실 것이다.
- 우리를 진짜 부자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돈을 다 빼앗아 가실 것이다.
우리는 약해질 것이고, 믿음이 없어질 것이고, 생명을 잃을 것이고, 거지가 될 것이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진짜 은혜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인내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진짜 강함, 믿음, 생명, 부가 주어진다.
-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 그리고 이 약속이 얼마나 확실하고 유효한지 예수님을 통해 증명되었다.
- 하나님 손에 이끌려 죽은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참 능력과 생명을 얻게 되셨다.
- 똑같은 능력과 생명이 우리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하면, 빌라도와 유대인처럼 된다.
- 의도와 결과의 괴리가 온다.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만 얻게 된다.
- 의도는 강함, 믿음, 생명, 부를 얻으려는 좋은 의도였을지 몰라도, 결과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다 빼앗기게 된다.
- 그러다가 하나님 그리고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죽게 된다.
- 이것이 믿음 없는 자의 비극적인 숙명이다.
-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이렇게 죽는다.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저주 받고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미리 대비하라는 것이다.
- 생명이 위태로운 바로 그 순간에는 아무 말도 안들린다.
-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는 것을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러나 지금 아무 일도 없는, 그런대로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 하나님께서 언제나 역설적인 방식으로만 행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는 반드시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 모든 재산이 날아가는 순간이 올 것이다.
- 내 모든 것이 박탈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 그때 지금 이해한 것을 떠올리라는 것이다.
- 박탈의 상황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 그래서 스스로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지 않고, 차분히 앉아서 믿음으로 기다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의도와 결과의 괴리를 경험하며 비극적인 숙명에 떠내려가지 않고, 하나님 붙잡고 비극적 죽명에서 건짐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참 강함, 참 믿음, 참 생명, 참 부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역설적 방식을 지금부터 미리 이해하고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시켜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고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역설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주신 것이다.
- 하나님 사랑의 방식이 먼저 죽이신 후 살리시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하나님의 역설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왔을 때, 그 안에서 참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이 왔을 때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23-24절: 병정들의 예수님의 옷 분쟁
병정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나눠 갖는다.
- 이 사건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 간혹 설교에서 병사들의 모습을 무자비하다고 평가한다.
-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자기 유익만 챙긴다며,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 하지만 누구나 전쟁에서는 자기 유익만 챙긴다.
- 전쟁 포로의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죄인을 죽이는 것은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것이다.
- 오히려 싸우지 않고 공평하게 제비 뽑기를 하는 것이 더 대단하다. 참 평화적이다.
- 그런 해석은 상식에 어긋난다.
이 사건의 유일한 의미는 성경 말씀의 성취이다.
- 예수님의 죽음 길의 모든 것은 예견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 이로서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가치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 예수님의 죽음은 한 의인의 죽음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것을 확증하려는 것이다.
25-26절: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의 새로운 관계 형성
예수님은 죽으시기 일보 직전에,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를 연결시켜주신다.
- 두 사람을 모자 관계로 맺어주신다.
- 그래서 그때부터 제자는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신다.
이 뜬금없는 관계는 무슨 의미일까?
- 분명한 것은 이 관계의 상징을 구체화시켜줄 주변 단락이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의미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단지 상상의 영역이지 확정의 영역은 아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해 알아보면,
- 어머니는 딱 두 번 등장한다.
- 이번 본문과 2장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이다.
- 가나의 혼인 잔치가 예수님의 공생애 첫 사역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어머니에서 시작해 어머니에서 끝난다.
- 어머니는 그때에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말씀을 따랐다.
- 이번에도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었고, 죽으시는 장소까지 따라온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대부분 설교에서 이 둘의 관계를 '부모님 공경'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 맞을 수도, 틀렸을 수도 있지만, 요한복음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서로 사랑'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낫다.
- 부모 자식이라는 상하 관계에서가 아니라, 제자 간의 수평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이다.
- 요한복음의 맥락으로 볼 때, 더 적절하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예수님은 죽으실 때까지 제자들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것이다.
-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자 간에 서로 사랑하도록 예수님은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신 것이다.
- 예수님이 계시면, 제자들이 예수님만 바라보고 서로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기를 더 원하셨다.
- 그런데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죽어 사라지는 것 뿐이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은 목숨보다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셨다.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예수님 죽음 직전에 배치한 것이다.
27-30절: 다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두 마디 말씀을 하신 후 죽으신다.
- '목마르다'와 '다 이루었다'이다.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신 다른 뜻은 없다.
- 오로지 성경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 이 역시 죽음의 과정이 철저히 통제 안에 있음을 밝히시려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이다.
-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뜻이다.
-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된 죽음이 아니라, 계획대로 성취된 죽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역시 하나님의 역설적인 방식을 드러낸다.
- 사람 관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묶여서 무능하게 죽으시는 비극적인 모습이다.
- 하지만 하나님 관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하신 영광스런 모습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이러한 방식은 여러 방식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만약 이 방식이 여러 방식 중 하나라면, 예수님의 죽음도 구원의 여러 방식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고,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여지까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 이는 결국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 따라서 하나님의 역설적 방식이 하나님의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고 죽이시고 부활케 하신 분이 맞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행하실 것이다.
- 우리를 무능하게 하실 것이고, 비참하게 하실 것이고, 저주받은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 하지만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되게 하시는 방법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셔야지만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실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1:28)
- 그래야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만 찬양하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1:29)
- 그리고 그 찬양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이다.
주제
본문의 키워드는 '역설'과 '관계'이다.
- 이 두 가지가 요한복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너무 많이 말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 이번에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생각해 보겠다.
'역설적 관계'가 무엇이냐?
- 참 관계는 관계가 깨질 때 비로소 맺어진다는 뜻이다.
- 왜냐하면 관계가 깨져야만 그 관계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관계의 진정성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사랑의 관계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용 관계, 거래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이었던 관계는, 관계가 깨져도 다시 맺어진다.
- 처음부터 상대의 인격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 물론 특정한 상황에서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
- 하지만 상대의 인격을 통해 받았던 감동은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 오로지 그 한 사람을 통해서만 채움 받을 수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다.
- 그래서 참된 사랑의 관계는 회복되기 마련이다.
- 오히려 깨진 후에 관계의 진정성이 더욱 더 확인된다.
반면에 거래 관계는, 한번 깨지면 회복되기 어렵다.
- 처음부터 상대의 인격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에 근거해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유익은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다.
- 그렇기 때문에 거래 관계였던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 그러니 관계 회복도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탕자 이야기이다.
- 사랑의 관계를 맺었던 탕자는 관계가 깨져도 결국 아버지께 돌아갔다.
- 반면에 거래 관계였던 탕자 형은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실상은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았다.
- 탕자에게 아버지는 대체 불가의 존재였지만, 탕자 형에게 아버지는 돈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는 친구 관계,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 결국 우리가 한 사람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싸워도 다시 만나고, 힘들어도 또 만나고, 나를 고치고 상대방을 바꿔서라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 우리와 관계 맺으시기 위해 자신을 바꾸신 것이다.
-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 그리고 우리에게도 바꾸기를 바라신 것이다.
-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 입장에서 우리가 대체 불가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도 하나님을 대체 불가로 여겨주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 그러한 참 관계를 맺기 위해 죽으셔서 관계를 깨뜨리신 것이다.
- 이것이 역설적 관계이다.
그렇다면 관계 맺는 것은 무엇일까?
- 대체 불가가 되는 것이다.
- '대체 불가'는 '훌륭함'과는 다르다.
- 예를 들어, 김치가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음식은 아니다. 맛있는게 너무 많으니까.
- 하지만 대체 불가 음식이다.
- 없으면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대체 불가가 되냐?
- 훌륭한 사람, 멋있는 사람,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절대 안된다.
- 더 좋은 사람은 많으니까.
- '나'가 되어야 한다.
- 김치처럼 자신 고유의 맛을 내야 한다.
- 그러면 호불호가 갈리게 된다. 즉, 싫어하는 사람이 생긴다.
- 그러나 그래야만 진짜 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 하지만 누구에게나 훌륭한 맛이 되려고 하면, 결국 모든 사람에게 대체 가능한 사람이 될 뿐이다.
-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내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결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까?
- 나다운 신앙은 뭘까?
- 하나님께 대체 불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하나이다.
- 우리는 블랙 박스이고, 블랙 박스는 절대로 열어서 내부를 볼 수 없다.
- 입력과 출력, 의도와 결과만 알 뿐이다.
- 따라서 신앙 생활 많이 해보는 수 밖에 없다. 시행 착오를 많이 해보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주체적으로 해야 한다.
- 남이 시켜서는 소용 없다.
- 수 많은 시행착오를 스스로 겪어야 한다.
- 너무 고되고, 지루하며, 비효율적인 작업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 생활은 정말 지겨운 것이다.
-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 또한,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계속해서 차이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그 차이가 결국 신앙 생활이 뭔지 가르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신앙 생활 하자!
- 이제 와서 안할 재간도 없지 않냐.
- 이왕 할거면 제대로 해보자.
- 눈치 보며 적당한 수준에서 다른 사람 따라하지 말자.
- 정말 하고 싶은 것, 필요한 것, 해야 할 것을 집중해서 하자.
- 나답게 하자.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반드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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