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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56) 20:1-18 부활하신 예수님은 없다.

요한복음 20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10절: 빈 무덤을 보고 당황해하는 제자들 이야기

② 11-18절: 빈 무덤에서 예수님을 본 마리아 이야기

③ 19-31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도마 이야기

세 단락 모두에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부각된다.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생각하지 못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으며,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며 생떼를 쓴다.

- 단락 중간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긴 하지만, 제대로 된 믿음의 고백은 없다.

- 게다가 21장에서 제자들은 좌절감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기까지 한다.

- 본문이 의도적으로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왜 이럴까?

- 19장에서 예수님이 쌩고생하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 그리고 드디어 부활하셨다.

- 그러면 이제는 제자들이 뭔가를 깨달을 법하다.

- 상식적으로, 제자들이 부활을 경험하면 믿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무지'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도 불구하고, 아무 성과가 없다.

- 만약 내가 복음서를 썼더라면, 마지막에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줬을텐데 말이다.

- 하지만 요한복음은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무지'만을 부각한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설명이 이번 본문 해석의 핵심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요한복음 기록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지도 약 60년이 지났다.

-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의 수 많은 가르침을 들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충분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다.

- 본문에 나온 제자들처럼 말이다.

특히 부활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 그것에 대한 처방으로 이번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 무지한 제자들의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것이다.

- 부활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서 참 부활의 의미를 전하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오해는 크게 두 가지이다.

- 부활 자체를 의심하는 경우와 부활의 의미를 오해하는 경우이다.

수 많은 증거와 증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 특히 시체가 도난당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장 컸다.

- 이러한 현실을 마리아의 한탄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20:2]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0:13]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0:15]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 뒤늦게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 역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지 않았다.

[20: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20: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활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했다.

- 이를 마리아와 도마를 통해 드러낸다.

-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다.

[20:17]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 이는 여전히 마리아가 부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예수님을 직접 봐야 믿겠다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20:29]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 이 역시 부활에 대해 무지한 도마를 예수님께서 교정하시는 것이다.

- 자세한 내용은 이후에 다루겠다.

이렇게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 무지한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부활의 의미를 정교하게 가르쳐주시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이것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은, 꼭 이래야만 했을까? 이다.

-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다. 정말 영광스러운 장면이다.

- 제자들도 함께 고생했고, 지금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

-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위로하고 격려하며 부활의 영광을 감사하는 축제 분위기가 더 적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러한 껄끄러운 분위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우리 교회도 부활의 의미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 잘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 중에 있다.

이는 단지 우리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문제이다.

- 십수 년 동안 신앙 생활을 했지만, 어떤 교회에서도 부활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특별한 기적이 일어났다! 구약 예언이 성취되었다! 라며 흥분해서 소리만 질러댔다.

- 이는 동어 반복일 뿐이다. 뜻 없는 외침이다.

- 그러나 정작 부활 자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아무도 부활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까?

부활 역시 '역설'과 '비-직관성' 때문이다.

-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교회가 부활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부활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교회는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했고, 그래서 우리는 부활에 대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에 대한 잘못된 이해 두 가지를 다루겠다.

①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르다.(단절성 강조, 이원론)

[고전 15:42]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 부활 이전의 예수님은 '죽을 수 있는' 예수님이었다면, 부활 이후의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예수님이다.

- 즉, 이전과 이후의 단절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이다.

- 일견 맞지만, 지나치면 오해가 생긴다.

- 부활 이후의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 '신'으로만 치부되기 때문이다.

- 그 결과 '신'은 '사람'과 공감하고 교제할 수 없게 된다.

-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참된 주'가 아니라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 것이다.

- 이것이 단절성과 이원론으로 인한 폐해이다.

- 따라서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님은 다르지 않아야 한다.

②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님은 완전히 같다.(연결성 강조, 일원론)

-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셨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본질은 그대로여야 한다.

- 만약 변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예수님의 신적 속성이 훼손된다.

- 본질이 변하는 존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역시 지나치면 오해가 생긴다.

- 대표적으로 본문의 마리아와 도마가 그렇다.

- 이들은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 동일한 예수님을 부활 이후에도 기대했다.

- 항상 살붙이로 함께 있기를 기대했고, 감각적으로 만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 하지만 부활 이후의 예수님은 더 이상 부활 이전의 예수님이 아니셨다.

- 시공을 초월하는 몸을 가지셨고, 제자들 옆이 아닌 하나님 옆에 계셨다.

[17: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20:17]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 더 이상 살붙이가 아니고, 만질 수도 없는 분이 되셨다.

그렇다면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님은 같은가, 다른가?

여기에 역설과 비-직관성이 있다.

-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100% 사람이며 동시에 100% 신이셨던 것처럼, 부활 이후에도 동일하다.

- 100% 사람이며 동시에 100% 신인 존재의 정체를 직관으로 이해할 수 없듯이, 부활 이후의 예수님 상태는 이해할 수 없다.

- 부활 이후의 예수님은 부활 이전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바로 그 예수님과 같은 분이시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존재이기도 하다.

- 이렇게 같음과 다름을 모두 생각할 때만이 부활 이후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한편에 편중된 메시지만 들었다.

- 언제는 같다, 언제는 다르다는 메시지를 들으니, 들을 때는 이해되는듯 하지만, 돌아서면 헷갈린다.

-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태가 우리 사람과 같다는 것인지 다르다는 것인지 헷갈리니, 예수님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우리 뿐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에도 있었던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설명은 하지만, 설명할수록 오해만 쌓이는 상황이었다.

- 그래서 요한복음은 제자들을 통해 오해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상태인지 전하려 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활 이후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에 초점을 두지 않고,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믿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에 초점을 둔 것이다.


내용 정리

1-10절: 빈 무덤을 보고 당황해하는 제자들 이야기

주간의 첫 날이다.

- 안식일 전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안식일이 되기 전에 서둘러 장사를 지냈으며, 안식일에는 모두 집에 있다가, 안식일이 끝나고 다음 날이 된 시점이다.

- 이렇게 날짜로는 3일, 시간으로는 약 30(3+24+3)시간 정도 예수님은 죽어계셨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시점을 알려주는 것 이외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새로운 시대의 '첫 날'이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시대, 성령의 시대, 종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무지'하다.

- 이를 '이른 새벽(dark early still)'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

- 제자들은 새 시대에도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 게다가 도마 이야기가 시작되는 19절도 '저녁'이다.

- 이 역시 앞으로 있을 도마의 '무지'를 암시한다.

이렇게 본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둠'이다.

- 제자들의 '어둠'을 통해 '참 빛'이신 예수님을 부각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무덤에 갔다.

- 아마도 시간 때문에 다 끝내지 못한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려고 간 것으로 보인다.

-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던만큼 제대로 예수님을 떠나 보내려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무덤은 열려 있었고, 시체는 없었다.

- 마리아는 도난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 당시 무덤 도굴자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마리아의 이런 반응은 상식적이다.

-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소식을 전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니, 한 쪽에 몸을 쌓던 삼베가 있고, 다른 곳에 머리를 쌓던 수건이 있었다.

- 이는 부활의 증거 중 하나이다.

- 도난당했다면 삼베나 수건도 없었을텐데, 부활하셨기에 몸이 빠져 나간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도 제자들은 여전히 '무지'했다.

-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당했다고만 생각했다.

- 그래서 제자들이 이를 보고 시체가 도난당했다는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다.

[20: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20: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니 별 수 있나? 

- 시체도 도난당했으니 장례도 치를 수 없고, 제자들 역시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 시체를 찾아 나설 수도 없다.

-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20:10]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 인류 2000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예수님 부활의 현장을 본 제자들이 한 일이 고작 집에 가는 것이 다였다.

이것이 현실이다.

- 부활을 보면 엄청난 반응이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 마리아도,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옆구리의 구멍에 손도 넣어봤지만, 거기서 끝이다.

- 열광적인 믿음의 반응은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부활이 하찮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 부활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 하지만 그 부활을 보고 경험하는 것과 부활을 믿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믿음은 성령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선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지, 본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을 구하는 기도와 예수님만 귀하게 여기겠다는 선택이다.

11-18절: 빈 무덤에서 예수님을 본 마리아 이야기

초점은 베드로와 요한에서 마리아로 넘어간다.

- 다른 제자들은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무덤 밖에 남아 있었다.

- 그리고 무덤 안을 본다.

- 거기서 천사 둘을 본다.

천사의 역할이 모호하다.

- 왜 우냐고 묻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다.

- 아마도 무덤 안의 분위기를 신비하게 조성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 빈 무덤의 원인이 도난과 같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여전히 모르겠다며 무지를 드러낸다.

[20:13]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시지만, 여전히 알지 못한다.

[20: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같은 질문을 하고, 마리아는 또 같은 대답을 한다.

-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 일관되게 '무지'하다.

그때 예수님만의 독특한 억양으로 마리아를 부르자, 드디어 마리아가 알아본다.

- 그러나 여전히 '무지'하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했던 마리아의 행동은 생략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비추어 추측할 수 있다.

[20:17]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엎드려 예수님 발에 입을 마추려 했던 것이다.

-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손대지 말라고 꾸짖으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손대지 말라고 하셨을까?

바꿔 말해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도를 왜 문제시하신 것일까?

-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마리아의 '무지'와 마리아의 만지는 행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 결국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지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 무지를 드러내시기 위해 손대지 말라고 꾸짖으신 것이다.

그렇게 꾸짖으신 후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나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것이다.

- 이 말씀이 정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이다.

-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이 또한 마리아 무지의 핵심이다.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무지했다.

-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는 못했다. 무지했다.

-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붙잡으려 했다.

붙잡으려는 행동이 상징하는 바 역시 무지이다.

- 특히 부활 이후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대한 무지이다.

- 예수님은 이전부터 죽음 부활 이후 하나님 아버지께 가실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17: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 이후에도 계속 함께 하실 것이라고 착각했다.

- 그리고 성령님께서 예수님 대신에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17] ・・・・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이후에 오실 성령님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손대지 말라!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떠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마리아와 일정한 거리를 두시며, 자신의 자리를 성령님께 양보해드린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태이다.

- 예수님은 안계신다. 하늘로 올라가셨다.

-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지켜주시지 않는다.

-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실 뿐이다.

[롬 8:34]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이제는 성령님의 차례이다. 

- 성령님의 시대이다.

-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이다.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기록 당시의 사람들도, 그리고 우리도 여전히 이것을 오해하고 있다.

- 예수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 '아 옛날이여!'라며, 부활 이전 시대만을 그리워하고 있다.

- 여전히 예수님이 나타나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내 옆에서 가르쳐주시고 인도해주시면 신앙 생활 잘 할 수 있을거라고 핑게대면서 말이다.

- 그러면서 정작 지금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외면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다른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 여러 번 말했지만, 성령님의 역할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부활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부활 이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과 사역,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절대적이다.

하지만 전달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 부활 이전에는 사람 대 사람으로 오감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다.

- 정말 매력적인 전달 방식이다.

- 신의 진리 메시지를 직접 감각으로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감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 제대로 전달이 안된다.

- 얼마나 전달이 안되냐면, 감각으로 메시지를 전달 받은 사람 중에 제대로 전달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 예수님의 메시지를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 제자들은 결국 다 도망갔다.

- 예수님 곁에 끝까지 남은 마리아조차 여전히 '무지'하다.

-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길 기대하지만, 나타나봤자 우리 신앙에 아무런 유익이 안된다.

- 제자들처럼 헛소리만 해댈 것이고, 예수님 버리고 도망갈 것이 뻔하다.

감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부호화와 복호화가 필요하다.

- 전하는 사람은 메시지를 감각의 형태로 부호화해야 하고, 받는 사람은 그것을 다시 메시지로 복호화해야 한다.

- 그 과정에서 엄청난 왜곡과 정보 손실이 발생한다.

- 그로 인해 메시지는 누구도 구원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달 방식이 새롭게 바뀐 것이다.

- 중간 과정이 필요 없이, 감각이라는 매개 없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메시지를 직접 넣어주신다.

- 내가 직접 내 뇌 안에 있는 생각을 떠올리듯,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신다.

- 뇌와 뇌가 직접 전선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 이를 위해 반드시 예수님은 하나님께 올라 가셔야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성령님을 내려 보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감각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알맞은 매체가 아니다.

- 그래서 도마에게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그만큼 감각의 한계를,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부활 이후의 새 시대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참 부활이 무엇인지 제시하신 것이다.


주제

부활은 무엇인가? -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메시지이다.

- 여기서부터 시작할 때, 참 부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 육체를 벗어 던지는 것도 아니다.(단절성 강조)

- 성경은 부활 이후에도 육체를 갖는다고 말한다.

- 단지 죽었다가 살아서 오래 오래 계속 사는 것도 아니다.(연결성 강조)

- 부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 몸을 갖게 된다.

- 연결되면서도 단절되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 그래서 사람에게서 떠나셨다. 하나님께 가셨다.(단절성 강조)

- 하지만 성령님을 통해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연결성 강조)

주의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옆'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제는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니라 성령님이 말이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미련을 가지면 안된다.

- 우리는 도마처럼 예수님 보고 듣고 만지겠다고 집착하면 안된다.

- 그런 미련과 집착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성령님은 영이기 때문에 감각으로 느낄 수 없다.

- 하지만 우리 영에 직접 말씀하신다.

- 그래서 아무 것도 보고 듣고 느낄 수 없다.

- 하지만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조차도 알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가 깨닫게 하신다.

반대로 말해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은 성령님의 방식이 아니다.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한 성령님을 이해시키려고 설명하는데, 전부 가짜다.

- 다시 말하지만, 성령님은 영이다.

- 영은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오감으로 경험할 수도 없다.

- 바람과 같이 실체는 이해할 수 없다. 

- 오직 자취와 흔적만 남길 뿐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자취와 흔적이 뭐냐?

- 결국, 하나 되는 것이다.

[17: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많은 경우 성령하면 은사를 떠올리는데, 은사는 성령의 도구일 뿐이다.

- 은사의 목적은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 되는 것이다.

[엡 4:11-13]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결론

부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을 만날 것이란 기대를 버리게 해준다.

- 구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것처럼,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 신앙에 진지했던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쯤은 이런 기대를 갖는다.

-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믿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한다.

-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상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헛된 기대를 준다.

- 이걸로 꼬시면 대부분 잘 넘어오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그 기대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기 때문이다.

- 신을 만나고자 하는 욕망은 인류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 사람을 모으기 위해 거짓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가져야 하는가?

- 예수님을 만나 육체적 희열을 느낄 기대를 버리고, 관계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기대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과의 관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성령님은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 맺도록 하시지만,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드러나는가?

- 사람 사이의 관계가 드러난다.

- 교회의 하나 됨이 드러난다.

- 교회의 하나 됨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다.

- 이것이 성령님의 자취와 흔적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몸으로서 하나 된 교회 공동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참 기대이다.

이것을 또 이렇게 오해하면 안된다.

- 교회 공동체의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는 유일한 증거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 관계가 신앙의 전부는 아니다.

- 공동체 관계는 각각 개인이 맺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공동체의 관계가 중요한만큼 예수님과의 관계도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감각적인 신앙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신앙이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 따라 공동체가 하나 되는 신앙이다.

- 이러한 신앙만이 구약에서 예고된, 그리고 신양에서 성취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