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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55) 19:31-42 예수님은 정말 죽으셨는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한데,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 두 가지가 있다.

- '증거 능력'과 '증명력'이다.

- 쉽게 말해서, 증거 능력은 외적 조건이고, 증명력은 내적 조건이다.

증거 능력은 증거의 진실성 여부이다. 

- 조작되지 않은 진실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반면 증명력은 타당성 여부이다. 

- 사실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증거는 사실을 입증한다.

- 먼저 증거가 진실하다는 것이 확인된 토대 위에서, 증거가 사실을 얼마나 잘 지지하는지 확인될 때,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도 똑같이 적용된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가 필요한데, 성경은 십자가 사건이 결정적 증거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 십자가 사건의 증거 능력과 증명력을 확인해야 한다.

- 증거 능력은 외적 조건으로, 정말 십자가 사건이 정말로 일어났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 다음으로 증명력은 내적 조건으로,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사실을 입증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를 확인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왜 어렵냐?

먼저, 내적 조건인 증거력부터 보면,

- 증거가 너무 비-직관적이다.

- 예수님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의 약함을 증거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말만 듣고 예수님의 강함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예수님을 바로 앞에서 본 제자들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 비-직관적인 증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직관과 상식을 수도 없이 부정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직관과 상식을 부정당하는 것은 죽기만큼 힘든 일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가 죽기만큼 힘든 것이다.

그래서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이 비-직관적인 증거가 얼마나 강력한 증거인지 설명하는 것으로 채워져있다.

- 왜 예수님은 죽어야만 하셨는지?

- 죽은 것이 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되는지?

-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으면 어떤 오해가 생기는지?

- 이런 내용들이 전부 비-직관적인 증거를 이해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다.

- 죽어야 산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등 역설적인 구절이 많다.

- 지금까지 요한복음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증거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기독교 역사상 수 많은 오해와 그 오해로 인한 이단이 우글거린 것이다.

- 비-직관적이기 때문이다.

- 사람은 비-직관적인 현상을 보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직관적인 내용으로 왜곡시켜서 받아들인다.

-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조차 오해한 사람이 끊임없이 나왔고, 그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이 바울의 서신서 안에 구구절절히 적혀 있는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우리도 성경을 계속 배우고 있지만, 우리의 직관과 상식의 방해 때문에 오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십자가 사건은 증명력을 발휘하기 굉장히 어려운 증거이다.

- 그런데 더 문제는 증거 능력조차도 입증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 즉, 십자가 사건의 진실성 여부에도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 때에도 십자가 사건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부활한 것처럼 꾸몄다고 주장했다.

- 또 예수님이 죽은 후 부활하지 못했는데, 시체를 숨겨서 부활한 거서럼 꾸몄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의심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마 27:62-66] 이튿날 곧 예비일 다음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63] 말하였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64]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65]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경비병을 내줄 터이니, 물러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66] 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두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것만 입증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쉽게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그런 의심을 의식하고 있다.

- 그래서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했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한다.

- 병사들이 다리를 꺽을 필요도 없을만큼 예수님의 죽음은 확실했다.(33)

- 창을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34)

- 시신을 내려서 줄만큼 예수님의 죽음이 확실했다.(38)

- 특히 35절에서 자신이 분명한 목격자이며, 자신의 증언이 참되다고 강조해서 말한다.

이를 통해 본문은 십자가 사건의 증거 능력을 설명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전제 위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고, 예수님의 죽음 부활의 전제 위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두 가지 중에 후자를 지금까지 길게 설명했고, 전자를 이번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왜냐하면 둘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번 본문은 지루할 수 있다.

- 우리는 십자가 사건의 진실성 여부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는 십자가 사건의 증명력을 제시한 이전의 본문이 훨씬 더 의미있다.

-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에는 증거 능력도 상당히 중요했을 것이다.

-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뉜다.

① 31-34절: 예수님의 죽으심 

② 35-37절: 예수님 죽음의 진실성

③ 38-42절: 예수님 시신의 매장

- 특이점은 35-37절이다.

-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매장되는 과정 가운데를 뚝 끊어서 사건의 진실성을 항변한다.

- 그만큼 십자가 사건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공격이 많았음을 반증한다.

십자가 사건은 증거 능력과 증명력 모두에서 취약한 증거이다.

- 비-직관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 그리고 시체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명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2000년 동안 살아남았다.

- 어떻게 그랬을까?

- 기독교가 참 진리이기 때문일까? 성령님의 인도하심 때문일까?

- 아니면 반대로 기독교인들이 너무 거짓말을 잘해서일까? 그래서 거짓된 십자가 복음이 지켜진 것일까?

- 보통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 최근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진 것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 그런 관점에서 2000년 동안 거짓임이 밝혀지지 않은 기독교는 정말 진실로 보인다.

- 그러나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가 수두룩하다.

- 그렇게 보면, 이러한 정황 증거만으로 기독교를 진실로 보기 힘들기도 하다.

- 그렇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는 사실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31-34절: 예수님의 죽으심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죽으셨다.

-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 세 시간만에 죽으셨다.

- 그런데 십자가형은, 엄밀하게 말해, 사형 형벌이기보다 고문 형벌이다.

- 즉, 목적이 죽이는데 있지 않고, 죽을만큼의 고통을 죽지 않고 오래 느끼도록 하는데 있다.

- 보통은 하루, 최대 4일까지 버틴 기록도 있다고 한다.

- 그래도 예수님은 빨리 죽으신 편이다. 

-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보통 십자가에서 죽으면, 내리지 않고 매달아 놓는다.

- 그래서 독수리 밥이 되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 왜냐하면 십자가형의 목적에 처벌 뿐만 아니라, 경고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시체가 훼손되가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반역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체는 바로 내려졌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다음 날이 '큰' 안식일이었다.(31)

- 왜 이렇게 불렀냐면, 유월절 기간 안에 있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은 이 날을 특별히 더 '거룩하게' 보내기 위해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청했다.

그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 병사들은 다리를 부러뜨렸다.

- 왜냐하면, 그래야 빨리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죽어야만 십자가에서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십자가형이 사람을 죽이는 원리는 질식이다.

- 두 팔이 묶여 축 늘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사람이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숨을 쉬기 위해서는 다리를 이용해 몸을 들어 올려야 한다.

- 숨이 막히는 과정, 숨을 쉬기 위해 몸을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이 십자가형이다.

- 그런데 다리가 부러지면, 몸을 들어 올릴 수 없어서 곧 바로 질식해서 죽게 된다.

- 혹시나 죽지 않고 내려올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뜨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리는 놔두었다.

- 이미 죽으셨기 때문이다.

- 단지 옆구리만 살짝 찔러 확인만 한다.

- 거기서 피와 물이 쏟아진다.

이 피와 물에 대해 많은 설명이 있다.

- 첫째는 상징적 의미이다.

- 피에는 희생 제사의 의미가, 물에는 성령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 둘째는 의학적 설명이다.

- 사람이 죽으면 심장이나 폐에 피와 물이 고일 수 있다고 말한다.

- 하지만 어느 것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성경은 침묵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정말 죽으셨다는 것이다.

- 창으로 찔렀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으셨다.

- 예수님은 죽은 것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으신 것이다.

- 병사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여러 번 확인했다.

- 그만큼 예수님의 죽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35-37절: 예수님 죽음의 진실성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사람들이 의심했나보다.

-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그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하니 더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전자를 의심해서, 예수님이 실제로 죽지 않고 죽은 채만 했다거나, 죽었는데 부활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 또 어떤 사람은 후자를 의심해서, 실제로 죽은 사람은 예수님의 껍데기이고 그리스도의 본질은 죽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의심은 요한에게 큰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 요한일서에서도 첫 문장부터 강조한다.

[요일 1: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 즉, 예수님의 신비하고 영적인 몸이 아니라 '실제 몸'이 죽고 부활하신 것이며, 이는 하나님이 실제로 죽고 부활하신 것을 뜻한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직접' 본 목격자라고 말한다.

- 십자가 사건의 사실 여부가 해결되야 복음이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35] 그는 여러분들도 믿게 하려고 증언한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고 '비-직관적'인 십자가 사건은 숨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 숨기진 않더라도, 살짝 왜곡하고 요약 축소해서 간단하게 넘어가는 것이 이롭다.

-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반발만 사기 때문이다.

- 이것이 현대 교회의 비극적인 현실이다.

성경도 이를 인정한다.

[고전 1:21-23] ・・・・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22]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 세상의 관점에서 십자가 사건은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일 뿐이며, '거리낌'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 오히려 십자가 사건을 '부드럽고', 현명하게' 들리게 말하면 틀린 것이다.

- 역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역설은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 성경조차 '역설'과 '비-직관성'을 인정한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된다.

-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십자가 사건 안에 있는 '역설'과 '비-직관성'이 교회에 혼란과 분열을 일으킨다.

하지만 성경은 십자가 사건 안에 담긴 '역설'과 '비-직관성'만이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 역설적으로 말해, 십자가 사건이 전해질 때, 필연적으로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는데, 그 혼란과 분열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 즉, 구원의 과정과 방식에까지도 '역설'과 '비-직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비-직관적'이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된다.

- 교회의 혼란과 분열이 구원을 일으킨다니.

- 이해하려하지 말고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 '비-직관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 이해할 수 없을 때에만, 참 믿음이 발휘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과정 전체가 성경의 성취임을 또 다시 밝힌다.

- 우연으로 보이는 사건이 모두 필연이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도, 예수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도 결국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한다.

38-42절: 예수님 시신의 매장

통상적으로,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공동 묘지에 '버려'진다.

- 일단 십자가형을 받으면, 독수리가 다 먹어서 형체가 없어지고, 종교적으로도 부정하기 때문에 성문 밖에서 장사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최소한의 장례 절차를 거쳐, 새 무덤에 안치된다.

- 이유는 분명하다.

- 부활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 만약 공동 묘지에 버려졌다면, 다른 시신과 섞여서 부활을 입증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그랬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절대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우연한 일이 일어났다.

① 시기 - 유월절 안식일 전날

- 유월절 안식일 전날이었기 때문에, 훼손되기 전에 시신을 내릴 수 있었다.

- 만약 훼손되었다면, 이 또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 우연한 시기 때문에, 온전한 시신을 얻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을 논란의 여지 없이 명확히할 수 있었다.

② 부자 요셉 - 산헤드린 의원

-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 때문에, 예수님 죽음에 대한 신뢰가 올라갔을 것이다.

-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한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산헤드린 의원직은 당시 최고 지위였다.

- 최고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 산헤드린 의원직의 무게만큼 예수님 죽음의 신빙성이 올라갔다.

③ 무덤 - 아무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

- 만약 누군가 이미 장사된 무덤이었다면, 이 또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 예수님의 시신이 다른 시신과 혼동되었을 것이다.

- 예수님의 시신이 부활하여 없어졌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우연이 모여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주제

예수님 죽음의 확실성 - 역설적 증명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한지 다양한 정황 증거를 통해 제시한다.

- 왜냐하면 죽음이 분명해야 부활을 말할 수 있고, 죽음 부활이 분명해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나약한 죽음'이 확증될 때, 예수님이 '완전한 능력'이 증명된다는 뜻이다.

이 시점에서 복음의 역설, 진리의 역설이 극대화된다.

- 성경에서 십자가 사건이 가장 중심에 있는 것과 같이, 복음에서 역설이 가장 중심에 있다.

- 그래서 역설을 깨달을 때, 그리고 우리의 직관을 극복할 때만이 복음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다.

그런데 직관이 언제 극복되냐? 다른 말로, 직관에 언제 무너지냐?

- 죽음의 위협이 있을 때, 죽도록 힘들 때, 죽었다 살아날 때만이다.

- 그럴 때에만, 비판하지 않고 믿었던 상식, 직관, 가치관이 무너지고 극복된다.

- 그 때에야 비로소 역설적 복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생기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 역시 역설이다.

- 죽음을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 16:24-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 즉,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생명을 찾게 된다고 말이다.

이 역설적 진리를 전하기 위해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토록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결론

본문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 예수님은 정말로 죽으셨는가?

- 예수님은 정말로 죽으셨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고 있다.

- 당신은 정말로 죽었는가?

- 본문은 죽음의 경험을 한 사람만이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질문을 실제적인 질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 진리의 역설과 비-직관성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 나의 직관, 판단, 경험, 상식, 가치관을 얼마나 불신하는가?

- 세상의 조롱 소리 속에서 하나님 사랑의 음성을 듣는가?

- 불행 속에서 소망을 보는가?

-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가?

- 나를 좋은 사람, 그저 그런 사람, 나쁘진 않은 사람이 아니라 나쁘고 못되고 쓸데 없는 지옥의 땔감이라고 판단하는가?

- 반대로 하나님은 지옥의 땔감인 나를 의롭다고 여기심을 믿는가?

- 내가 죄인도, 의인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사악한 죄임이며 동시에 완전한 의인임을 믿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가 정말 죽었는지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해 줄 것이다.

- 이러한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며,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