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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53) 19:1-16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로 괴리된 인류 역사의 비극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로 구분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흐름이다.

- 반면에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영역 넘어서, 오직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역사 흐름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는 배타적이다.

- 사람이 알 수 있는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일 수 없다.

-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가 만날 때가 있는데, 그것을 '계시'라고 부른다.

-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여주시는 때가 있다.

- 예를 들어, 오순절 다락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깨달은 시점이 있고,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은 시점 등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의 관계는 무엇인가?

- 완전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개방적이다.

그런데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 본질적인 관점,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 마치 수학에서 아무리 큰 수가 분자에 있어도 분모가 무한대면 0으로 수렴하는 것처럼 말이다.

-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 자체는 무가치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연결된 인간의 역사만 가치 있다.

- 베드로와 바울의 인생이 가치 있는 이유도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본문도 가치 있는 하나님의 역사와 무가치한 인간의 역사를 동시에 보여준다.

- 본문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확증되는 사건이다.

- 예수님은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약에서 예고된 그리스도이심이 증명된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

- 이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자신들에게 유익이 생길 것이라고 판단했고 행동했다.

-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그들에게 무가치한 판단이었다. 

- 아무 유익을 얻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행동으로 인해 지옥 심판을 받게 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용되기만 하고, 자신에게는 해악뿐인 행동이었다.

본문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모두 비극적이다.

① 병정들은 예수님을 조롱할 의도로 왕관과 자색 옷을 입히지만, 이로 인해 예수님이 참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결과를 낳는다.

② 빌라도 역시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예수님을 죽인 실질적 주범이 된다.

③ 유대인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도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 결과 하나님을 죽인 꼴이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 속에 사는 모든 인류의 비극이다.

- 모든 사람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좀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 그러나 그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 한 마디로, 인류는 행동의 의도와 행동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괴리된다는 것이다..

이런 예는 신앙을 벗어나 생각해도,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 예를 들어, 노벨의 다이너마이트가 있다.

- 노벨은 평화를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평화가 깨지는 것에 낙담하여, 전 재산을 털어 노벨상을 제정했다.

의도와 결과의 괴리가 얼마나 비극적인지 와닿게 설명해보자면,

- 이는 마치 뇌성마비나 중풍에 걸려, 몸을 의도에 따라 움직일 수 없거나, 의도와 상관 없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상태와 같다.

-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하지 않는 행동이 나온다.

- 이러한 고통을 육체를 넘어 정신과 영혼까지 느끼는 것이 모든 인류가 당하고 있는 비극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리가 왜 생기는 것일까?

- 왜 의도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괴리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이다.

외적 요인은, 나에게는 문제가 없는데, 외부 상황이 변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적절한 행동을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외부 상황 때문에 생기는 괴리이다.

- 사람은 아무도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외적 요인은 언제나 생길 수 있다.

- 사람들은 보통 이를 두고, '운이 없다'라고 표현하는데, 운이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것 자체가 괴리의 결과이다.

반면에 내적 요인은, 외부 상황은 그대로인데 나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 명목상의 의도 이면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근원적인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 자신조차도 자신의 의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의도를 전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적 요인 역시 언제나 생길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와 자신 안의 내부 세계를 전부 알 수 없기 때문에, 의도와 결과는 언제나 어긋날 수 밖에 없다.

- 이 때문에 본문의 병정들, 빌라도, 유대인은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이 하나님을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단순하다.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를 전부 아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절대로 의도와 결과의 괴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사람은 절대로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괴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노력 방향을 내부 세계에 두겠다.

- 왜냐하면, 외부 세계는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

- 외부 세계는 나를 제외한 모든 자연 환경, 문화, 사람, 우주 등을 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포괄한다.

- 하지만 내부 세계는 '나'이다. 범위가 비교적 작다.

- 물론 '나'를 알기 위해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경험, 감정, 행동 등을 전부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 그럼에도 비교적 수훨하다는 점에서 '나'에 집중하겠다.

'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이 세상은 아주 단순하게 입력, 블랙 박스, 출력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블랙 박스는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입력과 출력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숨겨진 시스템이다.

- 원하는 출력을 얻기 위해서는 올바른 입력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올바른 입력을 알기 위해서는 블랙 박스를 알아야 한다.

- 블랙 박스를 알아야, 어떤 입력에 어떤 출력이 나오는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블랙 박스를 모르면, 올바른 입력을 알 수 없고, 그래서 올바른 출력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삶에서 원하는 결과를 갖기 위해서는 적절한 의도를 가져야 한다.

- 그런데 적절한 의도를 갖기 위해서는 블랙 박스인 '나'를 알아야 한다.

- 따라서 나를 알 때에만 원하는 삶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나를 알 수 있냐?

기본적으로, 블랙 박스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 블랙 박스가 블랙 박스라고 불리는 이유는 내부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열어서 내부 원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블랙 박스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알 수 없다. 간접적으로만 가능하다.

- 마치 나를 알기 위해 뇌를 뜯어볼 수 없는 것과 같다.

- 오직 입력과 출력을 반복해서 해보고 그것을 비교해서, 간접적으로 블랙 박스를 유추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나를 아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 '나'를 해부한다고 '나'를 알 수가 없다. '나'는 감추어져 있는 블랙 박스다.

- 의도를 갖고 행동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보는 것 뿐이다.

- 그래서 의도와 결과를 비교해서, 간접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유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 성찰이다.

- 자아 성찰은 나의 내면을 '직접' 살펴보는 것이 아니다.

- 내가 어떤 의도를 가졌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과거의 상황을 여러 번 비교하여 나를 '간접'적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알 수 있는 기회는 많다.

- 그런데 문제는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기회를 살리려면 완전한 나로서, 나답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라는 블랙 박스를 중심에 두고 행동해야 하는데, 사람 눈치, 세상 눈치 보며 나답게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해 살라는 것이 아니다. 배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 이기적이건 이타적이건 나답게 행동해야 '나'를 알 수 있고, 그래야 나다운 이기심, 나다운 이타심을 갖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 나다울 수 있을까?

나다움의 반대는 무엇일까?

- 세상다움이다. 또는 주변 사람다움이다.

- 내가 나다움을 포기하면, 진공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 세상에 휩쓸려 세상 혹은 주변 사람들의 가치관대로 행동한다.

우리가 세상다워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 그것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 나다움을 숨기고 세상다워질 때, 인정 받기 쉽고, 돈 벌기 쉽고, 욕도 안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결국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생존 본능' 때문에 나다움을 숨기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나다워지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 본능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마 16: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 즉, 본능대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은 결국 '나'를 잃고 실질적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다워지는 것에는 생명의 위협이 뒤따른다.

- 그만큼 어렵고, 도전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아무도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의도와 결과의 괴리가 오는 것이다.

- 그래서 모든 사람이 실질적 장애를 가진 환자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생존 본능에 역행하는 사람만 그래서 죽음을 이긴 사람만 나답게 살 수 있다.

- 그래야 괴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 올바른 의도를 갖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 사람답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 우리에게 생명을 보장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우리가 죽음을 감수할 수 있도록.

- 그래서 죽음을 이겨서, 생존 본능에 속박되지 않고 역행할 수 있도록.

- 그래서 우리가 나다워질 수 있도록.

- 그래서 괴리되지 않고 일치된 삶을 살도록 있도록.

-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종말에 폐기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로서 영원토록 의미 있도록.

- 이렇게 영원토록 지속될 하나님의 역사에 편입되는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 빌라도는 총독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종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병정들도 군인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나다움을 포기했다.

특히 본문은 빌라도의 내적 갈등에 초점을 둔다.

- 본문의 상당 부분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하는 시도로 채워져 있다.

- 총독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빨리 해치워버리는 것이 유익하다.

- 예수님 입장에서 봐도, 빌라도의 노력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명하는데 도움 되지 않는다.

- 빌라도의 내적 갈등은 자신에게도 예수님께도 무의미해 보인다.

그렇다면 쓸모 없어 보이는 빌라도의 내적 갈등에 왜 초점을 두고 있을까?

- 결국 나다움을 잃고 자기 자신과도 괴리된 인간의 비극적인 실상을 고발하려는 것이다.

- 유대인을 통해서는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과 괴리된 실상을 고발했다.

- 반면에 빌라도를 통해서는 '인생'이라는 보다 넓은 테두리 안에서 괴리를 경험하는 인간의 비극을 고발한 것이다.

- 유대인을 통해서는 변질된 '신앙'의 비극을 다뤘다면, 빌라도를 통해서는 변질된 '인생'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빌라도의 내적 갈등을 세심하게 살펴보겠다.


내용 정리

본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① 1-3절: 예수님을 조롱하는 병정들

② 4-7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 - 죄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려는 빌라도와 죽이라는 유대인

③ 8-12a절: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 권한 없는 권위자 빌라도와 권한 있는 죄수 예수님

④ 12b-16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 - 유대인을 조롱하는 빌라도와 빌라도의 약점을 공격하는 유대인

- 내용은 예수님을 둘러싼 병정들, 빌라도, 유대인의 대화이다.

- 예수님의 역할은 극히 적고, 주변 사람들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 특히 대화의 중심에는 빌라도가 있다.

-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빌라도의 인물상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1-3절: 예수님을 조롱하는 병정들

유대인의 성화에 못이긴 빌라도는 일단 예수님을 데려간다.

- 그러고 나서 먼저 때린다.

- 때리는 의도는 악의가 아니라 선의이다.

- 요한복음에는 안나오는데, 다른 복음서를 보면 죽이지 않고 풀어주기 위해 때린다.

- 때리기라도 해서 유대인의 악독한 마음을 풀어주려는 선의였다.

[눅 23:16]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하고, 놓아주겠소.

그런 도중 병정들의 만행이 벌어진다.

- 가시나무 왕관과 자색 옷으로 우스꽝스러운 왕 코스프레를 시킨다.

- 그리고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친다.

- 그러면서 또 때린다.

- 순수하게 모욕을 주기 위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모욕의 대상은 누구일까?

- 당연히 예수님일 것이다.

- 자칭 왕이 자신들에게 조롱당하는 것이 재밌었을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께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다.

- 그냥 지나가는 정신 나간 아저씨일 뿐이다.

- 그런 사람에게 굳이 이렇게 정성드려서 모욕을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 따라서 실질적 모욕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다.

실질적 모욕 대상은 유대인들이다.

- 로마 병사는 유대인에게 나쁜 감정이 많았다.

- 로마 식민지 중에 특별히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나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골칫덩어리였다.

- 게다가 재판 과정 중 유대인이 보인 치졸함에 악감정은 한층 달아올랐을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꼭두각시 삼아 유대인의 왕으로 변장시킨 후 조롱한 것이다.

- 유대인의 왕을 조롱하여 유대 민족 전체에 모욕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과정에 예수님이 사용된 것 뿐이다.

따라서 병사들의 조롱 사건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① 예수님의 수난

-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아무 이유 없이 다양한 사람에게 고통 당하신다.

② 예수님의 영광

- 수난 당하시지만, 그 수난을 통해 역설적으로 유대인의 왕이심이 증명되었다.

③ 유대 민족의 실상 고발

- 유대인의 의도는 예수님을 죽여 유대 민족을 살리는 것이었다.

- 그러나 이를 통해 유대 민족의 치졸함이 드러났다.

- 신앙을 명분 삼아 잇속을 채우는 실상이 드러났다.

- 그래서 로마 병사들에게조차 조롱당하는 결과를 얻는다.

 그리고 결국 유대 민족은 하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치욕을 떠안게 된다.

이렇게 본문은 역설과 중의가 밀도 있게 담겨 있다.

- 이는 요한복음의 큰 특징인데, 예수님의 수난 부분이 특히 심하다.

- 이 점에 염두하면서 나머지 본문도 보자.

4-7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 - 죄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려는 빌라도와 죽이라는 유대인

빌라도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한다.

- 그래서 예수님을 때렸다.

- 그렇게라도 유대인의 마음을 헤아려주려고 했다.

- 이것을 핑게로 유대인을 설득해보려고 했다.

- 그리고 그렇게 얻어터진 예수님을 보여줘서 동정표를 얻고자 했다.

[19:5] 예수가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신 채로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시오,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 유대인의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되레 악기만 더 자극하고 말았다.

[19:6]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 즉, 빌라도의 의도와 결과가 어긋난 것이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 이들도 의도와 결과가 어긋났다.

-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주장을 위한 근거로 '율법'을 제시했다.

[19:7]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율법' 때문에 유대인들의 주장은 더 약화된다.

십자가 형은 로마에 정치적으로 반역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최고형이다.

- 그래서 처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고발한다. 십자가 형을 받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정치범이 아닌 종교범이라고 다시 고발하고 있다.

- 의도는 예수님의 죄목을 늘리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받을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 종교범은 십자가 형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문은 빌라도도, 유대인도 자신들의 의도와 정반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 이를 통해, 죄인의 실상, 괴리된 인류의 비극을 드러낸다.

8-12a절: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 권한 없는 권위자 빌라도와 그것을 드러내시는 예수님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더 두려워진다.

- 빌라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지나쳐버릴 수 없는 이유는 이전 예수님과의 대화 때문이다.

[18:36-3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37]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38]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 빌라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말씀을 사실상 인정했다.

-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인지 묻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 동시에 그런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더 큰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다시 한번 묻는다.

[19:9]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 몰라서가 아니라, 알지만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확신을 부정하고 싶어서이다.

-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신다.

- 이미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빌라도는 '권한' 타령을 하며 으름장을 놓는다.

- 이는 마치 싸우다 불리할 때,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 두렵기 때문이다.

- 싸움에서 질 것 같으니까, 싸움 외적인 요소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입을 여신다.

[19:1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이오."

- 참고로 이 구절 해석은 다른 해석서에 없는 나만의 것임을 밝힌다.

- 그러니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내 생각이 맞는지 잘 헤아려주길 바란다.

해석의 핵심은 '위'가 누구냐는 것이다.

- 모든 해설서는 '하나님' 혹은 '로마 황제'라고 말한다.

- 상식에 따른 해석이지만, 맥락과 맞지 않다.

- 오히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준 '유대인'을 지칭한다.

- 그래야 11절 마지막 문장과도 연결되고, 10절과도 연결된다.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 빌라도는 두려움에 빠져 있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신통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유대인의 눈치를 보느라 그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또 총독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애써 부인하고 있다.

- 그래서 권한 타령을 하고 있다.

-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극적인 빌라도의 상황을 에둘러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대인 때문에 아무런 권한도 발휘하지 못하는 빌라도의 상황이다.

- '위', 즉 유대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런 권한도 없다고 빌라도를 비난하신 것이다.

-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문장을 말씀하신 것이다.

[19:11] 그러므로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이오.

- 빌라도 너는 꼭두각시일 뿐이고, 진짜 권한을 가진 자는 유대인이다.

- 그러니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유대인의 죄가 더 큰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12절과도 문맥이 이어진다.

- 11절은 예수님께서 의미 없이 뻔하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빌라도를 자극하고 도전하신 말씀이다.

- 권한을 발휘해서 소신 있게 예수님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신 말씀이다.

-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권휘를 발휘하지 못한 빌라도의 처지를 자각하도록 하신 말씀이다.

- 그랬기 때문에 12절에서 빌라도는 더욱 예수님을 풀어주려는 노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빌라도의 괴리, 즉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를 지적하신다.

-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유대인 눈치만 보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빌라도를 도전하신다.

12b-16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 - 유대인을 조롱하는 빌라도와 빌라도의 약점을 공격하는 유대인

예수님을 놓아 주려 힘쓰는 빌라도 앞에 유대인의 반발은 더 거세진다.

- 빌라도의 최고 약점을 건드린다.

- 총독 빌라도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를 들먹이며 협박한다.

-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황제에게 상소할 것이란 뜻이다.

- 유대인이 상소하면, 예수님의 죄 유무와 상관 없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것 자체로 빌라도의 지위에 타격을 입을 것이다.

빌라도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렸다.

-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보호할 여력이 없다.

- 조금 더 예수님을 보호하면, 자신의 자리가 날라갈 판이다.

그래서 판결을 내린다.

- 재판석에 앉아서 예수님을 부른다.(13)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판결하는데, 그 판결문이 이상하다.

[19:14]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

- 끝까지 십자가 형을 구형하지는 않는다.

- 이는 빌라도가 마지막까지 지킨 자신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대신 십자가 형을 에둘러 선고한다.

- '당신들의 왕'이란 말로,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받아야 하는 반역죄가 있음을 확인한다.

이를 통해 빌라도는 두 가지를 이뤘다.

① 비참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켰다.

② 유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을 해서 유대인들을 조롱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더 격렬히 반응한다.(15)

- 그에 대해 빌라도는 마지막으로 십자가 형을 재확인한다.(15)

다음 유대인들의 말이 또 이상하다.

[19:15]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의도는 두 가지이다.

① 빌라도를 향해 황제를 언급함으로, 빨리 예수님을 죽이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② 유대인 자신들과 달리 예수님은 황제에 반역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십자가 형이 내려지는 것 이 합당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빨리 십자가 형이 내려지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 유대인의 의도대로 예수님은 십자가 형을 당하시게 된다. 일단 성공이다.

그러나 반쪽짜리 성공이다.

- 유대인의 말은 결국 하나님의 유일한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유대인의 목적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자신을 왕이라 주장하는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 그들에게 예수님의 주장은 하나님이 유일한 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죽여서, 하나님이 유일한 왕이라는 것을 주장하여, 유대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 유대인의 최초 논리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적을 부정했다.

-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황제를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유일한 왕이심을 부정한 것이다.

이는 유대인이 얼마나 의도와 결과가 괴리되었는지 드러낸다.

- 처음 의도는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깔고 뭉갰다.

- 이렇게 의도와 결과가 괴리되는 것이 모든 인류의 비극적 숙명이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형을 당하시는 것으로 본문은 끝이 난다.

- 본문의 표면적인 내용은 예수님의 수난이다.

- 그러나 본질적으로 수난을 당하는 사람은 빌라도와 유대인들이다.

- 그들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대중 앞에서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죽는 사람은 예수님이지만, 본질적으로 죽는 사람은 빌라도와 유대인이다.


주제

사는 것이 힘든 이유 - 의도한대로 안되니까

- 뭐든 것을 내멋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 애초부터 나쁜 마음으로 욕심 부렸다면, 덜 억울한 것이다.

- 노력을 안했다면, 답답하지도 않을 것이다.

- 좋은 의도를 가지고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참담할 때, 절망하게 된다.

-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보면, 좋은 의도도 내팽게쳐버리고, 노력하기도 싫어진다.

- 대박을 노리며 요행만을 바라게 된다.

- 그 동안 운이 없었다는 핑게를 대며, 앞으로 올 운에 인생 전부를 걸게 된다.

- 그러나 결국 운은 오지 않고, 모든 것을 원망하며 눈을 감는다.

이것이 의도와 결과가 괴리된 모든 인간의 비극적 숙명이다.

- 단지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 크건 작건 모든 인류가 경험하는 것이다.

- 아무리 부자라도,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인생이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한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빌라도와 유대인이다.

- 이들 모두 좋은 의도를 갖고 최선을 다했지만, 얻은 것은 하나님을 죽인 자라는 오명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 질문을 구체화하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일 수도 죽이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답은 하나다.

- 스스로에게 정직해지는 것이다.

- 딜레마에 빠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 즉 예수님께 털어 놓는 것이다.

- 물론 자존심에 스크레치는 생겼겠지만, 역사적 오명은 벗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답은 '나'를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 물론 빌라도가 정직하게 행동했다면, 총독직을 빼앗겼을 수도 있다.

- 뿐만 아니라 예수님 대신에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죽임 당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역사적 오명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영원토록 천국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나'를 알면, 의도와 결과가 괴리된 현실 속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다.

- 현실은 복잡하고, 통제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뿐만 아니라 나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래서 삶을 포기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현실의 한계와 자신의 무능력만 더 깨달게 될 뿐이다.

빌라도도 유대인도 이렇게 미궁 속에 빠졌다.

- 그리고 스스로 해결하려다보니, 결국 하나님까지 죽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비극적 숙명이다.

- 모든 사람은 딜레마에 빠져 있는데, 벗어나려고 노력할수록 더 빠지게 되어, 결국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일, 즉 하나님을 죽이기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 빌라도나 유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반드시 사람에게 죽임 당하신 하나님이 나서셔야 한다.

- 죽임 당하신 후 다시 일어나셔야 한다.

- 그래서 그 분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 그래야 의도와 결과가 괴리된 '나'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 죽고 부활하지 않은 다른 신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후, 예수님을 다시 따를 수도, 아예 버릴 수도 없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자살을 택했다. 그 결과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한 후, 유다와 마찬가지로, 딜레마에 빠졌지만,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해 나아갔다. 그 결과 대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이미 딜레마에 빠져있는 현실을 언젠가 마주하게 될 것이다.

- 그 때 정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해결하려다 결국 망할 것이다.

- 그러나 정직하게 '나'를 인정한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갈 것이다.

- 결국 '나'에 대한 인식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이다.


결론

정직하게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 빌라도에게 정직함은 총독직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유대인에게 정직함은 유대 공동체에서 퇴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정직함은 우리에게 '목숨'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가 정직할 수 없는 것이다.

-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가 정직하게 '나'의 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 이것이 회개가 어려운 진짜 이유이다.

그런데 우리가 위험한 일에 도전할 때가 있다.

- '안전 장치'가 있을 때이다.

- 위험한 놀이 기구를 탈 수 있는 이유도 안전 장치 때문이다.

- 아무리 위험해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직하게 회개할 수 있는 이유도 안전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 안전 장치가 바로 부활이다.

- 정직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데, 설사 죽는다고 해도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위험하지만 안전 장치를 믿고 놀이 기구를 타듯이, 부활을 믿으면 정직하게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너무 어려워서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욕구조차 생기지 않는다.

- 아무리 원하는 것이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무의식적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세뇌한다.

- 그래서 목표를 이루려는 동기를 갖기 위해서는, 목표가 너무 어렵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 정직하게 회개하는 것에 대한 동기가 생기지 않는 것도 너무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이다.

- 정직함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정직하게 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세뇌하여, 지레 포기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부활을 믿음으로 죽음이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되면, 정직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 '나'의 의도를 정직하게 밑바닥까지 파헤쳐보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 그래서 죄의 근원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 이렇게 될 때, 바른 회개가 시작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정직과 회개는 죽음을 담보로 하기에,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 그래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회피하며, 외면하고, 지레 포기한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안전 장치가 있으면, 그래서 실현 가능성이 생기면, 도전하고싶은 동기가 생긴다.

- 끝까지 정직하게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되며, 죄의 밑바닥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 그 때에야 비로소 회개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또 믿음이다.

- 부활을 믿어 죽음을 극복할 때, 회개할 수 있다.

- 정직하게 회개할 때, '나'를 알 수 있다.

- 그래야 의도와 결과의 괴리라는 비극적 숙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 그래야 사람답게, 나답게, 의도한대로 결과를 얻으며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