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예수님은 끌려가 신문을 받는다.
-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신문을 받으시는데, 끝까지 기죽지 않으신다.
- 입 바른 소리 하다가 맞기까지 하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대로 말씀하신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라 신문 장소까지 간 베드로는 기가 죽어 찍 소리도 못한다.
- 문지기 하녀에게, 사람들에게, 대제사장의 종에게조차 바른대로 말하지 못한다.
- 그들에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한다.
- 완전히 무기력한 모습이다.
지난 본문에서 이 둘의 차이를 욕구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 예수님은 모든 욕구가 채워졌기 때문에, 최상위 욕구인 관계 욕구를 가질 수 있었다.
- 그래서 관계 욕구에 따라, 하나님과 그리고 제자들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투신하셨다.
- 그 결과 육체적, 정신적 위협에 빠지게 되시지만, 끝까지 관계를 지켜내신다.
반면에 베드로는 여전히 육체적, 정신적 욕구에 속박되어 있었다.
- 하녀에게, 종에게, 사람들에게조차 무시당하는 것이 싫었고, 죽는 것은 더 싫었다.
- 그래서 예수님과 관계를 부정했다.
-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내팽게친 것은 아니었다.
-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신문 장소까지 따라간다.
-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 육체적, 정신적 욕구 앞에 관계 욕구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 결국 베드로는 관계를 헌 신짝 버리듯 내팽게친다.
-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한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베드로와 얼마나 같은지 잘 알고 있다.
- 우리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관계를 언제나 내팽게친다.
- 내 문제 때문에, 사랑하는 배우자, 사랑하는 자식조차 내팽게친다.
- 하루에 한 번 하는 말씀 기도 시간조차 내팽게치기 일쑤이다.
- 내팽게치는 이유는 피곤해서, 바빠서, 힘들어서, 까먹어서 등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도 힘들다.
- 그 이유들이 모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다.
-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육체적, 정신적 욕구에 속박되어 있다는 증거들이다.
지난 본문에서는 이렇게 사람이 관계를 내팽게쳐버리는 '원인'에 초점을 두고 말했었다.
- 원인은 욕구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 베드로는 욕구에 속박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계를 포기했고, 예수님은 욕구에 해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관계를 지키셨다.
그런데 이번 본문에서는 관계를 내팽게쳐버려서 생기는 '결과'에 초점을 두고 말하려고 한다.
- 관계를 포기한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될까?
- 신앙 안에서 볼 때야 물론 지옥에 떨어지는 심판을 받는다. 뻔하다. 그래서 말할 필요가 없다.
- 말하고 싶은 것은, 신앙을 배제하고 볼 때이다.
- 관계를 포기한 사람은 '세상 안에서' 결국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어떤 삶의 결과를 얻게 될까?
이것에 대해 지난 본문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 욕구에 속박되어 사는 삶도 나름 재밌을 수 있다고.
- 열심히 돈을 벌어 집의 크기를 조금씩 늘려가는 재미도 쏠쏠하고,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해지는 재미도 상당하다.
-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이루는 것도 재밌고,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의 성취감도 짜릿하다.
반대로 아무 목표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만족하며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도 충분히 재밌다.
- 짜릿한 성취감은 없을지언정, 일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섬세하게 느끼며 작은 일에 감사하며 살 수 있다.
- 지겹고 힘겨운 하루를 마친 후 집에 와서 마시는 맥주 한 캔이 그 다음 하루를 살도록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성취감을 추구하는 삶과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을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 그런 삶이 가치 없다고 아무도 감히 말할 수 없다.
- 우리 모두가 이 두 가지 삶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다.
- 목표를 이루면 성취감에 빠져 살다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소확행에서 삶의 원동력을 찾는다.
- 즉, 이렇게 관계를 내팽게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 따라서 우리는 지금도 이미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변화의 필요성이 없다.
- 굳이 어렵게 만족스런 삶을 포기하고 새롭게 관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동기 부여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삶을 놔두고 왜 관계를 추구해야 할까?
- 이것을 신앙 안에서 설명하기는 너무 쉽다.
- 이런 삶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지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맺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면 행복한 인생을 살기는 할테지만, 죽은 이후 지옥 심판을 받아 영원토록 고통 받을 것이다. 라는 설명을 너무 많이 들었다.
이러한 설명에 굳이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 성경을 근거로 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성경을 믿는 사람에게는 유익을 준다.
- 신앙 때문에 고난 받고 있는 사람은 죽은 이후 받게 될 영광을 들으면 위로가 된다.
하지만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 그들에게 성경을 근거로 한 설명은 무의미하다.
- 죽음 이후에 일어날 위험은 그들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 그러한 설명은 논증할 수 없는 신화와 같기 때문이다.
- 그것이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도, 만족스러운 현재 삶을 포기할 마음이 그들에게는 없다.
-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현재의 확실한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밖에서, 신앙을 배제하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하나님 없이 논증해야 한다.
- 관계를 배제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인생으로 설명해야 한다.
- 지금 당장은 성취감 혹은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이 만족스럽지만, 그 만족이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 이렇게 죽음 이후가 아닌 현실에서 위험하다는 것만이 위협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현재 누리는 만족스런 삶에 대해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지금 누리는 성취감을 과연 평생 누릴 수 있을까?
- 맥주 한 잔이 주는 소확행을 평생 누릴 수 있을까?
- 민약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식이 죽고, 사업은 부도나고, 사기 당해서 빚이 수억원 생기고, 건강이 나빠져 사지 마비가 오면, 성취감과 소확행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 이런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오해하면 안된다.
- 멀쩡한 인생을 비관하자는 것이 아니다.
- 최악의 상황을 염두하고, 그에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보험 들자는 것이 아니다.
- 게다가 따지고보면, 아무리 안좋은 일이 겹치고 겹쳐도 살 사람은 또 어떻게든 산다.
-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그 상황이 되면 또 살아진다.
- 홀로코스트에서도 사람은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이유는,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 나는 누구고, 왜 살며,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나답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이다.
- 당장의 눈 앞의 욕구에 휘둘려 사는 삶은 동물과 다른 바 없다.
-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욕구만을 채우며 사는 삶은 사람다운 삶이 아니다.
- 그것은 사람으로 태어나 동물로 사는 어리석은 삶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도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정한다.
- 원래부터 예수님을 욕했던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베드로는 인생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쫓았던 사람이다.
-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고 결단했던 사람이다.
-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토록 원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다.
- 원했던 예수님을 포기하고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선택했다.
-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는 원했던대로 선택하지 못했다.
- 가장 나다워야 할 때 베드로는 나다움을 포기했다.
- 베드로는 베드로로서 살지 못하고, 베드로 되기를 포기했다.
-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끊어졌고, 예수님과의 관계도 끊어졌다.
- 이것이 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인생의 비극적인 결말이다.
- 내가 나로서 살지 못하는 것,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지 못하는 것 말이다.
관계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면, 나와의 관계도 깨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답게, 사람답게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 육체적, 정신적 욕구에 속박되어, 내가 진짜 바라는 것, 정말 나다운 것, 내 안에 있는 최상위 욕구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 게다가 최상위 욕구가 뭔지 알아도, 베드로처럼 하위 욕구에 휘둘려서 욕구대로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 최상위 욕구만 중요하다고 하고, 육체적, 정신적 욕구는 무시하는데, 그건 안굶어봐서 그런 것이다.
- 정말 고생해본 사람은 그렇게 말 못한다.
- 돈 없어서 굶어보고, 돈 없어서 무시당해보면, 최상위 욕구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 배부르고 등따시니까 그런 소리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반박에 재반박할 수 있는 인생의 연륜이 없다.
- 하지만 역사책 속에 있는 위인들을 보면, 하위 욕구를 극복하고 상위 욕구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많다.
- 배 굶고 무시당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고, 죽음을 무릅쓰고 소신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하위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도 상위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다.
- 하위 욕구에 만족할 것이냐, 상위 욕구를 추구할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라는 뜻이다.
- 물론 그 선택이 쉽지 않아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하위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어도 상위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위 욕구가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위 욕구만 추구하며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 즉, 돈을 이미 많이 벌었지만 여전히 돈만 추구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돈이 없어 배고프고 무시당하지만 자신만의 이상을 향해 사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내가 살던대로 욕구에 속박되어 살 것이냐, 아니면 나답게 최상위 욕구를 추구하며 살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다.
- 만약 내가 살던대로 욕구에 속박되어 살기로 선택한다면, 지금처럼 배 안고프고, 무시 안당하고, 크게 불편함 없이, 남들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살게 될 것이다.
- 이는 사람의 자리에서 내려와 동물의 자리에서 사는 삶이다.
반면에 나답게 살기 위해 하위 욕구를 거절하고 최상위 욕구를 추구하기로 선택하면, 배고프고, 무시 당하며, 불편하고, 남들과 비교당하며 살게 될 것이다.
- 하지만 나답게,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 그럴 때에만 나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은 더 높은 지위, 더 강한 힘, 더 많은 지식, 더 큰 능력을 가질 때 주어지지 않는다.
- 아무리 큰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더 큰 능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그 삶은 처참히 무너진다.
이러한 일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었다.
- 내가 아무리 세계 최고의 주먹을 가지고 있어도 멀리서 쏘는 화살 한 방에 나가 떨어지고, 아무리 훌륭한 활 명사수라도 총 앞에서 맥을 못춘다.
- 아무리 달리기를 잘해도 말 탄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아무리 훌륭한 말을 가졌다 해도 자동차를 이길 수는 없다.
이렇게 인류의 강자는 계속 대체되었다.
- 절대 강자는 단 한번도 없었다.
- 앞으로도 이러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 지금 강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인 변호사, 의사, 일류 과학자들 역시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도 반드시 새로운 강자로 대체될 것이다.
- 이렇게 계속 대체되는 역사 속에서 강자는 언제나 대체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대체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 나다워지는 것 뿐이다.
- 나는 나밖에 될 수 없으니까.
- 나를 이해하고, 나의 욕구를 깨달아, 최상위 욕구를 향해 달려가는 것 뿐이다.
- 그러면 비록 강자가 되어 인류를 정복할 수는 없지만, 영원토록 대체되지 않는 나로 남을 수 있다.
-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 나다워지기 위해, 가장 먼저 나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기 위해, 관계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단 한 번도 바른 관계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관계를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관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이 삼위일체 관계이시기 때문이다.
- 그래야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나다워질 수 있다.
- 그렇게 나와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 단지 서로 이용하는 거래 관계가 아닌, 뇌가 전선으로 연결된 것과 같은 사랑의 관계 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에 본문에서 끝까지 '나다움'을 지키셨다.
- 예수님은 그리스도다움을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다움', '인간의 존엄성'도 지키셨다.
- 예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하나님 뜻을 따라 제자들과의 관계를 지키셨다.
반면에 베드로는 욕구에 속박되어 '나다움'을 포기했다.
- '죽기 싫어서' '죽기보다 싫은' 배신을 했다.
- 베드로의 비극은 스승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나다움'을 잃은 것이다.
-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인간 되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예수님과 베드로를 비교해보자.
- 그럴 때 베드로의 배신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보다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내용 정리
12-16절: 끌려가는 예수님과 따라가는 베드로
체포되신 예수님은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 가셔서 신문을 받으신다.
- 그러면서 안나스를 소개하길,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한다.
- 갑자기 왜 장인이 나오나 의아한데, 나름 복잡한 사연이 있다.
원래 유대교 전통에 따른 대제사장 직분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 이스라엘 성전 제사의 총 지휘자이다.
- 모세의 형 아론으로부터 계승되었으며, 장자에게만 계승되는 종신직이기에, 딱 한 명만 있었다.
- 대제사장이 가진 가장 특별한 임무는,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혼자 들어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속죄제를 드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변질되었다.
-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 의해' '다수'가 임명되었다.
- 안나스 역시 로마에 의해 임명되어 AD 6-15년까지 대제사장이었으나, 다시 로마에 의해 해임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후임 대제사장 중에 안나스의 아들이 다섯 명, 사위가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사위가 바로 가야바이다.
- 따라서 안나스는 직분은 없지만,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장 먼저 실권을 가진 가야바에게 가셔서 신문을 받으신 것이다.
베드로는 요한으로 알려진 '다른 제자'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으로 갔다.
- 베드로는 '다른 제자'의 도움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 거기서 문지기 하녀를 만난다.
- 그래서 그 유명한 사건이 시작된다.
17-18절: 베드로의 첫째 부인
문지기 하녀의 질문이 참 고약하다.
- 정확하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18:17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그 관계를 부정한다.
- 자신은 제자가 아니다, 예수님과 관계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은 한 구절을 덧붙이는데, 분위기가 요상하다.(18)
[18:18] 날이 추워서, 종들과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 그리고 같은 구절을 25절에서 반복한다.
[18: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날이 얼마나 추웠는지 숯불까지 피워놓았다.
- 베드로도 날이 추워서인지, 마음이 추워서인지 불을 쬐고 있다.
- 이렇게 어두움, 추움을 통해서 베드로의 불안정한 마음을 부각하고 있다.
-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불의한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 또한 18절과 25절을 연결하여 세 번의 부인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숯불'은 예수님의 부활과도 연결된다.
[21:9]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 예수님은 고향으로 되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시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차려주신 식사에도 '숯불'이 사용된다.
- 이 때의 숯불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추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따뜻함'을 상징한다.
- 그러면서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회상하게 하는 '생선'과 '빵'을 주신다.
- 이 역시 예수님과의 관계가 주는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춥고 배고픈 상태에 있다.
19-23절: 신문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 - 절차 상의 문제 지적
이번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 본문의 큰 틀은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이다.
- 하지만 그 이야기에는 부인하는 내용 외에는 없다.
- 오히려 베드로의 부인 사이에 있는 예수님의 신문에 더 많은 정보가 있다.
- 샌드위치 구조가 그렇듯, 사이에 끼어있는 예수님 이야기가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의 메시지를 규정하고 강화한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께 제자들과 가르침에 대해 묻는다.
- 당연히 이를 통해 죄를 추궁할 목적이었다.
- 왜냐하면 현재 체포는 했지만, 체포할 분명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에는 안나오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죄에 대한 다양한 증언이 있었지만, 증언들이 서로 어긋났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막 14:55-56] 대제사장들과 온 의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그를 고소할 증거를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56] 예수에게 불리하게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예수님은 길게 말씀하시는데, 정작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 제자들과 가르침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씀하지 않으신다.
대신 신문 절차에 대해서 지적하신다.
- 첫째로, 나는 항상 공개적으로 말했으니, 들은 사람들에게 묻고 나에게 묻지 말라!
- 둘째로, 내 말에 잘못 있으면 증거를 대고, 내 말이 옳다면 때리지 말라!
예수님의 지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세기 유대 법정의 수준을 알아야 한다.
- 결론부터 말해서, 생각보다 수준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다.
- 올바른 재판을 하기 위한 장치들이 많았다.
특히 피고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때릴 수 없었고, 피고인에게 직접 신문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 반드시 증인들의 증언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 따라서 예수님의 지적은 정당했다.
-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증인들을 모으려고 그 노력을 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이 시점에 예수님께서 절차 상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내용을 넣었을까?
- 왜 예수님은 가르침을 묻는 신문에 '내가 그리스도라고 가르쳤다'라고 답하시지 않으셨을까?
- 다른 복음서의 경우,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시기 때문에 더 의문이 든다.
[막 14:6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답은 예수님의 주체성, 주도권, 나다움을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 적절하지 않은 신문에 대해 답하시지 않으심으로 상황에 끌려가지 않으셨다.
- 손으로 맞는 상황에서도 해야할 말씀을 하셨다.
- 완전한 주체성을 가지고 상황을 주도하셨으며, 예수님답게 행동하셨다.
반대로 베드로는 그렇지 못했다.
-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에도, 상황에 쫓겨, 엉뚱한 대답을 했다.
- 주체성과 주도권을 잃었다.
- 그리고 평소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대답을 했다.
- 나다움도 잃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부각하려고 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차이이다.
- 이를 통해 욕구에 속박되어 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인생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 '나다움'을 잃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보여준다.
- 그래서 '나다움'을 지키신 예수님이 얼마나 멋있는지 부각한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진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보내진다.(24)
- 가야바에게 받는 신문은 안나온 것으로 봐서, 실권은 안나스에게 있다는 것이 더 드러난다.
24-27절: 베드로의 둘째, 셋째 부인
별다른 내용은 없다.
- 사람들과 대제사장의 종이 또 묻고, 베드로는 또 부인한다.
- 여전히 베드로는 비굴하다.
그 결과 목숨은 건졌지만, 베드로 자신을 잃었다.
- 나다움, 자존심, 인간의 존엄성을 잃었다.
이러한 베드로를 통해, 본문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 육체적, 정신적 욕구는 우리의 생명을 지켜준다.
- 하지만 같은 욕구 때문에 나다움, 사람다움을 잃는다.
- 사람다움을 잃은 채 살아 있는 것이 나을까, 죽음을 감수하고 사람다움을 지키는 것이 나을까?
- 우리가 평생토록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일 것 같다.
주제
우리는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한편으로 실없는 질문이다.
- 내가 나지 누구겠는가.
하지만 정말 답하기 어려우면서, 반드시 답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 내가 나로 살지 못한다면, 사람이 사람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 내가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혹은 알아도 원하는대로 선택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은, 얼굴 없는 유령 혹은 가면 쓴 삐에로로 평생을 사는 것과 같다.
- 이것이 내가 나로부터 소외되어, 나외의 관계마저 단절된 사람에게 일어나는 비극적인 인생의 결말이다.
그런 면에서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 만약 신앙이 물질적, 육체적 유익을 받고 정신적 위로와 힘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신앙은 모든 사람이 아닌 일부 사람에게만 중요한 것이 된다.
- 돈도 많고, 몸도 건강하고, 낙천적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신앙 외에도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 오히려 요즘에는 다양한 경쟁 상대들에게 신앙의 능력이 밀리고 있는 현실이다.
- 예전에는 교회가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채워주는 최고의 장소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최악의 장소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런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대와 문화와 지역을 초월하여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 유일한 것은,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이다.
- 이것은 공룡을 피해다니는 원시인에게도, 신분 사회에 사는 노예에게도, 홀로코스트에서 죽도록 일하는 유태인에게도, 민주 사회에서 시민으로 사는 우리에게도, 인공 지능에게 지배되어 살게 된 후손에게도 동일할 것이다.
그런데 신앙이 그것을 이뤄준다는 것이다.
- 내가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참된 '나'가 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회복하여 참된 '사람'이 되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회복되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결론
지금까지 '나다움'에 대해 말했다.
- '나다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 왜 우리는 '나다움'을 잃고 사는지.
- '나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 남은 질문 하나가 남았다.
- 사실상 가장 중요한 질문이지만, 절대로 쉽게, 단번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맨 마지마까지 미뤄놓은 질문이다.
'나다움'은 무엇일까? '사람다움'은 무엇일까?
- 결국 이것을 알면 모든 것은 다 끝나는 것이다.
- 이것이 최종 목적이며, 우리가 이뤄내야 할 결론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도, 누구도 절대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인류의 종말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단지 인생은 그 답을 찾아 가는 과정이며, 신앙만이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렇게 신앙을 통해 나다움을 찾고자 한 사람은 종말 이후 참된 '나'로서 영원토록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원토록 찾을 수 없는 나를 찾으며 방황하게 될 것이다.
- 그것이 천국이며 지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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