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드디어 예수님을 잡으러 들이닥친다.
-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그 사람이다.(I am.)'라고 자신을 세 번 인정하신다.
반면에 잡혀가신 예수님을 눈 앞에 둔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정한다.
- '당신도 예수님의 제자지요?'라는 질문에 '아니요.(Not I am.)'라고 예수님을 세 번 부정한다.
- 정확하게 말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예수님과 베드로의 차이는 무엇일까?
- 한 마디로, 관계 때문이다.
- 예수님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셨고,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다.
- 예수님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 구원자로서 제자들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인정하셨다.
- 반면에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 이것이 관계'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이다.
우리 교회의 현재 상태는, 관계가 중요한 것은 알지만, 관계'만' 중요하다는 것은 모르는 상태이다.
- 그래서 관계가 중요하다는 메시지에 모두 공감하면서도, 다른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못한다.
- 왜냐하면 관계 외에도 중요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 다른 것들에 힘을 쓰느라,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관계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왜 관계는 언제나 뒷전을 밀릴까?
- 관계 욕구가 인간의 욕구 계층 중에 최상위 욕구이기 때문이다.
- 사람은 하위 계층 욕구가 채워져야 상위 계층 욕구가 생긴다.
- 마치 재난 현장이나 비상 사태에는 사람들이 생존 외에 미적, 지적 욕구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 이는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계층 이론'에서 충분히 검증되었다.(나무 위키 참조)
관계에 대한 욕구, 즉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욕구가 모두 채워졌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욕구이다.
- 이 욕구를 가질 때에만, 사람은 자신 외의 외부 세계인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
-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어려운 것이다.
-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진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완전히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육체적, 정신적 욕구에 속박되어, 그 안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 자신에게 관계 욕구가 있는지 조차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육체적, 정신적 욕구의 고통을 경험하셨고, 죽음을 통해 욕구를 죽이셨다.
- 그리고 부활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완전하게 채운 상태로 다시 태어나셨고, 인간을 같은 상태로 재창조하셨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 욕구에서 건져내어져, 욕구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만이 관계 욕구, 즉 자신에게 관계가 필요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관계 맺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 사람은 배고프면 밥 생각 밖에 안난다. 체면이고 눈치고 아무 상관 없이 음식을 향해 돌진한다.
- 그런데 배부르면 그제서야 체면도 차리고, 다른 사람 눈치도 보고, 배려도 한다.
- 이렇게 다른 모든 욕구가 채워져야 최상위 욕구인 관계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인정되고 공감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여전히 배고프기 때문이다.
- 여전히 육체적, 정신적 욕구 채우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 너무 배가 고파서 그 이상이 있을 것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상태에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 먼저 육체적, 정신적 욕구가 채워져야 한다.
이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 나는 관계 욕구도 없지만, 육체적, 정신적 욕구도 그다지 없다.
- 그냥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 뿐이다.
- 욕구가 있고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해야하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직장을 다니는 이유도, 승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돈 많이 벌어 부자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 가족도 너무 소중하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졌고, 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돌보는 것이다.
- 만약 직장, 가족, 건강, 생명 모두 잃는다고 해도, 물론 힘들고 속상하겠지만, 아쉬움 마음과 함께 시원하고 후련한 마음이 같이 들 것이다.
- 내가 관계 욕구가 없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욕구 채우는데 정신 팔려서가 아니라, 욕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 나는 아무 욕구가 없다. 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욕구가 없다고 느끼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 지금 가지고 있는 욕구는 다 채워졌지만, 이보다 상위 욕구는 포기했기 때문이다.
-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것도, 필요한 것도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 더 필요한 것이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이다.
- 아무리 욕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세 끼만 굶으면 온통 음식 생각 밖에 안 난다.
- 자신이 얼마나 욕구에 속박된 존재인지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욕구가 없다고 느끼는 이유는, 자신에게 상위 욕구를 가질 능력 혹은 자격이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다.
- 이는 마치 우리가 삼성 이재용 부회장을 보며 부러워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오히려 지방에 마당 있는 단독 주택에 살며, 적당한 직업 가지고 있으면서 돈 걱정 안하고 소소하게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노력하면 손에 닿을 듯 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런 사람은 욕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욕구에 속박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이듯이, 욕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도 믿음이다.
-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이재용 부회장보다 더 부자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미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믿음이다.
-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해서 괜히 기대했다가 상처만 받을까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실망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
-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를 기대하신다.
-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전능자의 위치까지 올리시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 그럴 때에야 비로소 최상위 욕구인 관계 욕구가 불러일으켜 진다.
-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 싶어지고,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더 많이 품고 싶게 된다.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한다.
- 너무나 뻔한 소리지만, 이는 부나 명예에 대한 가난함과 배고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관계의 욕구를 느끼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간절한 소망 때문에 갈급함, 배고픔, 가난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 관계의 욕구가 너무 커서 마음의 가난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의 가난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 첫째로, 육체적, 정신적 가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 둘째로, 이미 자포자기하여 욕구조차 없기 때문이다.
- 분명히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마음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채워주실 것이란 믿음이 첫째이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체적, 정신적 욕구 이상으로 채워주실 것이란 믿음이 둘째이다.
이 두 가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계의 욕구를 갖게 하시는 것이다.
-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진의이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이 무엇인가?
- 하나님의 나라이다.
[마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다른 말로, 하나님의 통치, 또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 관계 욕구를 갖게 하실 뿐만 아니라, 관계 욕구를 채워주신다.
- 이것이 신앙 생활이다.
- 인간의 최하위 욕구부터 최상위 욕구까지 전부 채워주시는 일련의 과정이다.
신앙은, 영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구원 받아 의로워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도 가치있다.
- 뿐만 아니라, 육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가진 모든 욕구를 전부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서도 가치있다.
-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문화를 아우르는 매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 그래서 진리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세 종류 뿐이다.
- 욕구에 속박되어 사는 삶
- 욕구에 자포자기하며 사는 삶
- 욕구가 채워지며 사는 삶
평생을 욕구를 좇아 사는 것도, 욕구 없이 주어진대로 사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수 있다.
- 언제나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하나씩 이루며 사는 것도 재밌고, 아무런 목표 없이 현재 자신에게 만족하며 자족하며 사는 삶도 재밌다.
- 하지만 비참하다. 헛되다.
그러나 오히려 욕구가 채워지지만, 또 다시 무한한 욕구를 느끼는 신앙 생활은 더 힘들 수 있다.
-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육체적, 정신적 욕구 뿐만 아니라 영적 욕구까지 채워지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괴로움에 몸부림칠 수도 있다.
- 하지만 가치있다. 영광되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생명은 지켰지만, 비참함과 헛됨을 느꼈다.
- 반면에 예수님은 생명을 잃었지만, 영광됨을 느끼셨다.
가치있게 살기 위해서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
- 어디서든 예수님을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 그런데 그 용기가 줄 만족은 상상할 수 없이 클 것이다.
- 너무 상상할 수 없어서 막연하다. 그래서 더 용기가 안난다.
- 하지만 그 용기가 우리에게 줄 영광은 분명하다. 명확하다.
- 그것 믿고 신앙의 용기를 내자.
- 베드로처럼 헛되게 살지 말고, 예수님처럼 영광되게 죽자.
-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차이이다.
내용 정리
예수님은 12장에서 예루살렘이 입성하신 후, 13장에서 예루살렘 성 안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다.
- 그 이후로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마지막 기도를 하시는데, 장소를 특정하지 않는다.
- 다른 정보가 없기 때문에, 14-17장까지의 장소는 최후의 만찬 장소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다음 18장에서 다시 장소가 나온다.
-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동산이다.
- 기드론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과 올리브(감람) 산 사이를 가르는 골짜기이다.
- 골짜기를 지나 동산에 가셨다는 것으로 보아, 그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일 것이다.
-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셨던 곳이다.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그 기도가 생략되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장소가 동일한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는 예수님은 여기저기 끌려다니시며 재판을 받으신다.
- 18장 끝에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19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며, 20장에서 부활하신다.
- 그 중에 이번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장면이다.
이번 본문에서 눈여겨 볼 것은 세 번 반복되는 예수님의 자기 인정이다.
- 이는 아마도 다음 본문에서 나올 베드로의 부정을 염두한 복선일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재빨리 자신이 예수임을 인정하신다.
- 반면에 베드로는 자신만 살기 위해 재빨리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한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부각할 수도 있고, 무지한 베드로의 배신을 부각할 수도 있다.
- 이를 통해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성품을 제시할 수도 있고, 베드로를 반면 교사 삼아 참된 제자의 조건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키워드는 역시 '관계'이다.
- 예수님은 관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고, 베드로는 살기 위해 관계를 포기했다.
- 관계에 대한 인식 차이가 예수님과 베드로를 가르고 있다.
- 이러한 대조를 통해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부각하고 있다.
-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관계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우리의 시선이 죽음 그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길 바란다.
- 죽음 이면에 있는 '관계'에까지 이르길 바란다.
-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것 뿐만 아니라, 관계'만' 중요하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까지 알게 되길 바란다.
- 그것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이다.
- 그리고 그것이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이다.
- 그런 관점으로 본문을 보자.
1-3절: 예수님을 잡으러 온 유다와 무리들
유다는 예수님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
- 그래서 유다는 로마 군대, 제사장, 바리새파 소속 성전 경비병과 함께 예수님이 계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간다.
평소에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에 주둔하지 않는다.
- 그러나 유동 인구가 많은 유월절 같이 큰 명절에는 폭동이나 반란을 조기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주둔한다.
- 예수님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예수님을 체포할 경우 발생한 폭동에 대비하여 로마 군대가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을 들었다.
- 이는 현재가 밤이며, 사람들이 무지의 상태에 있음을 드러낸다.
-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인다.
4-9절: 세 번 반복되는 예수님의 자기 인정 - 관계 지키기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다가 먼저 예수님께 다가가 인사한다.
-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나서신다.
- 특히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을 완전히 알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18:4]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수동적으로 당하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택하셨음을 전한다.
- 예수님은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먼저 물으시고,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세 번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나서서 자신이 예수이심을 인정하신 것은 '관계' 때문이다.
[18:8-9]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9]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양 삼아, 제자들이 잡히지 않고 도망갈 수 있도록 하셨다.
- 만약 예수님이 나서지 않으면, 제자들이 공범으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제자들과의 관계를 우선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나서셨다.
둘째로, 이렇게 제자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나서신 것이다.
- 제자들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관계를 지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철저히 지키셨다.
- 이로써 예수님은 생명을 잃게 되셨지만, 하나님과 그리고 제자들과의 관계는 온전히 지키셨다.
-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인정을 통해 진짜 드러내려는 메시지다.
10-11절: 베드로의 칼 - 충성과 만행 사이
예수님이 잡혀가실 위협에 처하자, 베드로는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자른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충성일까, 아니면 멋모르고 설치는 만행일까?
-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나선 충성일 수 있다.
-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의도는 좋았을 수 있다.
반면에 만행일 수 있다.
- 성전 경비병에 로마 군대 수백 명이 있는 앞에서 단검 하나 꺼내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 오히려 예수님께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 의도는 좋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베드로의 진짜 속마음은 뭐였을까?
- 충성심 하나로 죽기로 달려든 것이었을까?
- 단검으로 정말 예수님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이었을까?
- 아니면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었을까?
- 단검 하나로 로마 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나서서 예수님을 지키는 척 하면, 싸움이 날 것이고, 그러면 능력 있는 예수님께서 모든 군대를 쓸어버려서, 손쉽게 싸움에서도 이기고, 예수님께 충성심도 인정 받게 될 것이라는 치밀한 전략이 담긴 행동은 아니었을까?
- 무의식적으로라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수백 명의 군대 앞에서 단검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말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말리신다.
- 그리고 순순히 잡혀 가실 것을 정하신다.
- 그것이 마땅히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신다.
- 예수님이 잡혀가셔서 고난 당하시는 것을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잔'이라고 말씀하신다.
- 아버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지키기 위해 '잔을 마시신다.'
- 예수님의 행위 동기는 언제나 '관계'이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 '복종' 하시는 것 같다.
-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순종', '복종'이 아니다.
- 이 단어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전제한다.
- 명령하여 지배하는 자와 순종, 복종하여 지배 당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순종'하시지 않는다.
- '사랑'하신다.
-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상호 관계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예수님께 '명령'하지 않으신다. 강제하지 않으신다.
- '권유'하시고, '요청'하신다.
- 예수님께는 '거절'할 능력이 있으시다.
-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른다.
-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미세하지만 명확한 차이를 구분하길 바란다.
- 이것을 구분해야, '관계'를 알 수 있다.
- '관계'를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
- '사랑'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다.
- '관계'를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 우리도 두려움이 아닌 사랑 때문에 신앙 생활 해야 한다.
- 이 세밀한 관계의 의미를 함께 알아가자.
주제
예수님 행동의 유일한 동기 - 관계
예수님께서 먼저 나서서 자신이 예수임을 인정하신 것도 제자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 제자들을 지켜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저지하고 '잔을 마시는' 이유도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관계'를 생각하실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 전지전능한 신이기 때문이 아니다.
- 전지전능한 존재는 타 존재와의 관계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자기밖에 모른다.
진짜 이유는 최상위 계층의 욕구인 관계 욕구를 제외하고 모든 욕구가 채워졌기 때문이다.
- 단순하게 말해서,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욕구가 모두 채워져서,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것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의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죽음을 또 다른 고통 회피 수단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 죽음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회피하는 것도 아니며, 수긍하고 체념하는 것도 아니다.
- 죽음은 단지 수단일 뿐이고, 죽음을 이용하여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갖는 무게가 너무 커서, 우리의 시선이 죽음에 자꾸 붙잡힌다.
-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전하시는 메시지는 외면한 채, 죽음만을 묵상한다.
- 예수님 정말 힘드셨겠다. 나도 저렇게 죽으면 어떻하지? 걱정한다.
죽음은 모든 욕구가 채워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일 뿐이다.
- 죽어도 상관 없을만큼 모든 욕구가 채워진 예수님께서 어떤 욕구를 추구하시는 지를 봐야 한다.
- 그 욕구를 보여주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 모든 욕구로부터 해방된 존재가 갖는 욕구가 무엇인지 밝히시려는 것이다.
-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관계 욕구를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관계 욕구를 갖고, 관계 욕구를 채우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제시하는 메시지이다.
예수님은 죽어도 상관 없을만큼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와 관계 맺고 싶으셨고, 또 그렇게 하셨다.
- 하나님과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셨다.
- 단순히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은 예수님 말고도 많다.
- 죽음은 사랑의 단편적인 표현일 뿐이다.
- 예수님의 사랑은 지배 관계, 이용 관계, 거래 관계, 수직 관계, 일방적 관계가 아닌 상호 관계, 순환 관계이다.
- 예수님이 우리와 순수한 관계 그 자체만 추구하셨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다.
-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 관계를 보지 못하는데, 관계를 봐야 그제서야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인류 전체의 유일한 소망이었지만, 인류 중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관계'를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다.
-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그 관계를 계속해서 지금까지 확장하고 계신 것이다.
관계는 인류가 가진 욕구 중에 가장 매력적이고, 고귀하며, 영광스럽고, 가치있는 최상위 욕구이다.
- 이 욕구만이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나누는 기준이다.
-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욕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지레 포기하고 산다.
- 하지만 예수님이 이루셨고, 성령님이 여전히 이루고 계신다.
결론
그래서 우리도 그 관계 알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자는 아기 들쳐메고 한밤 중에 모이는 것이다.
- 우리도 알게 모르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관계 욕구에 불을 지피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이미 우리 안에 일을 시작하셨다.
- 두 가지 일을 하실 것이다.
- 첫째로,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채우셔서, 욕구의 속박으로부터 건져내실 것이다.
- 둘째로, 관계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실 것이다.
- 그래서 관계 욕구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이 모든 일이 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따지고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 우리가 어떻게 우리 모든 욕구를 채울 수 있으며, 보지도 듣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관계 욕구를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림 뿐이다.
- 성령님께서 두 가지 일을 쉬지 않고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 뿐이다.
-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셨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것 뿐이다.
-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시기로 약속하셨고, 예수님은 그 약속 성취를 보여주셨으며, 성령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약속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 뿐이다.
믿고 기다리자.
- 지치고 힘들어서 포기해도, 다시 돌아와 기다리자.
- 인생은 기니까, 포기할 수도 있다.
- 하지만 인생은 아무도 모르니, 조금 쉬고 빨리 돌아오자.
- 그러면 어느샌가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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