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신앙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 왜냐하면 신앙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 만약 신앙이 삶의 규범이나 지침,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라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 목적이 분명하고, 관심 대상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 현재(관심 대상)가 좀 더 나아지기(목적)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은 목적도 관심 대상도 불분명하다.
- 목적은 '관계'인데, 관계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 관심 대상도 제한적인 현재가 아니라, 태초부터 종말까지 전부이다. 모든 시간이다.
왜 그러냐면, '진리'이기 때문이다.
- 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 모든 시대, 모든 문화, 모든 계층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 이것이 진리가 진리되는 결정적인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과 역설이 난무한다.
- 상 하, 좌 우, 안 밖, 앞 뒤를 모두 아울러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도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모호하면 안되고, 생명과 죽음을 나눌만큼 날카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 이러니 어렵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 본문도 그런 모순을 다룬다.
- 신앙은 세상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 둘 다에 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 이것이 이번 본문을 복잡하게 만든 주범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 이슬람교의 경우 세상 밖의 신앙에 치중한다.
- 지하드, 곧 성전(聖戰)이 그 예이다.
-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 고백이다.
- 그래야 죽은 후에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쿠란 4:74]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에서 성전하게 하여 내세를 위해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하나님의 길에서 성전하는 자가 살해를 당하건 승리를 거두건 나는 그에게 크나큰 보상을 주리라.(나무위키)
- 불교의 경우 이 문제 때문에 분열했다. 그래서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가 있다.
- 소승 불교는 세상 밖의 신앙을 추구하고, 대승 불교는 세상 안의 신앙을 추구한다.
- 이렇게 신앙이 세상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문제는 종교를 분열시킬만큼 어려운 문제이다.
- 칼빈 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도 마찬가지이다.
- 칼빈 주의는 세상 밖의 신앙에, 알미니안 주의는 세상 안의 신앙에 치중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이 둘을 아우른다.
- 이에 대해 유명한 명언이 있다. 참고로 나는 유치해서 싫어한다.
- "신앙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서서, 하늘에 속해서 사는 것이다."
- 어쨋든 의미는 전해진다.
- 세상을 등지고 세상과 단절하여, 하나님만 묵상하고 예배하며 사는 것도 신앙이 아니고, 반대로 세상과 섞이고 세상에 적응하여 사는 것도 신앙이 아니라는 뜻이다.
- 이게 말로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 지지만, 곱씹어보면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상한 말이다.
- 왜냐하면 모순이기 때문이다.
- 모순은 아무 것도 정의하고 설명하지 않는다.
- '이 물건은 완전히 까만 색이고 동시에 완전히 하얀 색이다.'라는 정의는 아무 것도 정의하지 않는 것과 같다.
- 우리 이성의 한계 안에서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17:15]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 제자는 세상에서 떠나지 않고 세상 안에 있는 사람이다.
- 즉,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세상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 우리는 이 설명을 많이 들어서 잘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이 설명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
- 그냥 각 사람 마음대로, 어떤 사람은 이 설명을 핑게삼아 세상에 속하여 세상을 누리며 산다.
-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이 설명을 위안 삼아 세상에서의 실패를 합리화하며, 세상에서 도피해서 자기 세계 안에 갖혀 산다.
- 세상에는 이 둘 밖에 없다.
- 단지 차이는 자신이 이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본문은 이 난해한 개념을 설명하기 때문에, 오락가락 뒤죽박죽으로 보인다.
- 그러나 이 난해한 개념을 몇 문장에 담은 것이 더 대단하다.
- 그리고 세상 안과 밖을 아우르는 신앙이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역 가장 마지막까지 이것을 두고 기도하시는 것이다.
본문을 계기로 우리 신앙도 되돌아보자.
-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한 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 세상에 검으면서 동시에 흰 것은 없다. 단지 좀 밝은 회색과 어두운 회색이 있을 뿐이다.
-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밖에 있을 수 없다.
- 단지 세상과 좀 구분되 보이는 사람과 세상과 얽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명확한 전제 아래서, 우리는 어느 쪽에 치우쳐 있을까?
- 신앙의 균형을 정확하게 잡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단지,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바른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자신을 옳다고 여기며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살던대로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 이 작은 차이가 우리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 하지만 이 작은 차이가 우리를 천국과 지옥으로 나눌 것이다.
그래서 이번 본문을 더 집중해서 봐야 한다.
- 미묘하고 난해해서 의미가 우리 눈에 확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 하지만 무게감은 생사를 가르만큼 크기 때문이다.
내용 정리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셨다.
- 하나님께 예수님 자신이 영광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 기도의 초점은 자신에게 있지만, 기도의 영향력은 하나님과 사람 전체에 미친다.
- 예수님이 영광 받으셔서, 예수님 ➔ 사람 ➔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원활하게 순환한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야 한다.
- 우리는 나를 위한 기도 따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따로 한다.
- 나의 신앙과 삶을 위한 기도와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한 기도가 구분된다.
- 왜냐하면 나와 다른 사람 사이가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 즉,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 나의 신앙의 나아짐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반대로 다른 사람의 신앙이 나의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나를 위한 기도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구분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셨다.
-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였다.
- 자신이 영광을 받아야, 결국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기 때문이다.
- 동시에 예수님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이기도 했다.
- 자신이 영광을 받아야,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영광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예수님 자신의 나아짐이 하나님과 사람들의 나아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상호 관계를 확인하고, 상호 관계를 순환시키고, 상호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 예수님 기도의 중심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도 관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의 중심이 관계가 되어야 한다.
- 나의 신앙과 삶이 다른 사람의 신앙과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다.
- 내가 하나님과 예수님께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다.
- 나의 작은 선택 하나가 내 신앙과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그리고 내 신앙과 인생이 옆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께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동시에 보람을 느끼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 나의 한 주의 삶이 고스란히 나의 설교에 담기고, 나의 설교가 얼마나 많이 여러분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의 한 주가 무겁게 느껴지는 동시에 보람차다.
여러분도 꼭 기억하길 바란다.
- 여러분의 한 주가 나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주는지.
-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담긴 신앙 고백이 다음 한 주 동안 나의 마음에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 드러내지는 않지만, 여러분의 한 마디가 나를 얼마나 웃고 울게 하는지.
- 이것 때문에 내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다 나를 위해서이다.
- 여러분의 신앙이 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 여러분도 여러분을 위해 나의 기도를 해주시길 바란다.
- 나의 신앙이 여러분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알기를 바란다.
- 그렇게 관계 속에서 관계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 참 기도이다.
이번 본문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기도의 초점 역시 '관계'이다.
- 본문에는 '관계'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서 의아할 수 있다.
-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 ➔ 예수님 ➔ 사람 ➔ 다시 하나님으로 이러지는 관계의 순환이 원활히 돌아갈 수 있도록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시는 기도이다.
- 왜 그런지 본문에서 확인해보자.
본문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먼저 본문은 크게 서론과 본론으로 나뉜다.
- 서론에서는 기도 대상과 기도 이유를 밝힌다.
- 본론에서는 네 가지 기도를 하신다.
기도 대상은 명시적으로 '제자들'이다.(9)
- 인류 전체가 아니라, 인류 중에 현재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열두 명의 제자들이다.
- 제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동 소유임을 밝히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데 일조했음을 밝히시는데(10), 이 또한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지켜주셔야 하는 근거가 된다.
기도 이유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시기 때문이다.(11)
- 예수님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 세상이 얼마나 가혹한지 아시기 때문이다.
- 그리고 제자들이 얼마나 나약한지 아시기 때문이다.
- 따라서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기 때문이다.
- 그런데 자신은 그 세상에서 벗어나지만, 제자들은 그대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 기도를 하시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기도가 시작된다.
- 크게 보면, 네 가지 기도가 나온다.
- 여기서 ①과 ④가 한 쌍, ②와 ③이 한 쌍으로 보인다.
바깥 한 쌍 ①과 ④를 먼저 보자.
- 언듯 보면, 11절은 제자들을 지키셔서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고, 17-19절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상관 없어 보인다.
- 그런데 이 두 구절이 '거룩'이란 단어로 연결되어 있다.
- 11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며 시작하기 때문이다.
- 왜 하나님을 갑자기 이렇게 부르실까? 도대체 거룩이 뭘까?
'거룩'만큼 범위도 넓고 애매한 단어도 없다.
- 원어 사전을 보면, 이 단어의 기원이 set apart, other, different로서, 확장하면 'likeness of nature with Lord', 'different from the world' 등의 의미를 갖는다.
- 즉, '세상과는 철저히 구분되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속성'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거룩'이란 단어를 하나님과 제자들에게 적용하나? 두 가지이다.
① 성령에 대한 암시
그 동안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돌아가신 후, 성령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 성령님이 예수님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제자들을 인도하신다.
그런데 본문에는 예수님의 떠나심은 있지만, 성령님의 오심은 없다.
- 성령님 대신 하나님 앞에 '거룩(holy)'를 붙여서 하나님과 성령님을 미묘하게 동일시하고 있다.
- 그래서 그 분이 제자들을 지키시고(11),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신다.(17)
② 기도 제목을 구체화
'거룩'이라는 단어를 매개로, '제자들을 지키는 것'과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암시한다.
- 본문에서는 '지키는 것'과 '거룩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 그런데 11절과 17절을 연결시키면, 예수님의 기도 제목이 구체화된다.
'거룩'이란 단어의 기원에는 set apart, 즉 '구분하다'는 뜻이 있다.
- 따라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세상 안에 있는 제자들을 세상과 섞이지 않고 구분되도록 하는 것이다.
- 세상 안에서 세상에 무한정 노출될 제자들이 세상과 구분되도록 예수님은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 세상에는 악한 자들이 난무하는데(15), 악한 세상으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하신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거룩 = 세상과의 구분 = 지켜짐>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분됨이 지켜지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구분이 실제 제자들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
- 결국 이것이 중요하다.
- 우리가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분되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안다.
- 그런데 핵심은 도대체 그것이 뭐냐는 것이다.
본문은 그것을 '관계'라고 말한다.
[17: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제자들이 서로 관계 맺어 하나 되는 것이다.
- 예수님 기도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 삼위일체 관계의 하나됨이 제자들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것은 모두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듯, 제자들도 그렇게 서로 관계 맺고 사랑하는 것이다.
- 그것이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것이다.
[행 2:44-45]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45]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공동 소유, 공동 생활에 대해 오해한다.
- 현상만 보고, 이면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 그러면서 이러한 공동 생활은 현 시대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말씀을 외면한다.
- 이는 마치 '식구'라는 단어를 '같이 밥 먹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한정하여, 같이 밥 먹으면 아무리 먼 관계여도 식구이고, 같이 밥 안먹으면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식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 '식구'는 '밥'이라는 생명 유지 수단을 공유할만큼 가까운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단어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공동 생활은 모든 것을 나눌만큼 가까운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 실제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 사건 이면의 본질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 지금 우리가 당장 재산을 다 팔아 같은 집에 살 수는 없어도, 그럴만큼 서로를 생각하고 아끼고 관계 맺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 물론 그러다보면 우리가 공동 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이벤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예수님도 공동 소유, 공동 생활을 하셨다.
[17:10]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 그러한 깊은 관계가 제자들 안에서 이뤄지길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이다.
[17: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것이 <거룩 = 세상과의 구분 = 지켜짐 = 하나됨>을 통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이다.
- 세상의 본질은 '지배 - 피지배 관계', '일방적 관계', '거래 관계'이다.
- 세상에 있으면 이러한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 그러면 제자들 안에서도 '상호 관계', '순환 관계' '사랑 관계'가 깨질 수 밖에 없다.
- 예수님께서 걱정하셨던 것의 핵심도 이것이다.
-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주셔서, 하나됨을 지켜주시기를 마지막까지 기도하고 계신 것이다.
다음으로, 안 쪽 한 쌍 ②와 ③을 보자.
- 1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쁨을 갖도록 기도하시고, 15절에서는 '세상 안'에서의 지켜주심을 위해 기도하신다.
- 그리고 둘 다 14절과 16절에서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시하신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현재 제자들은 세상에 남겨져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상태에 있다.
- 이는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미움 당함이 생긴다.
- 그러면 누구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신앙을 떠나 세상에 속하여 세상과 동화되려 한다.
- 그리고 그 고통을 이용하여 세상에 속박시키려는 것이 '악한 자', 즉 사탄의 전략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한데, 예수님은 두 가지 대비책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다.
첫째로, 기쁨이다.
- 제자들이 기쁨을 차고 넘치도록 느끼도록 하신다.
- 아무리 강심장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박해 당하고 미움 받으면, 힘들다.
- 게다가 강한 박해라도 한 번 받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지속되는 박해는 누구도 참을 수 없다.
- 그러다가 결국 배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고통을 참을 수 있도록,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차고 넘치는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
- 실제로 바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
[행 16:23-25]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 [24] ・・・・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다.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당했지만, 바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이러갈 수 있는 이유도 기쁨 때문이다.
- 누구도 의무감, 사명감, 책임감으로 신앙을 이어갈 수 없다.
- 그런 것들이 하나의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즉 박해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그 때에는 신앙으로 인한 직접적이고 순수한 '기쁨'만이 우리를 지켜준다.
- 언제나 실없이 웃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박해와 고통의 순간에 우리를 지켜줄 근원적인 '기쁨'을 기대하자는 것이다.
둘째로, '세상 안'에서 지켜주심이다.
- 박해를 당하면, 누구라도 도망가고 싶다.
- 세상의 박해를 당하니까,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 그래서 우리는 고통이 있을 때,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그것의 극단으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도 있다.
- 모세도 계속된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민 11:15]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견디게 하신다.
- 참을 힘을 주시는 것보다 죽게 하시는 것을 더 바랄 때가 있다.
- 그것이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견디게 하시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고통스럽지만 세상에 유익이기 때문이다.
- 세상의 가혹한 고통 속에서 끝까지 견디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복음은 전해지기 때문이다.
- 박해하는 세상과 그것을 견뎌내는 그리스도인의 대결 구도는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전도 방식이다. 예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일하셨다.
바울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빌 1:21-25]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22]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25]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 바울은 죽기를 원했다. 박해의 고통이 너무 크니까.
- 그러나 세상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왜냐하면 그것이 교회의 발전과 믿음을 더하게 하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 즉, 죽고 싶었으나, 교회를 위해 끝까지 견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견디는 힘을 주셨다.
이렇게 박해 속에서도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이다.
- 세상의 박해가 너무 크고, 그 박해 속에서 살아 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경험해보셨기 때문에 이것을 기도하신 것 같다.
-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살아서만 알 수 있는 신앙의 신비가 있는 것 같다.
주제
예수님 기도의 핵심 - 관계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자들이 '거룩'해지도록 기도하셨다.
-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안에서, 세상의 영형력을 강하게 받고 있어서, 세상과 뒤섞일 위협 속에 있는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셨다.
- '하나님의 지켜주심'이 없으면 누구도, 예수님조차 '세상과 구분'될 수 없고,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과 구분'되는 것은 무엇인가?
- '관계'이다.
- 이를 본문은 '하나됨'이라고 말했다.
-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과 같은 관계이다.
- 본문은 '공동 소유'를 통해, 소유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 '공동 소유를 할 만큼의 깊은 관계'가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은 다르다.
- 순환 관계, 상호 관계, 사랑 관계가 아니라, 지배 관계, 일방적 관계, 거래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세 부류가 있다.
- 세상에서 인정 받아서 지배 관계 피라미드에서 상위로 올라가 지배하는 사람
- 세상에서 인정 받지 못해서 지배 관계 피라미드에서 하위에 있지만, 상위의 지배에 잘 복종하는 사람
- 세상에서 인정 받지도 못하지만, 복종하지도 못해서, 세상에서 도피하여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는 사람
- 분명한 것은 세 부류 모두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 상대방을 이용하는 사람, 상대방에게 이용 당하는 사람, 누구도 이용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이용 당하지 않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세상에 있으면, 이런 잘못된 관계가 스며들기 마련이다.
- 하나님조차 이용하려 하고, 이용 당하려 하며, 둘 다를 거부한다.
- 그러면 기복신앙이 되고, 율법주의가 되며, 신비주의가 된다.
- 이는 세상과 구분되지 못하고 세상에 뒤섞여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그래서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세상 안'에 있어야 하고, '세상과 구분'되어야 한다.
- '세상 안'에 있기를 거부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 동시에 '세상과 구분'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세상의 거래 관계를 맺어 바른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 맺어 하나 되는 것만이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분되어 거룩하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
-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켜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결론
이전 본문에서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의 핵심도 관계였고, 이번 본문에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핵심도 관계였다.
-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과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기도로 확장될 수 있었다.
- 예수님 자신의 변화가 하나님과 사람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일으키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공동 소유 관계에 있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 나의 변화가 옆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
- 나의 변화가 예수님과 하나님께 얼마나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 나의 변화가 주변 사람과 하나님께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화하려는 동기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 나의 변화가 옆 사람에게 드라마틱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볼 때, 그래서 친밀한 관계가 얼마나 강력한지 경험할 때, 우리에게 변화하려는 동기가 생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 사람 안에서 관계의 힘을 경험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라게 된다.
-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라지 않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친밀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 친밀한 관계가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 말씀, 예배보다 우리 관계 안에서 친밀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 여기서 친밀감은, 마냥 좋고, 모든 것을 용납하고, 사랑해서 어쩔줄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관계의 최종 목표지,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우리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친밀감은 '영향력'이다.
-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주는가가 결국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친밀감의 척도이다.
- 친밀감을 통해, 관계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
- 별로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것 같다.
-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 최종 목표는 서로의 가치관에, 서로의 생명에,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지금 생각할 것은 아니다.
- 정말 사소한 것에서부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그렇게 쉬운 관계 맺기가 시작될 때, 그래서 관계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 그래서 그 관계를 위해 헌신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가 맺어질 것이다.
- 그것이 거룩함이다.
- 그것만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의 성취이다.
- 그것만이 결국 이번 본문의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소한 관계 맺기부터 함께 고민해보자.
- 그것이 우리 신앙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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