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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45) 16:4-15 예수님의 떠나심과 성령님의 오심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해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겠다.

- 돈, 명예, 권력을 전부 얻는 대신 평생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면, 그렇게 하겠는가?

- 만약 지금 가진 돈, 명예, 권력, 사랑하는 사람, 건강을 모두 잃고 딱 1년만 살면, 남은 평생 가진 것의 두 배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는가?(욥기의 내용)

- 만약 뱀 100마리 속에서 하룻밤을 자고, 살아있는 바퀴벌레 100마리를 먹고, 썩은 쥐 갈은 주스를 한 사발 먹으면 2억을 준다면, 그렇게 하겠는가?(실제 미국 예능 'fear factor'의 내용)

여기에 'yes'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 물론 나는 아니다. 나는 그냥 지금의 나로 살고 싶다. 지금도 충분하다.

- 그러나 돈, 명예, 권력을 더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아무리 돈이 좋아도 썩은 쥐를 어떻게 먹는가?

- 당연히 그럴 수 있다.

- 먹지 못하는 나보다 어떤 면에서 훨씬 합리적이다.

- 왜냐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2억을 버는데 드는 노력보다 썩은 쥐 먹는데 드는 노력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 투입보다 수익이 큰 투자는 안하는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

-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나보다, 눈이 없어 보지 못하지만 뭐든지 할 수 있는 유능한 내가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왜 안하냐? 이유는 두 가지다.

- 첫째로, 그만큼 유능해지고 싶지 않아서이다. 투자로 얻는 수익이 커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누가 주면 받겠지만, 굳이 그렇게 고생하면서 2억 가지고 싶지 않다.

- 둘째로, 내 관점에서 투자에 필요한 투입이 너무 커보이기 때문이다.

- 나에게는 미래에 있을 유능함보다 지금 내 눈으로 사랑하는 사람 얼굴을 한 번 더 보는 것이 더 가치있다.

신앙도 이와 같이 투자이다.

- 투입과 수익이 있다.

- 단순하게 말해서, 투입은 우리의 인생이고, 수익은 영원한 생명이다.

성경은 다양한 방법으로 투자를 유치한다.

- 투입이 얼마나 적은지, 즉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 설득한다.

- 동시에 수익이 얼마나 큰지, 즉 영원한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설득한다.

- 따라서 투입 대비 수익이 큰 고수익 투자라고 말한다.

- 그러면서 이 투자가 다른 어떤 투자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라고 설명한다.

-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증을 서기 때문이다.

- 고수익 투자는 불안전하여 손실도 크기 마련인데, 신앙은 고수익이며 안전한 투자라고 말한다.

이렇게 좋은 투자라면 모든 사람이 다 투자해야 마땅하다.

- 그래서 감추인 보화 비유가 나온 것이다.

[마 13: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 이러한 반응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아무도 가진 것을 팔지 않는다.

-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투입하지 않는다.

- 신앙에 전부를 투신하는 사람은 적다.

왜 그럴까?

- 처음에 했던 질문에 내가 'yes'라고 하지 못했던 이유와 똑같다.

- 투입은 커보이고, 수익은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 아무리 큰 수익을 준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내 인생을 희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 미래는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내 인생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선택과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선택 중에 무엇이 더 옳바른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성경은 당연히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러니 신앙에 투자하지 않는 것도 합리적인 것이니 지금처럼 적당히 살라! 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반드시 신앙에 투자해야 한다. 

- 이 사실 자체에 의문을 가진 사람은 우리 교회 공동체에 애초에 오지를 않았을 것이다.

- 우리는 '왜' 신앙에 투자해야 하나? 를 알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신앙에 무조건 투자해야 하는데 '어떻게' 신앙에 투자해야 하나? 를 알려고 모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어떻게'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 신앙에 투자하는 것이 이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에 투자하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첫째로, 구원을 통해 받는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큰지 잘 알면 투자 할텐데, 몰라서 못한다.

- 둘째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내 인생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 알면 투자 할텐데, 몰라서 못한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큰지 알아도, 인생의 가치가 얼마나 적은지 알아도 우리는 신앙에 투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즉, 이러한 앎이 우리가 신앙에 투자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것들을 알아도, 신앙에 투자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는 것이다.

- 우리는 신앙에 투자하고 싶은 마음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것들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을 더 알고 죄에 대해 더 많이 알았다고 해서 더 쉽게 투자할 수 있는 것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알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다.

- 앎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 그 선택을 하는데는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는다.

- 우리가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힘 내고, 노력하고, 수고해서 해야 하는 아주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 신앙이 언젠가는 쉽고 자연스럽게 될 것이라는 우리의 오해를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다.

- 더 많이 깨달아도, 천국을 보고 지옥을 경험해도,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도, 신앙은 똑같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택의 순간을,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막연한 미래로 미루지 말자는 것이다.

- 일단 먼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신앙에 투자하겠다는 선택을 하자는 것이다.

- 그러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이 많이 있을텐데, 실제로 어려움에 휩쌓인 절박한 상황 속에 들어가서 절박하게 기도하자는 것이다.

절박한 기도는 절박한 현실에서만 나온다.

- 배부르고 등 따시면, 누구도 절박하게 기도할 수 없다.

- 일부러 가난해지자는 것도 아니다.

- 신앙에 투신하여 현실을 포기하면, 자연스럽게 절박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 현실에 매진해도 성공하기 힘든데, 현실을 포기하는데 어떻게 풍요로울 수 있겠는가!

- 신앙에 투신하면 절박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절박한 현실에 본문의 제자들이 처한 것이다.

-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첫째로, 부모, 가족,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했다. 

- 유대교 출신인 사람들이 예수님만 따라 3년을 다녔으니, 유대교 가족, 친구들로부터 외면 당했을 것이다.

둘째로, 재산을 포기했다.

- 제자들은 3년 동안 일도 하지 않고 예수님만 따랐다.

- 3년 동안 어떻게 먹고 입고 잤는지 알 수 없지만, 정기적인 수입은 없었을 것이다.

- 그랬기 때문에 생업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제자들이 두 가지를 포기한 이유는 딱 하나다.

- 예수님이 책임져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 그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닐지언정, 어쨋든 제자들이 믿을 것은 예수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그 상황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한 가지를 더 포기하기 원하신다.

- 그것은 마지막 셋째로, 제자들이 유일하게 믿고 있었던 예수님이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포기할 것을 권하고 계신 것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만 남겨두고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제자들이 느꼈을 당혹감을 섬세하게 느껴보자.

-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닭 쫓던 개 된 것이다.

-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린 것이다.

- 사랑하는 사람도, 재산도, 예수님까지도 잃어버린 것이다.

-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까? 얼마나 당황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화가 났을까?

물론 예수님이 그냥 가시지 않는다.

-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신다.

- 그 분이 오시면,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풍요로운 신앙 생활을 약속하신다.

그런데 과연 제자들에게 이 말씀이 위로가 될까?

- 첫 질문에서 말했지만, 전혀 아니다.

- 사람은 이후의 아무리 큰 수익이 있어도 당장의 투입이 너무 크면, 투자 하지 않는다.

- 아무리 2억이 커도, 나는 썩은 쥐 주스 절대로 못먹는다.

- 제자들은, 이후의 보이지도 않는 성령은 모르겠고, 지금 당장 예수님과 함께 하길 원했을 것이다.

-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신다 한들, 지금 떠나신다는 예수님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 예수님 없이 혼자 남겨질 것이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다.

- 이제는 돈도 없고, 자신들을 받아줄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런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 당연히 그 믿음이 제자들을 불안함으로부터 건져주지 못할 것이다.

- 마치 눈 앞에 2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뱀 100마리가 우굴거리는 통 안에서 하룻 밤을 보내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과 같다.

- 2억을 위해 참고 참고 또 참는 것 뿐이지, 2억이 있다고 고통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다.

- 믿음이 있으면, 천국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면, 예수님을 내 손으로 만지면, 신앙에 투자하는 것이 수훨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 똑같이 어렵고, 똑같이 무섭고, 똑같이 화난다.

- 그냥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런 절박한 제자들의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 내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성령님이 오신다고.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두 가지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첫째로,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 내가 너한테 투자한게 얼만데, 갑자기 간다는거야?

- 성령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너 가지마! 라며 마음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둘째로, 성령님을 절박하게 찾았을 것이다.

- 사랑하는 사람도, 돈도 없고, 이제 믿었던 예수님마저 없네.

- 이제 남은 것은 약속된 성령님 뿐이구나.

- 정말 성령님만 의지해야겠다. 라며 절박하게 성령님만 기다렸을 것이다.

이러한 복잡하고 이중적인 제자들의 감정을 이해할 때, 예수님의 떠남과 성령님의 오심이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좀 더 공감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하게 예수님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다.

- 물론 제자들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부활을 약속 받으셨다.

- 부활 이후 받을 영광은 버림 받음의 고통을 상쇄하고서도 남을만큼 크다.

- 하지만 약속이 아무리 확실하다고 해도, 지금 당장 버림 받는 것의 고통은 참을 수 없다.

- 그 고통 때문에 땀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다.

- 이 때의 예수님의 심정도 본문의 제자들의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 하나님에 대한 짜증과 분노도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에 하나님에 대한 절박함이 극도로 치달았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기쁜 것이다. 

-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합친 것을 겪는 고통을 감수한다고 해도 얻을 가치가 있는 희열이 있다.

- 하지만 동시에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 신앙의 희열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 고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인류가 느낀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하셨다.

- 물론 육체적 고통만 보면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은 사람도 있다.

- 그러나 사회적, 정서적, 영적 고통을 전부 포함하면 예수님의 고통이 가장 크다.

제자들의 삶도 비참했다.

- 비록 설이긴 하지만, 12명의 제자 중에 요한을 제외하고 11명의 제자가 모두 순교했다.

- 예수님도, 제자들도 지금은 하나님 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계실 것이다.

- 그들이 느끼는 기쁨과 희열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클 것이다.

- 하지만 그들이 삶에서 느꼈던 고통 역시 상상할 수 없을만큼 컸을 것이다.

동일한 희열과 동일한 고통이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 희열이 있다고 고통이 상쇄되지 않는다.

- 희열은 희열대로 있고, 고통은 고통대로 있을 것이다.

- 그 희열도 그 고통도 이 세상의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클 것이다.

- 물론 희열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참을 수 있기도 하다.

- 하지만 희열이 있다고 해서 고통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 마치 2억을 준다고 하면 뱀과 함께하는 밤을 참아보려는 동력이 생기는 것이지, 고통을 즐거움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내용 정리

본문을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었다.

① 5-7절: 예수님의 떠나심과 성령님의 오심 선포 - 제자들에게 유익

② 8-11절: 성령님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 -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심

③ 12-15절: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이유 - 삼위일체의 관계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야 성령님이 오시고, 그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신다.

- 그 이유는 예수님 대신에 성령님이 참된 죄, 의, 심판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 성령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삼위일체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예수님의 뜻을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5-7절: 떠나시는 예수님 대신에 오시는 보혜사 성령님 - 제자들에게 유익

예수님의 떠나심 예고 때문에 제자들은 근심에 쌓여 있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믿으라고 위로하신다.

그런데 그렇게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또 다시 경고하셨다.

[16: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 사람들이 제자들을 회당에서 쫓아내고 죽일 것이라고 하신다.

-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안그래도 불안했던 제자들은 더욱 더 놀라게 된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매몰차게 또 다시 떠나심을 예고하신다.

[16:5]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 안그래도 견디기 힘든 박해를 예수님 없이 홀로 감당할 생각을 하니, 제자들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찰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6:6]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이렇게 한 없이 위로 받고 돌봄 받고 사랑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하신다.

- 좋은 리더는, 가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노출시켜서 적응하도록 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가혹한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차단하고 보호하는 사람일까?

- 아마도 노출과 차단을 시의적절하게 잘 이용하는 사람일 것이다.

-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차단하고 보호하셨다.

- 그런데 이제는 제자들이 준비 되었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 그래서 제자들을 가감 없이 세상에 노출시키신다.

- 현실이 얼마나 냉혹한지 있는 그대로 알려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세상으로부터 차단될 때일까, 노출되어 싸울 때일까?

- 우리는 준비가 되었을까, 아직 아닐까?

- 고민스러운 문제이다.

그러면서 또 다시 위로를 하신다.

- 보혜사, 즉 예수님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알려 주시는 성령님이 오실 것을 예고하신다.

- 그러면서 예수님이 떠나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근거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16:12-13]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 지금 당장 예수님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성령님께서는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진리의 말씀은 분명히 십자가 죽음 부활의 의미일 것이다.

- 십자가 사건으로 제자들과 온 인류에게 주어질 구원의 은혜일 것이다.

-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현재 시점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성령님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떠나시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온 인류에게 유익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그런 것이고,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위로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마치 2억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아무리 잘 알아도, 눈 앞에 있는 썩은 쥐를 보면 2억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2억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할 것이다.

- 마찬가지로 제자들 역시 홀로 감당해야 할 박해를 생각하며 성령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똑같으셨다. 

- 십자가 앞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도 그리스도로 받으실 영광을 포기하고서라도 십자가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다.

-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아무 말씀도 없이 함께 아파하시는 것 뿐이었다.

- 성령에 감동하게 하셔서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셨다.

- 오히려 하나님은 마취 주스까지 금지하시며, 고통을 더욱 온전히 느끼게 하셨다.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 역시 같은 길이다.

- 십자가의 길 끝에는 분명히 찬란한 영광이 펼쳐져 있다. 

- 그 영광은 사람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희열을 줄 것이 확실하다.

- 그러나 그렇다고 십자가의 길이 가뿐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 하나님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통제하셔서 십자가 길의 고통을 줄여주시지도 않는다.

- 우리가 십자가의 길 한 복판에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실 것이다. 예수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길의 고통을 홀로 온전히 느끼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 그리고 나서야, 바로 그 십자가 길 끝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 세상의 모든 고난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세상의 모든 희열보다 더 큰 희열을 주실 것이다.

-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십자가 길이다.

이러한 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인도하고 계신 것이다.

8-11절: 성령님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 -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우치심

이 구절은 유명한 구절이라서 다양한 해석이 많다.    

- 하지만 어떤 해석도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 왜냐하면 내용은 깊고 심오한 반면, 내용을 규정할 수 있는 정보는 적기 때문이다.

- 내용 자체가 짧고, 문맥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 따라서 대략적인 추론만 가능하지 정확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 아마 저자의 의도도 그러했을 것이다.

- 성령님의 역할을 대략적으로만 제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길잡이가 되는 단어가 있는데, 8절의 '잘못을 깨우치다'는 단어이다.

- 이 단어는 원어로 elegchó(엘엥코, convict, reprove)인데, 요한복음에 총 3회 나온다.

[3: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8:46] 너희 가운데서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단정하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 따라서 단어의 뜻은, '잘못을 판단하여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냐?

- 세상이 가지고 있는 잘못, 착각, 오해를 판단하고 드러내어 교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 특히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은 큰 오해를 가지고 있는데, 성령님은 그것을 바로잡아 주신다.

죄, 의, 심판은 한 두 마디로 쉽게 규정할 수 없는 너무 큰 단어이다.

- 본문은 한 단어 당 한 문장의 설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 그래서 대략적인 추론만 가능하다.

첫째로, 죄이다.

- 성령님께서 죄에 대해서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신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세상이 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참된 죄는 뭐냐?

[16:9]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성령님이 깨우쳐주실 참된 죄의 의미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의 근본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잘 몰랐다.

- 단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 특히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큰 죄로 생각했다.

-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으면서도, 안식일을 지키며 죄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단지 유대인의 문제가 아니다.

- 우리도 죄를 알지 못한다.

- 우리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적, 윤리적 책임만 어느 정도 지면, 지옥에 갈 죄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죄인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에게 죄를 깨우쳐 주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이다.

-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아무 문제 일으키지 않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세상 일에 빠져 예수님을 잠시 잊었던 자신에 대해 괴롭고 슬퍼하며 자책하고 회개하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 그렇게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머리로 그리고 마음으로, 감정으로 깊이 느끼며 고통스럽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둘째로, 의이다.

[16:10]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 본문이 말하는 참된 의는 예수님의 떠나심, 즉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이다.

-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확증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 이것만을 의라고 말한다.

성령님은 세상에 이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일어날, 그래서 영원토록 인류 전체에게 구원을 줄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도록 하신다.

하지만 세상은 이러한 의를 알지 못했다.

-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나, 율법을 지키며, 안식일에 시체처럼 가만히 있기만 해도 의로운 것이라고 착각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 열심히 교회 다니고, 종교 생활 하는 스스로를 보며,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의에 이른 것 아니냐며 은밀하게 스스로를 칭찬한다.

- 나를 비롯해서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령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착각하고 있다고 경고하신다.

- 의는 십자가 사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 내 안에는 아무런 의가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다.

-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의이심을 알게 하신다.

셋째로, 심판이다.

[16:11]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참된 심판은 세상 통치자를 심판하는 것이다.

- 세상 통치자를 심판하여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펴도 허사다.

- 율법을 지키고, 나쁜 행동 좀 덜 하고, 좋은 행동 좀 더 하는 것은 몸통을 그대로 둔 꼬리 자르기일 뿐이다.

- 꼬리 자르기는 악당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숨기고 보호하기 위한 연막 작전이다.

-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세상의 통치자가 자신의 실체를 숨기는 전략에 속아 넘어가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세상 통치자는 누구인가?

- 로마서에서는 세상의 통치자를 비유적으로 '죽음'으로 설명했다.

[롬 5: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 이 세상의 실질적 통치자는 '죽음'이다.

- 따라서 죄인의 인생은 본질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패워져 있다.

- 기쁨, 행복, 만족 등 인생 전체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회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로서, 죽음이 왕노릇 하지 못하게 만드신 것이다.

-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로 '죽음'을 죽이셨다.

- '죽음'을 무력화시켜서, 더 이상 '죽음'이 세상을 두렵게 하고 통제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만이 세상 통치자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질적 세상의 통치자인 '죽음'을 죽이는 것만이 참 심판이다.

그러나 세상은 심판을 잘못 알고 있다.

- 세상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긴다고 잘못된 심판을 하였다.

[7:23-24]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분개하느냐? [24]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

- 겉모습으로 심판단다는 것은, 율법의 참 뜻이 아니라 율법의 구문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배제한다는 뜻이다.

-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참 율법을 어기게 하였다.

- 유대인들은 안식일법보다 더 상위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법에만 급급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법에 그토록 목 매단 것이 정말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 단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 세상 통치자의 꼬리 자르기에 희생당한 것 뿐이다.

- 그로 인해 잘못된 심판을 하는 것이다.

- 그 결과 죄 없는 예수님을 심판하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돈과 성공, 명예를 위해 발버둥친다.

-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 좀 더 편안해지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한 번 가만히 생각해보자.

- 내가 정말 돈, 성공, 명예를 원하는가?

-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으면, 더 원하는 것이 없어질까?

-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 단지, 돈, 성공, 명예를 위해 매진할 때, 죽음의 두려움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럴 때 사람은 안정, 평안, 쉼을 느낀다. 

- 하지만 그 열중에서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불안을 다시 느낀다.

- 그래서 끊임없이 열중하는 것이다.

- 이 역시 세상의 통치자의 꼬리 자르기 전략에 이용되는 것 뿐이다.

그런 우리에게 성령님은 우리가 빠져 있는 거짓된 심판을 드러내시고, 참된 심판은 십자가 사건 밖에 없음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정리하면, 본문은 이렇게 성령님의 역할을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지만, 실상은 하나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 사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 그것을 알 때, 거짓된 죄, 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죄, 의, 심판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예수님도 행하시지 못하신, 오로지 성령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시기만 하셨지,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시지 못하셨다.

- 실질적으로 제자들이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12-15절: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체하실 수 있는 이유 - 삼위일체 관계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제자들을 실질적으로 진리로 인도하신 분이다.

[16: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 성령님께서 진리로 인도하시는 방법은 딱 하나이다. 앞으로 올 일들, 즉 십자가 사건이다.

[16:13]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 주신다는 것은, 미래 일을 맞추는 점쟁이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다.

-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 즉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 8-11절에 이어서 일관성 있게 십자가 사건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이다.

성령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삼위일체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① 먼저 성령님은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받아서 알려주신다.

[16: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즉, <예수님 ➔ 성령님>이다.

② 다음으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16:15]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12:49]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 즉, <하나님 ➔ 예수님>이다.

③ 그리고, 성령님은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다.

[16:15]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 즉, <성령님 ➔ 제자들>

④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린다.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 즉, <제자들 ➔ 하나님>

정리하면,

- 끊임없는 상호 관계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 그 중에 성령님은 닫혀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인간에게 개방하는 역할을 하신다.

이렇게 성령님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

-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이다.

- 이는 곧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라는 뜻이다.

-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셨다.

-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너무 이해하기 어려워서, 실제 그 사건을 겪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 십자가 사건은 너무나 사람의 직관과 이성을 벗어나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아무리 그 사건을 겪었어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셔야만 이해할 수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 시점에 제자들은 역설적으로 절대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다.

- 예수님이 가셔야만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다.

- 그래서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16: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 그리고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주제

① 신앙 생활의 필연적 과정 - 희열 이전에 있는 고통

No Pain, No Gain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 운동 강사나 운동 동기부여 영상에 자주 나온다.

- 건강을 얻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운동에 효과가 있으려면 고통이 있다는 뜻이다.

- 즉, 고통이 있어야 건강을 얻는다는 것이다.

왜 운동 강사들이 이런 말로 사람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는가?

- 단순하다. 운동이 힘들기 때문이다.

- 힘들 때 포기하면, 운동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 힘든 것을 참고 운동해야 건강해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 건강이라는 희열을 얻기 위해 힘든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운동이 좋다는 것, 운동을 해야 건강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그런데 운동하면 힘드니까 안하는 것이다.

- 이것이 말하는 것은, 투자 수익이 아무리 크고 확실해도, 당장 눈 앞에 투입이 힘들면 투자 안한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 중에 운동해서 건강해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 나머지 다수는 운동만 하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건강을 포기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운동을 안한다. 어리석은 것이다.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교회 안다니는 사람은 제외하고, 적어도 우리는 구원이 얼마나 좋은지 안다.

- 하지만 막상 말씀 보고 기도하려면 힘들다.

- 지금 하는 노력보다, 나중에 얻을 기쁨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안한다.

- 구원을 몰라서, 구원이 시답지 않아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알지만 힘들어서 안한다.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 이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우리와 똑같은 어리석음을 예수님도 겪으셨다. 

- 예수님도 죽음을 피하고 싶으셨다.

- 죽음 이후 받을 영광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알지만 힘들어서 그러셨다.

- 하나님은 예수님께조차 신앙 생활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시지 않으셨다.

- 예수님도 신앙 생활의 고통을 쌩으로 겪으시면서 힙겹게 걸어가셨다.

신앙 생활의 이러한 속성이 말하는 것이 뭐냐? 두 가지다.

첫째로, 신앙 생활은 희열 이전에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 그 고통은 진짜 힘들다. 예수님조차 견디기 힘들만큼 정말 크다.

- 이것을 알아야 한다. 

- 이것 모르면, 신앙 생활 하다가 힘든 일이 왔을 때 도망가버린다.

- 사람은 예상치 못하는 일이 갑자기 찾아 오면,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

- 그래서 성경은 신앙 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것이다.

- 힘든 일이 왔을 때 너무 당황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도록 말이다.

둘째로, 아무리 힘들어도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만약 예수님이 힘들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 만약 제자들이 힘들다고 예수님 전하지 않았다면?

- 그러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합세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 "너네가 한 번 겪어봐~ 이건 사람이 견딜 수 있는게 아냐~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이해하줘~"

- 그랬다면 인류 전체는 모두 지옥의 땔감이 되었을 것이다.

- 마찬가지로 우리도 감수해야 한다.

- 고통은 경감되지 않는다. 구원의 희열이 아무리 크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힘들지만 참고 열심히 신앙 생활 하자!

② 성령님의 역할 - 십자가 사건을 깨우치심

결국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가르쳐주시는 분은 성령님 뿐이시다.

- 예수님이 예고도 하시고, 십자가 죽음을 직접 행하기까지 하시지만, 그 의미까지 전달하는 것에는 실패하신다.

- 오로지 성령님의 몫이다.

- 제자들이 깨달은 시점 역시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님이 오셨을 때였다.

십자가 사건 안에는 죄, 의, 심판의 참 의미가 담겨있다.

- 죄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의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 심판도 죽음 부활을 통해 세상 통치자 '죽음'을 죽이는 것이다.

- 세상은 이것을 모르는데,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 역시 성령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필수적이다.

- 하나님도 예수님도 대신할 수 없는 성령님 고유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 하나님이 기획하고, 예수님이 수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 마지막에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해서 적용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결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해야할 일은 두 가지이다.

- 수익이 얼마나 큰지 설득하는 것과 투입을 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도 두 가지이다.

- 구원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 배워가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어 자유케 되어 하나님과 관계 회복되고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아가야 한다.

- 그래서 다른 것 아무 것도 안보이고 오직 천국에만 소망 두고 살 수 있도록 예수님께 세뇌가 되어야 한다.

그와 함께, 신앙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로, 참아야 한다. 인내이다.

[롬 5:3-4]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환난 속에서 인내할 때, 결국 천국 소망을 얻을 수 있다.

- 다른 것 없다. 그냥 쌩으로 참는 것이다. 악으로 깡으로 참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 성령님 핑게로 넋 놓고 있으면 안된다.

- 하지만 성령님 도움 없이 인내할 수 없다.

- 우리가 세상에 속아서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때,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신다.

- 세상에 빠진 우리가 정신 차리고 천국 소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 고통을 줄여주시지는 않지만, 고통을 참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신다.

우리는 항상 뭔가를 쉽게 얻고 싶어 한다.

- 운동하지 않고, 약으로 건강해지고 싶어 한다.

- 일하지 않고, 로또로 대박나고 싶어 한다.

- 공부하지 않고, 쪽집게 과외로 좋은 성적 갖고 싶어 한다.

- 신앙 생활 하지 않고, 구원 받고 싶어 한다.

이것이 얼마나 허황된 착각인지 돌아보자.

- 그리고 참고 노력하고 감수하고 인내하자.

- 그럴 때 성령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 성령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실 것이다.

- 이것 믿고 신앙에 투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