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번 동안 다뤘던 주제는 좀 어두웠다.
- 신앙으로 인한 박해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박해,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 신앙 생활을 하는 목적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신앙 생활이 우리에게 고통을 줄 것이라고 말했었다.
- 마치 혹부리 영감처럼,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다.
- 고통을 덜려고 신앙 생활 하는데, 신앙 생활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진다니.
- 게다가 하나님조차 그 고통을 경감시켜주시지 않으신다니.
- 이는 신앙의 목적과 정반대로 나가는 것이다.
- 신앙이 이렇다면 신앙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신앙에 고통만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 고통에 비할 바 없는 영광과 희열이 있다고 말했다.
- 하지만 사람은 뒤따르는 영광이 아무리 크다 해도, 당면한 고통 앞에 무릎 꿇기 마련이다.
- 그래서 신앙이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신앙의 어두운 면을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보다보니, 말하는 나도 듣는 사람도 부담이 되었다.
- 나도 말을 하다보니, 신앙의 어두움 면만 지나치게 부각하게 되었다.
- 그래서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신앙을 설명하는데 '기회 비용'이라는 개념을 사용해보겠다.
- 뜻은, A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대안들 중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대안의 가치이다.(나무위키)
- 사업을 선택하면 직장 생활의 안정성을, 직장 생활을 하면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육아를 하면 일하는 재미를 포기해야 한다.
- 이렇게 선택을 하면, 다른 대안들을 포기해야 한다.
- 지난 번에는 투자에 빗대어서, 선택으로 인한 유익을 '수익', 포기로 인한 손해를 '투입'이라고 말했었다.
- 선택을 할 때, 기회 비용이라는 투입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이렇게 모든 선택에는 기회 비용이 뒤따른다.
- 기회 비용이 싫어서 선택하지 않는다면, 선택으로 인한 유익도 얻지 못한다.
- 그래서 우리는 기회 비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하는 것이다.
신앙에서도 영생을 얻기 위해 인생이라는 기회 비용을 치뤄야 한다.
- 일상에서도 선택에 따른 기회 비용이 있고, 기회 비용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기회 비용과 고통이 있는 것이다.
- 신앙에 고통이 있다는 말은, 신앙에만 특별히 적용되는 새로운 원리가 아니다.
- 인생의 모든 선택에는 기회 비용이 따르는데, 그 원리가 신앙에도 해당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때때로 기회 비용을 아쉬워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 사업을 하다가 경제적 문제가 생기면, 안정적인 직장 생활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 직장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아이에게 큰 문제가 생기면, 육아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 육아를 하다가 잘나가는 사람을 보면, 일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게다가 기회 비용으로 인한 손해를 어느 정도 대체 가능하면 그래도 참을만 하다.
- 사업 하다가 빚을 졌지만, 아직 사업의 기회가 남아있다던가, 직장 생활 하다가 아이가 아팠지만 그래도 수술 받으면 회복할 수 있다던가, 육아 때문에 일을 못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시작할 수 있으면 괜찮다.
- 하지만 사업이 크게 어려워져서 가진 재산을 다 잃고 갚을 수 없는 빚까지 생긴데다가 사업의 기회 마저도 없으면, 아이가 치료해도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육아만 하다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면, 그래서 기회 비용을 감당할 수 없데 되면, 그 때에는 심각한 절망을 느끼게 된다.
- 물론 처음에 선택을 할 때부터 기회 비용을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생기면 고통스럽다.
이러한 과정이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 우리는 신앙을 선택함으로 인생 전체라는 기회 비용을 지불한다.
- 예수님을 믿겠다고 선택하는 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기쁨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앙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 신앙을 통해 얻는 유익이 기회 비용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 인생이라는 기회 비용을 지불하면, 신앙을 통해 영원한 인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회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 영생의 기쁨을 기대하고 한 선택인데, 냉혹한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온다.
- 물론 예수님을 믿겠다고 다짐할 때부터 세상의 인정을 포기한 것이지만, 실제로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고 조롱 당하면, 그리고 그 정도가 예상한 것 이상이면, 누구나 멘붕에 빠진다.
일상에서 아무리 잘한 선택이라도, 그 과정에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 사업을 시작했지만,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고, 직장에 다니지만 육아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고, 육아를 하지만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동일하게 신앙에서도 예수님 믿기로 한 선택이 좋았어도 과정에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도, 신앙에서도 고통과 후회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리하면, 신앙이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만약 신앙이 고통이라면, 인생도 고통이다.
-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과 마찬가지로, 신앙이라는 선택에도 그 과정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 신앙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 신앙이 인생에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앙에 고통이 있다는 말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을 선택하는 것에도 기회 비용이 있고 고통이 따른다.
-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도 수 많은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
- 세상을 선택한 사람도 세상에서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한다.
- 신앙도 그런 여러가지 선택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신앙과 세상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 신앙을 선택한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은 얻지 못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 반면에 세상을 선택한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은 얻지만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
- 세상에서 성공과 영원한 생명 중에 뭐가 더 가치있는가?
- 영원한 생명이 더 길다.
- 그래서 고통이 있지만, 신앙을 선택하자고 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만, 그런 어둡고 찝찝한 이야기를 굳이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해야 하는가?
- 신앙의 밝은 면만 얘기해도 동기 부여가 될까 말까인데, 어두운 면을 얘기해서 괜히 힘빠지게 만드는 것 아닌가?
-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얘기해서 괜히 기분만 찝찝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첫 번째 이유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니까 하는 것이다.
[16:33] ・・・・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
- 나도 어두운 얘기 하면 부담된다. 찝찝하다. 괜히 사람들 눈치 보인다.
- 어쩔 수 없이 나오니까 하는거다.
두 번째 이유는, 정말 필요해서 하는 것이다.
[16:3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 예수님께서 신앙의 어두운 면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낙담하고 시험에 들어서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 평화를 얻고, 용기를 내도록 하시는 것이다.
- 신앙의 어두운 면을 아는 것이 신앙에서 평화를 얻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왜냐? 신앙의 밝은 면 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 왜 평화를 얻는데 도움이 되나?
- 예를 들어, 우리가 외줄 타기를 훈련한다고 해보자.
- 그런데 우리에게 두 부류의 코치가 있다.
- 한 코치는 외줄타기가 쉽고, 안전하고, 절대 떨어질리 없다며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 다른 코치는 어렵고, 위험하고, 처음에는 실수해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떨어져도 너무 놀라지 말라. 라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 둘 중에 누가 더 좋은 코치인가?
- 긍정적인 코치에게 배우면,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줄에 올라갈 수는 있지만, 이내 떨어질 것이고, 결국 자기는 쉬운 것도 못하는 소질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포기할 것이다.
- 반면 부정적인 코치에게 배우면, 조심스런 마음으로 줄에 올라가며, 떨어져도 자신을 탓하지 않고, 외줄타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도전할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 신앙을 쉬운 것으로 알면, 신앙 생활이 어렵고 잘 안될 때, 자기를 탓한다.
-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불안해하다가, 결국 신앙을 포기한다.
- 반면에 신앙을 어려운 것으로 알면, 신앙 생활이 어렵고 잘 안될 때, 자기를 탓하지 않는다.
- 신앙이 으레 그런 것인 줄 알고, 차분하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린다.
-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
- 아무리 지독한 죄를 지은 순간에도 말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의도도 동일하다.
- 제자들이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반드시 실수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
- 가깝게는 십자가 죽음의 때였고, 멀게는 베드로가 유대인의 눈치를 보며 이방인을 배척한 때 등 실수한 때가 많았을 것이다.
-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수하고 낙심하여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길 원하셨다.
- 그래서 신앙의 어두운 면을 미리 말해주시며, 충분히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니, 너무 낙심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예수님을 믿으라고 격려해 주시는 것이다.
- 그러면서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고 위로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부정적인 면을 말하는 진짜 이유다.
- 신앙에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서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위로,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신앙이 얼마나 어려운지 자세하게 말하는 것이다.
- 어려우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려우니 실수해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이다.
- 우리가 문제라서 실수한게 아니라, 신앙이 어려워서 실수한 것이라고 말이다.
-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것이니, 실수했다고 자책하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자고 말이다.
물론 신앙의 부정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
- 일단 신앙 때문에 인생에서 시련과 고통의 시점이 온다는 것 자체가 듣기 거북할 수 있다.
- 하지만 굳이 신앙이 아니더라도 어떤 일을 하던 일을 하다보면 시련의 때가 있다.
- 신앙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고통의 때가 있다.
하지만 신앙이 인생의 다른 여러가지 일들과 다른 점이 있다.
- 사업도, 직장도, 육아도 최선을 다해서 하다가 힘들면 포기해도 된다.
- 포기하면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포기할 수 없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 신앙 외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 그래서 실패에 더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 실패가 없으면 좋겠지만, 누구나 신앙의 실패를 겪는다. 베드로도.
- 신앙에서 실패의 횟수는 아무 상관 없다. 1번 한 사람이 100번 한 사람에게 자랑하지 못한다.
- 마지막 실패 후에 다시 일어섰냐 아니냐만 중요하다. 일어난 사람만 천국에서 자랑할 수 있다.
- 그래서 신앙은 '실패하지 않는 법'보다 '실패하고 일어서는 법'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 그래서 신앙의 어두운 면을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
- 신앙의 어두운 시기를 예상하고 대비해서 일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의도라는 것을 기억하며,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본문을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었다.
① 16-23a절: '조금 있으면'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 - 제자들에게 있을 고통과 기쁨의 예고
② 23b-28절: 아버지께 구하라는 권면 - 예수님으로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
③ 29-33절: 여전히 무지한 제자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약속하시는 예수님
-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회복 이후 제자들이 맺게 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해 주신다.
-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있을 회복을 선포하신다.
16-23a절: '조금 있으면'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 - 제자들에게 있을 고통과 기쁨의 예고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떠남과 성령님의 오심을 말씀하셨다.
- 자신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며, 그 이유는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올바로 깨닫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성령님만이 예수님 일생 전체의 의미를 올바로 설명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 아이러니하지만, 예수님이 올바로 전해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떠나셔야만 했다.
이번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떠나심을 예고하신다.(16)
- 그리고 그 시점도 얼마 남지 않았다.
- '조금 있으면'이다.
- 16장은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마지막 장이다.
- 다음 17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를 하신 후 18장에서 바로 잡혀가신다.
그런데 또 '조금 있으면' 부활하실 것도 예고하신다.(16)
- 이 역시 예수님 부활에 대한 마지막 예고이다.
- 예수님 없이 홀로 남겨질 제자들이 낙심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실수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도, 예수님은 돌아오셔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실 것까지 예고하신 것이다.
- 분명히 예수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에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 하지만 그 고통 뒤에는 반드시 회복과 기쁨이 있을 것임도 함께 예고하신다.
- 이에 대해서 20-22절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17)
-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해 못하는 제자들이 부활을 이해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 특히 '조금 있으면'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
- 시점에 대한 강조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19),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20, 21, 22)
- 본문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해서 3번 설명하고 있는데, 죽음과 부활 따로 떼어서 설명하겠다.
죽음에 대해서
첫째로, 제자들은 울며 애통하는 반면, 세상은 기뻐한다.(20)
둘째로, 근심에 잠긴다.(21)
셋째로, 근심에 쌓인다.(22)
- 먼저 염두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아닌 사람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죽음에는 대속 제물, 예수님의 순종,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 등의 의미가 있지만, 예수님이 죽을 때 제자들과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게는 기쁨을 준다.
- 만약 전쟁이 나서 다 같이 고생하면, 누구나 서로 공감하며 위로한다.
-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만 고통 당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제자들의 고통을 보며 즐기고 비웃는다.
- 아무도 제자들을 공감하고 위로하지 않는다.
-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다 같이 고통스러운 전쟁보다 더 고통스럽다.
- 이 고통이 앞으로 곧 제자들이 겪을 고통이다.
부활에 대해서
첫째로,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20)
둘째로, 기쁨 때문에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다.(21)
셋째로, 어떤 사람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확실한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22)
- 부활 역시 영생,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확증 등의 의미가 있지만, 부활로 인한 제자들과 세상의 반응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때문에 상실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제자들의 감정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 모든 것을 잃었던 제자들은 잃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 받는다. 마치 욥처럼.
- 그래서 이전의 고통은 기억하지도 못하며, 또 다른 고통으로 인해 훼손될 수도 없는 완전한 기쁨을 얻는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제자들은 이러한 고통과 기쁨을 느꼈다.
[20:19]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을 잃은 상실감, 자신의 인생을 잃은 실패감, 세상의 정죄를 받은 죄책감 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 반면에 그런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기쁨에 겨워,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유대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한다.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 이렇게 베드로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 결과 3000명의 신도가 생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제자들의 반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 성경은 제자들의 반응을 왜 적어 놓았을까?
- 단순히 지식 습득을 위한 것을 아닐 것이다.
- 제자들이 고생을 했구나, 제자들이 다시 기뻐했구나를 아는 것은 의미 없다.
목적은 우리도 날마다 이러한 고통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십자가를 통해서 매일 매일 열탕과 냉탕을 오갈 것이다.
- 예수님 때문에, 상실감, 실패감, 세상으로 인한 죄책감을 느낄 것이고, 또 금세 고통은 잊어버리고 기쁨에 빠져들 것이다.
- 이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이다.
이러한 고통과 기쁨을 매일매일 반복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은 2000년 전에 한 번 일어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매일매일 반복되는 영원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으로 인한 고통이 올 때,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참고 인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조금만 더 참으면, 지금 고통은 다 잊혀지고, 기쁨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는 '그 날에는'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께 묻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3)
- 왜냐하면 '그 날'은 예수님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이후부터 종말까지의 날이고, 그 떄에는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바르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면 예수님께도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었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고통 이후에 기쁨과 승리와 영광이 올 것을 다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그것이 다음 단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23b-28절: 아버지께 구하라는 권면 - 예수님으로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게 되면, 하나님도 바르게 알게 된다.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되면,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구한 것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6:24]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는 단지 구하고 받는 give and take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이 구절을 읽고 하나님께 구했는데 왜 안주시냐며 실망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렇다.
- 단순한 구하고 받는 관계를 넘어, 하나님과 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다.
[16:27]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도 하나님께 분명히 구했을 것이다.
- 이들은 유대인이다.
- 모든 명절, 절기, 제사 때마다 평생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며 뭔가를 구했을 것이다.
- 하지만 예수님 이전에는 누구도 하나님을 바르게 안 사람이 없었다.
- 하나님을 몰랐으니, 누구도 하나님께 바르게 구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 그러니 당연히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나타나셨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시는 것이다.
-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16:26]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했다.
- 우리가 예수님께 구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대신 구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정확히 말씀하신다.
- 일단,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예수님 없이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이름'의 역할은 무엇인가?
[16:27]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다는 뜻이다.
표현이 굉장히 모호하다.
-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인가,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맺는 것인가?
- 분몬은 예수님을 사이에 두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그렇다고 예수님의 역할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를 이러한 비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모르는 가게에 가려면 간판을 봐야 갈 수 있다.
- 간판을 못 찾으면 가게도 못찾는다.
- 그런데 간판을 봤다고 해서 간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간판은 가게가 아니다.
- 우리가 들어가는 곳은 가게이다.
- 여기서 간판이 예수님, 가게가 하나님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sign), 즉 네온 사인이나 간판과 같은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다.
- 그러나 결국 우리가 만나게 되는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이다.
물론 이 비유가 종말 이후에 맺게 될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 설명해주지 않는다.
- 일면 뿐이다.
- 이 설명에도 약점이 있다.
- 예수님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다.
- 하나님과 예수님의 역할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만, 어떤 비유로도 불가능해 보인다.
- 왜냐하면 설명 중심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 삼위일체의 신비는 어떤 방법으로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조차 비유를 이용해서 다방면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셨지만, 언제나 그 한계를 인정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16:25]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였으나, 다시는 내가 비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 줄 때가 올 것이다.
- 예수님도 아버지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노력하셨지만, 부족하다는 것을 아셨다.
- 그리고 더 이상 비유가 아닌 직접 이야기 해주실 그 날을 기대하셨다.
- 비유는 '말'이라는 구닥다리 소통 수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한계가 있다.
- 그런데 만약 소통하는데 '말'이라는 수단이 필요 없이, 즉 아무런 수단 없이 직접 소통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것이 바로 성령님을 통해 뇌를 전선으로 연결하는 방법이다.
- 그렇게 되는 것이 참 관계이며, 예수님과 그런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구원이며,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직접 맺게 되는 것이 신앙의 최종 목적이다.
세상에 이 관계를 전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온 것이고, 또 그 관계를 성취하시기 위해 다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다.(28)
이렇게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설명하셨다.
- 이 정도면 제자들도 알아들었을듯 싶은데, 그렇지 않았다.
29-33절: 여전히 무지한 제자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약속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은 완전히 착각한다.
-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비유'가 아니라 '분명하게' 말해 주실 때는 미래이다. 현재가 아니다.
[16:25] 다시는 내가 비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 줄 때가 올 것이다.
- 하지만 제자들은 그 시점을 현재라고 착각했다.
-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이미 알았다고 착각했다.(30)
[16:30] 이제야 우리는 ・・・・ 알았습니다.
이렇게 착각한 사람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 대표적으로 니고데모이다.
[3: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몰랐다.
[6:42]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7:27]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 이런 유대인도 있었다. 안다고 확신했지만, 아무 것도 몰랐다.
자아도취된 제자들은 멋있게 믿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않으신다.(31)
[16:31]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이 말씀의 원문을 직역하면, 'now you belive?'이다.
- 이 문장을 앞뒤 문맥에 맞게 번역하면, '이제는 너희가 믿는다고?'가 더 적절하다.
- 즉, 제자들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부정하신 것이다.
부정이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다.
- 32절은 한 마디로 제자들의 배신이다.
- 예수님이 잡히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릴 것이고, 제 갈길로 갈 것을 예고하신다.
-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알고 계셨고, 그 이유는 제자들이 자신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31절의 말씀을 긍정적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너희가 믿는다고? 아니다! 안믿는다!'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끝까지 믿음이 없었다.
-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까지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 오히려 믿음 있다는 착각에 빠져 헛된 신앙 고백만 남발한다.
- 착각 자체보다도 더 이상 착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더 가슴 아픈 일이다.
- 그렇게 예수님은 홀로 쓸쓸하게 잊혀져간다.
- 함께 있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콩 밭에 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홀로 계신 것은 아니었다.(32)
-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다.
- 제자들과 세상은 예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끝까지 예수님과 관계를 유지하셨다.
- 이를 통해 본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대비하여 배신하는 제자들의 실패를 더욱 부각한다.
제자들의 실패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두 가지가 있다.
① 신앙이 진짜 어려운 것이구나.
- 3년 간 예수님께 직접 배운 제자들도 신앙에 실패했다.
- 정확하게 예수님께만 초점을 두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닌다 한들 결국에는 배신하는 것이 신앙이다.
- 적당한 수준에서, 내 인생도 어느 정도 지키면서, 주변 사람들의 비위도 어느 정도 맞춰 가면서 하는 신앙 생활의 결론은 배신이다.
- 그러니 정말 천국 가려면,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제외한 세상 전부를 미워해야 한다.
- 이렇게 본문은 신앙 생활 똑바로 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한다.
② 그러나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것이구나.
- 3년을 예수님께 완전히 헌신했던 제자들도 실수했다.
- 성령을 받고, 3000명을 전도하고, 그렇게 십여 년을 빡세게 신앙 생활을 한 후에도 베드로는 또 실수했다.
-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면, 이전 실수는 전부 삭제되는 것이 세상 원리와 다른 신앙만의 특징이다.
- 따라서 본문은 신앙에서 실수한다고, 실패한다고,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 다시 일어서라고 격려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권면과 위로를 하신 것은,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33)
- 신앙 생활은 정말 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다.
- 우리의 인생보다 더 긴 것이 신앙 생활이다. 죽어도 이어지니까.
- 그 긴 길을 끝까지 가려면,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 예수님만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수 많은 유혹을 모두 견뎌야 한다.
- 약간의 욕심만으로도 신앙 전체가 흔들려서 불안해질 수 있다.
- 오로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뿐만 아니라, 긴 신앙 생활 동안 예상치 못한 별의 별 일이 다 생긴다.
- 그러다보니 실수할 수 밖에 없다.
-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오히려 교만이며 불신앙이다.
- 실수해도 된다. 잠시 한 눈 팔 수 있다.
-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할 수도 있다.
- 예수님 배신하고 죽음에 넘겨줄 수도 있다.
- 크게 보면 그것도 신앙 생활의 일부이다.
- 제자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신앙을 배웠기 때문이다.
- 그러니 너무 잘하려 하지 말고, 편안하게 예수님 믿으면 된다.
- 그럴 때 예수님이 주시는 특별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의 환란 속에서도, 유혹 당하고, 실수하고, 실패한 후에도 다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정으로 승리하셨으니까.
- 우리를 유혹하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까.
- 예수님이 유일한 진짜 왕이시니까.
이렇게 기복 있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진짜 신앙 생활이다.
주제
① 예수님의 죽음 부활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 - 고통과 기쁨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인생 전체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인생과 함께 영생까지 되돌려 받는 것을 의미한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제자들에게 고통과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 그래서 우리도 신앙 생활에서 인생의 박탈과 되돌려 받음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어떤 순간에 어떤 계기로 누려왔던 인생을 모두 포기하고 예수님께 헌신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 그 때가 우리 모두에게 올 것을 확신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말이다.
- 어떻게 확신하냐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까지는 다 재미있게 신앙 생활 할 수 있다.
그런데 위기가 온다.
- 우리가 인생을 걸고 헌신했던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시는 것이다.
- 그 때 느낄 상실감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만 남았는데, 그 예수님마저 빼앗기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왜 빼앗기냐면, 우리가 비록 순수하게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 예수님이 참 예수님으로부터 살짝 빗겨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더 올바른 예수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존에 알던 예수님을 빼앗아 가시는 것이다.
- 복음서의 제자들이 겪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제자들이 정말 예수님을 완전히 몰라서가 아니라, 알지만 더 바르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빼앗김은 인생에서 반복된다.
- 우리가 기존에서 벗어난 새로운 예수님을 알았다고 해도, 그 예수님과 참 예수님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잘 알아도, 종말 전까지는 참 예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 인생을 통해서 조금씩 더 잘 알아가는 것 뿐이다.
- 그래서 알고 있던 예수님을 빼앗기고, 새로운 예수님을 다시 받는 죽음과 부활, 고통과 기쁨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② 고통과 기쁨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 -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고통과 기쁨을 통해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게 된다.
- 이렇게 깊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본문은 '모든 것을 구하고, 구하는 모든 것을 받는 관계'로 설명했다.
-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참 특별하다.
세상에는 '모든 것을 구하고, 구하는 모든 것을 받는 관계'가 없다.
- 우리는 아랫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구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는 없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 반면에 윗 사람에게는 구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모든 것을 구할 수 없다. 어렵기 때문이다.
- 따라서 상하 관계, 수직 관계에서는 모든 것을 구하고, 구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다.
이런 관계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 먼저 완전히 수평 관계여야 한다.
- 그래야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
- 그리고 대상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 그래야 구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이렇다는 것이다.
- 전능한 하나님과 완전히 수평 관계를 맺는 것이다.
완전한 수평 관계가 뭘까?
- 제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 우리는 단 한 번도 수평 관계를 맺어 본 적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 세상에는 없는 관계이다.
-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수평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착각이다.
- 친구 관계조차 상하 관계가 있다.
-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과 맺게 될 수평 관계를 상상해볼 수는 있지만, 제대로 알 수는 없다.
- 정말 신비롭고, 이상적이며, 완전한 관계라는 것만을 기억하자.
- 누구도 지배 당하지 않고, 종속 당하지 않고, 뺏기거나 빼앗지 않지만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관계이다.
그 완전한 관계를 기대하며 신앙 생활하자.
③ 우리가 실패해도 괜찮은 이유 - 예수님의 승리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패를 '예고'하신다.
- 이 말은 제자들의 실패가 '필연'이라는 뜻이다.
- 다시 말해서, '반드시' 실패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왜 우리는 반드시 실패를 해야 할까?
- 실패를 통해서만, 우리가 우리의 실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평상시에는 우리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지금처럼 각자 일 하며 신앙 생활 할 때는, 우리 전부 다 믿음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나름 신앙에 진지한 것처럼 보인다.
- 어느 정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성경은 전혀 아니라고 말한다.
- 신앙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그래서 실수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 신앙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도록 말이다.
- 우리 안에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밝히시기 위해서 말이다.
- 상황만 주어지면, 우리가 언제든 예수님을 팔아 먹을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우리의 겉모습만 보고 잘 할 수 있을거라 착각하지 않고, 예수님만 의지해서 신앙 생활 하도록 말이다.
신앙의 진가는 실패했을 때 나타난다.
-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한 번 실패했다고 다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 예를 들어, 말씀 기도 한 번 못했으니, 이번 달은 아예 쉬자는 것이다.
- 반면에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바로 다시 일어난다.
일어나는 동력은 무엇인가? 결국 예수님의 승리이다.
- 예수님이 나의 죄와 실패를 이기셨다는 믿음이다.
-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 일어나셨듯이, 나를 실패 가운데 일으켜주시리란 믿음이다.
- 죽음에서 일어나신 예수님은, 나의 실패는 보시지 않고, 다시 일어남을 보실 것이란 믿음이다.
- 그래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일어나심으로 우리에게 전하시는 메시지다.
- 나도 일어났으니, 너희도 일으켜주겠다!
- 이 말씀이 우리를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두 가지 생각에 빠질 수 있다.
① 신앙 참 쉽네. 그냥 이렇게 지금처럼 적당히 열심히 하면 되는거지. 이렇게 열심히 말씀, 기도, 예배, 구제, 봉사 하다보면, 죽어서 천국 가겠지!
② 신앙 너무 어렵다. 열심히 하려 하지만 맨날 실패만 하네. 난 해도 안되는구나. 하나님이 난 인도해주시지 않는가보다.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은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 베드로조차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 지금 하는 정도로는 택도 없다고 말이다.
- 상황만 조금 변해도 바로 배신할 것이라고 말이다.
동시에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이 쉽다고 말한다.
-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 베드로도 실패했다고 말한다.
- 누구나 반드시 실패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 실패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하고 말한다.
- 그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증표라고 말이다.
- 그러니 다시 일어서라고 말한다.
이는 신앙이 어렵냐 쉽냐의 문제가 아니다.
- 신앙이 어렵다는 핑게로 지레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 신앙이 쉽다는 핑게로 대충하지 말라는 것이다.
- 신앙 생활 잘하자는 것이다.
너무 잘하려다가 아예 포기하지도 말고, 대충하지도 말고, 최선을 다하되 불안해하지 말고 평안하자는 것이다.
- 한 마디로, 정직하게, 진솔하게, 진지하게 하자는 것이다.
-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어떻게 하면 신앙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 그리고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예수님이 인도하신다고 믿는 수 밖에 없다.
- 그리고 결과는 예수님께 맡기는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신앙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것이 인생이 아닐까?
-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하고, 결과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 밖에.
- 승리하신 예수님이 우리도 승리케 하실 것을 믿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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