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은 해결되지 않은 논쟁이 많은 단락이다.
먼저, 21장의 존재 자체가 논쟁이다.
- 20장 마지막에 결론 문구가 나오기 때문에, 그리고 21장 내용이 독특하다는 이유로, 21장은 삽입된 단락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
베드로가 갈릴리로 돌아간 경우도 논쟁적이다.
- 신앙을 포기하고 생업으로 돌아갔다는 견해와 신앙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먹고 살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와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라는 견해(막 16:7)가 있다.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 숫자인 '153'도 논쟁적이다.
- '153=100+50+3'이라는 견해, '153=1+2+・・・・16+17'이라는 견해, 고대인이 알고 있는 물고기의 총 가지 수라는 견해, 단순한 사실 진술이라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이 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부인과의 연관성도 있다.
-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당시에, '불을 쬐고 있다'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
- 그리고 본문의 9절에서도 예수님일 '숯불'을 피워 놓고 베드로를 맞이하신다.
- 이를 두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신 목적을 배신한 베드로에 대한 용서라고 말한다.
-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같은 상황을 만드셔서 베드로의 내적 수치를 극복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식사를 성만찬 혹은 오병이어 기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 예수님께서 빵과 생선을 '집어서' '주시는' 모습이 성만찬과 유사하다.
- 그리고 음식이 빵과 생선인 것이 오병이어 사건과 유사하다.
이렇게 다양한 논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다.
- 다 읽어보는데 힘들었다. 게다가 논쟁에 대한 결론도 없었다.
- 대부분 결론 없는 논쟁으로 채워지다 보니, 모든 해설서에서 본문의 초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 다양한 논쟁을 통합하여 하나의 메시지를 찾으려는 시도가 없었다.
- 그것이 본문을 해석하는 목적인데도 말이다.
- 결국 어떤 해설서도 본문을 해석하지 않았다.
본문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는 것일까?
-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일까?
- 제자들의 무지를 확인하는 것을까?
- 베드로를 용서하기 위한 것일까?
- 성만찬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일까?
-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을 본받으라는 것일까?
이런 메시지들이 본문에 포함된 것은 분명하다.
- 하지만 이것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 그것을 찾는 것이 이번 본문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해서, 본문의 핵심은 <전도>와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 풀어 말하면, 성령님의 시대에 제자의 역할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전도하는 것이다.
- 그런데 전도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
- 그리고 전도는 결과적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든다.
- 본문은 이를 물고기 잡는 이야기와 예수님과 식사하는 이야기를 엮어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전도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달리 표현하면,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다.
- 성령을 통해 깨닫는 예수님의 말씀이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다.
- 이는 곧 예수님께서 사역 내내 하셨던 말씀이다.
자세히 말하면,
-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 말씀 따라 이웃을 사랑한다.
- 그런데 사랑 중의 최고 사랑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 그로 인해 예수님을 함께 믿는 공동체가 생긴다.
- 성경은 그 공동체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한다.
- 그 결과 예수님의 몸을 통해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진다.
-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전보다 더 믿고 따르게 되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고 ・・・・
-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반복되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 이러한 선순환이 본문이 전하는 제자의 모습이다.
논외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면,
- 예수님과의 감각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 공동체를 소홀히 여긴다는 점이다.
- 왜냐하면 감각적인 경험은 다른 사람 없이 혼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 피곤하게 다른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
- 오히려 다른 사람이 방해가 된다.
- 혼자가 더 잘된다.
- 그 결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다.
- 겉으로 하는 시늉은 낼 수 있지만, 마음으로 사랑할 수 없다.
- 왜냐하면 사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VR로 연애하는 것과 같다.
- 만약 VR로 정서적, 육체적 만족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으면, 결국 사람과의 관계를 끊게 된다.
- 왜냐하면 VR을 통해 쉽고, 빠르게,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 굳이 어렵고 오래 걸리는 진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신비로운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된다.
마약 중독이 무서운 이유도 같다.
- 주사 한 방이면 최고의 쾌락을 느낄 수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 사랑, 돈, 명예, 관계, 성취감 등 사람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이 필요 없게 된다.
- 그래서 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감각적 경험을 추구하는 신앙이 무서운 이유이다.
- 그 신비한 경험이 너무 쉽게 너무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 그래서 노력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재기하는 인생의 일련의 과정을 견디지 못한다.
- 점점 나약해지고, 피폐해지고,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사람, 특히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만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만이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 사람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성경은 이렇게 말할까? 왜 하나님은 세상을 이렇게 만드셨을까?
- 그래야 예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전해지고, 이웃 사랑이 다시 예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삼위일체의 관계가 모든 믿는 사람에게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바로 믿으면,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길 수 밖에 없다.
-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 그것만이 예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본문은 성령의 새 시대에 이웃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그것이 물고기 잡는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상징적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① 1-3절: 제자들이 예수님 만나기 전 - 제자들은 고기를 전혀 잡지 못한다.
② 4-6절: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으나 알아보기 전 - 고기를 잡지만, 끌어올리지 못한다.
③ 7-11절: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후 - 큰 고기 153마리를 끌어올린다.
④ 12-14절: 제자들이 예수님과 교제 - 예수님과 빵과 생선을 먹는다.
본문은 두 가지 이야기가 엮여 있다.
- 첫째는 제자들이 고기 잡는 이야기이고, 둘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 각각 이야기의 메시지가 있지만, 두 메시지가 합쳐져서 하나의 메시지를 전한다.
- 많은 해설서에서 두 메시지 중 하나를 취사선택 했는데, 그러면 안된다.
- 이러한 이야기 전개를 파악해야 본문의 초점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기 잡는 이야기를 통해서는 '전도' 메시지를, 예수님 만나는 이야기를 통해서는 '예수님과의 관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선순환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1-3절: 제자들이 예수님 만나기 전 - 제자들은 고기를 전혀 잡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시 나타나신다.
- 특이점은 장소가 '디베랴 바다'라는 점이다.
- 이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으로서, 제자들의 고향이다.
[6:1] 그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니,
그런데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재회는 이미 예견된 것이다.
[마 28:10]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 그래서 제자들이 갈릴리로 간 것에 대해 논쟁이 있는 것이다.
- 배교일 수도 있고, 순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문이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제자들이 갈릴리로 간 것은 본문에서 중요하지 않다.
- 초점은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고기 잡으러 간 동기가 아니라 행위 자체에 있다.
- 행위의 상징적 의미에 초점을 두고 있다.
특이하게 제자들의 이름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 이 역시 본문의 초점이 제자들의 행위에 있음을 부각한다.
베드로를 필두로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간다.
- 낙담했기 때문인지, 먹고 살기 위해서인지, 순종하기 위해서인지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 중요한 것은 고기 잡기를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이다.
고기 잡기의 상징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본문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 추정할 뿐인데, 단서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다른 복음서에서의 언급이다.
[마 4: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 이렇게 고기 잡기는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를 상징한다.
둘째로, 21장의 후반부 이야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하신다.
- 이 역시 목자로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전도를 상징한다.
따라서 고기 잡기의 실패는 전도 실패를 상징한다.
본문은 실패 이유를 설명하느데, '밤'이기 때문이다.
-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 즉, 예수님 오시기 전의 전도 사역은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 바꿔 말하면,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전도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4-6절: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으나 알아보기 전 - 고기를 잡지만, 끌어올리지 못한다.
그런데 시점이 바뀐다.
- '밤'에서 '동틀 무렵'으로 변한다.
- 이는 '시간의 변화' 뿐만 아니라, '상황의 변화'를 상징한다.
뭐가 변했냐?
- 예수님이 오셨다.
하지만 아직 해가 떠서 아침이 오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둡다.
-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신다.
[21:6]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렇게 하자 고기 잡기에 성공한다.
- 단순한 성공을 넘어 대박을 친다.
- 고기가 너무 많이 걸린 것이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와 전도의 상관 관계이다.
- 고기 잡이 베테랑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없으면 실패한다.
- 하지만 예수님이 있으면, 성공한다.
- 즉, 예수님과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전도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이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의 현 상황을 상징한다.
- 전도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미완성이다.
7-11절: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후 - 큰 고기 153마리를 끌어올린다.
드디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본다.
- 언제나 그랬듯 요한이 먼저 알아보고, 다음으로 베드로가 행동한다.
나머지 제자들은 먼저 간 베드로를 뒤따라 배를 끌고 간다.
- 이는 아마도 배 안에 머물러 있는 요한의 시점에서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식사를 준비해놓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 생선과 빵은 오병이어와 성만찬을 연상하게 한다.
- 어떤 것이든지 예수님과 맺는 풍성한 관계를 뜻한다.
- 제자들은 식사 교제를 통해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누린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선'을 요구하신다.
- 생선이 이미 놓여 있었는데 또 다시 요구하신다.
- 이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베드로가 직접 잡은 생선'이며, 그것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생선'은 무엇인가?
- 결국 전도된 사람이다.
- 즉, 예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전도된 사람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 사랑을 위해서는 이웃 사랑이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아보기 전에도 예수님 말씀을 따르자 물고기를 잡았다.
- 그러나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자, 잡은 물고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 그리고 그 물고기를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얻었다.
-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그 만큼 많은 전도의 열매를 얻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생선을 요구하셨을까?
- 예수님이 제자들과 관계를 맺는데 왜 전도된 사람을 요구하셨을까?
- 이를 바꿔 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전도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결국 예수님과의 관계와 전도를 연결하기 위한 것이다.
- 4-6절에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전도가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 그런데 7-11절에서는 반대로 전도를 통해 예수님과의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본문은 선순환 연결 고리를 이은 것이다.
① 예수님과의 관계 ➔ 전도
-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니 고기를 넘치게 잡았다.
- 따라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있어야 전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② 전도 ➔ 예수님과의 관계
- 예수님은 제자들과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시기 전에 '생선'을 요구하신다.
- '생선'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 따라서 전도가 있어야 예수님과의 관계도 맺어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본문은 고기 잡는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고 있다.
- '그물로 잡는 단계'와 '그물 안에 있는 고기를 끌어올리는 단계'이다.
- 나는 처음에 전도하는 과정에 두 가지 단계가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 사람을 모으는 단계와 모은 사람을 전도하는 단계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다.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두 단계를 통해 선순환의 연결 고리를 완성한 것이다.
- 그래서 선순환이 돌아갈수록 예수님과의 관계가 모든 사람에게 확장되도록 설계한 것이다.
12-14절: 제자들이 예수님과 교제 - 예수님과 빵과 생선을 먹는다.
이렇게 모든 과정이 완성되고 나서야 예수님과의 식사가 시작된다.
- 특히 시점부터가 다르다. 드디어 '아침'이다. 해가 떴다. 빛이 비춘다.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이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묻지도 않을만큼 예수님을 잘 안다.
- 예수님과의 관계가 완성된 것이다.
- 실제로 제자들의 신앙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완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세 번째 만남은 끝이 난다.
주제
성령의 새 시대에 제자들이 사는 법 - 예수님과의 관계와 전도의 선순환
예수님은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 그리고 떠나셨다.
- 대신 성령님의 시대가 왔고,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신다.
그렇다면 말씀에는 뭐가 기록되어 있는가?
-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과의 관계와 전도이다.
- 따지고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전체가 이것 말씀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둘은 반드시 순환 관계여야만 한다.
- 둘 중에 하나도 소외되면 안된다.
- 둘 중 하나도 수단이 되면 안되고, 항상 동시에 목적이 되어야 한다.
- 최종 목적이 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데, 꼭 잘 이해해야 한다.
- 왜냐하면 둘 중에 하나가 소외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도 변질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과의 관계가 수단이 되고, 최종 목적이 전도가 된다면?
- 그래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소외된다면?
- 그렇게 행해진 전도는 사교 모임, 동호회, 종교 집단 이상이 될 수 없다.
-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된 공동체가 될 수 없다.
- 왜냐하면 공동체는 이웃 사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러면 결국 전도도 변질된다.
반대로 만약 전도가 수단이 되고, 최종 목적이 예수님과의 관계가 된다면?
- 그래서 전도가 소외된다면?
- 그렇게 맺어진 예수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율법주의와 신비주의로 전락한다.
- 이웃은 단지 율법주의로 군림할 대상이거나, 신비주의를 과시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 왜냐하면 사람 사이에서 관계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관계가 아닌 이용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 그러면 결국 예수님과의 관계도 변질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언제나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 예수님과의 관계는 실제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 관계의 복잡 미묘한 실체는 절대로 글로, 말로 배울 수 없다.
- 관계는 너무나 역설적이고 비-직관적이어서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 관계를 이해해야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을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다.
- 예수님만이 사랑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다.
- 예수님 외에는 참 사랑을 보여준 사람이 전무하다.
-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의 한 없는 사랑을 경험할 때에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럴 때 전도가 되는 것이고, 그럴 때에만 교회 공동체가 생기는 것이다.
결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 둘 중에 하나를 희생한다.
- 어떤 교회는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 전도를 강조한다.
- 최소한의 성경 공부만 시킨다.
- 그조차 전도를 위한 성경 공부일 뿐이다.
- 반대로 어떤 교회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 이웃은 함께 예배 드릴 파트너일 뿐이다.
- 항상 반갑게 인사하지만, 이웃이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이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하려고 노력한다.
-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서로 사랑하기를 힘쓴다.
- 동시에 서로 사랑하는 하나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힘쓴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 관계가 그렇게 좋냐?
- 사실 대면대면하다. 노력할 뿐이지.
또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좋냐?
- 생활에 찌들어 간신히 명목만 이어가고 있다. 노력할 뿐이지.
하지만 내가 자부하는 것은, 우리 교회가 바른 신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 역동성 측면에서는 부족하지만, 방향의 측면에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정확한 방향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 아니다.
- 우리는 아무도 정확한 방향이신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한다.
- 단지 끊임없이 올바른 방향을 찾고 있고, 반복해서 수정하고 있을 뿐이다.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묻고, 공동체 안에서 묻고, 기도할 때 묻고 있기 때문이다.
- 결국 이것이 신앙의 유무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묻자.
- 묻는 사람만이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참 진리이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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