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계속해서 하나의 사건에 두 가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 11장에서도 대제사장의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 단순히 자신의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결단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예언을 의미하기도 했다.
- 즉 하나의 사건에 인간의 의도가 담긴 '인간의 역사'로서의 측면과, 인간의 의도와 상관 없이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측면이 있었다.
- 이렇게 요한복음은 이 두 가지 역사를 계속해서 나란히 끌어가고 있다.
그러한 병행은 12장에서도 계속된다.
- 마리아의 향유에서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도 그렇다.
요한복음이 이러한 병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밝힌다는 것을 염두하며 본문을 읽어보겠다.
내용 정리
1-2절: 배경 설명 - 나사로 가족이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잔치
11장에서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리고 잠시 에브라임에 머무시다가 다시 베다니로 오신다.(11:54)
때는 유월절, 즉 예수님이 죽으시기 6일 전이다.
마르다는 일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아가 없는 상황이다.
3-8절: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마리아 - 현실적 vs 충동적
그 때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았다.(3)
여기서 고민해볼 것은 몇 가지가 있다.
① 향유의 가치
용량은 한글에서는 '한 근', 원어에서는 '1 litra'인데, 약 300g이다.
- 조금 큰 우유 한 통의 크기이다.
'나드'는 인도에서 자라는 나드 실물의 뿌리에서 추출한 기름이다.
정확한 가치는 알 수 없지만, 5절에서 300 데나리온 정도로 추정된다.
-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으로, 300 데나리온은 한 해 연봉이다.
- 따라서 수천만원 정도이다.
② 향유를 발에 붓는 행위의 의미
300g은 모두 발에 붓기에는 많은 양이다.
- 다른 복음서에는 머리에 붓는다고 나온다.
- 따라서 '발'에 초점을 둔 이유는 존경과 겸손을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 감히 머리에도 붓지 못할만큼 마리아는 예수님을 존경했다는 의미이다.
특히 발을 씻는 것은 가장 낮은 종에게 할당된 일이었다.
- 그리고 주의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세족식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발을 씻는 행위는 상대를 위한 가장 어려운 일을 상징한다.
- 즉, 발을 씻는다는 것은, 상대를 위해 아무리 궂은 일도 다 하겠다는 헌신을 의미한다.
③ 머리털로 닦는 행위의 의미
이는 향유를 '닦아낸다'는 의미보다는 '골고루 바른다'는 의미이다. 향유가 발 구석구석 묻도록 머리털로 바른 것이다.
초점은 머리털에 있는데, 당시 유대인에게 여성의 머리카락은 성적 대상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머리카락을 보이는 것은 금기시 되었다.
- 따라서 사람들 앞에서 머리털을 풀어 보이는 것은, 율법, 전통, 문화, 규범, 가치관을 깨는 손해를 감수하여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해,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대한 감사, 존경, 사랑, 헌신을 표현한 것이다.
- 마리아는 이전부터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상당한 신뢰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 그러던 중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그 신뢰가 감당할 수 없이 커졌고,
- 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자신의 소유 중 가장 비싼 향유를 들고 예수님께 갔으며,
- 또한 '충동적'으로 향유를 깨어 예수님의 발에 붓고, 또 '충동적'으로 머리털을 풀어 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 미리 계획했더라면, 머리털 대신 수건이나 솔을 가져와서 닦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행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렸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즉, 우리가 예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② 전통을 파괴하면서까지 헌신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전통, 율법, 문화, 가치관 등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세상 문화와 자신의 가치관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가 삶의 중요한 여러가지 일, 즉 육아, 직장, 가정, 일 등을 핑게로 예수님께 헌신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③ 충동적으로 사랑했다.
계획적이기보다 충동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계획 없이 막 했다는 뜻이 아니다.
- 철저히 계획을 세우되,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계획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 즉, 충동은 그 사람의 본심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반대로, 계획대로만 하는 것, 혹은 세운 계획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세운 계획조차 '충동적'으로 지키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다.
그 결과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 극도로 정제된 향유가 부어졌으니, 향내가 온 사방에 퍼지는 것은 당연하다.
- 이는 마리아의 사랑이 온 사방에 전해져서, 우리를 비롯하여 온 인류 역사에 길이길이 전해질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가룟 유다의 생각은 달랐다.(4-6)
- '충동적'이 아니라 '계획적',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300 데나리온을 '충동적'으로 예수님께 부어 '버리는 것'은 낭비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합리적'이라는 핑게로,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도 언제나 '합리적'이라는 미명하에, 신앙에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한다.
- 그 어떤 것보다 기도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다.
- 그 시간에 성경을 보면 생각이라도 하고 깨닫는 것이 있는데, 기도하면 졸립기만 하고 멍때리기만 하기 때문이다.
- 기도는 최소한으로 하고, 남은 시간에 말씀 보고 교제하는 것이 신앙을 위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도만큼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은 없다. 다른 어떤 매개체 없이 예수님과 대면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 마치 연인 간에 문자, 전화, 영화 관람, 여행 등보다 함께 무엇을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한 것과 같다.
- 그렇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 자체'인 기도가 '함께 무엇을 하는 것'인 예배, 말씀, 교제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가장 어려워한다.
- 마치 사랑하지 않은 대상과 함께 영화보고 여행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아무 것도 없는 방에서 단 둘이 있는 것은 어려운 것과 같다.
- 반대로, 정말 사랑하는 대상과는 영화나 여행조차 방해가 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둘이서만 있고 싶다. 오로지 상대방만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은 '낭비'이다. '비합리적'이며 '충동적'이다.
- 상대방과 함께 교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재미도, 유익도 없는 낭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 기도가 그런 시간이고, 그런 기도만이 참 기도이다.
- 반대로, 재미와 유익을 위한 관계는 관계가 아니며, 유익을 위한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 어떤 측면에서 보면, '깨달음'조차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위한 관계, 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교회 공동체도 결국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
- 자신의 인생은 '낭비'하러 모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 교회 공동체에 인생 전부를 헌신, 희생해서, 세상에서는 남은 것 하나 없이 거지가 되어야 한다.
- 교회 '때문에' 세상 명예, 부가 모두 탕진되어야 한다.
-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는 공동체이다.
마지막으로, 부부 관계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 서로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낭비하는 대가로 상대방을 얻는 것이다.
- 마치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남자가 여자를 위해 시계를 팔아 머리빗을 사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머리를 잘라 시계줄을 사주는 것과 같다.
- 이 남녀는 시계도 시계줄도, 머리카락도 머리빗도 모두 낭비되었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더 깊은 관계가 되었다.
우리 부부도, 우리 교회도, 우리와 예수님과 관계도 이런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 그것만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 이렇게 우리 인생을 낭비하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위해 살자!
- 그럴 때에만,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 공동체 관계 속에서, 부부 관계 속에서 세상의 전부를 되돌려 받을 수 있다.
- 그것이 곧 영생이며 천국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마리아의 낭비를 인정하신다.(7)
- 그러면서 그 낭비가 얼마나 귀한 '투자'인지 가르쳐주신다.
- 낭비처럽 보이는 향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영원토록 기억될 투자였던 것이다.
향유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합리적'이다.
- 하지만 향유를 가난한 사람에게 줄 기회는 여전히 많이 남았다.(8)
향유를 예수님께 드리는 것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합리적'이다.
- 왜냐하면 향유를 예수님께 드릴 기회는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딱 이 때 뿐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투자는 썪지 않고 영원토록 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인생을 헌신할 수 있는 기회도 딱 지금 이 때 뿐이다. 헌신하자.
9-11절: 유대 사람들의 반응 - 적대감 vs 인기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도 절정이지만, 예수님의 인기도 절정이다.
- 이는 모두 나사로의 부활 기적 때문이다.
그로 인해, 대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 예수님의 인기가 너무 커서, 로마의 심기를 건드릴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 자신들의 지위까지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지도자들은 공의회에서 예수님을 죽일 결정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인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나사로도 죽이려고 한다.(10)
- 나사로가 사라지면 예수님의 인기로 사그러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게다가 나사로는 대제사장이 속해있는 사두개파의 교리를 부정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더 불편했다.
- 사두개파는 부활을 부정했는데, 나사로의 부활로 자신들의 교리 자체가 위협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갔다.(11)
-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유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까지 있었다.
- 나사로 부활을 계기로 진지하게 믿음을 가지고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까지 나온 것이다.
이렇게 지금 예수님은 적대감과 인기가 모두 절정에 있어서, 극도로 긴장된 상태이다.
12-16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 자신을 증언하는 예수님 vs 무지한 사람들
그런 시점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 '다음 날'이기 때문에, 지금은 유월절 5일 전이다.
유월절을 보내러 온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었다.
환영 방법은 세 가지였다.
① 종려나무 가지
야자나무과이다.
- 예루살렘에 많이 퍼져있어서 구하기 쉬운 나무이다.
유월절과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다.
단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로마로부터의 독립과 승리를 의미한다.
- 특히,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인들을 환영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종려나무 가지는 구약을 근거로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국화'같은 역할로서 이스라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② 호산나
시편 118:25에 나오는 문구로, 직역하면 "지금 구원을 주소서."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문구를 원래 의미로 사용하지않고 관용구처럼 사용했다.
- 특히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하거나 칭송할 때 자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호산나 역시 정확하게 메시야에게 국한된 표현이 아니라, 일반적인 존경과 환호를 의미한다.
③ 이스라엘의 왕
요한복음에서 '왕'은 좋은 의미로도 쓰이고 나쁜 의미로도 쓰인다.
- 좋은 의미: [요 1:49]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 나쁜 의미: [요 6: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따라서 이 역시 정확하게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변질된 의미의 왕을 의미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이들의 환영 메시지 세 가지는 모두 옳다.
① 예수님은 참 승리자시며, 참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분이시다.
② 또 유일한 구원자로서 칭송 받기 합당하신 분이다.
③ 마지막으로 참된 이스라엘의 실질적 왕이시다.
하지만, 다 틀리기도 하다.
① 예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웅이 아니다.
② 또한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③ 마지막으로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용하는 왕이 아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환영은 이중적인 메시지를 갖는다.
- 예수님이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라는 것을 대중 앞에서 확증하는 의미를 갖는다.
- 반면에 고백을 한 대중은 그 고백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의 말, 자신의 행위,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 무리들은 자신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이 확증하였지만, 자신들은 그 역사적인 사건에서 배제되었다.
- 대제사장도 예수님의 죽음과 그 의미를 예언하였지만, 죽음의 효력에서 배제되었다.
- 다른 의미지만, 마리아도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음을 확증하였지만, 자신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 우리 인생에서도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만 아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는 '겉으로 드러나 사람이 알 수 있는 역사'와 '숨겨져 있어서 하나님만 아시는 역사'가 공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사람은 그 일의 의미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내가 좋다고 평가한 일도 하나님은 나쁘게 평가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무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①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삶이 '우리 기준으로' 좋은 인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이런 노력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 그래서 인류 역사에 기록된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② 하지만 나의 선한 노력이 하나님께 좋다고 평가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 그래서 나의 평가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 고민한다고 다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평가가 무엇인지 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알 수 있는 '인간의 역사'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버무려서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이다.
- '인간의 역사'는 드러나 보이는 '우리의 행위'이고,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재설계'이다.
-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가 뒤섞여서 우리는 예수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의 역사'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세속주의고, '하나님의 역사'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신비주의이다. 둘다 옳지 않다.
- 우리의 신앙은 세속적이며 동시에 신비하다는 것을 알 때, 올바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다.(14)
-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람들의 상식을 깨는 모습이다.
- 일반적으로 영웅은 말, 전차, 혹은 낙타를 타고 등장한다.
-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어린 나귀'의 의미는 두 가지다.
① 구약 예언의 성취
- 스가랴 9:9에서 메시야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했다.(15)
- 이를 통해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야이심이 확증된다.
② 사람들의 오해 교정
- 사람들은 강하고 능력있는 정치적, 군사적 왕을 기대했다.
- 하지만 예수님은 전쟁용 말이 아닌 나약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의 구원 방법은 힘과 능력이 아니라 나약한 죽음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의 방식이 강함이 아닌 약함임을, 정복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닌 패배해서 죽임 당하는 것임을 밝히신다.
- 이러한 메시지는 정말 많이 들어왔다.
- 하지만 막상 긴급한 상황이 되면 쉽게 잊혀진다.
-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 용맹하고 빠른 말이 아니라 힘 없고 느려터진 어린 나귀를 타고 여유 있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 짜증이 먼저 나온다.
- 절박하고 급한 입장에서 그런 예수님을 보면, 마치 놀리며 무시하는 것 같다.
- 정작 필요할 때 안나타나시고, 다 지난 후에 나타나 입바른 소리만 하시는 예수님이 얄밉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뒤늦게 나타나 무덤을 열라는 이상한 소리만 하신다.
우리 인생에서도 가장 힘든 순간, 예수님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실 것이다.
- 우리는 예수님이 때마침 말 타고 신속하게 오셔서, 멋지게 사건을 해결해주시길 바란다.
- 하지만 예수님은 다 지난 뒤에 오신다.
- 이미 상황도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한 과정 중에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쳤다.
- 그런 상황에 오셔서, "날 믿어라."와 같은 쓸데 없는 소리를 하신다.
- 믿는다고 달라질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럴 때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
- 믿는다고 달라질 것 하나 없을 때에만, 예수님께만 초점을 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 그 믿음만이 예수님과의 참된 관계를 맺도록 한다.
- 예수님을 일부러 믿는다고 달라질 것 하나 없는 상황을 만드셔서 우리에게 참 믿음을 가르쳐주신다. 죽은 나사로를 슬퍼하는 마리아, 마르다에게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때를 준비해야 한다.
- 믿는다고 달라질 것 하나 없는 상황.
- 실패, 분노, 좌절, 절망조차 지나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
- 믿음이 아무 쓸모 없다고 느껴지는 상황.
-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진짜 관계를 맺는 기적이 일어난다.
- 지금의 신앙 생활은 이 때를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제자들은 지금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충분히 설명한 후에도,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16)
-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을 비롯해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언하신 어떤 말씀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깨닫게 된다.
먼저, 여기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사건'이라고 말한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 부활을 통해 참 하나님, 참 메시야이심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 그것이 예수님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영광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영광도,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예수님을 참 하나님, 참 메시야로 믿는 것 뿐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 그리고 나서 다시 예수님의 말씀들을 회상했을 것이다.
- 그제서야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 그제서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은 순차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역순으로 깨닫는 것이다.
-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시점에 그 때까지 들은 말씀의 진의를 거꾸로 되짚어가며 깨닫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우리도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배우고 알아가고 있다. 지금 알아가는 것도 충분히 재밌다.
- 하지만 그 진의는 알지 못하고 있다.
- 그것을 깨닫는 시점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이다.
- 그 때까지 들었던 말씀을 거꾸로 되짚어가며 깨달아갈 때에야 비로소 지금 알아가는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자! 그 때는 온다!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실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 지금 듣는 말씀을 우리가 다 깨닫지는 못하지만, 무의미하게 스쳐간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그 때에 퍼즐 조각처럼 다 맞춰져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 숨쉬도록 할 것이다.
- 그 때를 기대하며, 말씀을 열심히 보자.
17-19절: 유대 사람들의 반응 - 인기 절정 vs 포기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인 결정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소문이 돌고 있었겠지만, 특히 나사로의 부활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7)
- 나사로의 부활을 본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언했던 것이다.
- 그래서 그 증언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의 영향력이 이정도로 컸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① 유월절이 가까웠다는 점이다.
- 그랬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그래서 소문이 더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② 예루살렘에서 가까웠다는 점이다.
- 대부분의 기적이 갈릴리에서 일어난 반면, 나사로의 기적이 일어난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하룻길로 상당히 가까웠다.
- 그래서 소문이 더 빨리 퍼져나간 것이다.
③ 기적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다.
-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능력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중에 최고 수준이다.
-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기는 폭등한 것이다.
-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도 볼 수 있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타이밍을 우리가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이밍이 오기를 기다라며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 뿐이다.
우리 인생에서도 예수님을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분명히 올 것이다.
- 그 때는 우연히 혹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 그 때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 뿐이다.
이런 사람들의 열광 속에 바리새인들은 넉다운 되었던 것 같다.(19)
- 예수님에 대한 환영이 너무 격렬해서 '온 세상'이 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42)
예수님의 치솟는 인기는 곧 바로 로마의 군사 개입으로 직결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 그러면 결국 민족적,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위기가 오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현 시점에서 이스라엘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죽음은 참 이스라엘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맞지만, 이들이 생각한 방식대로는 아니었다.
주제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 마리아는 '충동적인 낭비'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다.
- 또한 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한채 예수님을 환영했다.
- 그리고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완성시켰다.
-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이 일들은 결국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가 구분되는 것이다.
-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은 '인간의 역사'이고,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 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인간의 역사'이고, 죽음 예수님을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 이렇게 모든 사건은 '인간의 역사'로서의 측면과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측면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 구분을 이렇게 오해하면 안된다.
- 예를 들어,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은 '인간의 역사'이고, 신앙 생활 중에 일어나는 특별한 일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구분짓는 것이 아니다.
- 가정에서 함께 앉아 식사를 한 사건에도 '인간의 역사'로서의 측면과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측면이 있고, 교회에서 예배 역시 '인간의 역사'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라는 뜻이다.
- 인간의 지각으로 인식되어 드러난 사건을 하나님이 재설계하셔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뜻이다.
- 예를 들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은 재설계하셔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예수님을 높이며 영광스럽게 기록된 마리아도, 예수님을 죽이며 수치스럽게 기록된 대제사장도 모두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 순종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역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 순종했든 거역했든,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절대로 모른다.
-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아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마리아와 대제사장 사이에 차이가 있다.
-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단순하게' 헌신했다.
- 반면 대제사장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인류 역사의 의인으로 기록된 것이고, 대제사장은 악인으로 기록된 것이다.
의와 불의를 나누는 기준은 단순하지 않지만, 비교적 쉽고 선명한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 내가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아느냐 모르느냐이다.
- 안다는 것은, 보여지는 인간의 역사 이면에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 이는 결국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절대로 의로울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모른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넘어선 초월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곧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한다.
-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냐?
-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냐?"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 성경이 말하는 것만 알 수 있고, 말하지 않는 것은 터럭만큼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성경이 마리아의 향유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 성경이 대제사장의 고백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 그리고 그 죽음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그 구원이 나에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것이다.
- 왜냐하면 성경에 안쓰여있으니까.
- 우리는 "믿으면 구원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성경 말씀 하나 의지해서 몸부림치는 것이다.
- 바울이 확신있게 말하는 것도, "내가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지, "내가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 바울은 말년까지 구원이란 푯대를 향해,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확신 가지고 달려갔다.
- 바울도 자신이 믿고자 하는 행위인 인간의 역사와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만이 우리의 무지를 깨닫고, 죽을 때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결론
신앙은 기다림이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냐?
-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로 재설계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 마리아처럼 우리의 전부를 예수님께 충동적으로 드리는 계속해서 반복하는 인간의 역사를 살아가는 것이다.
- 그러면서 우리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재설계해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 만약 기다려도 그 때가 안오면 어떻하나?
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어쩔 수 없다.
- 그냥 그렇게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속에서도 계속해서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둘째는, 그 때는 분명히 온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다.
- 이것은 우리가 걱정할 것이 아니다.
- 이것을 걱정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 그 때를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지치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올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것이 믿음이다.
-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믿는 사람만이 구원에 이른다.
이렇게 계속해서 무모해 보이는 신앙 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 나도 한 달에 한 두번 정도는 다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는 이유는, 예수님이 너무 좋고 잘 믿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 이제는 세상으로 돌아갈래도 돌아갈 세상이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도 힘들지만, 믿지 않고 사는 것은 더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그러니 좀 덜 힘들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불순한 동기로 신앙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실 것이다.
- 불순한 동기지만, 어떻게든 예수님 바라보려는 우리의 절박한 마음을 아실 것이다.
- 그리고 그런 절박한 마음에도 공감하며 감동하실 것이다.
- 그래서 가만 계시지 않으실 것이다.
- 온 우주를 움직이셔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가 바라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딱 지금을 시점으로 의심은 없어지고 믿음만 충만해서, 다른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으로만 사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
- 우리에게 더 많은 의심과 회의와 시험과 갈등을 주시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리고 하나님만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의심과 회의가 반복되는 인간의 역사가 의미 없어 보인다.
- 하지만 하나님은 의미 없어 보이는 인간의 역사를 영원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역사로 지금도 여전히 재설계하고계실 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며 다시 한번 도전하자. 충동적으로 낭비하자.
- 그러면 우리 인생에도 마리아처럼 영원토록 기억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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