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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32) 11:17-37 예수님 눈물의 의미(부활의 현재성)

본문은 너무 유명할 뿐만 아니라 메세지도 단순명료하다.

- 예수님은 나사로를 여윈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난다.

-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언하신다.

-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곧 바로 살리신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도 너무 멋있고, 기가막힌 기적을 일으키시면서도 츤데레 같은 모습도 매력적이다.

- 하지만 매력이 너무 강렬해서, 우리 눈을 멀어버리게 한다. 강한 빛을 보고나면 미세한 빛을 보지 못하듯이.

- 그래서 섬세하고 미묘한 메시지를 놓히기 쉽다.

11장까지 요한복음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요한복음이 얼마나 미묘하게 내용을 전개하는지 충분히 알 것이다.

- 중의적인 표현이 없는 단락을 찾기가 더 어렵다. 거의 모든 사건이 이중, 삼중으로 메시지가 얽혀있다.

- 중심 사건의 의미도 여러가지고, 사람들의 멘트도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요 11:16]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 이런 단순한 멘트에도 헌신의 의미와 믿음의 의미가 중의적으로 담겨 있다.

- 이번 본문도 당연히 중의적이며 미묘한 표현이 많다.

따라서 너무나 강렬하고 선명한 나사로의 죽음, 부활 사건은 시야에서 잠시 제쳐두고, 오히려 그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미묘한 대화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 그래야 나사로 죽음 부활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두 가지가 본문 메시지의 전체 방향을 결정하는 포인트이다.

① 마르다의 신앙 고백의 진정성(27)

- 마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정확한 고백이다.

- 하지만 나사로를 살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부정한다.(39, 40)

- 본문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②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35)

-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래서 더 주의 깊게 다뤄야 한다.

-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고(33),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셨'다.(38)

- 우리는 예수님 눈물의 의미가 죽은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의 슬픔을 공감하시는 사랑의 눈물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해설서가 적지 않다.

-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와 죽음을 슬퍼하는 자매들 앞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셨을까?

이렇게 정한 이유는, 마르다만이 예수님과 상대하는 실질적인 상대자이기 때문이다

- 마리아는 마르다와 똑같은 멘트를 반복하며, 예수님을 무덤으로 안내하는 것이 전부이다.

- 유대 사람들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관중일 뿐이다.

따라서 본문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예수님(25, 26)

② 그것에 신앙 고백으로 반응하는 마르다(27)

③ 그리고 마르다의 반응에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35)

- 마리아와 유대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모두 마르다에 소급하여 볼 수 있다.

- 따라서 본문을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로만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는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약 마르다의 신앙 고백이 진정성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 예수님은 마르다의 믿음을 인정하셨고, 마르다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마르다를 공감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반면에, 마르다의 신앙 고백이 진정성 없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눈물은 '분노'를 의미할 것이다.

- 예수님은 마르다의 불신을 보셨고, 믿지 않는 마르다 때문에 분노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이렇게 마르다의 신앙 고백과 예수님의 눈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고 제한한다.

-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맥락을 통해 나사로 부활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이다.

- 일단, 33, 38절에서 '비통하다'는 원어가 분노, 경고, 경멸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쁘셨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려고 작심하신 상황에서 죽음의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23) 바로 살리면 될텐데 왜 슬프겠는가.

따라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23), 죽음을 슬퍼하며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신 것이다.

- 특히 본문이 예수님께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의 가장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감정은 더욱 격해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다의 신앙 고백 역시 진정성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

- 예수님의 분노를 보아, 현재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무하다. 마르다도 마찬가지다.

- 게다가 39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부정하였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마르다와 같이 신앙 고백 자체는 바르지만, 실상은 믿음 없는 경우가 또 있었다.

[요 3: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니고데모 역시 바른 신앙 고백을 했지만, 예수님께 믿음 없다는 책망을 받았다.(3:12)

- 따라서 단순히 고백 문구만 가지고 믿음을 평가할 수 없다. 고백 의도를 세밀하게 봐야 한다.

과연 예수님의 눈물은 분노일까, 사랑일까? 이 질문을 염두하면서 본문을 읽어보자.

 

내용 정리

17-20절: 상황 설정 -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셔서 마르다를 만나심

예수님께서 도착하시니, 죽은지 4일이 된 날이다.

여기서 4일에도 나름 의미가 있는듯 하다.

- 유대 전통에 사람이 죽고 3일 동안은 영혼이 다시 몸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 이는 일반적으로 시신이 죽고 3일 후부터 부패하여 심하게 훼손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즉, 4일은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지각이 더 속상했을 것이다.(21, 32)

- 예수님이 소식을 듣자 마자 출발하셨으면, 2일만에 오셨을 것이고, 그러면 살리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마감 시한인 3일이 지나 4일째에 오셨다.

-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지막 남은 일말의 가능성을 예수님의 지각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다.

-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원망을 한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정도의 가까운 곳이었다.(18) 그래서 나사로를 조문하러 많은 유대 사람들이 왔다.(19)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① 많은 유대 사람들이 조문하러 온 것을 보아, 나사로가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 어떤 영향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예상 외로 가난한 보통 사람은 아니다.

-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람을 끌어모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② 많은 유대 사람들로 인해, 나사로 부활의 증인도 많아졌고, 그만큼 예수님의 증언이 널리, 빨리 퍼졌을 것이다.

- 증인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왜곡하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예수님의 영향력은 더 커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자, 마르다는 맞으러 나갔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다.

- 이러한 차이는 누가복음에 나온 차이와 일치한다. 거기서도 마르다는 분주하고 마리아는 차분하다.(눅 10:38-42)

-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통해 신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마르다가 먼저 예수님을 만난다.

21-27절: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의 지각으로 마르다는 속상했던 것 같다. 예수님께 한 첫 마디가 원망이다.(21)

- 마르다는 예수님이 늦어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 이러한 감정은 이후에 마리아에게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32)

- 이는 마르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다음 멘트에는 믿음의 고백이 연속된다.(22, 24, 27)

-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한다.(22)

- 종말에 있을 부활을 믿는다.(24)

-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27)

모두 흠잡을 수 없이 바른 고백이지만, 진정성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39절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리고 40절에 예수님은 그러한 마르다를 믿음 없다고 지적하시기 때문이다.

- 말로는 믿었지만, 실상은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신앙 고백의 문제는 무엇일까? 마르다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았을까?

마르다가 믿은 것은 다음과 같다.

-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셨고, 특히 부활의 능력을 가지셨음을 믿었다.

- 정말 훌륭한 믿음이다.

그러나 믿지 않은 것은 이것이다.

- 예수님의 능력이 마지막 날 이후에만 유효하다고 믿었다.

- 마지막 날 이전에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종말 이후 내세에 구원하실 것만 믿고, 현재 구원하실 것은 믿지 않은 것이다.

종말 이후의 부활은 구약에도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단 12:2]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도 종말 이후의 부활을 믿었다.

[행 23:6-8] 그런데 바울이 그들의 한 부분은 사두개파 사람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파 사람인 것을 알고서, 의회에서 큰소리로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바리새파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7] 바울이 이렇게 말하니,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회중이 나뉘었다. [8] 사두개파 사람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하는데, 바리새파 사람은 그것을 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 부활이 '①예수님에 의해', '②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 마르다는 ①에 있어서는 바리새인과 달랐지만, ②에 있어서는 여전히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은 현세에서의 구원과 심판을 강조한다.

[요 3:18-19]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 종말 이후의 심판이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현세에서의 심판을 강조하였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포하는 표현들이 모두 현세에 초점을 두고 있다.

-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명의 물

- 오병이어 사건에서의 생명의 떡

-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생명의 빛

- 양의 문, 선한 목자

이러한 표현들이 모두 '현재'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고, '현재' 배부르게 하는 떡이며, '현재' 보게 하는 빛이고, '현재' 인도하는 목자시다.

- 현재 예수님의 물을 마시고, 떡을 먹고, 빛을 보고, 목자의 인도하심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결국 내가 만든 물, 내가 만든 떡, 세상의 빛, 세상의 인도하심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 즉, 예수님께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하여, '나'를 의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 종말 이후의 예수님을 아무리 소망한다 하더라도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 헛되다. 거짓일 뿐이다.

그래서 25, 26절에서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며 생명'인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 즉 살고 있는 현재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강조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살아서 믿을 것을 강조하신다.

하지만 마르다는 이해하지 못했다.(27)

28-32절: 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 - 주님이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과 마리아는 동네 밖에서 만나려고 한다.

- 이유는 마르다가 유대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가만히' 말한다.

- 반대로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의 살해 위협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부탁한 것일 수도 있다.

- 어쨋든 그들은 은밀히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한다.(31)

- 마리아를 따라 온 유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본다.

-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한다.

마리아 역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것으로 보아, 예수님을 믿었던 것 같다.(32)

- 그러나 예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가 아닌 종말 이후에 대해서만 믿었다.

33-37절: 마리아와 유대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마리아도 울고, 유대 사람들도 울었다.(32)

- 울음을 매개로 마리아와 유대 사람들을 일치시킨 것이 의미심장하다.

- 이 울음의 의미는, 의심할여지 없이,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이다.

- 이를 통해 유대 사람들과 같이 마리아도 믿음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이 울음에 대해 예수님은 '비통하여 괴로움'으로 반응하신다.

- 그리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신다.(34)

- 또 무덤으로 가시는 길에도 '비통하게' 여기신다.(38)

'비통하다'의 사전적 뜻은 분노이다.

- 하지만 사전적 의미로 단어의 뜻을 정하려는 시도는 굉장히 위험하다.

- 우리도 모든 단어를 사전적 의미로만 쓰지 않는다.

- 단어의 뜻은 사전적 의미와 맥락의 상호 연결 관계를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눈물까지 흘리며 분노하신 대상은 무엇일까?

일부 해설서에서 '죽음'이라고 말한다.

- '죽음'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그리고 유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그래서 '죽음'에 대한 분노로 '죽음'을 죽이는 부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문제가 있다.

- 분노는 결핍에서 온다. 통제 능력이 없거나 통제하기 어려울 때 분노한다.

-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구도 분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자녀가 없어졌다면, 우리는 비통해할까?

- 자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면, 괴로워서 눈물이 날 것이다.

- 반면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서 잘 있나 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제할 수 없다면 분노할 것이지만, 통제할 수 있다면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눈물 흘리지 않을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통제하실 수 있었다. 즉시 '죽음'을 제거하신다.

- 예수님께 '죽음'이란 지나가는 날파리 같은 하찮은 것이다. 손짓 하나면 날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분노의 대상이 '죽음'이 될 수 없다.

- 분노의 대상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은 누구인가? 

- 바로 지금 눈 앞에서 죽음의 슬픔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이다.

- 믿음을 계속해서 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는 커녕 믿음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온 우주도 통치하신다.

- 물론 사람도 예수님의 통제 안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은 하나님께서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 사람은 하나님 외에 '주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주권'을 갖도록 만드신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믿을 수도, 저항할 수도 있게 만든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람만이 예수님이 분노하실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셨던 것이다.

- 죽음 때문에 우는 것은,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믿음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말했지만, 여전히 믿지 않기 때문이다.

- 특히 지금이 대중에게 믿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욱 극도의  감정을 가지셨던 것이다.

게다가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눈 앞에 두고도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믿도록 강제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분노하셨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신다.

- 예상컨데, 무덤으로 가시는 이유는 당연히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한 것인데,

-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유는, 이를 통해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유대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나사로 부활의 의미는 모두 세 가지다.

① 말 그대로,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다. 부활까지 시켜서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② 또한, 예수님께 부활의 능력에 대한 '선포'이다.

③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정죄'이다.

그런데, 현재 예수님의 감정 상태가 분노인 것으로 보아, 정죄에 가장 큰 강조가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의 사랑과 선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

- 하지만 본문은 정죄를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두었다.

따라서 본문을 읽은 우리는 본문을 통해 가장 먼저 정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 봐야 한다.

-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

-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가르침을 깨닫는 것에서 멈추면 안된다.

마르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믿지만 막연히 먼 미래에 있을 믿음에 만족하는 우리의 불신앙에 예수님처럼 비통해 해야 한다. 나의 믿음 없음에 분노하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 이것이 본문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눈물에 대한 유대 사람들의 반응이 나온다.(36, 37)

- 그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사랑으로 판단했다.(36)

- 그리고 그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나사로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면, 왜 죽지 않도록 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37)

이러한 유대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예수님의 눈물이 사랑이 아님이 더욱 분명해진다.

- 유대 사람들조차 예수님의 눈물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 그들조차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했다면, 이렇게 울고 계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께는 사랑하는 사람을 회복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37)

따라서 이를 통해 예수님의 눈물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증한다.

- 예수님은 믿음 없는 사람들 때문에 분노하셨다.

- 그리고 울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증명하시기 위해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것이다.

-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종말 이후의 부활만 믿는 사람들을 꾸짖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정죄 목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일은 많다.

- 5장에서 중풍병자를 굳이 안식일에 치유하신 것도 안식일을 오해하고 있는 유대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함이다.

- 9장에서 눈먼 사람을 치유하신 것도 질병의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유대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예수님 눈물의 진짜 의도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으로 본문은 끝난다.

 

주제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이신 것은, 종말 이후 뿐만이 아니라 현재에서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 마르다는 종말 이후의 부활은 믿었지만, 현재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

-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 없음이라고 판단하셨다.

- 그러한 불신을 바로잡기 위해 예수님은 현재 시점에 나사로를 부활시키셨다.

- 이를 통해, 죽음 이후 종말이 아닌, 살아있는 현재에 예수님을 믿을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 종말 이후, 죽음 이후에 구원 받을 것을 믿는 것은 당연하다.

- 하지만 부족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이후 구원 받을 것을 믿는 믿음만은 믿음이 아니다.

현재 이 시점에도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구원 받는다.

- 스스로는 어떻게 해도 목마르지만, 예수님의 물로만 목마르지 않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 스스로는 어떻게 해도 배고프지만, 예수님의 떡으로만 배고프지 않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 스스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의 빛으로만 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 스스로는 어디로도 갈 수 없지만,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인도해주셔야만 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 지금 이 시점에 예수님으로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보고, 인도함 받는다고 믿어야 한다.

즉, 현재 이 시점에도 예수님만이 전부이며 예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 예수님이 돈, 집, 핸드폰, 인터넷, 가족, 친구, 자동차, 직장 등이라고 믿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돈, 집, 핸드폰, 인터넷, 가족, 친구, 자동차, 직장 등 아무 것 없어도 예수님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 그리고 실제 그렇게 믿음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질문. 

-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물도, 밥도 안먹고, 눈 감고,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인가?

-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실제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인가?

- 몸이 아파도, 스스로는 치유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치유해주실 것이란 믿음으로, 병원에 가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인가?

일단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 눈이나 손, 발이 우리를 죄 짓게 한다면, 눈을 빼고, 손, 발을 짜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마 5:28-30)

- 돈이 나를 속박하고, 거기에서 스스로 자유케 될 자신 없으면, 돈을 모두 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 본회퍼가 말했듯이, 단순한 순종과 역설적 순종이 있는데, 단순한 순종도 못하면서 역설적 순종을 거론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돈을 갖고 있으면서 돈에 매이지 않는 것이 역설적 순종인데, 이것 할 자신 없으면, 단순하게 돈을 다 버려버리는 단순한 순종부터 해야 한다고 말한다.

- 단순한 순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역설적 순종을 할 수 없다.

- 역설적 순종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순종을 먼저 해야 한다.

지금 현재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당장 단순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는 것처럼,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을 믿는 것이다.

- 그 믿음으로 돈, 직장,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다.

- 이것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현재'의 믿음이다. 단순한 순종이다.

마르다는 단순한 순종도 하지 않으면서 역설적 순종을 하려고 했다.

- 지금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종말 이후의 부활만 믿으려 했다.

물론 믿음의 최종 목적은, 밥도 물도 먹으면서 나의 생명이 밥과 물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 내가 스스로 계획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살지만, 내 인생은 내 계획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다.

- 손, 발 자르지 않고, 손, 발로 죄 짓지 않는 것이다.

- 병원 다니면서, 내 생명이 예수님께 달렸다고 믿는 것이다.

- 이것이 역설적 순종이다.

- 이러한 순종을 하려면 단순하고 무식한 순종부터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마르다처럼 종말 이후의 부활만을 믿느냐?

- 역설적 순종은 너무 '어려워서' 못하고, 단순한 순종은 하기 '싫어서' 못하기 때문이다.

- 결국 현재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 현재의 부활을 믿으려면, 현재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수해야 하는데,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그렇게까지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의 마르다도, 우리도, 종말 이후의 믿음으로 시점을 미루는 것이다.

- 그래야 지금 순종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지금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자기 스스로를 믿음 있다고 기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믿음 없는 자신을 보고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냐?

- 지금 당장 돈 몽땅 기부하고, 직장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다.

- 병원도 가지 말고, 밥도 물도 마시자 말라는 것이 아니다.

- 믿음도 없는데, 무작정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 그렇게 무리하면 탈난다. 그런 사람 여럿 봤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순종도 못하면서, 역설적 순종을 하려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 우리가 먼 미래에는 믿음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 자기 기만이다. 믿기 싫음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매 순간마다 거짓말로 때우며 신앙 생활을 이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자.

- 지금처럼 신앙 생활하면 무조건 지옥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다시 말하지만, 뭔가를 개선하자는 것이 아니다.

- 지금 현재 우리의 믿음 없음을 정확하게 인식하자는 것이다.

- 믿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우리의 믿음으로는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깔끔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 없음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의 신앙 생활이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 신앙의 잡다한 것에서 시선이 거두어지고, 믿음 하나에만 시선이 꽂히기 때문이다.

- 그제서야 진짜 신앙 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론

본문이 이런 경고를 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특별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하지 않는 특별한 잘못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경고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경고이다.

-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일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경고이다.

- 내가 '지금', '현재',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가? 

- 오늘 나에게 밥 없고, 물 없고, 돈 없고, 갈 길 잃어 죽어도,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예수님께서 나를 살리셔서 인도해주실 것을 믿는가?

- 그래서 밥, 물, 돈 생각 안하고,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며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는가?

- 이렇게 매 순간을 죽음을 각오하며, 부활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 물론 이 질문에 '아멘'이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 하지만 '아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짐작컨데, 바울도 매일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고전 15: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 바울도 매일 죽음을 각오했고, 그랬기 때문에 매일 부활을 경험했을 것이다.

- 또한 바울도 항상 '아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괴수라고 말했다.

- 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열심히 달렸다.

[빌 3:12]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연약하다.

- 하루라도 예수님의 부활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멀게 느껴진다.

- 그러면 신앙이 위축되고, 세상에 휩쓸린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은혜를 경험하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다.

- 죽음 ➔ 부활 ➔ 사랑 

- 이러한 순서로 밖에 예수님을 경험할 수 없음을 기억하자.

그런데 우리는 이 '죽음'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 여러번 말했지만, 비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명예로운 자살을 선택하는 존재가 우리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명예 없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셨고, 같은 죽음을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이런 지경임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 뿐이다.

- 이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예수님께 무슨 원망을 할 수 있겠는가.

- 예수님 왜 은혜주시지 않냐는 원망을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정말 기도하자. 간절히 기도하자. 

- 기도가 그 중에 제일 쉬운 것 아닌가!

믿음 달라고, 부활 달라고 기도하자. 그리고 가장 우선으로 죽음 달라고 기도하자.

- 그럴 때 우리를 부활케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