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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31) 11:1-16 잔인한 냉혈한 예수님

요한복음 전체 중간 정리

 장

주제 

구분 

초점 

 1

서론 

전반기 사역

 예수님의 유능하심

 2-4

 가나 사이클

 5-10

 명절 사이클

 11-12

 연계부

연계부 

 예수님의 유능하심 & 무능하심

 13-19

 십자가 행

 후반기 사역

 예수님의 무능하심

 20-21

 결론

지난 본문을 끝으로 예수님의 전반기 사역은 끝났다.

전반기 사역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유능, 전능하심을 드러냈다.

② 그렇게 드러난 유능함을 기반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셨다.

③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기는 동시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를 근거로 후반기 사역을 예상하면 다음과 같다.

① 기적은 더 이상 보이시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이 무능하게 죽임 당할 것을 예언하신다.

② 무능한 죽음을 기반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신다.

③ 그 결과 예수님을 비웃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만, 그 중에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전반기 사역과 후반기 사역을 명확하게 구분지으면서도 동시에 연결시키는 단락이 연계부 단락이다.

- 기적 중에 최고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일으키셔서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확증한다.

- 그런데 그 부활의 능력은 앞으로 있을 무능한 죽음을 암시한다.

-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례 절차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은 더욱 구체화된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밝히기 위해 유능과 무능을 결합하여 제시하나?

① 유능의 필요성

- 유능하지 않으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수단이다.

-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셔서, 유능함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증언이 얼마나 확실한지 증명하셨다.

② 무능의 필요성

- 유능함은 예수님을 돋보이게 하지만, 그럴수록 진짜 예수님의 본질은 유능함에 가려진다.

- 마치 미모로 유명해진 배우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연기 칭찬을 받기 힘든 것과 같다.

- 그래서 외모가 아닌 연기로 인정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추한 모습의 배역을 선택한다.

- 예수님은 최소한의 자기 보호 능력조차 없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되어서, 유능함으로 가려진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신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만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우리가 예수님의 유능한 껍데기가 아닌 예수님의 본질과 관계 맺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유능과 무능의 결합이 실제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능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가 예수님께 관심을 갖도록 하신다.

- 그래서 예수님의 유능함으로 인해,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는 일마다 성공한다고 느낄 것이다.

- 그때 우리는 자신이 유능해졌다고 느낄 것이다.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은 유능함은 숨기시고 무능함으로 오실 것이다. 순수한 예수님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무능함으로 인해,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하는 일마다 실패한다고 느낄 것이다.

- 그때 우리는 나 자신이 무능해졌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시점에 예수님을 떠난다.

- 예수님 때문에 문제도 해결되고 자신이 유능해졌다고 느껴서 계속 신앙 생활을 이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의 유능함과 도우심이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

- 예수님이 떠나신 것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 신앙 생활을 해도, 기도를 해도, 예전처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 그러면서 과거에 경험했던 예수님의 도우심도 전부 의심이 된다.

- 결국 예수님과의 추억은 옛 이야기처럼 희미해지고, 그럴수록 더욱 삶에 매진하며 예수님과 소원해진다.

- 이 때, 아예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고, 교회를 떠날 용기까지는 없는 사람은 적당한 수준에서 신앙 생활을 이어간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시점이 온다.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반드시.

- 그때 예수님이 안계신 것처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만 믿어 무능해진 자신이 불안해질 것이다.

- 예수님만 믿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결국 세상에서 도태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결국 진짜 믿음은 이 때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 예수님의 유능함 이면에 있는 예수님의 본질을 보고 믿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무능함 속에서도 동일한 본질을 볼 것이다.

- 반면에 예수님의 본질에는 안중에도 없고 예수님의 유능함만을 바랬던 사람은, 예수님의 무능함을 보고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배신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유능함보다 무능함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의 유능과 무능을 결합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 우리에게 예수님의 본질을 보고 알고 믿으라고.

- 그래서 요한복음은 11장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요한복음 11장부터 예수님의 무능함을 제시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란 것을 기억하면서 본문을 보자.


인물 정리

① 마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27]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하지만 믿음 없음이 드러난다. 

-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려 하자, 예수님을 저지한다.

[39]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40]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② 마리아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불분명하다.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 '발 아래 엎드린 것'을 보아,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능력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12장에서도 계속된다.

- 마리아는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데, 거기서도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③ 나사로

아무런 대사도 없다. 그래서 평가도 없다.

- 예수님께서 나오라는 말씀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 전부이다.

④ 유대 사람들

양 극단으로 갈린다.

[45]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53]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있었지만, 기적으로 인해 생긴 막대한 영향력에 두려움을 느껴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리하면, 마르다 외에 다른 인물들의 역할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며,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심을 선포하도록 하시는 조연일 뿐이다.

- 따라서 인물보다는 죽었던 사람이 일어나는 상황과 그것에 대처하시는 예수님께 초점이 있다.


상황 정리

10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동편, 요한이 처음에 침례를 주던 곳인 베다니로 가셨다.

그리고 나서 11장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가셔서 기적을 일으키신다.

이렇게 성경에서 베다니는 두 곳이고,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 두 베다니 사이의 거리는 약 150km이다.

- 따라서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서 베다니로 이동할 때, 하루에 40km씩 약 4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나사로 소식 전달자가 출발하고 4일만에 예수님께 도착한다.

- 소식 전달자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출발했다.

- 그리고 예수님께 도착했을 때도, 나사로는 죽기 전이었다.

[4]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②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 소식을 들었지만, 바로 출발하지 않고, 2일 후에 출발하신다.

-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을 초자연적으로 아시고 출발하기로 정하신다.

[11]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 따라서 나사로가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들은 후 2일이 지나서이다.

③ 예수님은 4일이 걸려 베다니에 도착하신다.

- 거리가 걸어서 4일 걸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 게다가 예수님이 도착하신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4일 된 때이다.

[17] 예수께서 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은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

- 이렇게 예수님이 베다니로 이동하시는 시간과 나사로가 죽은 이후부터 예수님이 도착하시기까지 시간이 정확히 일치한다.

④ 예수님은 도착하신 날 바로 무덤에 가셔서 나사로를 살리신다.

이렇게 지리 상의 거리와 예수님의 행적이 잘 맞아 떨어진다.

- 나름 현실성 있게 이야기를 기록했다.


내용 정리

1-6절: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가족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3)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인 나사로가 병에 걸리는 것으로 사건이 시작된다.(1, 2)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3)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총평하시는데, 이 말씀은 이 사건을 보는 관점을 제시하고 제한한다.(4)

- 먼저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씀을 통해,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다.

- 그리고 그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제시된 관점은 사건이 갖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제한한다.

- 기적의 목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서 오랫토록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 즉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 우리도 나사로처럼 병에 걸려서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 엄밀하게 말해서,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는 이 기적을 통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했다.

- 오히려 나사로는 천국에 빨리 갈 수 있었는데, 못가게 되었다. 불쌍하다.

- 하지만 딱 하나 유익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도록 놔두신 후 14, 15절에 나사로가 죽은 것을 두고 '잘 된 일이라며 기쁘다'고 하신다. 

-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죽음을 기뻐하신다.

이 역시 사건의 메시지를 제한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사건을 그 죽은 사람과 가족에 초점을 두면 기쁘다고 말할 수 없다.

- 사건에서 사람을 철저하게 배제했기 때문에 기쁘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기쁘냐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 그것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만이 예수님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눈 깜박 안하시는 냉혈한이시다. 

- 우리도 이런 냉혹함이 있어야 한다.

왜 냉혈한이 되어야 하냐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너무 심취해 계셔서, 그 외의 다른 것에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았다.

-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알면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보고 기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는 마치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사명감 때문에, 외과 의사가 사이코패스처럼 환자의 몸에 칼질을 하는 것과 같다. 눈 깜박하지도 않고 냉혈한처럼 말이다.

만약 반대로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에 동요되어 슬픔에 빠지셨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를 놓치셨다면?

-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목숨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 이는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다.

- 사람의 목숨이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키보드 정도의 가치 밖에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아픔에 함께 슬퍼하는 것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누구의 아픔에도 공감하고 슬퍼하면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 하나님도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음 소리에 공감하셨다.(출6:5)

- 따라서 모든 아픔의 원인은 믿음 없음 때문이라는 믿음을 갖고, 아픔을 공감하며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 아픔에 빠져 예수님을 전하는 것까지 잊어버리면 안된다는 뜻이다.

- 아픔 앞에서 냉혈한이 되어, 예수님께 초점을 두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사아픔이 하찮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이 사람의 아픔조차 하찮게 만들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바로 가지 않으시고, 2일 후에 가신다.(6)

- 그 이유는 나사로가 죽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 나사로가 죽어야, 다시 살리심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정말 잔인하다. 

- 하지만 잔인한 것이 아니다. 마치 외과 의사를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렇게 예수님을 오해할까봐,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3, 5)

-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바로 가지 않으신 이유는 관심과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 나사로를 사랑하시고 살리시고 싶으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정말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사로에게 아예 가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2일 동안 기다리신다. 

-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면서. 

-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7-11절: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의 위협을 감수하심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 지방에 있는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신다.

-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유추하면, 나사로의 소식을 들은지 2일 후인 현재 시점에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11)

- 예수님은 이를 초자연적으로 아시고, 이제 죽은 나사로에게 가서 살릴 때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초점은 나사로가 아닌 자기 자신의 안전에 있었다.(8)

- 제자들은 유대 지방으로 가면 예수님과 함께 자신들에게 살해 위협이 있을 것을 두려워했다.

- 바로 직전에도 예수님은 돌을 맞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반응은 당연하다.

- 그래서 예수님께 가지 말자고 한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상징적인 경구로 대답하신다.(9, 10)

- 내용은, "낮에 다니면 안넘어지고, 밤에 다니면 넘어진다."는 선문답같은 말씀이다.

- 한 가지 주안점은 '햇빛'이라고 번역된 단언의 원어는 '세상의 빛', 즉 예수님이다. 

- 따라서 예수님이 있으면 안넘어지고, 예수님이 없으면 넘어진다는 뜻이다.

이 경구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이다.

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예수님만 믿어라!

- 낮과 밤을 나누는 기준은 햇빛(세상의 빛)이다.

- 빛이 있는 낮은 안전하고, 빛이 없는 밤은 위험하다.

- 따라서 안전과 위험을 나누는 유일한 기준은 빛, 즉 예수님 뿐이다.

- 그러니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과 함께 하면 언제나 안전하다.

② 예수님이 떠나실 때가 온다. 그러니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라!

-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

- 그런데 밤이 되면 위험하기 때문에 맡겨진 일을 행할 수가 없다.

[요 9:4-5]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 따라서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밤이 오는데, 밤이 되기 전에 하나님의 일을 완수해야 한다.

③ 그러나 지금은 안전하다. 유대 지방으로 가자!

- 지금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낮이다.

- 그러니 걸려 넘어지지 않고 안전하다.

- 따라서 유대 지방으로 가도 안전하다.

실제로 예수님은 유대 지방에서 위협을 받긴 하지만, 안전하게 도망가신다.

- 하지만 이 시점 이후로 더 이상 유대 사람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신다.(54)

- 그만큼 살해 위협이 심각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나사로에게 가신 것은, 그만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제자들을 안심시키신 후, 예수님은 잠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신다.(11)

- 우리는 잠자는 것은 죽은 것이고, 깨우는 것은 살리는 것이라는 것은 다 안다.(13)

- 이러한 표현은 구약에서도 흔히 사용된다.

[왕상 14:20] 여로보암은 스물두 해 동안 다스린 뒤에, 조상들과 함께 잠들고

[왕상 16:6] 바아사가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서, 디르사에 묻혔다.

[왕상 16:28] 오므리는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서 사마리아에 묻히고

하지만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12)

12-16절: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가심

제자들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전혀 몰랐다. 단순히 잠들었는데, 뭐가 문제겠느냐.(12, 13)

그래서 예수님은 상세히 설명해주신다.(14, 15)

- 나사로는 잠자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

그리고 특히 그가 죽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신다.

- 왜냐하면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너희가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를 위해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 전에 의도적으로 나사로에 가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조차 이용하신다.

이것을 수단 삼아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은 무엇이냐?

- 결국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를 비롯하여, 제자, 그리고 우리를 포함한 인류 전체와 참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 단순하게 말해, 나사로를 죽여서 나사로와 관계 맺고, 마리아, 마르다를 죽도록 슬프게 하셔서 마리아, 마르다와 관계 맺으시려는 것이다.

누차 말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나' 죽음, '나' 부정, '나' 파괴가 필수적으로 선행된다.

- '나' 부정으로 인한 모멸감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이 생긴다.

- 이를 위해, 예수님은 잔인하게도, 사이코패스같이, 냉혈한처럼 나사로를 죽인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예수님은 우리도 잔인하게, 사이코패스같이, 냉혈한처럼 '죽일' 것이다.

- 이런 일로 인해, 우리에게 모멸감이 반드시 들텐데, 그때 너무 당황해서 예수님조차 잊어버리지 말고, 에수님과 참된 관계 맺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기억하자.

- 모멸감으로 인해,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거나, 모멸감을 준 상대에게 시선이 가거나, 상황에 집중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을 인도하신 예수님께 초점을 두자.

- 그럴 때, 예수님의 껍데기가 아닌 본질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예수님과 참 관계, 참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마가 나서서 "우리도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이러한 도마의 태도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① 죽음을 감수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고백이다.

- 현재는 누구나 죽음이 임박해 있다는 것을 안다.

- 지금 유대 지방에 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다.

-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대단한 헌신이다.

- 하지만, 도마에게서 베드로의 냄새가 난다.

-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도망갔다.

- 도마도 마찬가지로 도망간다.

② 안전하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 대한 부정, 불신이다.

-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안전하다,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9) 

- 하지만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이 역시 베드로와 같다.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먼저 말씀하셨다.(13:36)

-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따라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이런 도마를 통해, 제자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따르지만,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아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암시한다.


주제

예수님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 사람 목숨 살리는 것, 그래서 잘 먹고 잘 살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다.

- 사람의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과감하게 무시하신다.

- 오히려 죽음과 슬픔을 보고 기쁘다고 하신다.

- 슬픔과 죽음을 도구로 이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 이를 통해 앞으로 있을 자신의 죽음과 그 후의 부활을 암시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부고, 예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신앙 고백이 뜻하는 것이다.

- 정말 무섭고 잔인할 정도로 세상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 그리고 예수님께만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정말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라는 것은 아니다.

-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감정을 자기 일처럼 선명하게 느끼실 것이다.

- 우리가 느끼는 감정보다 우리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느끼실 것이다.

- 우리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고 슬픔을 함께 슬퍼하실 것이다.

- 그러나 그 모든 감정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선한다는 것이다.

- 우리의 아픔과 고통 앞에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할 정도로.


결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도록 방치하신 것처럼, 우리의 남편, 아내, 아들, 딸, 부모의 죽음을 방치하신다면? 그러면서 그 죽음을 보고 기뻐하신다면? 우리는 감당할 수 있을까?

-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하신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다.

-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는 주님이시다.

- 하지만 그 예수님이 우리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도록 방치하시고, 뒤에서 미소를 지으시는 사이코패스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님께 다정함과 함께 냉혹함을 보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낄수록, 그래서 예수님께 더 의지할수록,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 마치 사랑하고 의지했던 배우자가 알고 보니, 오래 전부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받을 충격과 같을 것이다.

- 배우자를 사랑한만큼 실망과 충격은 더 클 것이다.

-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더 사랑하는 배우자(하나님)가 있었고, 그 배우자 앞에서 싸늘하게 내팽겨질 것이다.

만약 예수님의 다정함 이면에 있는 냉혹함을 알지 못했다면, 예수님께 실망하고 돌아서게 될 것이다.

-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를 매몰차게 내팽겨치실 것을 알아야 한다.

- 그렇게 내팽겨쳐질 때, 실망하고 돌아설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삶의 풍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삶의 풍요를 연료 삼아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것이 예수님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예수님은 우리를 기쁘게 하실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예수님은 하나님만 기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왜이러시냐? 왜 우리는 안중에도 없으시냐?

- 이런 방법만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이것만이 우리가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이것만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 속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꼭 기억하자. 예수님만이 전부이고, 예수님 외에는 다 아무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