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본문은 9장 전체를 요약, 정리, 결론 맺는다.
- 사건도, 메시지도 단순하고 명확하다.
- 하지만 9장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연결 관계를 세밀하게 확인하다보면, 전혀 단순하고 명확하지 않다.
- 심각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어야 의미를 알 수 있다.
- 이번 본문의 의미를 알아야, 9장 전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 마치 큰 배가 작은 키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짧은 이번 본문이 9장 전체를 좌우한다.
키워드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보다>, <못 보다>, <심판>, <죄>, <믿음>, <인자>
게다가 이 키워드는 9장 전체의 키워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빛>, <앎>, <기적>, <하나님의 일>
이 10개의 키워드는 단 하나도 소홀하게 여길 수 없다. 전부 다 중요하다.
- 이 키워드를 어떻게 꿰어 하나의 목걸리를 만드느냐가 본문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 이번 본문이 목걸이를 만드는 설계도와 같다.
- 그래서 이번 본문이 특히 어렵고 골치 아프다.
키워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본이 되는 말씀은 39절이다.
- ①못 보는 사람은 ②보게 하고, ③보는 사람은 ④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 여기서 ①, ②는 의의 영역에 있는 사람, 즉 눈 뜬 사람이다.
- 반면에 ③, ④는 죄의 영역에 있는 사람, 즉 바리새인이다.
그리고 ①, ③은 현세에서의 상태, ②, ④는 내세에서의 상태이다.
- 현세와 내세는 시간적인 의미도 물론 있다. 개인의 죽음, 혹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한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
-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서 '나'라는 존재의 죽음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이라는 의미도 있다.
예수님의 역할은 현세와 내세를 구분 짓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의의 영역에 있는 사람을 의롭게, 죄의 영역에 있는 사람을 죄인으로 '드러내시는' 것이다.
- 의인과 죄인은 이미 구분되어 있지만, 그 차이를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와 의의 '기준'이시다.
- 그리고 죄인과 의인을 드러내시는 '빛'이시다.
- 동시에 죄인과 의인을 구분하시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 즉 기준, 빛, 심판은 다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기준이시고 빛이시며 심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기적'이다.
- '기적'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사건이 아니다. 또한 의롭게 하시는 사건도 아니다.
-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르쳐주는 사건이다.
- 이 차이를 구분하자.
- 기적이 바리새인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도, 눈 뜬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다. 누구도 기적을 시점으로 천국 혹은 지옥에 가지 않았다.
-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군지 알려줘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유일한 기준임을 평생 동안 상기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다.
본문은 이러한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표현한다.
- 하나님의 일은 돈 생기고, 밥 생기고, 치유되는 일이 아니다.
- 예배, 찬양, 전도도 아니다.
- 어떤 일이라도,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이 기준 되심이 밝혀지면, 다 하나님의 일이다.
그렇다면, '본다'라는 의미는 뭐냐?
- 반대되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 현세에서 보는 것 ③과 내세에서 보는 것 ②이다.
현세에서 보는 것 ③은 기본적으로 눈으로 보는 것이다.
- 이런 의미가 심화되어 '앎'으로 연결된다.
- 따라서 죄와 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여 아는 것을 의미한다.
- 특히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나'인 사람을 말한다.
-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다.
- 이는 결국 영적인 생명 없음, 즉 죄외 연결된다.
반면 내세에서 보는 것 ②는 당연히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기준 삼는 것이다.
- 따라서 영적인 생명을 얻어 의에 이르는 것이다.
- 그래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못 보게 된다'고 표현했고, 눈 뜬 사람은 예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보게 된다'고 표현했다.
따라서 '의'는 예수님을 보고 알아 믿는 것이고, '죄'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자'의 의미는? 당연히 예수님이신데, 왜 꼭 이 표현을 썼을까?
- '인자'는 당시에 생소한 단어였다.
- 다니엘 7:13-14에 나왔지만, 대중적으로는 그리스도라고 인식되지 않았다.
- 그런 특별한 단어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중하게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 요한복음은 총 13회 사용했다.
- 어찌되었건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를 드러내기 위한 단어일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기준', 빛', '심판자'이다.
- 이 셋 모두 죄와 의를 선명하게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 따라서 '인자'라는 단어의 뜻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인자'의 용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는 기준
[요 5:27] 또,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것은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 심판의 기준
[요 6:5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 생명을 구분하는 기준
이렇게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이 기준이심을 강조한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준인 '전통'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 전통과 율법이 나쁜 것이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대체하여 예수님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미심쩍은 것이 있다.
- 현세에서 못 보는 사람 ①의 의미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 이는 예수님을 전통과 율법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바리새인과 반대된다.
본문에서 현세에서 못 보는 사람은 대표적으로 눈먼 사람이다.
[9:25]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 눈먼 사람은 25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아무 판단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33절에서 눈먼 사람도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33]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 정말 못 보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알지 못해야 하는데 말이다.
지난 본문에서 나는 이 점을 눈 뜬 사람의 한계라고 말했다.
- 출교를 감수하며 솔직하게 말한 것이 특별한 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똑같은 논리로 예수님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 이는 보는 사람의 태도이다.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문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과연 눈 뜬 사람은 ①못 보는 사람일까, ③보는 사람일까? 아니면 제 3자일까?
- ①못 보는 사람이라고 하면, 33절이 걸린다. 판단하기 때문이다.
- ③보는 사람이라고 하면, 전체 맥락과 맞지 않는다. 특히 37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②내세에서 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③보는 사람일 수 없다.
- 게다가 본문은 제 3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한다. ①과 ③ 외에는 없다.
과연 눈 뜬 사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이런 전체 흐름 속에서 본문을 보겠다.
내용 정리
35-38절: 예수님과 눈 뜬 사람의 대화 -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눈 뜬 사람이 출교되었다는 것을 들으셨다.
그리고 그를 만나신다.(35)
- 이 단어는 우연히 만난다는 수동적인 의미보다는 찾아서 만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눈 뜬 사람에게 찾아 가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자임을 드러내시고 믿도록 권유하신다. 동시에 눈 뜬 사람 역시 인자가 누군지 묻고, 믿겠다고 다짐한다.
또한 예수님은 눈 뜬 사람이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의롭게 됨을 선포하신다. 동시에 눈 뜬 사람 역시 그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 이렇게 믿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상호적이다.
- 예수님은 믿음을 제시하기만 하고, 강제로 주입하시진 않는다.
- 동시에 눈 뜬 사람도 믿음을 간절히 구하기만 하지, 믿음을 혼자 힘으로 쟁취하지 않는다.
- 예수님과 눈 뜬 사람이 서로 믿음을 주고 받는다. 예수님의 주심과 눈 뜬 사람의 구함이 함께 어우러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신다는 것이다.
- 눈 뜬 사람은 그 기회에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 그래서 상호 믿음이 성취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반드시 먼저 찾아 오실 것이다. 성경의 약속이다.
- 문제는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 지금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언제든 악착같이 달려들어야 한다.
-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입장에서 예수님과 상호적인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을 하시는데, 37절에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 '보다'는 죄와 의와 연결되는 중요한 표현이다.
- 예수님 없이 못 보는 것과 예수님을 보는 것은 의이다.
- 그리고 예수님 없이 보는 것과 예수님을 못 보는 것은 죄다.
- 그런데 눈 뜬 사람은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특히 본 대상이 예수님이다.
-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의로움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다는 것, 즉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것을 한번 더 강조하고 있다.
39절: 예수님의 선포 - 나는 심판하러 왔다.
9장 전체의 핵심 구절이다.
- 치유 기적, 눈 뜬 사람과 바리새인의 논쟁은 모두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이용하신 수단이다.
- 더 극단적으로, 눈 뜬 사람에게 믿음을 주신 것도, 이 한 사람 구원 받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눈 뜬 사람도 단지 이용당한 것이다.
이 말씀의 핵심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
- 누가 보고 누가 못 보는지 따지는 것은 의미 없다.
- 이 역시 죄와 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온다.
- 이러한 반응이 현세에서 보고, 내세에서 보지 못하는 죄인의 전형이다.
핵심은 두 가지다.
① 유일한 기준은 예수님 뿐이다.
② 그런데 현세에서 우리는 그 기준으로 인한 심판 결과를 절대로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항상 우리의 판단을 빗나가시기 때문이다.
- 그러니 절대로 어떤 것도 잘못 판단해서 오해하지 말고, 예수님만 볼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알고 일부러 역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틀렸다.
- 예를 들어, 물질적인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이 반대로 물질적인 저주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또 이것을 이렇게 오해하기도 한다.
-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말에,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것도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확신있게 전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판단의 기준을 아는 것'과 그 기준으로 '판단을 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마치 '자'를 가지고 있는 것과 길이를 재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오해가 이해는 된다.
- 사람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을 구분하기 굉장히 어렵다.
- 왜냐하면 기준을 가지면, 판단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 판단은 본능이라서 사람이 막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한 번도 소고기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숯불에 이글거리는 소고기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 반면에 1등급 소고기를 맛 봐서 소고기 맛에 기준을 가진 사람은 소고기를 보면 자동으로 침이 고인다. 맛있겠다는 판단을 무의식적으로 내린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은, 이미 입에 침이 흥건히 고인 사람에게 맛있겠다는 판단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단지 소고기가 있다는 사실만 알라는 것이다.
- 이것은 마치 고문하는 것 같다. 감당하기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법을 사용한다. 소고기 먹었던 기억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 그러면 맛있겠다는 판단을 자연스럽게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반드시 소고기 먹었던 기억, 즉 기준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판단만 하지 말아야 한다.
- 기준과 판단을 모두 버리는 것은 쉽지만, 기준을 가진체 판단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리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판단 기준까지도 부정해버리는 오해를 한다.
- 그래서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것을 확신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오해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심판,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을 39절에서처럼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것이다.
40-41절: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화 -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옆에서 엿듣고 있었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은 이해했지만, 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한 것은, 현세에서 눈 먼 것이 좋은 것은 알았다.
-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이 눈 먼 사람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내세에서 못 보게 될, 현세에서 보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몰랐다.
- 그래서 자신들이 눈 먼 사람이냐고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이 참 얄궂다.
- "너희는 본다."가 아니라, "너희가 본다고 말한다."고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판단을 근거로 말씀하시지 않고, 바리새인의 자기 판단을 근거로 말씀하신다.
-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 말씀을 부정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말을 근거로 바리새인이 죄인이라고 정죄하신다.
- 죄인인 이유는 바리새인이 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 즉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덫에 걸리게 하셨다.
이렇게 9장은 믿음을 얻게 되는 눈 뜬 사람과 죄인이라 정죄 받는 바리새인을 비교하며 끝난다.
주제
① 예수님은 유일한 기준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주시고, 원하지 않는 것을 막아주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시고 가르쳐주시는 분이다.
- 예수님은 우리의 기준, 판단, 가치관 안에서 활동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 오셨다.
- 마치 우리집 인테리어를 예수님께 맡겼더니, 건물 자체를 부수고 새로 짓는 것과 같다.
- 아니 건물 부수는 것도 모자라, 지구와 우주와 존재 자체를 전부 부수고 새로 만드시는 것 그 이상이다.
-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말의 뜻이 이런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예수님을 대면했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집 인테리어 새로 싹 해서 새 집에 살 기대를 잔뜩 가지고 예수님께 인테리어를 맡겼는데, 잘 되고 있나 와봤더니, 건물 자체가 없어져 있기 때문이다.
- 사기 당하고 도둑 맞은 기분이 든다. 믿었던 사람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기분이 든다.
- 이런 업자에게 누가 집을 맡기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 이러한 당혹감이 본문에서 바리새인이 느꼈을 감정이다. 그러니 돌을 드는 것이다.
하지만 전제가 바뀌면, 상황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뀐다.
- 만약 알고 봤더니 우리집의 기초가 부실해서 1년도 버티지 못할 집이었다면?
- 건축 대가였던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건물을 부순 것이었다면?
- 아니, 더 극적으로, 예수님이 인테리어 철거를 하다가 건물의 부실 공사 때문에 무너진 거라면?
- 예수님이 건물에 깔려 있어서 연락조차 못한 것이었다면?
- 자칫하면 내가 깔릴 수도 있었던 것인데, 예수님이 대신 깔리신 것이라면?
이것을 알게 되면,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사기꾼에서 생명의 은인으로 바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뜻의 이면에는, 우리가 기준 삼고 있는 모든 것이 곧 무너질 부실한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 내 인생 전체가 얼마나 부실한지 알아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사기꾼, 도둑놈에서 은인, 생명, 구원자, 그리스도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강도 잡듯이 잡아 죽인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이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 인생 전체가 얼마나 부실한지, 얼마나 금방 무너질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그래서 4절에 예수님께서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우리 인생의 건물이 무너질 때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 인생의 건물이 무너지면,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 전에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우리를 우리 인생의 건물에서 구조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② 예수님이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못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곧 무너질 건물에서 예수님에 의해 구조된 사람이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없이는 다른 집으로 이사도 갈 수 없게 될 것이다.
- 집이 무너진 트라우마 때문에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수 있다.
- 예수님이 안전하다고 인정한 건물에만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 그러니 당연히 이사를 할 때도 예수님의 확인을 받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스스로는 건물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한 건물이 무너진 것을 보면, 그 이후로는 절대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본문은 이러한 상태를 못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 그러면서 이런 사람만이 의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무능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능함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이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조차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게 된다.
- 특히 이러한 의문을 누가 갖게 되냐면, 예수님으로 인해 무능함을 알게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 안에서 무능함을 깨달은 사람의 경우 이러한 오해에 빠진다.
- 예수님이 기준이심을 아는 것에 초점을 둬야 하는데, 자신의 무능함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 자신의 무능함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전능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해법은 뭐냐?
- 결국 똑같이 예수님께 초점을 두는 것이다.
- 자신의 무능함 아는 것은 잠시 제쳐두고, 예수님께 초점을 두면, 예수님을 알고 믿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이 직접 우리의 인생 건물을 무너뜨리실 것이다.
- 그래서 그 동안 몰랐던 자신의 진짜 무능함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자신이 못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③ 믿음은 반드시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생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 건물에 들어오셔서 우리 인생 건물을 무너뜨리시고 예수님이 기준임을 깨닫게 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 첫째는, 예수님이 얼마나 훌륭한 건축가이신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셔야 한다.
- 둘째는, 그래서 우리는 우리집 인테리어를 예수님께 맡겨야 한다.
즉, 예수님 측에서의 계시와 우리 측에서의 헌신 중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 인생 건물이 무너질 수도 없고, 예수님이 기준임을 깨달을 수도 없다.
- 언제나 상호 작용 속에서만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미 계시해주셨고, 지금 오늘도 계시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반복해서 계시해주실 것이다.
- 우리 교제 속에서 일어나는 일, 깨닫게 되는 일을 회상해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계시를 절대로 부정할 수가 없다.
- 우리가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서 예수님에 대해 알게된 것이 너무 크고, 서로에 대한 관계도 비교할 수 없이 깊어졌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이 만큼 알게된 것은, 우리 안에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냈다는 것이 아니다.
-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힘써 이뤄낸 것이다.
- 그 힘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든 것이다.
언제나 이렇게 관계는 상호 작용 속에서만 이뤄진다.
- 이것 기억하고 더 힘을 내자.
- 예수님께 더 헌신하고, 서로에게 더 헌신하자.
- 인생에서 한 번 헌신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헌신하자.
세상이 종말하여 인류의 건물이 다 무너지는 날, 예수님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결론
신앙은 파괴다.
- 그래서 신앙은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럽다.
- 이 점 잊어버리면,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 날 파괴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 달려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파괴는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 나의 안식처였던 멀쩡한 내 집이 파괴된다면 괴롭다.
- 그러나 새 집을 짓기 위해 내 집을 철거한다면 행복하다.
- 즉, 집에 대한 나의 인식이 달라지면, 동일한 파괴에 대해 다른 감정을 갖게 된다.
지금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파괴는 새 집을 짓기 위한 철거라는 것을 기억하자.
- 결국 우리는 온 우주의 종말에도 무너지지 않을 예수님이라는 집에 살게 될 것을 기억하자.
그러면 내 인생 여지 저기가 무너져 내려, 빼앗기고 실패하는 것을 볼 때, 고통스럽겠지만, 고통스럽기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 소망과 행복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말 잘 아신다.
-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파괴만 허락하신다.(고전 10:13)
- 그렇기 때문에 점짐적이다. 천천히 진행된다.
- 그래서 지루하고 답답하고 재미 없을 수 있다.
- 이 느린 변화의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 변화가 빨라지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게 보고, 너무 성급해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해야할 기도, 말씀, 교제에 집중하며, 또한 종말 이후에 있을 소망 기대하며, 그냥 그렇게 신앙 생활 하자.
- 그것이 눈 먼 사람의 삶이다.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오실 때 그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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