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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27) 9:13-34 눈먼 사람과 바리새인의 시각 차이

본문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 바리새인은 어떻게든 치유 기적을 부정하려는 반면, 눈먼 사람은 있는 그대로 기적을 증언한다.

바리새인의 논리는 이렇다.

- 안식일 율법을 범한 사람은, 비록 기적을 일으켰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일 수 없다.

- 즉, 율법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서 기적을 부정한 것이다.

반면에 눈먼 사람의 논리는 이렇다.

- 신비한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비록 안식일 율법을 범했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 즉, 기적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서 율법을 부정한 것이다.

게다가 지난 본문까지 연결해서 보면, 제자들까지 합세한다. 

- 이들의 논리는, 질병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는 것이다.

- 즉, 건강과 하나님을 연결시킨 것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을 가운데 두고 세 부류가 싸우고 있다.

① 율법을 주장하는 바리새인, ② 기적을 주장하는 눈먼 사람, ③ 건강을 주장하는 제자

결국 셋이 싸워서 누가 하나님을 차지하게 될까?

- 단순하게 사건만 보면,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혹은 눈먼 사람의 치유 이야기로 보인다.

-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 혹은 눈을 뜬 사람의 믿음으로 결론이 난다.

하지만 논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면에 있는 각 사람의 이념과 생각이 보인다.

- 본문은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치열한 이념 전쟁 이야기이다.

게다가 언듯 보면, 전쟁에서 눈먼 사람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 예수님에 의해 육체적 시력을 회복하고, 영적 시력까지 회복하여 믿음까지 얻으니 말이다.

- 대부분의 유명한 해석서들이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난 반대한다. 예수님은 누구도 승리자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예수님만 유일한 승리자시다.

- 언제나 예수님만이 유일한 본질, 기준이시고, 나머지는 전부 다 수단이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주장은 다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결국 다 같다.

- 율법이냐, 기적이냐, 건강이냐만 차이날 뿐,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한다는 점은 똑같다.

본문을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

- 바리새인은 율법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 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고, 눈먼 사람은 실제 일어난 객관적인 사건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 했기 때문에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또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부정했기 때문에 잘못했고, 눈먼 사람은 인정했기 때문에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핵심은 하나님을 판단하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 만약 기적으로 치유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질병이 걸린체 있는 것 은 하나님의 저주여야만 한다.

- 반대로 질병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면, 질병에서 벗어나 치유되는 기적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여야 한다.

즉, 눈 뜬 사람과 바리새인은 판단의 기준은 달랐지만, 결국 같은 논리라는 뜻이다.

- 게다가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먹고 그 기적의 능력에 반해 예수님을 왕 삼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이미 말씀해주셨다.(6:15)

따라서 아무리 예수님을 옹호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 기준이 나 자신의 판단이라면, 예수님은 그 믿음을 부정하신다.

그런 관점에서 33절에 눈먼 사람이 기적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바른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없다.

- 36절에 눈먼 사람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33절의 고백을 바른 신앙이라고 가정하면, 예수님을 모르고서도 기적으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오해가 생긴다.

- 그런 오해 속에서, 기적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현재 예수님과의 관계와 상관 없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눈먼 사람의 주장은 단지 유대 사람들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봐야 한다.

- 바리새인은 날 때부터 질병에 걸린 것이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이에 대해 눈먼 사람은 바리새인의 논리로 바리새인을 비판한 것이다.

- 질병이 죄 때문이라면, 치유는 의 때문이라는 것이다.(31-33)

- 그렇기 때문에 치유를 행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인이라는 논리다.(33)

- 이에 바리새인은 논박하지 못하고, 인신공격을 하며 논쟁이 끝난다.(34) 

그렇다면, 본문이 큰 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 '명절 사이클'이라는 틀에서 봐야 한다.

- 전통, 율법, 사람의 가치관, 상식, 통념 등 세상에 있는 모든 판단 기준을 부정하는 맥락이다.

그 중에서 본문은 율법과 기적을 충돌시킨다.

- 그래서 율법과 기적 중 하나의 편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틀렸음을 증명한다.

이를 통해, 세상의 기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고발하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과의 관계만이 유일한 기준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은 사건 자체가 흥미롭기 때문에 섬세하게 이해하기 힘들다.

- 특히 맥락과 연결해서 보기는 더 힘들다.

- 그래서 기적에 대한 맹신으로 빠지기 쉬운 본문이다. 

- 나를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게 된다.

- 그렇게 되면, 결국 바리새인과 똑같은 사람이 된다.

- 신앙을 위해 예수님과 대립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 주의하면서 본문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내용 정리

13-17절: 눈먼 사람과 바리새인의 1차 대화 -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치유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전통을 파괴하시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었다.

- 유대 사람들은 질병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질병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말씀하셨다.

- 그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부정한 때에 부정한 방법으로 치유를 행하셨다.

- 이렇게 예수님은 전통을 파괴하심으로 참 예수님을 전할 상황을 만드신 것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욕하는 예수님께 바리새인이 적개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 그래서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그것을 위해 바리새인은 눈 뜬 사람을 불러 조사한다.(15)

- 하지만 다 아는 정보 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이를 두고 바리새인 안에서도 상반된 판단이 나온다.(16)

-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 율법을 범한 것을 근거로 예수님을 부정한다.

-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표징을 근거로 예수님을 인정한다.

- 그래서 그들은 분열한다.

이 분열은 너무나 당연하다.

- 예수님을 부정하는 기준과 예수님을 옹호하는 기준 모두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 서로 자기가 맞다고 우기며,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무리는 분열할 수 밖에 없다.

- 우리도 마찬가지다. 조심하자.

마지막으로 바리새인은 눈 뜬 사람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예언자'라고 대답한다.(17)

이러한 반응은 한편으로 특별하지만, 한편으로 평범하다.

- 평범한 이유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요 4:19]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요 6:14] (오병이어를 본)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였다. 

[요 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가운데는 "이 사람은 정말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 그렇기 때문에 눈 뜬 사람의 고백은 별 것 아니다.

하지만 이 고백을 한 상황을 고려하면, 특별하게도 볼 수 있다.

- 지금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한 살의가 극에 달한 상황이다.

-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말을 하면, 예수님과 엮일 수 있는 상황이다.

- 그것 때문에 그의 부모 역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극도로 조심했다.

이로 보아, 눈 뜬 사람이 예수님을 남들보다 특별히 더 신뢰했다고 볼 수는 없다.

- 하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에 비해, 그리고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부모에 비해, 솔찍하게 아는 것을 말하고 있다.

18-23절: 눈먼 사람의 부모와 바리새인의 대화 - 출교 당하기를 무서워하는 부모

유대 사람들은 증인(눈 뜬 사람)과 증거(뜬 눈)를 모두 보았지만, 믿지 않았다.(18)

- 이들은 눈 뜬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눈 뜬 사람을 두 번이나 불러 추궁하고, 그의 부모를 증인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일관성 있는 진술, 증인의 증언까지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믿지 않았다.

- 이와 비슷한 일로서 '타진요 사건'이 있다.

- 사실을 입증한 명백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실형까지 선고되었다.

이런 어리석은 일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도 비슷한 일을 저지른다.

-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각, 신념, 믿음과 다른 사실은 근거가 있어도 믿으려하지 않는다. 

- 더욱이 근거를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 자신과 반대되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러한 실수는 너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서,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 내가 항상 이런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우리도 100% 바리새인과 똑같은 착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부모를 불러다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어떻게 보게 되었소?"(19)

- 같은 질문이 10절, 15절, 26절에도 나온다. 4번에나 질문한다. 징하다.

차이점은 정말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는지 확인한다.

- 날 때부터의 질병은 당사자보다 부모가 더 잘 알 것이다.

이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 눈 뜬 사람이 원래 질병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내어 예수님의 기적을 부정하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다.

- 현재 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 이전에도 볼 수 있었다며, 치유 기적을 부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한다. 부모가 날 때부터 질병을 확실하게 증언한다.(20)

- 분명히 날 때에는 눈먼 사람이었고, 지금은 확실히 본다고 말한다.

- 이로써 예수님의 기적은 확증되었다.

그러나 부모는 제일 중요한 것은 빼고 말한다. '어떻게'와 '누가'이다.

- 부모는 의도치 않게 기적을 증언했다.

- 하지만 의도적으로 기적에 대해 함구한다.

그리고 그 '폭탄'을 자식에게 넘겨버린다.(21)

- 기적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간, 출교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22)

- 그래서 기적에 대한 증언은 하지 않고, 자식에게 미룬다.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출교가 주는 부담이 상당했나보다.

- 종교적, 영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문제까지 생겼을 것이다. 

- 부모 입장에서 굳이 자신들의 일생을 걸고 예수님을 증언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근시야적으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어쩌면 불필요해 보이는 부모 이야기를 요한복음에 실은 이유는 무엇일까?

- 비슷한 상황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약 AD 90년경) 예수님을 믿지만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커밍아웃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 당시는 박해가 워낙 심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랬을 법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가치이고, 예수님 외에 모든 가치는 쓸모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 '돈 많이 벌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떨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 하지만 적어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줄은 알아야 한다.

- 또한, 저런 말을 하는 다른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 하지만, 적어도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말에 공감하고 동조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들의 말에 동조한다.

- 그것을 좋게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상대방의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동조한다.

- 우리는 다른 사람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 사람은 내 바로 앞에 있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 이는 명백한 불신, 배신, 배교다. 조심하자!

본문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부정할 때가 없다고 하더라도, 부모처럼 비겁하게 암묵적으로 부정할 때가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24-34절: 눈먼 사람과 바리새인의 2차 대화 -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눈 뜬 사람을 또 다시 부른다. 바리새인의 말에서 부른 목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24)

먼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는 말은 거짓말 하지 말라는 뜻이다.

[수 7:19]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들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사실대로 고백하여라. 네가 무엇을 하였는지 숨기지 말고 나에게 말하여라."

그러면서 바리새인이 추궁하는 이유는 '예수가 죄인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 이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다.

- 안식일을 범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치유하는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서 죽이려는 속셈이다.

그에 대해 눈 뜬 사람은 정말 거짓말 하지 않고 사실만 말한다.

- 죄가 있냐 없냐라는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다. 

-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가치이기 때문이다.

- 치유가 되었다는 사실만 제공한다.

모든 작전을 실패한 바리새인은 또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26) 

- 할 말이 없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눈 뜬 사람은 반복되는 질문에 참다 못해 바리새인을 도발한다.(27)

-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을 죽이려는 속셈이 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래서 "너네 예수님 제자가 되고 싶냐?"고 말한다.

-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칭한 것은 상당한 모욕일 것이다.

그러자 당연히 바리새인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28)

-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소리친다.

- 이를 통해,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으니, 하나님과의 연결성을 강조한 것이다.

- 반면에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과 관련 없음을, 그래서 죄인임을 주장한 것이다.

30-33절에서 눈 뜬 사람이 마지막으로 열변을 토하며 지저분한 논쟁은 끝나간다. 

정리하면,

- 대전제: 하나님은 의인의 말을 들으셔서 기적을 일으키신다.(31)

- 소전제: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셨다.(32)

- 결론: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인이다.(33)

- 즉, 기적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한 것이다.

말했지만, 이 역시 옳지 않다. 대전제가 틀렸다.

- 하나님께서 의인의 말은 듣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은 맞다.

- 하지만 모든 기적을 전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사탄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 출애굽 할 때, 이집트의 마술사도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출 7장)

- 또한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다.(고후 11:14)

하지만 눈 뜬 사람의 논증은 바리새인의 논리를 부수기에는 충분했다.

- 바리새인도 아무런 근거 없이 율법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했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기적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눈 뜬 사람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때가 있다.

- 징조가 좋다며 근거 없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 뭔가 이번에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 같다며, 기분을 근거로 헛된 판단을 할 때가 있다.

- 우리도 정신 안차리면, 바리새인과 같은 실수를 한다.

이러한 실수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데, 그 때문이 한국 교회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 아무 근거 없이 감정을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잘 되게 해주실 것이란 확신이 든다."와 같은 허황된 판단을 한다.

- 게다가 이러한 실수를 목사가 주도한다. 그래서 교회 전체가 아무런 문제 의식을 갖지 못하고 똑같이 따라한다. 

- 그렇게 감정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안다.

그로 인해 생긴 심각한 문제가 바로 신천지다.

- 신천지도 교회 안에 들어와서 똑같은 말을 한다.

- 교회에 와서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 그래서 그들을 신천지로 데리고 간다.

- 근거 없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신천지의 논리가 교회의 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 교리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천지는 깨끗한 교회에 악영향을 주입한 것이 아니다.

- 이미 교회 안에 퍼져 있는 악영향을 입구 삼아, 아무런 제지 없이 사람들을 옮겨간 것이다.

- 즉, 교회를 공격하는 신천지가 문제가 아니라, 신천지에 당하는 교회가 문제인 것이다.

-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은 근거 없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다.

교회가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신천지의 무차별 공격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 교회가 할 수 있는 것 딱 하나는, 교회 문 앞에 신천지 금지 포스터 붙여 놓는 것 뿐이었다.

그 이유도 가관이다.

- 교회에서 신천지를 쫓아낼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 이 포스터가 없으면, 신천지로 생기는 문제에 대해 '법률적'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교회가 얼마나 무능하면, 교회의 생명을 '법률'에 의지해서 지키겠는가!

교회가 이런 지경에 이른 이유는 근거 없이 하나님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확신을 주셨다'며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하는 사이비 이단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 그렇게 당하면서도 교회는 자기 문제가 뭔지 지금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

- 문제를 모르는게 더 문제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나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면 안된다.

- 이 작은 문제 하나가 교회 전체를 무너 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5-10장까지의 명절 사이클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가치 기준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다.

- 농담으로라도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하지 말자!

마지막으로, 이런 도발에 가만히 있을 바리새인이 아니다. 당장 출교를 명령한다.

- 눈 뜬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했으니 당연하다.

- 게다가 기분 나쁘게 한 괘씸죄까지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주제

① 하나님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어떤 것도 옳지 않다.

율법, 건강, 기적을 기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모두 틀리다.

- 그것이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한 좋은 목적일지라도 안된다.

- 좋은 목적으로 시작한 일로 인해 교회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무엇을 기준으로 하건, 내가 하나님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

② 사람은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고도 부정할 수 있다.

본문은 바리새인만 비판하지 않고, 부모도 비판하고 있다.

-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한 사람 뿐만 아니라, 알면서도 모른체 한 사람까지 비판한다.

어쩌면 부모가 더 나쁘다.

- 바리새인은 몰라서 그랬다고 할 수 있지만, 부모는 알면서도 부정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건 다니지 않건,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 대충 사는 것은 그럴 수 있다. 모르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된다.

- 적어도 머리로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신앙 외에는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안중요한지 아니까.

- 게다가 세상을 혐오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을 혐오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세상이 좋을 수 있다. 아니 모든 사람은 세상을 좋아한다.

- 하지만 세상 좋아하는게 얼마나 창피한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 그래서 세상 좋아 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것은 진짜 어리석은 것이다.

이는 마치 바지에 큰 실수를 하고 당당하게 활보하는 사람과 같다.

- 상황이 우연치 않게 맞아 떨어지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실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상황이 안좋았던 것 뿐이다.

- 수습하면 된다. 옷을 갈아입으면 된다.

- 일반적으로 사람은 실수를 감춘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상이다.

- 예외로 자신의 실수로 피해를 본 사람이 있으면, 부끄러워도 실수를 밝히고 사과한다. 

하지만 실수를 하고 당당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 주변 사람들한테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 실수를 한 것보다,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진짜 어리석은 것이다.

당당한 이유는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냄새나는 옷을 그냥 입고 다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신이 세상 좋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밝히는 사람이다.

-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 위해 밝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이 아닌 사람은 정말 부끄럽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고도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③ 사람은 믿을만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바리새인은 증거를 찾는 척 하지만, 실제로 증거를 찾지는 않는다.

- 자신들이 원하는 증거를 조작해서 만들려고 할 뿐이다. 

- 근거 없는 믿음을 지키려고만 노력한다.

- 우리가 보기에는, 눈 앞에 증거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이 답답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측면에서 바리새인과 똑같다.

- 사람마다 분야가 다를 뿐, 모든 사람은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 정치적으로 진보인 사람이 보수인 사람을 보면, 근거 없이 믿는 것 같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보인 사람조차 근거 없는 믿음을 반드시 가지고 있다.

사람은 근거 없는 믿음이 있는 영역에 있어서 한 없는 바보가 된다.

- 그 영역에 있어서는 반복해서 같은 실수를 한다.

- 실수를 하면서도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한다.

- 그래서 진짜 바보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근거'가 없는 믿음이기 때문에, 아무리 믿음에 반대되는 근거가 나타나도 믿음을 바꾸지 않는다.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만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부정해야 한다. 

- 그래야 믿을만한 것을 믿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 그래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근거를 하나라도 더 만들 수 있다.

- 그래야 자신이 근거 없이 믿고 있는 것을 버릴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죽이지 않을 수 있다.


결론

세 가지 주제는 결국 하나를 말하고 있다.

- 하나님에 대해 판단하는 것도, 자신이 가진 기준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 부모가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도, 출교되면 안된다는 자신의 기준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 근거 없는 믿음을 갖는 것도, 자신의 믿음은 언제나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나에 대한 믿음'이다.

- '나'를 의심하지 않고, '나'를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내가 '나'를 믿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 마치 빨간색 안경을 끼면, 빨간색이 안보이는 것처럼, '나'라는 색안경을 낀 나는 절대로 '나'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것이다.

- 우리의 가치관을 무너뜨리심으로.

-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그래야 '나'라는 색안경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제서야 '나'를 믿는 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믿음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를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가 아닌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참 믿음이다.

'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헛된 믿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