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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29) 10:1-21 관계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목자 예수님

요한복음 10장에는 두 가지 논쟁이 있다.

첫째는, 9장과 10장의 맥락에 대한 논쟁이다.

- 10장에 나온 목자 비유가 9장과 연결되지 않는다.

- 그리고 10:21에 눈먼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그래서 9장이 10:21에 바로 연결되고, 10:1-18은 10장 마지막에 오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10:1-18 안에서 첫째 비유(10:1-6)과 둘째 비유(10:7-18)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다.

- 두 가지 비유의 내용이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의견이 둘로 나뉜다.

- 한 부류는 둘째 비유는 첫째 비유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 반면에 다른 부류는 둘째 비유는 첫째 비유의 단순한 해석을 넘어 '확장'이라고 말한다.

- 여기서 확장이란, 둘째 비유가 첫째 비유의 의미를 넘어서 첫째 비유에 없는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논쟁이 생기는 이유는, 그만큼 목자 비유가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친숙해서 쉽게 생각했는데, 막상 문맥과 연결시켜 보려고 하니 잘 연결이 안된다.

- 항상 맥락과 연결시키기 어려운 구절에는 논란이 많다.

특히 두 가지 논쟁 모두 문맥과 관련된 논쟁이라 본문을 해석하기 더 까다롭다.

- 문맥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논쟁을 일축했다.

- 확실히 알아서가 아니라, 일축하지 않으면 해석을 할 수 없으니까.

첫째 논쟁에 대해서는 무조건 현재 본문의 순서를 따르기로 했다.

- 그래서 9장에서 10장으로 이러지는 맥락을 최대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둘째 논쟁에서, 둘째 비유를 첫째 비유의 단순한 해석으로 봤다. 

- 첫째 비유와 둘째 비유가 정확히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봤다.

- 그래야 두 비유를 연결시켜서 두 비유를 모두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두 비유가 서로의 의미를 한정시켜서 의미를 구체화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확장으로 보면, 그래서 두 비유가 완전히 같은 메시지가 아니라고 보면, 의미를 한정하고 해석할 수 없다.

- 해석되지 않은 비유는 괴장히 위험하다. 사람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 특히 다른 비유와 달리 목자 비유는 그 의미를 해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조차 없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10장을 해석하는 가이드라인을 세우면 다음과 같다.

① 5장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명절 사이클'의 맥락 안에서 본다.

- '명절 사이클'의 주제는 유대 전통 파괴이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의 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그 중에 특히 예수님과 관계 맺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따라서 목자 비유도 이 맥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② 본문에서 두 가지 목자 비유는 모두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 그 메시지는 전통 파괴, 예수님의 정체성, 관계에 대한 내용에 한정되어야 한다.

- 비유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다른 메시지는 과감히 무시할 수 있다.

따라서 목자 비유는 유대 전통의 메시야 관점을 부정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메시야시며, 특히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참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할 것이다.

- 3, 4, 5, 8, 14, 15, 16절에서 반복적으로 말과 목소리를 알고, 듣고, 알아듣는다는 표현을 한다.

-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

- 반면에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

- 10장도 역시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비유'라는 설명 도구는 반드시 이렇게 해석의 바운더리를 정해 놓아야 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 '비유'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잘 쓰면 한 없이 좋고, 못 쓰면 부작용이 심하다.

- 개념이 너무 낯설고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 '비유'를 통해 친숙하고 쉬운 소재로 바꿔 말하면 이해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100% 완벽한 비유는 없다. 

- 모든 비유는 원 개념을 100% 동일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 원 개념을 살짝 왜곡, 변질시켜서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 비유를 잘못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비유의 본질이다.

그래서 비유를 너무 자세하게 분석하면, 오히려 원 개념을 오해하게 된다.

- 이것이 비유의 한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에는 해석의 바운더리가 중요하다. 비유를 사용한 의도를 알아야만, 비유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래서 이번 본문을 이해하기 전에 이런 사전 작업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큰 맥락 안에서 본문을 자세히 보자.


내용 정리

1-5절: 목자 비유① - 도둑과 강도 vs 양들의 목자

비유의 소재 다음과 같다.

- 우리, 문, 문지기, 양, 도둑과 강도, 양들의 목자, 목자의 목소리, 낯선 사람의 목소리

소재는 도둑과 강도 편과 양들의 목자 편으로 양분할 수 있다.

① 도둑과 강도 편에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속한다.

- 도둑과 강도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문이 아닌 다른 데로 우리를 넘어 가서 양들을 훔치는 사람이다.(1) 

- 양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 달아날 것이다.

② 양들의 목자 편에는 우리, 문, 우리, 문지기, 양, 목자의 목소리가 속한다.

- 양들의 목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문을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간다.

- 목소리로 양들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 간다.

비유는 양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목자와 관계를 맺지 못한 도둑과 강도를 대비하고 있다.

- 목자는 당연히 예수님이고, 도둑과 강도는 유대 전통을 의지하고 있는 바리새인이다.

비유만 보면, 과연 이렇게 양분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 문과 문지기의 역할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전통과 예수님의 대결 구도가 이어지는 맥락 안에서 보면, 이러한 양분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바리새인은 올바른 성경 말씀이 아닌 잘못된 전통과 율법을 근거로 사람들을 이끌려고 하지만, 아무도 바리새인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 반면 예수님은 문, 즉 올바른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인도하고,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여 예수님과 관계 맺게 될 것이다.

- 이를 통해 전통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1-5절은 전하고자 하는 전체 메시지의 바운더리를 잡는다.

-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역할이 무엇인지, 바리새인의 횡포는 무엇인지 이후에 있는 두 번째 목자 비유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이 비유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깨알 디테일은 '문지기'다.

- 문지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본문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 예수님을 상징하는 목자와 문을 돕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전부이다.

- 해석서에도 별다른 설명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답은 '제자'인 것 같다.

-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하는 제자들의 역할도 강조된다. 대표적으로 침례 요한이 있다.

이렇게 문지기를 통해, 우리도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함께 예수님을 증언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6절: 사람들의 반응 - 말씀을 깨닫지 못함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비유 말씀이 어려우니까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 갔어야 했다.

-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하시기 위해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신다.

7-10절: 목자 비유② - 도둑 vs 문

예수님은 첫째 비유에서 자신을 목자라고만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디테일하게 '문'과 '선한 목자'로 구분하신다.

- 문과 선한 목자의 공통점은 둘 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8, 14)

- 반면에 차이점은 문은 예수님과 관계 맺는 과정, 수단, 길인 반면, 선한 목자는 예수님의 본질적인 속성, 성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은 유대 전통으로 들어가는 수단에 해당하는 율법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선한 목자는 율법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바리새인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 유대 전통의 핵심이 되는 율법과 바리새인을 각각 비판하기 위해 예수님을 문과 선한 목자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다.

- 이렇게 목자 비유는 비유의 대상인 예수님과 함께 그 이면에 있는 비판 대상을 함께 봐야 한다.

본문은 도둑과 강도로 비유되는 율법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① 양들과 관계 맺지 않는다.(8)

②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파괴한다.(10)

이는 변질된 율법의 속성이다.

[롬 3:19-20]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다. 생명을 훔치고 죽이고 파괴한다.

- 죄인임을 증명하고 죄를 인식하는 수단일 뿐이다. 의에 이르는 수단은 아니다.

특히 예수님도 그 율법 때문에 죽임 당하신다.

[요 19:7]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바리새인은 율법을 살리기 위해 쓰지 않고, 죽이기 위해 악용한다.

올바른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를 파괴하여,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율법은 자신을 부정함을 통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이해하고 관계 맺도록 한다.

- 그러나 바리새인은 율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려 했고, 또한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했다.

- 특히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여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했다.

- 그래서 바리새인은 율법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는 커녕,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이용하였다.

반면에 예수님은 '문'이시다. 생명의 통로, 관계의 통로시다. 의의 수단이시다.

[9]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 (구원과 생명을 넘치게 얻는다.)

예수님께서 생명과 양식을 넘치도록 주신다는 말씀은 정말 여러번 나왔다.

-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2장)

-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이 이르는 물을 주신 사건(4장)

- 생명의 빵으로서 오병이어를 주신 사건(6장)

-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며, 생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시겠다는 사건(7장)

- 세상의 빛으로서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9장)

예수님께서 풍성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따라서 이것은 본문의 초점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개념은 이것이다.

- 누구나 예수님이 목적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 하지만 수단 역시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기도, 말씀, 전도, 봉사, 예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 이런 행위 하면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 이런 행위들은 우리가 예수님께 초점을 둘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지, 이 행위 자체가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왜 이런 말을 하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조차 이 행위를 했다고 신앙 생활 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 특히 바리새인이 이렇게 착각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진리, 생명일 뿐만 아니라,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 예수님이 본질이자 동시에 수단이라는 뜻이다.

- 예수님이라는 본질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다!

- 예수님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역시 순환 논리이다. 왜냐하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다.

11-18절: 목자 비유③ - 삯꾼 목자 vs 선한 목자

이전의 문 비유에서도 그랬고, 이번 비유에서도 부정적인 예를 먼저 제시한다.

- 이런 부분에서, 비유의 목적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유대 전통 비판에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삯꾼 목자는 바리새인으로, 그들은 아무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삭꾼 목자의 특징은 '제한적 책임' 혹은 '무책임'이다.(12, 13)

- 평상시에는 양을 책임감 있게 돌보는 것처럼 보인다.

- 하지만, 위급한 상황, 그래서 생명에 위협이 생기는 상황에는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친다.

이는 마치 안식일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아픈 사람, 눈먼 사람을 돕지 않는 바리새인을 연상시킨다.

- 그들은 손해보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 평소에는 잘 했지만,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책임지지 않았다.

- 율법의 참된 성취가 단지 율법 문구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 문구를 어기더라도 사람들을 책임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반면 선한 목자의 특징은 '무한 책임'이다.(11, 15)

- 양들을 위해 어떤 것도 감수한다. 전부를 희생한다.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 이 죽음은 당연히 십자가 죽음을 암시한다.

'무한 책임'의 근거는 관계이다.(14)

-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기 때문이다. 역시 양방향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람의 관계의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이다.(15)

- 아직 성령이 나오지 않아 삼위일체가 전부 표현되지 않았다.

- 하지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예수님과 성도 간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투영된다.

- 여러번 말했지만,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인 삼위일체에 기원하고, 그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가 확장되어 우리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며, 결국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 이것만이 신앙의 목표, 완성, 지향점이며 구원이고 천국이다.

정리하면,

- 모든 것의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 존재의 본질인 삼위일체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 그 관계 속에서 성부와 성자가 서로 알고 관계 맺으며,

- 그 관계가 확장되어 예수님과 성도가 서로 알고 관계 맺는데,

- 그 관계로 인해 예수님은 성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

- 이번 본문을 벗어나지만, 그 관계를 근거로 예수님은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것을 도전하신다.

- 이런 우리의 헌신을 통해 예수님도 우리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일련의 과정 전체가 우주적 관점에서 본 신앙이다.

그리고나서, 16절은 논점을 살짝 벗어나는데, '다른 양들'에 대해 언급하신다.

- '다른 양들'은 당연히 이방인이다.

- 이방인도 예수님과 관계 맺고,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의 양떼'가 된다고 말한다.

-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 이렇게 예수님부터 이방인 선교를 염두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방인 선교를 언급하는 이유는 뭘까?

- 이 역시 바리새인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서 봐야 한다.

- 바리새인은 이방인을 개 취급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배제했다.

- 이들의 근거는 전통과 율법이었지만, 율법을 오해한 결과이다.

- 이방인 선교는 구약의 창세기에서부터 수 차례 예고된 것이다.

- 이렇게 바리새인은 굳이 율법을 어기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전통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선한 목자의 특징으로 이방인 선교를 제시한 것이다.

마지막 17-18절에서는 예수님의 실제 죽음에 대해 다룬다.

- 이전의 죽음은 헌신이라는 비유적, 상징적 표현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으실 것을 암시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성부가 성자에게 명령을 내린다.

- 예수님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 그 후에 다시 목숨을 얻는다.

- 그 결과 성부가 성자를 사랑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의 죽음조차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 인한 결과이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명령에 순종하신다.

- 하나님은 예수님의 순종을 보시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신다.

- 명령과 순종,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 간의 관계가 더욱 깊어진다.

- 이렇게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죽음과 부활조차도 하나님과 예수님 관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 특히 바리새인은 이렇게 오해했을 것이다.

- 예수님은 죽음 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예수님의 선택이었다.

-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촉발시킨다.

이러한 말씀 역시 바리새인을 향한 비판이 담겨 있다.

- 일반적으로, 목자 비유를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만 이해하는데, '명절 사이클'이라는 전체 맥락에서 보면, 바리새인에 대한 비판도 커다란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본문의 전개가 이해된다.

19-21절: 유대 사람들의 반응 - 분열

사람들은 갑론을박하며 분열한다.

- 이전에 말했지만,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무리는 분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을 진짜로 옹호한다면, 절대로 단순한 옹호에서 끝날 수 없다.

-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굴복해야 하지만, 옹호하는 말만 할 뿐이다.

- 따라서 이들의 옹호는 진정성이 없다.

결국 유대 사람들의 분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의 양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다.

- 하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주제

① 바리새인에 대해서

이들은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 본문은 양들, 즉 종교적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을 책임지지 않고 버린다고 말한다.

- 그리고 하나님과도 관계 맺지 않는다. 이용하기만 할 뿐이다.

- 이들은 사람도 하나님도 필요할 때만 찾아 쓰고, 다 이용한 후 버린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조차도 이용 대상이다.

- 본질이신 하나님을 직접 이용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단인 율법을 통해 이용한다.

- 있는 그대로의 율법은 자기 뜻대로 이용할 수 없으니까, 율법을 살짝 변질시켜 이용한다.

- 변질된 율법을 통해 사람들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 이 모든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다.

이러한 수법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사용된다. 특히 예배가 수단이 된다.

- 예배의 본질은 예수님 뿐이고, 예배는 예수님과 관계 맺는 시간적, 공간적 기회일 뿐이다.

- 하지만 예배를 이용하기 위해 변질시킨다. 절차에 맞게 행하는 규칙으로 정한다.

- 그리고 목사는 예배를 수단 삼아 사람들을 통제하여 자신이 높아지도록 판을 짠다.

- 이러한 예배는 거짓된 문으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고 빼앗아 파괴한다.

- 정해진 규칙이 필요 없고 마음대로 어겨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규칙 지키는 것을 신앙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규칙을 통해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리새인조차도 누군가를 죽이고 파괴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부정할 생각은 더 없었을 것이다.

- 단지 자신이 높아지길 바랬던 것 뿐이다. 좀 더 나아지고 멋었어지길 바랬던 것 뿐이다. 전형적인 보통 사람의 생각이다.

-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잠시 이용했던 것 뿐이다. 크게 해코지할 생각은 없었다.

- 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은 죽고 빼앗기고 파괴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도 부정된 것이다.

우리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 우리는 단지 좀 더 편하고, 재밌고, 성공하는 삶을 살려는 것 뿐이다. 큰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 하지만 그 작은 바램으로 인해 내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고통당하고 계신다.

이렇게 우리를 포함한 인류 전체가 죄를 짓고 있음을 기억하자.

②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고 하신다.

- 양들과도 관계를 맺으신다.

- 하나님과도 관계를 맺으신다.

예수님께는 선한 목자시다. 죽음조차도 관계를 위한 수단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하나님의 명령인 죽음에 순종하신다.

- 양들과의 관계를 위해 예수님의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은 문이시다. 관계를 위해 자신을 수단 삼으신다.

- 바리새인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 삼는 것과 상반된다.

-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하신다.

- 여기서 이 생명 역시 사람들이 예수님과 누리는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인생을 수단 삼아 예수님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관계 맺어야 한다.

-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아무런 유익도 없는 관계에 쏟아 붓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맺으시는 관계의 기원이자 목적은 하나님이다.

- 관계의 기원은 하나님의 존재 본질인 삼위일체로부터이다.(15)

-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람들과의 관계를 시작하셨다.(18)

-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관계를 맺으시는 목적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이다.(17)

이렇게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신다.


결론

So what? 이런 문과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결국 우리도 문이 되어야 한다.

- 다른 사람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과 관계 맺고, 풍성한 생명을 누려야 한다.

- 우리 자신이 우리 인생의 본질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해야 한다.

어떻게?

- 우리도 선한 목자가 되어, 죽음을 감수하고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라는 뜻이다.(13:14)

-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13:34)

과연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

- 적어도 교회 식구들을 위해 죽음을 감수하고 관계를 추구하고 있는가?

두 가지 생각이 있다. 이것 때문에 관계 맺기가 어렵다.

① 정말 죽음을 감수하기 싫다. 편하게 관계 안맺고 살고 싶다.

② 동시에, 정말 관계 맺고 싶은데, 사람들이 나의 관심을 부담스러워 할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가 생길 것 같다.

①이야 각자가 평생 동안 해결할 문제이고, ②가 중요한데,,

유일한 해법은 함께 진솔하게 대화하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