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한복음

요한복음(30) 10:22-42 믿지 않는 유대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

말했다시피, 5-10장은 '명절 사이클'이고, 이번 본문은 '명절 사이클'의 마지막 본문이다.

- '명절 사이클'은 반복되는 명절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풀어가는 단락이다.

- 특징은 '명절'이 상징하는 유대 전통을 예수님께서 비판, 파괴, 대체하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율법과 바리새인을 비판하셨다.

-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의의 통로인 율법 대신 '문'이며, 의의 인도자인 바리새인 대신 '선한 목자'라고 증언하셨다.

특히 이번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24)며, 하나님(33)이심을 선포하신다.

-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 선포는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애절한 호소임과 동시에 경고이다.

-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시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 그리고 다음 11장을 끝으로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지도 않는다.

- 이제부터 대중에게는 숨으시고 제자들에게만 가르침을 주신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깨닫고 믿으라고 마지막으로 호소하신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 극단적으로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배제하고서라도, 오해와 편견 없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것을 독려하신다.

- 이렇게 유대 사람들을 끝까지 부르신다.

반면에 계속해서 믿지 않는 유대 사람들에게 '내 양이 아니라고' 경고하신다.

- 그 결과 영생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따라서 이번 본문은 세 가지 주제를 갖는다.

① 유대 사람들을 부르시는 애절한 마지막 간청

② 반대로, 유대 사람들을 향한 경고

③ 이를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며 하나님이심을 선포

이것이 '명절 사이클'의 마지막 메시지이다.


내용 정리

22-31절: 유대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 -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는 '성전 봉헌절'이다.(22)

- 바벨론 포로 귀환으로 성전 재건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통치를 받는 중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 제단이 세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 그런데 BC 164년에 마카비가 혁명을 일으켜 성전을 재탈환하여 정화했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성전 봉헌절'이다.

- 그래서 '봉헌'이라는 뜻의 '하누카'라고도 하고, '성전을 수리했다'는 뜻의 '수전절'이라고 한다.

- 11월말이나 12월에 8일 동안 촛불을 켜는 의식을 갖는 절기이다.

예수님은 이 절기를 통해 자신이 회복된 참 성전이심을 암시하신다.

그러면서, 그 때가 겨울이라고 말한다.(22)

- 이는 이 절시의 실제 계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 동시에 예수님과 유대 사람들의 관계가 냉랭하고 부정적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절기와 계절을 통해, 점차 분명해지는 예수님의 정체와 여전히 냉랭한 유대 사람들의 반응이 암시된다.

그런 암시 속에서 유대 사람들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또 다시 묻는다.(24)

- 이 질문의 의도를 반대되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 정말 알고 싶어서 믿으려고 물은 것일 수도 있고, 책잡을 꺼리를 잡으려고 물은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겨울'이라는 상징, 그리고 31, 39절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점을 볼 때, 부정적인 의도로 볼 수 있다.

- 이들 마음 속에는 끝까지 예수님을 잡아 죽일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보셨다.

-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신다.(25)

-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곧 하나님이심을 증언하신다.(30)

이런 말씀 중에 예수님은 "너희가 믿지 않은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라시며 그들을 배척하시고 포기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런 의미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예정된 일이니, 돌이킬 수 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이다. 

그러나 경고일 뿐만 아니라 초청이기도 하다.

- 단순히 내 양이 아니니까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빨리 내 양이 되라고 간청하셨다는 뜻이다.

- 즉, 지금은 내 양이 아니라서 믿지 않는데, 내 양이 되면 믿을 수 있다고 약속하신 것이다.(27)

- 그 약속 꼭 지킬테니까, 내 양이 되어 나를 믿으라고 예수님은 간절하게 호소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나서 28-30절에서 그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지 증언하신다.

- 예수님은 내 양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말씀을 제자가 아니라 유대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

- 즉, 지금 이 약속을 제자가 아닌 유대 사람들과 맺고 있다는 뜻이다.

- 따라서 예수님은 약속을 믿지 않는 유대 사람들에게, 내 약속이 확실하니, 나에게 와서, 내 양이 되어서,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믿을 것을 간정하고 계신 것이다.

- 배척이 아니라 초청이다.

28절을 보면, 표현이 재미있다. 세 문장이 모두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 ①사람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은, ②그 사람이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게 할 것이란 뜻이다.

- 또, ②그 사람이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으려면, ③그 사람을 영원토록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

- 즉, 세 가지 다른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신실함, 약속을 지키실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한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의 신실함의 근거는 신실함의 대명사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29)

-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만유보다도 크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양'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논리이다.

- 그런데, 그 하나님이 예수님 자신과 하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생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30)

이러한 애절한 고백을 통해, 자신을 죽이는데만 혈안이 된 사람들이 영생을 얻게 하려고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다.

- 본문을 그냥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자신에게 던질 돌을 들고 있는 유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정하고 생각해보니, 참 애절하게 느껴졌다.

- 예수님은 외롭고 쓸쓸하게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말씀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계신 것이다. 그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애절함도 소용이 없다.(31)

- 유대 사람들은 여지 없이 예수님을 죽이려든다.

- 그 이유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33)

물론 유대 사람들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신성 모독, 민족 모독, 인격 모독으로 느꼈을 것이고, 마치 부모님을 욕하는 것처럼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 하지만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의 애절함을 알았다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 그랬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부정할 수는 없었을텐데,,

과연 나는 이 상황에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모멸감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애절함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을까?

- 나 역시 모멸감에 빠져서 아무런 합리적 판단도 하지 못한체 분노만 표출했을 것 같다.

- 사람은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 생활하는 과정에서도,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모멸감을 줄 것이다.

- 이것이 '명절 사이클'에서 말하는 전통 파괴. 율법 파괴. '나' 파괴이다. 

- 이것이 다른 말로 모멸감이다.

- 모멸감은 모든 사람이 믿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반드시 겪는다. 그리고 믿는 사람도 신앙의 과정에서 반복해서 겪는다. 

- 이것을 다른 말로 '회개'라고도 한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며, 자기 확신 속에 있는 사람은 모멸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 기분 나쁘고 감정이 상하면, 어느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 뇌 과학 연구에서도 감정 영역이 활성화되면, 사고 영역이 비활성화되기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훈육하기 위해서는 감정 영역을 비활성화시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듣지 못하면 끝장이다.

-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32-39절: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을 부르시는 마지막 간절한 호소 - 그 일은 믿어라.

예수님도 많이 답답하셨나보다.(32)

- 한편으로는 유대 사람들이 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 아셨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되셨던 것 같다.

- 예수님은 선한 일, 즉 유대 사람들이 영생을 얻도록 최선을 다하셨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유대 사람들 때문에 속상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은 여전하다. 한결같다.(33)

- 예수님의 애절한 간청은 듣지 못하고, 모멸감에만 빠져있다.

-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다."란 말씀의 간절함 부르심은 외면한체, 신성모독이라고만 주장한다.

34-36절은 이러한 유대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 대답을 한마디로 하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신성모독이 아니다.

- 왜냐하면 구약에도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시편 82편이다.

[시 82:6-7]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7]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 시편의 원래 뜻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메시지이다.

- 그러는 중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신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칭했다.

- 이것을 근거로, 예수님은 자신을 신(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자신이 한 것이 신성모독이 아님을 입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입증이 지금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분명한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 그렇게 보기에는 논리가 너무 빈약하다. 

단지 상황 모면 멘트이다.

- 유대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손에 들고 있는 돌을 던지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 극한으로 치닫는 흥분을 지연시켜서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시간을 벌려고 하셨을까?

- 어짜피 말해도 못 알아들을 것인데,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당장 도망가지 않고 무슨 할 말이 더 있으셨을까?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답을 해준다. 이때 하신 말씀이 참 감동적이면서도, 가슴이 애리다. 37-38절 말씀을 자세히 풀어보면 이럴 것 같다.

- 나를 믿지 않는 것은 괜찮다. 나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도 좋다. 나를 죽여도 상관 없다.

- 하지만 나를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일까지 매도하진 말아달라.

-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일은 믿어달라.

-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내가 했던 말, 즉 잘못된 전통과 왜곡된 율법, 편견에서 벗어나 참 하나님을 보라고 했던 말은 기억해라.

- 그리고 그 참 하나님이 바로 나라고 했던 말은 기억해라.

- 그리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 그러니 제발 나를 믿어라!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은 부정하더라도 유대 사람들이 믿음을 갖도록 호소하신다.

- 이 마지막 말씀을 하시려고 시편을 인용하며 시간을 버신 것이다.

-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영생을 얻도록 말이다.

유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달려들 때, 예수님도 동일하게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을 오해 때문에 죽이려한다면, 얼마나 모욕을 느끼겠는가.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멸감에 매몰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진리를 전하셨다.

-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은 모멸감에 매몰되어 진리를 들을 수 없었다.

- 자신들의 전통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특별한 일까지 모두 무시했다.

-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참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과연 우리는, 유대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처럼 진리 하나만 보고, 어떠한 모욕과 굴욕 속에서도 주어진 일을 담담히 해나갈 수 있을까? 애절함을 가지고 진리를 전할 수 있을까?

- 자신이 없다. 주님께서 힘 주시길.

- 유대 사람들처럼 모멸감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힘들 것 같지만, 예수님처럼 모멸삼 속에서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기는 더 힘들 것 같다.

결국 또 다시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만, 또 예수님은 도망가신다.

40-42절: '명절 사이클' 사역의 종료 -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은 그동안 잠시 도망가셨던 것에 반해, 이번에는 진짜 멀리 도망가신다.(40)

- 예루살렘을 떠나, 이스라엘 영토마저 벗어나셨다.

- 요단 강 동쪽, 요한이 처음에 침례를 주던 베다니로 가신다.(1:28)

- 이는 유대 사람들을 향한 사역의 종결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예수님의 대중 사역도 일단락 되었음을 의미한다.

- 요한의 침례와 함께 베다니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대중 사역은 다시 베다니로 돌아와 끝난다.

- 요한의 침례를 앞 뒤로 배치하여, 지금까지의 사역을 하나로 묶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여전히 요한의 증언이 회자되고 있었다.(41)

- 특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증언이 기억되었다.

이곳에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요한의 증언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42)

-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하시던대로 기적도 행하시고, 말씀도 선포하셨을 것이다.

- 그 결과 예수님의 사역과 요한의 증언이 결합되여, 그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도 점차 늘어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참 예수님을 알고자 예수님께 헌신하는 사람도 늘어가지만, 반대로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작 예수님을 부정하며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사람도 늘어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 중 특히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부정하고 죽이는 일은 종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일까? 


주제

모멸감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부정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과정 중에 반드시 느낄 수 밖에 없다.

- 왜냐하면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가치관, 신념, 경험, 인생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 유대 사람들도 예수님 때문에 모멸감을 느꼈다.

애절함은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 갖는 간절한 마음이다.

- 진리가 가진 독단적인 면 때문에 진리는 거부될 수 밖에 없다.

- 그래서 진리는 거부 당함을 감수하고 전해야 한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에게 애절함을 가지실 수 밖에 없었다.

정리하면, 모멸감과 애절함 모두 부정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 부정당해서 대적하지 않을 수 없을 때의 감정이 모멸감이고, 부정당하지만 포용할 수 밖에 없을 때의 감정이 애절함이다.

- 즉,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에게,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께 서로 모멸감을 주고 있는데,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멸감을 주시는 동시에 애절한 사랑을 보이신다.

- 이 양면성은 진리가 가진 특징이다.

- 그래서 우리도 복음을 들을 때 모멸감과 애절함을 함께 느낀다.

그런데 모멸감과 애절함은 상극의 감정이다.

- 모멸감을 느끼면 상대를 강하게 밀어내지만, 애절함을 느끼면 상대를 강하게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 그래서 모멸감을 느끼면 애절함은 보이지 않고, 애절함을 느끼면 모멸감은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모멸감과 함께 애절함을 보이시는데, 그 때 우리는 어떤 감정에 놓이게 될까?

모멸감을 느낀다면, 유대 사람들처럼 돌을 들 것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의 애절한 사랑은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절한 사랑을 느낀다면, 눈 뜬 사람처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 예수님이 주시는 모멸감조차 예수님의 애절한 사랑으로 느껴진다.

- 마치 모르는 사람 앞에서 엉덩이가 보이면 모멸감을 느끼지만, 의사 앞에서는 모멸감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것과 같다.

이 둘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 물론 예수님의 양이거나 양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 이는 태초부터 예정된 것이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 따라서 우리가 양이냐 아니냐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 자기 확신, 자기 사랑이 모멸감과 애절함을 가를 것이다.

-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파괴하는 예수님께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 반면에 자기 의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진리를 전하시는 예수님께 애절함을 느낄 것이다.

- 마치 자기를 환자라고 느끼는 사람만 의사 앞에서 엉덩이를 보일 수 있는 것과 같다.

- 자신을 환자, 죄인, 불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자기 확신을 버리고 자기 의심을 가질 수 있나? 어떻게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을까?

- 모르겠다. 이것 알면 전도하기 참 쉬울텐데.

분명한 것은, 우리는 모두 자기 확신을 칭송하고, 자기 의심을 무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 신앙에 있어서조차 자기 확신을 강조한다.

-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 우리는 정말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와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으려면,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뤄야 하는 시대와 상황이다.

-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인류 역사상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 가장 어려운 시대이다.

-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이렇게 강조하는 시대는 태초 이례에 없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나름 열심히 해서는 절대로 신앙 생활 할 수 없는 시대이다.

- 시대와 상황이 우리를 자기 확신으로 강력하게 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의 현재 상태를 확인해본다면,

- 자기 확신을 강요하는 세상의 조류를 얼마나 강하게 느끼고 있는가?

- 세상의 조류를 강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만큼 세상에 저항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 반대로 세상의 조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만큼 세상에 휩쓸려 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결론

이렇게 세상은 우리를 강력한 힘으로 밀고 당긴다.

- 우리가 자기 확신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더 들어가면, 지금보다 더 성공해서 더 높은 위치에서 더 큰 자기 확신을 가지라고 압박할 것이다.

- 반대로 우리가 자기 의심을 가지고 세상과 분리되려 하면, 세상은 우리를 실패자, 루져, 낙오자라고 조롱할 것이다.

- 또한, 현 상황에 안주하며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세상은 우리의 인생 전부를 현상 유지만을 위해 소진하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 세상에 속하려는 사람에게도, 세상에서 벗어나려 하는 사람에게도, 세상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려는 사람에게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

- 구원은 세상에 들어가는 것도, 벗어나는 것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 이런 것들은 모두 세상에 종속된 것이다.

구원은 세상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 세상에 집착하지도 않고, 세상을 미워하지도 않고, 세상에 무관심하지도 않는 것이다.

- 하나님께 종속되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 여전히 세상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가 돌아보자.

- 세상으로부터 독립할 때에만, 모멸감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의 애뜻한 사랑을 느끼며, 예수님께 종속될 수 있을 것이다.